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6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4. 03:06

서배 할배66(작성자; 손진길)

 

1907년 4월 하순에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장인식 교장이 첫번째 발표자로 나서서 먼저 말문을 다음과 같이 열고 있다; “제가 오늘 발표할 주제는 약 1년반 전에 한성의 황궁인 경운궁에서 강제로 체결이 된 ‘을사늑약’에 대하여 조선의 언론들이 어떻게 반대를 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다고 격분하여 순국의 자결을 결행하신 분들에 대한 것입니다”.

장인식 교장은 그가 연구한 내용 가운데 핵심사항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발표하고 있다; “첫째로, 일제와 대한제국 사이에 체결이 된 을사보호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일본에서 온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경운궁의 회의실에 가두고 5시간 동안이나 협박을 하여 자신이 가지고 온 조약서에 강제로 서명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경운궁은 오늘날의 덕수궁이다.

장인식 교장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7일에 먼저 일본공사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고종 황제를 위협합니다. 그가 작성해온 을사보호조약에 무조건 서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고서 고종 황제는 서명을 하지 아니하고 피해버립니다. 그 대신에 대신들에게서 한번 서명을 받아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공사와 함께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운궁을 완전히 포위하고서 무력시위를 벌여 마침내 그날 밤에 대한제국 5대신의 서명을 받아낸 것입니다”.

장인식 교장이 설명을 계속한다; “그 조약의 내용이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의 공관을 모두 철수시키고 대한제국의 대외관계는 향후 일제가 동경에서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필요로 하는 모든 외교사항을 한성에 주둔하는 일제의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하고 일본 동경의 외무성에 보내어 처리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늑대같은 조약에 무조건 동의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좌장인 최사권이 문득 생각이 나서 한가지를 묻는다; “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마지막 명치원로라고 불리고 있는 자가 맞지요?... 그는 명치원로 가운데 정한론자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본래 노선을 달리했던 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6년전 1901년 늦여름에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에 우에노 공원에서 보았던 것이 개를 끌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인데 그가 다른 명치유신의 원로들이 자신의 정한론을 전적으로 따라주지 아니하자 내란을 일으키고 결국 자결한 인물이지요…그런데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이제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리한 질문이며 아주 근원적인 물음이다. 따라서 장인식 교장이 신이 난다. 그의 대답이 명쾌하다; “한마디로, 초록은 동색이지요. 명치유신에 앞장을 선 사무라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수백 년간 쇼군에 의하여 버려진 천황을 일본의 상징으로 다시 세우고 일본백성들을 모두 신민으로 만들어 국가통합을 이루고 나아가서 그 결집력으로 일본 열도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명치유신으로 말미암아 패전한 쇼군이 메이지 천황에게 국가의 주권을 되돌려드리는 소위 ‘대정봉환’의 그림이 다음과 같다;

잠깐 숨을 돌린 장인식 교장이 이어서 말한다; “명치원로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일본제국이 산업선진국이 되는데 필요한 것들 곧 자본과 기술과 근대정신을 서양에서 적극 받아들여 일본을 빨리 동양에서 유일한 강력한 산업국으로 만들고 나아가서 강한 군사력으로 후진국인 조선과 청국을 침략하여 대동아를 자신들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성질이 급하여 산업화가 되기 전에 무력으로 먼저 조선을 정복하자고 주장했을 따름이지요”. 참고로, 다음 그림은 명치원로들이 본래 일본 서남번의 젊은 하급무사 출신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옳은 말이다. 그것은 똑같은 ‘정한론’인데 다만 그 실천의 시기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는 일본이 동양에서 유일하게 서구화하여 산업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대일본제국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의 섬나라인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선진국이 되어 그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서양에 엄청난 식민지를 개척하여 ‘대영제국의 영광’을 떨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서배 아재 손상훈이 상당히 다른 측면에서 장인식 교장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산업선진국이 되면 영국이 군사력으로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또 일본이 조선과 청국을 침략하여 반드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어떻게 근대화하고 산업선진국이 되면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야만의 나라가 되고 말지요? 선진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서로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그 반대로 선진국들이 후진국을 잡아 먹는 그러한 미개하고도 야만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1865년부터 1876년까지 부모님과 함께 일본에서 십대를 보내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는 장인식 교장이기에 확실하게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한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나라를 산업화하고 선진화하는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공장을 짓고 비싼 기계설비를 도입하여 많은 근로자에게 임금을 주면서 대규모로 상품을 생산하게 만드는데 그 모든 것이 돈입니다. 그만한 돈이 일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양에서 엄청난 차관을 얻어서 근대화도 하고 산업선진화도 한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지주 김춘엽이 쉽게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그 물건을 팔아서 차관도 갚고 계속 공장을 돌리면 되지 않아요?”. 그러자 장인식 교장이 곧 답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됩니다.  문제는 공장에서 많은 상품을 잔뜩 생산을 했는데 그것을 모두 처분할 수 있는 시장이 그만큼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국내시장만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따라서 해외에 팔아야 하는데 역시 시장이 없습니다. 벌써 서양의 열강들이 전부 자신들의 시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선비 김춘엽이 재차 말한다; “그러면 산업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일본이 사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군요. ‘외화내빈’ 곧 ‘속이 빈 강정’에 불과하겠는데요…”.  장인식 교장이 말한다; “그러므로 일본제국은 무조건 식민지를 개척하여 해외시장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외국의 빚을 갚고 동시에 그들이 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지요. 따라서 산업선진국은 반드시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부강한 나라를 보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아, 그것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짜 이유이구나!...’. 그러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는지 사랑방모임의 참석자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참고로 사진은 러일전쟁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좌장 최사권이 일동의 생각을 대변하여 말한다; “이제 알겠습니다. 산업선진국이 되면 어째서 전쟁광이 되고 야만인들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제가 그러한 논리로 조선반도와 청의 대륙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고 해외시장으로 삼는다고 하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나라와 백성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장 조선에서도 그 저항이 엄청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지요?”.

