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96

서배 할배76(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6(작성자; 손진길) 1917년 6월 5일 아침에 가주 손상훈은 구왕골에서 달려온 일가로부터 재종 동생 손형이 지난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별세를 하였다는 급보를 듣는다. 이름이 외자인 손형은 손상훈과 동갑이지만 몇 달 차이로 동생이다. 손형은 조선의 나이로 손상훈과 마찬가지로 금년에 67세이다. 장남인 손영로 내외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차남인 손영보 가족은 안심에서 살고 있다. 손상훈은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히 손형의 집으로 간다. 사랑방에 빈소를 차리고 고인의 시신이 보이지 아니하게 그 앞에는 병풍을 쳐서 가려 놓았다. 그 앞에서 제수씨 최인옥이 흐느껴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상주인 손영로와 손영보가 시립해 있다; 사랑방에 들어온 손상훈이 먼저 최인옥에게 말을 한다; “영로 아버..

서배 할배75(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5(작성자; 손진길) 그 다음해 1912년 6월에 경주 성동 김춘엽의 사랑방 정기모임에서 토의한 안건이 인상적이다. 먼저 그 집의 주인인 김춘엽이 다음과 같이 현안문제를 의제로 말한 것이다; “오늘은 먼저 조선총독부가 금년에 발표한 전국 토지에 대한 신고의 건에 대하여 한번 의논들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 신고기간을 1918년까지로 길게 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장기로 설정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 일본제국의 소식에 대하여 박식한 안성기 교장이 먼저 말을 한다; “저도 그 점이 궁금하여 동경에 있는 아들 용운에게 좀 알아보아 달라고 요청을 했지요. 그런데 참으로 재미가 있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통감부가 1908년에 진작 조선에 설치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옛날에 영국이 인도..

서배 할배74(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4(작성자; 손진길) 1911년 2월에 내남 덕천의 선비 최사권의 사랑방에서 모임이 열리고 있는데 그것이 그 집에서 개최가 되는 마지막 사랑방모임이다. 왜냐하면, 1836년생인 최사권 선비가 조선의 나이로 금년에 76세가 되어 너무 연로하여 더 이상 사랑방모임에 참석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날의 모임을 끝으로 이제는 명예스럽게 사랑방모임을 졸업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선비 최사권의 부인인 손예린이 그날 낮에 한상을 크게 차린다.. 따라서 4선비와 그 부인들은 마치 계중에 온 것처럼 푸짐하게 식사를 한다. 그리고 손예린에게 이제 자주 뵙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섭섭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자 손예린이 이웃에 살고 있는 장인식 교장과 그 부인 최순옥을 보고서 한..

서배 할배73(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3(작성자; 손진길) 17.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들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이 되자 일제는 한성에 1906년 2월부터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외교를 대신 수행한다. 그것으로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외국공관들은 전부 철수를 하고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조선의 항만과 주요도시에는 일제의 이사청이 설치가 되어 지방행정마저 감찰하게 된다. 일제는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하게 하고 순종을 세우는 이른바 양위식까지 거행한다. 유약한 순종황제는 모든 권한을 내각에 위임하고 일제와 합의하는 그대로 재가를 하고 있다. 따라서 1907년 7월 24일에는 통감부의 이토 히로부미와 내각의 이완용이 체..

서배 할배72(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2(작성자; 손진길)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나라인 대한제국 곧 조선이 망하게 되는 운명의 해가 1910년 8월 29일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를 그들의 힘으로 지키지를 못하고 외세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린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날을 소위 ‘국치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제국으로서는 그날을 축하하며 기념우표까지 발행하고 있다; 그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일본제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루아침에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는 백성으로 바뀌고 만다. 예를 들면, 일본말을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는 조선사람들이 일본관리가 일본어로 말하는 명령을 들어야 하고 그들이 행하는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서배 할배71(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1(작성자; 손진길) 1909년 12월에 들어서자 훈장 이덕화가 병이 났다.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었는데 사랑방에 아무리 군불을 많이 지펴도 자꾸만 몸이 춥고 오한이 난다고 한다. 부인 김옥심이 독감과 몸살이 심하여 그런 줄 알고 남편이 빨리 쾌차하도록 땀을 푹 흘리게 하고 몸을 보신하도록 맛난 것을 만들어 대접하지만 그래도 별로 차도가 없다. 김옥심은 시골 한의를 찾아서 진맥을 부탁한다. 그러자 노환에 고열을 견디지 못하여 병자가 기진맥진을 하고 있으니 약재를 좀 써보자고 한다. 그래서 며칠간 정성스럽게 탕약을 달려서 계속 먹게 한다. 그러나 별로 차도가 없다. 열이 좀 떨어졌다가는 다시 고열이 찾아오고 식은 땀을 계속 흘리고 있다; 김옥심이 너무 걱정이 되어 너븐들로 찾아와서 사위 손상훈에..

