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63(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3. 14:59

서배 할배63(작성자; 손진길)

 

15. 1907년의 조선과 서배 아재;

 

음력으로는 1906년 11월 17일 양력으로 1907년 1월 1일에 대마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면암 최익현의 시신을 조선으로 운구하여 그가 성장한 충청도 땅에 안장을 하고 나자 어느덧 음력설이 다가온다.

시골에서는 농한기의 절정이 정월 초하루와 보름 사이이다. 그러므로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설을 지내기 위하여 음식도 준비하고 설빔도 마련한다. 서배 아재 손상훈이 살고 있는 내남 너븐들에서도 설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느라고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엄청 바쁘다.

어린아이들은 골목과 마당에서 뛰놀다가 출출하면 동무들과 함께 집안의 여인네들이 전을 부치고 있는 부엌이나 처마 아래로 자주 찾아온다. 그날만은 주전부리를 마음껏 얻어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네들은 설음식을 준비하면서 무엇이 그리 재미가 있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너븐들의 여인네들은 1907년 음력설을 준비하면서 그 마음이 참으로 기쁘다. 그 이유는 작년에 추수를 한 결과 엄청난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1901년 가을에 서배 아재 손상훈이 일본에서 우량품종인 볍씨를 가지고 와서 그 이듬해부터 3년간 시험재배를 하여 드디어 성공을 했다. 낱알의 수가 참으로 많이 달려 있는 다수확품종의 벼가 내남에서 토착화가 된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서배 아재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서배 아재 손상훈은 그 기적의 볍씨를 가장 먼저 1905년부터 자신의 논을 소작하고 있는 일가들에게 제공했다. 그 결과 내남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 살고 있는 월성 손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1905년 가을과 1906년 가을에 곡수를 2할이나 더 수확을 했다. 그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그들은 풍년가를 드높이 부르고 있다;

한편,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이 일제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체결이 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만다. 따라서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한양에 생기면서 다른 나라의 공관들은 모두 철수를 한다. 이제는 일본 동경에 있는 외국공관에서 일제의 보호국인 조선의 외교까지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의 외교무대에 있어서 대한제국은 그 존재가 사라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내정에도 일일이 간섭을 한다. 예를 들면, 조선의 주요 항만과 큰 지방도시에 일본인 이사관을 파견하고 그들이 근무하고 있는 이사청이 대한제국의 지방행정을 감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이 되고 이제는 망국의 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남의 시골에서는 1907년 구정을 맞이하여 농부들이 소득의 증대를 크게 기뻐하고 설준비를 하고 있는 아낙네들도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라고 하는 거시적인 안목으로만 백성들의 삶을 모두 재단할 수는 없다. 엄연히 민초의 삶이라고 하는 또다른 마당이 그 나라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제국이 완전히 망하게 되면 일제는 시골 농촌에까지 그들의 마수를 뻗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가을 추수의 기쁨을 그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때가 도래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추수의 기쁨과 설날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서배 아재 손상훈은 선친 손성규가 물려준 천석꾼 살림을 우량종자를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되찾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온 동네에서 설음식을 준비하면서 모두가 즐거워하는 행복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그것이 아니다.

52세나 된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 이채령이 혼자서 설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나누고 일을 거들어 주는 여인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양아들 손영주가 아직 미혼이니 안방마님 이채령이 혼자서 부엌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배 아재 손상훈이 오늘은 아들 손영주를 찾는다.

사랑방에서 아들 손영주를 바라보면서 손상훈이 먼저 말문을 연다; “영주야, 이제 너의 나이도 24살이나 된다. 결혼을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이 애비도 네 나이 때에 결혼을 했다. 어디 마음에 드는 참한 색씨라도 있느냐?”. 그 말을 들은 손영주가 말을 못하고 주저주저한다. 그 모양새가 상당히 이상하고 어색하다. 무슨 일인가?

서배 아재가 궁금하여 묻는다; “어디 이 애비에게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는게냐? 어찌 속 시원하게 말을 못하고 그렇게 머리만 긁고 있느냐?”. 양아들인 손영주에게 평소 온화하기 그지없는 손상훈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들 손영주의 주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캐묻고 있다.

