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67(작성자; 손진길)
1907년 4월 하순에 덕천 사랑방모임의 분위기는 뜨겁다. 장인식 교장의 발표와 좌중의 토론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발표자인 안성기 교장이 이렇게 말문을 연다; “제가 오늘 발표할 내용은 반일 무력항쟁에 관한 건인데 앞서 일본이 어째서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그렇게 많은 군대를 보내고 있는지 벌써 설명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성기 교장이 말을 계속한다; “이미 장인식 교장이 발표한 그대로 조선의 언론과 순국열사들이 하나같이 1905년 11월 18일에 선포가 된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고종황제에게 무효화선언을 요청하였지만 고종은 겁에 질려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애국지사들이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항일 무력 투쟁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발생하고 있는 항일 무력투쟁을 이름하여 ‘을사의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10년전 을미년에 일본의 낭인들이 범궐하여 민비를 살해한 결과 발생한 ‘을미의병’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성기 교장이 부연설명을 한다; ‘을미의병’인 경우에는 그리 오래가지를 못하였는데 그 이유가 민비 살해 건도 있지만 주요인이 유림에서 단발령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종이 일단 단발령을 거두어 들였기에 그만 의병들이 대부분 자진해산을 하고 말았지요”. 참고로, 그 사실을 풍자하고 있는 그림이 다음과 같다;
그 다음에 안성기 교장이 을사의병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대표적인 ‘을사의병’으로서는 면암 최익현이 이끈 전라도 의병, 참판 출신 민종식이 이끈 충청도 의병, 그리고 평민 출신 의병대장 신돌석이 지금도 지휘하고 있는 경상도와 강원도의 의병이 있습니다”.
안성기 교장이 조금 숨을 쉰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면암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으로 거병을 하여 1906년 봄에 의병활동을 했으나 몇달 되지 아니하여 체포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그곳에서 단식을 하다가 양력으로 금년 정월 초하루에 그만 별세하고 말았지요”.
이어서 설명을 한다; “민종식 의병대장은 47세의 나이로 1906년 봄에 역시 거병을 했는데 그의 ‘홍주성 공방전’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대규모 일본군의 공격에 패하여 그해 11월에 체포가 되고 말지요. 그는 현재 일본의 간섭 아래 조선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전시가 되어 있는 ‘홍주성 전투’의 그림이 다음과 같다;
그 다음에 안성기 교장이 신돌석 의병대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위의 두 사람과 신돌석 대장은 많이 다릅니다; 첫째, 신돌석 대장은 평민 출신입니다. 둘째, 그는 19세에 벌써 ‘을미의병’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셋째, 그는 30세가 되는 1906년에 고향인 영덕에서 거병하여 지금도 경상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면서 신출귀몰하게 의병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용병술이 대단하고 탁월한 전략가이지요”. 참고로, 신돌석이 태어난 경상도 영덕의 생가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장인식 교장이 발표할 때에는 질문이 많더니 안성기 교장의 발표에 대해서는 별로 질문이 없다. 따라서 안성기 교장이 그것으로 발표를 마친다. 그 다음에 김춘엽 선비가 다음과 같이 발표를 한다; “저는 손상훈 선비와 함께 기타 민중운동과 민간의 구국운동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를 이제부터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비 김춘엽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금년 2월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이 되어 전국으로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가 1,300만원의 차관을 대한제국에 주고서 그것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압박하고 있기에 민간의 힘으로 그 빚을 청산하고자 김광제와 서상돈이 제창한 운동입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설명을 계속한다; “백성들이 애국 애족하는 마음에서 금주 금연을 하여 아낀 돈을 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금가락지까지 들고 나오고 있지만 문제는 그 운동을 일제의 통감부가 좋아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향후 귀추가 주목이 됩니다”.
김춘엽 선비가 또다른 운동에 관하여 말한다; “둘째로, 각종 민간단체들이 결성이 되어 애국 계몽운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민회, 대한 자강회, 헌정연구회, 보안회 등이 그러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교육과 언론의 창달에 적극적으로 민간인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저력의 확보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서배 아재 손상훈이 한마디를 보태고 있다; “교육과 언론 그리고 산업기반의 확충 등은 장기적으로 조선사람들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각종 사회단체들이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애국 계몽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이 되는 위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교육과 언론 그리고 산업진흥은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조선사람들의 힘의 신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것으로 1907년 4월 덕천 사랑방모임의 의제발표와 토론이 모두 끝났다. 5쌍의 부부들은 2달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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