서배 할배70(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70(작성자; 손진길) 16. 아들의 결혼식과 어른들의 별세 1909년 10월 17일은 경주 읍내에서 손영주와 정애라의 결혼식이 있게 된다. 1907년 5월 30일에 두사람이 약혼을 하였으므로 2년이 지난 1909년 5월쯤에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예정이 되어 있었지만 내남 시골사람들이 그때는 농번기이므로 한해 농사가 끝난 10월 중순에 혼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결혼식이 신부의 집인 경주 성동 김종민의 저택에서 10월 17일날 전통적인 혼례로 진행이 된다. 혼례식 날짜를 17일로 정한 이유는 경주 오일장이 서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남의 일가들이 오일장을 보러 경주에 왔다가 쉽게 혼례식에 하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서배 아재가 그렇게 배려한 것이다; 농사일에 바쁜 친척들의 시간을 많이 뺏지 ..

서배 할배69(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69(작성자; 손진길) 서배 아재 손상훈은 1907년 5월 30일에 아들 손영주의 약혼식을 경주 읍내에서 가졌는데 두 달이 지나지 못하여 7월 20일에 고종이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인 순종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양위식을 거행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부왕이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세자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이므로 조선의 백성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참고로 사진은 순종황제와 그의 황후이다; 그러자 한성에서 발행이 되고 있는 신문에서는 일제에 의하여 고종황제가 폐위를 당하고 황태자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라고 보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는 것은 지난 6월에 네델란드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개최가 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몰래 3인..

서배 할배68(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68(작성자; 손진길) 1907년 5월달에 들어서자 양삼마을에 살고 있는 훈장 이덕화가 너븐들에 살고 있는 사위 손상훈을 방문한다. 서배 아재 손상훈이 장인어른을 사랑방으로 인도한다. 5월달이 되자 이제는 완연한 봄이다. 따뜻한 날이므로 안방마님 이채령이는 거랑가에 빨래를 하러 나간 모양이다. 그래서 손상훈이 부엌에 가서 손수 술상을 차려서 사랑방으로 온다. 사위가 직접 차려준 술상이다. 그러므로 손상훈이 한 사발 따라준 막걸리를 훈장 이덕화가 맛나게 마신다. 그리고 탁배기 사발을 사위에게 내민다. 손상훈이 한잔 더 잔을 채웠더니 그것을 이덕화가 마시지 아니하고 사위에게 주면서 말한다; “서배 아재, 같이 늙어가면서 나 혼자 마셔서야 되겠나? 자네도 한 잔 하시게…허허…”. 제자이며 사위인 손상..

서배 할배67(작성자; 손진길)

서배 할배67(작성자; 손진길) 1907년 4월 하순에 덕천 사랑방모임의 분위기는 뜨겁다. 장인식 교장의 발표와 좌중의 토론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발표자인 안성기 교장이 이렇게 말문을 연다; “제가 오늘 발표할 내용은 반일 무력항쟁에 관한 건인데 앞서 일본이 어째서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그렇게 많은 군대를 보내고 있는지 벌써 설명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성기 교장이 말을 계속한다; “이미 장인식 교장이 발표한 그대로 조선의 언론과 순국열사들이 하나같이 1905년 11월 18일에 선포가 된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고종황제에게 무효화선언을 요청하였지만 고종은 겁에 질려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애국지사들이 다른 방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