장인식 선생이 즉답을 한다;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래서 일본의 목표는 조선을 그저 보호국 정도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계적인 전술에 불과하고 사실은 그들의 군대를 대규모로 주둔시켜서 조선반도를 아예 완전한 일본땅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 방법이 조선사람들의 혼을 빼앗고 민족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계속 부강해지자면 그 정도에 멈추지를 않겠지요. 결국 청국까지 차지를 해야 일본의 경제가 돌아가고 서양의 열강들과 경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손상훈이 다시 질문을 한다;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된다고 하면 한성의 신문들이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순국열사들이 자결을 통하여 일제에게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아까운 피를 흘리고 격분만 했지 별다른 소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장인식 교장의 답변이 다음과 같다; “저는 그렇지가 않다고 봅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있는 조선의 언론과 우국열사들의 순국의 결단이 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의 민족혼이 깨어나게 되지요. 당장은 일제와 맞서서 싸워보아야 그 힘이 미약하여 이기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의 힘이 강해지고 그 실력이 함양이 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제국 역시 승승장구할 수만은 없습니다. 서양의 열강과 경쟁하고 전쟁을 하여 그 힘이 약화가 되는 때가 필연적으로 오게 되지요. 그때에는 미래의 조선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먼 미래에 대한 매우 예언자적인 답변이다. 장인식 교장의 역사관이 깊숙하게 담겨 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랑방모임의 기타 선비와 또 5명의 부인들은 모두 절망 가운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를 파악한 좌장 최사권이 이제는 장인식 교장의 발표와 토론에 대하여 결론을 맺도록 회의를 유도하고자 한다; “힘이 나는 말씀입니다. 저도 민족의 혼만큼 무서운 무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다음세대에게 반드시 국권회복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 교장께서는 이제 마무리를 해주십시오”.

장인식 교장이 마지막 설명을 한다; “일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장차 조선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온갖 술책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을사늑약’을 보고서 ‘황성신문’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게재한 것과 영국인 베델이 발간하는 ‘대한매일신보’에서 계속적으로 을사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을사오적을 비판한 것 그리고 한성의 상인들이 상점을 닫고 항의를 한 것 등이 결코 허사가 아니지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훗날 조선의 혼을 일깨우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다음은 주필 장지연이 ‘오늘 목 놓아 운다’는 뜻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실어서 유명한 ‘황성신문’의 창간호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장인식 교장이 이어서 말한다; “더구나 가장 강력한 것이 순국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민영환과 조병세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것이 두고두고 조선인들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좌중의 선비들과 그 부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참고로, 1905년 12월 1일에 순국한 좌의정 출신 조병세의 고종황제에게 남긴 유언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으며 가평에 건립이 된 ‘3충제단’의 사진을 아래에 첨부한다;

황제에게 올리는 유소(遺疏)

 

(전략) 신은 죄가 많고 충성이 옅어서 성상의 뜻을 감동하시게 못하여 역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겁약(劫約)을 취소하지 못하게 되니, 한번 죽음으로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께 영결하는 것입니다. 신이 죽은 후에는 큰 결단을 내리시어 제순(齊純), 지용(址鎔), 근택(根澤), 완용(完用), 중현(重顯) 5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논하시어 섬멸하여 천지신인(天地申人)에게 사례하시고, 곧 각국 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僞約)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국가의 명맥을 회복하신다면 신의 죽는 날이 사는 해가 되겠습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령된 것이라면 곧 신의 몸둥이를 젓담아서 여러 적에게 하사하십시오.

 

장인식 교장의 발표와 그 주제에 대한 깊숙한 토론이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에게 참으로 오랜 세월 인상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들이 보지 못하게 되는 그 조선백성들의 영광된 미래가 그들의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으로 믿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남은 인생을 스스로 조선의 실력을 키우는데 헌신하게 되면 반드시 후세대에게 국권회복과 번영의 날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그때부터 그들이 지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