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6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3. 08:15

서배 할배60(작성자; 손진길)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자 일제는 더 이상 구미열강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을사보호조약을 1905년 11월18일 새벽에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만다. 처음에는 고종황제에게 조약에 서명을 하라고 강압했으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대신들에게 서명을 받으라고 미루고 만다.

따라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삼엄하게 덕수궁의 ‘중명전’ 건물을 포위하고서 그 안에서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서명을 강제한 것이다;

참고로, 한때 황실도서관으로 사용이 된 중명전의 복원된 모습이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을사보호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들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일제는 그 조약을 빌미로 거리낌없이 1906년 2월에 조선 땅에 일본의 통감부를 설치하고 만다. 참고로, 당시 강제로 체결이 된 문서가 아래와 같다;

조선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자 그 반사적인 이익으로 1895년에 일본으로 망명한 권동진 선생이 11년만에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손병희 선생 및 오세창 선생과 함께 1904년부터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보회’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그 운동을 조선에서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일을 조선에서 하고 있는 권동진 선생이 1906년 5월경 멀리 한양에서 내남 덕천의 선비 최사권의 집을 방문한다. 그를 집주인 최사권이 크게 환영한다. 5년전 1901년 늦여름에 일본 동경을 방문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 오문자의 집에서 하루동안 권동진 선생의 좋은 말씀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로 보면, 선비 최사권은 1836년생이고 권동진 선생은 1861년생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25살이나 연배에 차이가 있다. 그 정도이면 무려 한 세대의 차이이다. 그러나 소탈하고도 활달한 선비 최사권이 그러한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는 친히 사랑방에 권동진 선생을 모시고 함께 대작을 한다.

그러한 선비 최사권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는지 권동진 선생이 한마디를 한다; “최 선비님과 여러 사랑방모임의 형님들께서는 저를 동경에서 잘도 속이셨습니다.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을 여러분들이 함께 공모하여 충청도의 지주 이상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때 저는 제대로 속았습니다. 하하하…”.

그 말을 듣자 선비 최사권이 역시 ‘하하’라고 웃으면서 답을 한다; “사실은 손병희 선생이 저희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자신을 추적하는 자들이 일본에도 있으니 부디 자신의 정체를 숨겨 달라고 한 것이지요. 당시 저희들은 그분의 신분을 모르는 것이 권 선생님의 안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권동진 선생이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말을 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 덕분에 저도 손병희 선생을 이상헌 지주인 줄 알고 아주 편하게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상헌 선비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때에는 제가 벌써 동학사상에 은연중에 물든 다음이지요. 그후 저는 동학교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애국과 애족 운동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답니다”.

선비 최사권이 말한다; “저희 사랑방모임의 선비들도 동학교도는 아니지만 동학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있지요. 특히 손상훈 선비는 그 장인이 되시는 훈장 이덕화 옹의 집안이 아주 초창기부터 동학에 참여한 바가 있지요… 아 참, 서배 아재 손상훈과 장인식 선생의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제가 사람을 보내어 불러 오지요”.

권동진 선생도 찬성이다. 그래서 30분 후에는 같은 덕천에 살고 있는 장인식 선생이 그 자리에 참여하고 1시간 후에는 상신에 살고 있는 서배 아재가 역시 참석을 한다. 서로가 다시 만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확실히 동경에서 강의를 한 권동진 선생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감동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권동진 선생이 동경에서 덕천의 방문단에게 자신의 무관의 경륜에 비추어볼 때, 장차 일본은 서양의 세력을 등에 업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할 것이며 만약 그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중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날 집주인 최사권과 이조 소학교의 교장인 장인식 그리고 너븐들의 서배 아재 손상훈은 이구동성으로 권동진 선생에게 중요한 질문을 한다; “이제 일제가 조선 땅을 완전히 집어 삼키고자 통감부 정치를 하고 있으니 조선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권동진 선생이 침울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일제의 힘과 조선의 힘을 비교하면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집어 삼키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조선의 백성들이 조국이 망하게 되었는데 그냥 손을 놓고 앉아있을 수는 없지요. 나라는 망한다고 하더라도 백성과 민족은 남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민족혼을 일깨우고 조선인들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만 합니다”.