부친 손상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손영주가 조그만 목소리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 “사실은 제 눈에 들어오고 있는 처녀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아직 혼기가 되지 못하였기에 제가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러니 제 결혼을 조금 미루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애원하는 듯한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서배 아재 손상훈이 눈이 번쩍 뜨인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분명이 아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다고 한다. 그것 참 좋은 일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도대체 그렇게 어린 처녀가 누구란 말이냐? 너의 나이가 벌써 24살이나 되는데 얼마나 어린 처녀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계시는 부친의 음성이 순순히 답을 하지 아니하면 물러나실 의향이 없으신 것 같다. 그래서 평소 성품이 착하기만 한 손영주가 얼굴이 벌게지면서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을 한다; “아버지, 사실은 제가 경주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정진평 어른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 17세에 불과하니 혼사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한 2년만 기다려 주시면 좋겠는데요…””.  

정진평은 서배 아재 손상훈의 둘도 없는 친구인 김춘엽의 매제이다. 그러니 그 딸이라고 하면 김춘엽의 하나뿐인 누이동생 김경화의 딸 정애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거 혼처로는 괜찮은 자리이다. 그래서 손상훈이 아들 손영주에게 다시 묻는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처녀가 벌써 17세이다. 그만한 나이이면 영주 네가 사귀자고 말하면 충분히 대답을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어디 그 처자의 뜻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부친의 그 말을 듣자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의 손영주가 또 떠듬거리며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지만 중요한 질문인지라 답을 한다; “아버지, 제가 아직 말을 붙여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다음에 제가 경주 오일장에 가면 한번 의사를 타진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상훈은 아들 영주가 영 어리숙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겠다. 당분간 네게 맡겨 두마. 하지만 그 처녀의 답을 금년에는 확실하게 받아 두거라. 네 눈에 그렇게 좋게 보인다고 한다면 그 처녀를 마음을 두고 있는 총각이 너만 있는 것은 아닐게야. 그러니 남이 채어 가기 전에 확실하게 그 마음을 붙들어 두도록 하려무나. 이 애비는 그 정도의 자리이면 며느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네 어미도 그러할 것이야”.

그 말을 듣자 손영주는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씩씩하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제가 힘이 납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처녀의 마음을 붙들어 두겠습니다. 그러하니 그저 2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머니께도 그렇게 말씀을 미리 드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서배 아재 손상훈은 30여년 전 자신과 선친 손성규와의 대화의 자리를 새삼 회상하고 있다. 그때 자신이 지금의 손영주와 비슷한 말씀을 드린 것 같다. 일찍 양자로 데려다 키운 손영주가 되어서 그런지 그 성품이 손상훈 자신을 많이 닮아 있다. 어떻게 24살이나 되도록 그렇게 숫기가 없을까? 하지만 정진평의 딸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대단하니 한번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날 밤 애처 이채령이와 잠자리에 들어서 서배 아재 손상훈이 아들 손영주가 한 말을 해준다. 그랬더니 이채령이 한마디를 한다; “영주가 당신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당신의 성격을 많이 닮았나 봐요. 24살이나 되도록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말도 변변히 붙여보지 못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당신이 나서서 김경화와 정진평 부부의 의사를 슬쩍 떠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손상훈이 즉시 답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도 정진평의 딸이 마음에 드는가 보군요. 내가 지주 김춘엽이나 정진평을 만나서 그들의 의사를 타진하는 거야 무엇이 그리 어렵겠소. 하지만 영주 생각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 처자가 19살쯤은 되어야 혼인을 하고 데려올 수가 있다고 하니 당신이 고생스럽더라도 며느리를 보자면 한 이년 기다려주어야 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이채령이 잠이 오는지 하품을 하면서 한마디를 한다; “여보, 잘 알겠어요. 저야 자식을 낳지도 못하는 저를 내치지 아니하고 평생 함께 살아 주시는 당신의 말씀인데 어찌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지 않겠어요. 그런 걱정은 마시고 잠이나 주무셔요. 저도 졸리워요…”. 뒷말이 느려지더니 어느새 잠이 들고 마는 이채령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배 아재 손상훈도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