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59(작성자; 손진길)
1904년 2월 9일에 일본의 해군이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정을 공격하여 파괴하였으며 같은 날 뒤를 이어 일본의 육군이 수도없이 제물포로 들어와서 경인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소식이 경주 월성 지역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소식은 일본의 육군이 경인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그에 따라 2월 12일에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공사가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와 조선의 정부는 누구를 의지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 일본제국이 장차 조선을 어찌할 것인가? 그 대답은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렇지만 고종은 여전히 청일전쟁 때처럼 구미의 열강이 일본에 압력을 넣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눈치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그에 대한 일본의 준비가 대단하다. 일본당국은 10년전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과 1895년 4월 17일에 체결한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내용이 러시아와 불란서 그리고 독일의 압력으로 6일 후에 크게 수정이 되고 마는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사전에 영국과 동맹조약을 맺고 있다. 그리고 미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치는 것을 도와 주기 위하여 일본의 요청에 따라 거액의 차관을 민간금융기관을 통하여 전쟁비용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고종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이 러일전쟁의 결과도 9년전 삼국간섭의 때와 같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국제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판단을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이 내리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이제는 외동의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안성기 선생 덕분이다.
안성기 선생은 10년 전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을 때에 귀추를 알아보기 위하여 현장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한 전력이 있는 안성기 선생이 이번에는 직접 한양을 방문하지 아니하고 동경에 살고 있는 아들 안용운을 통하여 소식을 듣고 있다.
안성기 선생의 차남인 안용운은 1902년 봄에 동경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서신으로 교제하고 있던 박미자를 만나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그 봄에 그녀와 결혼하여 지금까지 장인 박철과 오문자 부부의 집에서 잘 살고 있다.
젊은 안용운이 동경생활에서 별로 불편함이 없는 이유는 일찍부터 서배 마을의 서당에서 신학문선생인 부친 안성기로부터 착실하게 일본의 문화와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에 있는 부친이 러일전쟁의 경과가 궁금하여 소식을 전해달라 하시기에 그가 읽은 일본의 신문을 오려서 아예 부친에게 우편으로 보내어 준 것이다.
안성기 선생은 아들이 보내어준 신문을 읽고서 그 소식을 2달에 한번씩 열리는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방모임의 좌장인 선비 최사권과 그의 부인 손예린, 서배 아재 손상훈과 그의 부인 이채령, 선비 김춘엽과 그의 부인 이가연, 장인식 선생과 그의 부인 최순옥 등은 상당히 정확한 러일전쟁의 소식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최근의 소식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9월 5일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러시아가 청국에서 조차하고 있는 요동반도 남부지역을 일본이 그대로 위양받고 전쟁배상금조로 북위 50도 이남에 있는 러시아의 섬들을 일본이 차지하며 극동 러시아 연안의 어업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관련이 되는 중요한 항목이 그 조약 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에게 조선에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한다는 조문이다. 그러한 내용의 조약이 미국 땅에서 그것도 미국 대통령이 중재하여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이 되었으니 이제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본이 승리의 기쁨을 신문에 발표하고 있는 그 내용을 읽고서 안성기 선생이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방바닥을 치면서 분격해하고 있다. 그런데 1905년 11월달에는 더 기가 막힌 소식이 지방에까지 전해진다.
한양에서 발행된 신문이 담고 있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국으로 전파가 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소위 ‘을사늑약’이다. 1905년 11월에 조선에 온 일본의 마지막 명치원로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고종을 고립시키고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협박하거나 매수하여 드디어 11월 17일에 망국의 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념이라고 생각했는지 1905년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어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자인 영친왕 이은과 찍은 사진이 다음과 같다;
그에 따라 1906년 2월에 일본이 조선 땅에 통감부를 설치한다. 한양에 설치가 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 행사하고 모든 내정을 간섭하는 상급기관이 되고 만다. 그리고 지방에도 12개의 통감부의 이사청과 11개의 지청을 설립하여 조선의 모든 지방행정까지 지배한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의 멸망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의 성립으로 보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1906년 3월 2일에 초대통감 이토오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고문정치를 강화하며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는 순서를 밟게 된다.
그 결과 그 뒤를 이은 일본인 통감들이 1907년 6월에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하고 순종을 황제로 즉위시켰으며 친일내각 이완용과 한일신협약을 맺고 만다. 참고로, 이완용이 이토오 히로부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다음과 같다;
그에 따라 차관정치가 실시되고 마침내 1907년 7월 31일 밤에는 순종황제의 칙령이라고 공포하면서 조선인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고 만다. 자국의 군대가 없는 조선은 국가로서의 존재가 실제로는 사라지고 그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참고로 대한제국 군대 가운데 당시 시위대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군대가 해산이 되자 격분하여 황궁 시위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을 한다. 그에 따라 그의 부대원들이 한양에서 일본군대와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다. 따라서 강제로 해산을 당한 조선의 군인들이 항일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의병이 되거나 지방을 돌면서 대한제국의 실정을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일을 한다.
그 때문에 덕천 사랑방모임의 인사들도 한양에서의 소식을 비교적 정확하게 듣게 된다. 그 소식을 듣고서 기여이 일본이 조선반도를 집어삼켰다는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장래가 참으로 암담해 있는 그때에 덕천의 선비 최사권의 집에 참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 든다. 그가 바로 1901년에 동경에서 잠시 만나고 헤어진 우국지사 권동진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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