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65(작성자; 손진길)
서배 아재 손상훈의 가족들은 설날 이튿날 평소보다 아침식사를 일찍 끝낸다. 그리고 손상훈은 길 떠날 차비를 하고 이제는 양삼마을에 가서 장인과 장모를 모시고 와서 가족들과 함께 외동 서배 마을을 방문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채령과 손영주도 외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서배 아재가 집을 나서기도 전에 먼저 장인 이덕화와 장모 김옥심이 대문을 들어서고 있다. 참으로 일찍 조반을 하고 너븐들로 온 것이다. 그래서 이채령과 손영주가 부랴부랴 외출복을 입고 방에서 나온다.
겨울날씨가 춥기는 하지만 5명이 즐겁게 걸어가니 크게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역시 동행이 많을 수록 사람은 온기를 서로 느끼고 활력을 주고받는가 보다. 서배 마을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얼추 오전 11시쯤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채령의 조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서 먼저 성묘부터 한다.
두 조상의 산소의 위치는 마을 가까이 있는 야트막한 산의 양지바른 곳이다. 따라서 가지고 간 낫으로 웃자란 풀을 좀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 설음식을 차린 다음에 술을 한잔 씩 올린다. 그리고 모두 한꺼번에 두 번 절을 한다. 산소가 마을에서도 가깝고 양지바른 곳이기에 그 주변에는 비석이 세워진 유명한 인물들의 묘소가 여럿 자리를 잡고 있다;
간단하게 성묘가 끝나자 훈장 이덕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산소가 있는 산의 주변과 그 아래에 정답게 펼쳐져 있는 서배 마을을 굽어 본다. 참으로 산이 좋고 물이 좋은 자신의 고향이다. 76세의 그는 무엇을 머리속에 생각하면서 그렇게 주변을 정찰하고 있는 것일까?
서배 아재 손상훈은 장인이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그 마음을 알 것만 같다. 그래서 장인의 손을 조용히 잡는다. 그리고 눈으로 묻고 있다; “장인어른, 마지막 안식처를 이곳으로 정하고자 하십니까?...”. 훈장 이덕화가 마치 탈속을 한 고승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떡인다.
서배 아재 손상훈은 그날이 늦게 오기를 소망한다. 장인어른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자신의 주위에는 어른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서 이 험난한 시대에 삶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 모두 떠나고 나면 손상훈은 서배 아재가 아니고 그만 ‘서배 할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서배 할배’로 불리게 되는 그가 내남의 월성 손씨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지고 만다. 아직 손주도 안아보지 못하고 있는 손상훈은 그러한 책임을 아직은 온전히 맡고 싶지가 아니한 것이다.
손상훈이 너븐들에서 ‘서배 아재’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는 아내 이채령의 고향이 본래 외동 ‘서배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장인 이덕화 훈장이 오랜 세월 내남 안심의 양삼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본래 내남 출신이 아니다. 외동 서배 마을에서 이사를 와서 산 것이다.
그러므로 너븐들 사람들은 지주인 손상훈을 그 아내의 본래 고향인 출신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서배 아재’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채령은 그 택호가 ‘서배뛰기’이다. 그러나 감히 천석꾼 지주의 안방마님을 그렇게 부르지를 못한다. 따라서 모두들 그녀를 ‘너븐들 마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묘가 끝나자 5사람은 서배 마을로 내려가서 김춘엽 부부의 집을 찾아 들어선다;
정월 초이튿날에 자신의 집 대문을 들어서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형 손상훈 부부와 그 아들 손영주를 보고서 김춘엽과 이가연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얼마나 귀한 손님들인가?
김춘엽은 고모부 이덕화와 사형 손상훈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가연은 시고모 김옥심에게 인사를 하고나서 소꿉친구이며 일가인 이채령의 손을 잡고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때 이채령이 “우리 아들 손영주야”라고 친구 이가연에게 말한다.
그러자 이가연이 마당에서 손영주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한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라. 그래 손영주 총각은 어른들과 함께 사랑방에 들어가 있어요. 내가 술상을 보아서 그 방으로 곧 들어갈 테니까. 그리고 아래채에 살고 있는 우리 아들 식구들도 어른들께 새해 세배를 드리도록 말해야 되겠네…”.
