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62(작성자; 손진길)
사랑방모임이 있은 다음달 곧 1906년 11월에 덕천의 선비 최사권이 너븐들 서배 아재 손상훈에게 사람을 보내온다. 그 전갈의 내용이 근일 중 덕천 자신의 집에서 좀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고희를 넘긴 6촌 매형 최사권이 손상훈을 조용하게 자신의 집으로 좀 걸음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라서 서배 아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내일이라도 잠시 들를 것이니 그렇게 전해 달라고 말한다.
겨울이 시작이 되어서 그런지 너븐들과 덕천 사이의 벌판을 지날 때에는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추위가 크게 느껴진다. 벌써 56세나 된 서배 아재 손상훈은 걸음을 잽싸게 걸으면서도 한기를 떨쳐버리지를 못한다. 옛날 소싯적에는 이 정도 추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더니 이제는 그것이 아니다. 몸이 야윈 것도 아닌데 나이를 먹어서 추위를 많이 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늙어가고 있다는 표시이겠지…
서배 아재 손상훈은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벌써 십여 세나 되는 여러 명의 손주를 보고 있는데 자신은 미혼인 양아들 손영주밖에 없어 아직 할아버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추위를 한껏 느끼며 길을 가고 있는 손상훈은 자신의 처지가 오늘따라 휑한 바람소리처럼 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걸음을 빨리 옮긴다.
덕천의 매형 최사권의 집을 찾아 들었을 때에는 사랑채에서 기침소리가 연신 나고 있다. 매형이 혼자서 고뿔이 심하신가 염려가 되어 손상훈이 사랑방문을 활짝 열어본다. 사래가 들렸는지 계속 ‘콜록콜록’하던 최사권은 방문이 갑자기 ‘휙’하고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그만 기침을 멈춘다.
그것을 보고서 서배 아재가 그때서야 안심을 하면서 뒤늦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다; “매형, 대문을 들어서니 사랑방에서 기침소리가 계속 들리더군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방문부터 열었습니다. 달리 편찮으신 데는 없으시지요?”. 선비 최사권이 밝게 웃으면서 말한다; “처남 잘 왔네. 추위에 이렇게 직접 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허이. 들어와서 몸부터 녹이게나…”.
손상훈에게 따뜻한 아래목을 권한다. 그러자 서배 아재가 손사래를 친다; “젊은 제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않겠습니까? 연세가 15살이나 많으신 매형이 그 뜨끈뜨끈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옳지요…저는 문간의 이 자리가 좋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최사권이 옆에 치워져 있는 술상을 당겨서 탁배기 한잔을 권한다; “그러면 막걸리라도 한잔 쭉 들이키시고 추위를 좀 잊으시게나”.
탁배기 한사발을 맛있게 들이킨 손상훈이 매형에게 한 사발 가득 부어서 권한다. 최사권도 ‘쭉’ 한잔을 마시고 수염을 한번 손으로 쓸어본다. 그리고 용무를 말한다; “처남을 이 먼 길에 부른 까닭은 한양의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인편으로 기별이 왔기 때문이야. 그간의 소식을 간략하게 글로 써서 보내면서 일간 한번 방문을 하겠다고 하네. 어쩐 일인가 궁금하여 서신을 가지고 온 동학간부에게 물었더니 요즘 동학내부에 분열이 생겨서 교주 손병희가 그것을 수습하느라고 지방을 순찰하고 있다고 하더군. 자네 혹시 짐작가는 바가 없는가?”.
그 말을 듣자 서배 아재 손상훈은 짚이는 바가 하나 있다. 지난 달에 경주 오일장에 다녀오신 장인어른 이덕화가 최근의 동학의 소식을 자신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내용이 1906년 9월 17일에 손병희가 친일 배교분자인 이용구 등 62명을 한꺼번에 출교조치하였는데 그때부터 동학이 재정난을 크게 겪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병희가 지난 5년간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이용구가 전적으로 재정을 관리하면서 동산과 부동산을 그만 사유화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상훈이 조심스럽게 최사권에게 말한다; “제가 듣기로는 손병희 선생이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동학의 재정을 담당하던 이용구가 재산을 거의 빼돌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급거 귀국한 교주 손병희가 친일분자 이용구 일당을 동학에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재정난이 심각하겠지요. 그러므로 현재 손병희 선생이 지방을 돌면서 교도들의 이탈을 막는 한편 뜻있는 분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고 있을 것입니다”.
최사권이 ‘흠’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떡인다; “처남의 분석이 거의 틀림이 없을꺼야. 나도 대충 그렇게 짐작을 하고 있다네… 그가 찾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말을 듣자 서배 아재 손상훈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웃으면서 말한다; “매형, 쉬운 문제를 너무 어렵게 풀려고 하십니다. 거대한 조직인 동학에 시골의 천석꾼에 불과한 저나 매형이 거금을 준다고 해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차제에 제가 매형에게 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한 마리 잡으시면 됩니다…하하..”.