그 점은 그들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그 점에 대하여 권동진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동경에서부터 손병희 선생 그리고 오세창 선생과 함께 진보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취지는 서구화 곧 근대화운동을 조선의 백성들이 스스로 먼저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조금 뜸을 들인 다음에 말을 잇는다; “외형적으로는 단발을 하고 서구의 복장을 갖추며 정신적으로는 근대적인 의식을 함양하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신식학교를 지방에도 설립하여 어린 백성들에게는 근대화교육을 실시하고 조선의 어른들에게는 발간사업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진보적인 민주사상을 고취하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선비 최사권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저는 벌써 나이가 서양식으로 70입니다. 고희가 넘도록 평생 유학을 하면서 선비로 살아 왔으니 상투를 가진 채 남은 여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단발을 하고 서구적인 근대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지요”. 좌중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그때 서배 아재 손상훈이 말을 한다; “저는 작년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덕수궁에서 있게 되자 민영환이 자결을 하여 순국하고 황성신문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실었으며 조선의 언론이 하나같이 ‘을사오적’을 처단하자고 나섰다고 듣고 있습니다”.

손상훈이 본론을 이야기한다; “저는 울분에 차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보다는 차분하고도 냉정하게 생각을 하고 그 다음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사람들이 앞으로 각자 어떻게 자주 독립을 되찾을 능력을 길러 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그 점에 대한 권동진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권동진 선생이 ‘흠…’하고 한참 생각을 하다가 신중하게 답을 한다; “저는 최근까지 일본에서 선진문물을 10년이상 접하고 살면서도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평생을 조선의 무관으로 그리고 관리로 살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다음 순간 그는 결연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입장에서 스스로 자주독립의 힘을 길러 나가자면 총칼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산업생산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경쟁력이 있는 기업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으로 봅니다. 경제력과 과학이 뒷받침되지 아니하면 사실 군사력이라고 하는 것도 선진화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 말을 듣자 사랑방모임의 세 인물들이 모두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권동진 선생은 그렇게 세사람과 의기투합하여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실컷 회포를 푼다. 그는 다음날이 되자 다시 만나자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일찍 떠나간다. 아무래도 그는 진보회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엄청 바쁜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까지 나눈 토론 가운데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는 뼈아픈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인식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저는 일제의 군대가 위협을 하고 있는 덕수궁 건물에 갇혀서 대신들 가운데 몇 사람이 어쩔 수가 없이 그 문서에 서명을 했는데 그것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르면서 조선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들을 처단하자고 나서는 것이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장인식 선생이 좌중이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제가 알기로는 고종황제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서 대신들에게 그 서명을 떠넘겼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의 책임은 묻지 않는 것입니까? 권한이 크면 당연히 책임이 그만큼 크다고 저는 일본에서 배웠는데 조선에서는 아마도 아직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참으로 할말이 없는 견해이다. 장인식 선생의 지적 앞에 모두들 할말을 잊고서 한숨을 내쉬고 있다. 백성들의 책임이 국왕의 책임보다 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국왕이 그 책임을 대신들에게 떠넘기고 나중에는 그 책임을 추궁하라고 백성들에게 여론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아직 1905년과 1906년의 조선은  그렇게 전제국가의 어둠이 짙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조정에 너무나 실망을 하고있는 조선의 백성들은 멀지 않아 장인식 선생과 같은 발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때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도 그러한 주장이 벌써 나타났기 때문이다. 끝으로, 1905년 11월 30일 자택에서 순국적인 자결을 선택한 외무대신 출신 시종무관 민영환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