그날 김춘엽의 사랑방에서는 정초의 세배가 줄줄이 있게 된다. 먼저 김춘엽 부부가 고모 부부에게 세배를 한다. 그 다음에는 김춘엽의 아들 김영식 내외가 다 큰 아들 김호길과 함께 고모 할아버지 내외에게 세배를 한다. 김영식은 1874년생인데 벌써 결혼을 하여 13살이나 되는 아들 김호길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배 아재 손상훈과 이채령이 부러워한다. 그러자 김영식의 가족이 이번에는 그들에게 세배를 한다. 그 다음에는 손영주가 나서서 김춘엽 부부에게 세배를 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10살이나 연상인 김영식에게 절을 하려고 하니까 그가 깜짝 놀라면서 맞절을 한다.
그렇게 한차례 세배가 끝나자 김영식이 손영주의 손을 잡고서 자신이 거처하는 아래채 사랑방으로 건너가자고 한다. 그것을 보고서 이가연은 얼른 이채령의 손을 잡고서 고모 김옥심에게 자신들은 모두 안방으로 건너가자고 말한다. 정초부터 여인들끼리 마음껏 수다를 떨기 위함일 것이다.
그날 사랑방에서 훈장 이덕화와 지주 손상훈 및 김춘엽은 심각한 이야기 두가지를 나눈다; 하나는, 손상훈이 김춘엽에게 자신의 아들 손영주가 김춘엽의 질녀인 정애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김춘엽이 나서서 다리를 좀 놓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 김춘엽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손상훈이 말한다; “아직 정애라가 17세로 나이가 어리니 손영주는 2년쯤 기다렸다가 혼례를 치루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네. 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다르네. 남의 집 귀한 딸을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당사자와 부모님이 싫다고 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서양식으로 간단하게 약혼식을 먼저 한 다음에 나중에 정식으로 혼례를 시키면 될 것 같은데… 친구의 생각은 어떠한가?”.
김춘엽도 두말없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나서서 여동생 김경화 부부에게 그렇게 말해보겠다고 한다. 마침 정초라 모래쯤 다시 경주 읍내에 가서 부모님과 동생부부를 만날 것이니 그때 한번 단단히 물어보겠다고 말한다.
또 하나는, 손상훈과 김춘엽이 2월 하순에 개최가 되는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다룰 의제에 관하여 하나 합의를 한 것이다. 그들은 지난 1905년 11월 18일 새벽에 일제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 땅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저항운동과 새로운 애국운동의 흐름에 대하여 한번 심도 있게 다루어 보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날 훈장 이덕화 내외와 서배 아재 손상훈의 가족은 김춘엽 부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내남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손상훈 부부와 김춘엽 부부는 내남 덕천의 선비 최사권의 저택에서 2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사랑방모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손상훈과 김춘엽은 자신들이 합의한 그 의제를 상정한다. 그러자 선비 최사권 부부는 물론 장인식 교장 부부와 안성기 교장 부부도 모두 찬성이다. 그 결과 소의제를 다음과 같이 분담하여 두 달간 깊이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다음 사랑방모임에서 발표하고 또한 서로 토론을 하기로 결정한다;
첫째,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조선의 언론과 순국자들에 대한 연구는 장인식 교장이 맡기로 한다. 둘째, 무력으로 항쟁을 하고 있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안성기 교장이 연구를 하기로 한다. 셋째, 기타 조선에서 민중들이 전개하고 있는 여러가지 구국운동에 대해서는 손상훈과 김춘엽이 맡기로 한다.
과연 다음 4월달 사랑방모임에서는 어떠한 논의가 있게 될 것인가? 모두들 궁금해하면서 1907년 2월과 3월을 지내게 된다. 그날 선비 최사권은 72세의 고령이라 특별한 과제연구를 맡지 아니하고 전반적으로 다음 번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만 진술하기로 한다.
노인이 되니 장년인 그들이 한번 봐주는 모양이다. 역시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이다. 참고로, 정초에 훈장 이덕화 내외와 서배 아재 손상훈 가족이 다녀온 서배 마을 곧 오늘날의 외동 신계리의 아름다운 모습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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