그 말을 들은 선비 최사권이 “황금알을 낳은 거위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을 소리 나게 친다. 갑자기 그의 소리가 명랑하다; “맞아, 처남. 어째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암, 그렇게 하면 되겠구만… 그러면, 볍씨의 주인인 처남이 동의한 것으로 알고 며칠내로 내가 소달구지에 그 볍씨를 한 가마니만 싣고 교리 최부자집 가주를 한번 만나보도록 하겠네. 초대 교주 최제우가 그 집 조상의 같은 후손이 아닌가? 그럼 그렇구 말구…”.
그날 선비 최사권이 얼마나 기분이 좋아서 손상훈에게 칙사 대접을 하는지 모른다. 지난달에 사랑방모임을 마치고 그 다음날에 처남 손상훈이 자신의 집에 보내어준 우량종자인 볍씨가 몇 가마니나 된다. 그것은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공짜로 보급하려고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긴요할 때에 참으로 귀하게 기금마련을 위한 방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남에서 만석꾼 집안으로 이름이 높은 교리 최부자 가문의 가주 최현식이 과연 얼마를 기부할까? 최사권 자신이 먼저 볍씨를 가져다 주고 그 다음에 손병희 선생을 직접 그 집에 데려가면 초대 교주 최제우를 생각해서 더 많은 돈을 내어놓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날 최사권은 손상훈과 탁배기를 여러 사발 나누어 마시면서 약간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면암 최익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최익현은 나하고 고향은 달라도 같은 경주 최씨이며 일가인데 나보다 3살이 위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충청도에서 자라났는데 23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참판 벼슬까지 했다네. 그런데 그의 상소가 유명하지. 나이 40에 겁도 없이 서원을 철폐하는 흥선대원군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상소를 한 거야. 그 덕분에 고종의 친정이 1873년부터 시작이 된 게야. 그러니 고종이 최익현을 아껴서 훗날 참판 벼슬까지 준 거지…”.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단지 최익현이 경주 최씨이며 선비 최사권과 크게 멀지 아니한 일가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최사권이 약간 숨을 쉰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도끼를 가지고 가서 자신의 명운을 걸어 놓고 궁궐 앞에서 상소를 하는 거야. 그 때문에 두 차례나 유배생활을 하게 되지. 그러한 그가 금년 정월에 은밀하게 나를 찾아 왔어…”.
처음 듣는 소리이다. 그래서 서배 아재가 귀를 쫑긋한다. 최사권의 이야기가 계속이 된다; “작년 10월에 체결이 된 ‘을사늑약’을 무효로 하라고 고종황제에게 아무리 상소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게야. 그래서 그는 전라도 정읍으로 가서 옛날 동학처럼 의병을 일으키고 위정척사운동을 다시 벌이겠다는 거야. 그러므로 내게 군자금을 좀 대라고 하더군. 나도 집안의 일이라 은밀하게 뒷돈을 대어주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역시 그를 교리 최부자집 가주에게 데리고 갔지. 그랬더니 최현식이 은밀하게 그에게 군자금을 많이 내어 주더군...”.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이며 흥미로운 것이다. 손상훈이 자신의 눈과 입을 빤히 쳐다보자 최사권이 신이 나서 취중에 다시 말한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그가 의병 400명으로 싸우다가 패하고 그만 대마도로 유배를 가고 말았다네… 74세의 노인인 그가 어떻게 일본의 변방 대마도에서 그 거친 유배생활을 이겨내겠나.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가 살아서 돌아오지를 못할 것 같애…”.
불행하게도 선비 최사권의 예견이 현실이 되고 만다. 그가 그러한 이야기를 안타깝게 하고 한달 보름이 지나 새해가 되자 마자 곧 양력으로 1907년 1월 1일에 대마도에서 여러 달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면암 최익현이 그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를 유학의 가르침으로 바르게 하여 그것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고 외세를 물리치고자 스스로 의병장으로 나선 그 노익장 조선의 선비 최익현이 마침내 적국인 일본의 변방 대마도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참고로, 훗날 대마도에 세워진 그의 순국비가 아래와 같다;
그의 시신이 부산에서 충청도 고향으로 운구가 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조선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길가에서 그의 관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스스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의 나라 조선의 혼을 깨워서 서양의 문물을 한번 이겨보겠다고 나선 그가 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죽음으로 유학의 힘으로 서구의 물질문명을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기에 그것을 조선인들이 크게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면암 최익현은 물질문명이 너무나 앞서 있는 구미의 열강과 서구화된 일본을 이기지 못하고 한을 품고서 대마도에서 운명하고 만 것이다. 그 일을 겪으면서 서배 아재 손상훈은 이제 조선의 유학사상으로 서구문명을 이긴다고 하는 생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방법은 똑같은 방법으로 외세를 이기는 것이다.
그들보다 더 창의적이고 나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는 것이 그들을 확실하게 이기는 방법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라도 자신이 이곳 시골에서 마련할 수가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서배 아재 손상훈은 거듭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조선의 선비들의 울부짖음 가운데 무정하게도 1906년 한해가 또 역사속으로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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