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58(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3. 01:57

서배 할배58(작성자; 손진길)

 

14. 러일전쟁과 조선의 운명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895년 4월에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그 결과  만주의 요동반도를 얻고 청국의 1년 예산의 2배반에 해당하는 2억냥의 전쟁배상금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종전협정은 3국간섭으로 크게 수정이 되고 만다.

러시아가 일본의 고베 앞바다에 함정을 끌고 와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불란서와 독일의 협조를 얻어 일본에게 그 조약을 수정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3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청국에 되돌려주고 전쟁배상금도 7분의 1규모인 3천만냥으로 축소하고 만다.

그때 일본은 부동항을 찾아서 남하를 계속하고 있는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지 아니하는 한 조선반도를 집어삼키고 만주와 청국으로 진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러시아를 쳐부술 준비를 한다.

  러시아는 그런 줄도 모르고 신나게 남하정책을 추진한다; 1897년 12월에 함대를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항에 보내어 청국에게 여순항과 대련항을 빌려 달라고 요청한다. 러시아 함대의 시위에 위협을 느낀 청국은 3개월 후에 ‘러청밀약’을 맺고 요동반도 남부의 두 항구를 조차형식으로 러시아에게 주는 한편 황해까지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그만 주고 만다.

그것으로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일년사철 얼지 아니하는 항구를 황해에서 얻게 된다.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여름에만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러시아제국은 유럽에서는 발틱함대를 운영하고 아시아에서는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극동함대를 운영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지니게 된다.

일본은 해군력이 강력해진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하여 영국 및 미국과 비밀리에 접촉을 한다. 영국과 미국 역시 러시아가 해군력이 강화되고 육군을 만주와 조선 그리고 청국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은 1902년에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전쟁을 벌이는 경우 러시아를 지원하는 동맹국이 있다면 그때에는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는 소위 ‘영일동맹’을 맺는다.

미국은 1905년 7월에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면 조선을 보호국으로 두는 것을 용인하고 그 대신에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비밀협정을 맺는다. 그것이 이름하여 ‘태프트 카쓰라 밀약’이다.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가 필리핀을 방문하는 걸음에 미국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동경에서 일본의 총리 카쓰라와 비밀리에 체결한 것이다.

‘영일동맹’이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있는 담력을 주었다고 한다면  ‘카쓰라 태프트 조약’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더 이상 구미열강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조선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미국의 비망록에 남아 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게 나라를 넘겨준다는 조약에 비준을 할 경우에만 조선을 합병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전세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그러나 그 조항이 있기에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본은 4년간 공작을 한다. 마침내 1910년 8월에 조선을 합방조약의 형식으로 집어 삼키게 되는 것이다.

‘태프트 카스라 밀약’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8월에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역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1905년 9월에는 미국의 작은 군항 포츠머스에서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소위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다.  

그때부터 일본은 구미열강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조선을 집어삼킬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내밀하게 대한제국과의 합병조약의 체결이라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였기에 그 눈치를 보느라고 1910년까지 기다린 것에 불과하다.

  그 기간 동안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양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운명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지키지 못한 결과가 그렇게 비극적인 외세의 지배를 허용하고 만다. 조선의 왕실과 조정이 사대주의로 일관하였기에 그와 같은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조선을 지켜주지 아니한다. 조선반도는 오로지 조선사람들의 힘으로 지켜야만 하는 조국인데 그 자명한 진리를 외면한 결과가 그러하다.

그와 같은 내용을 조선의 백성들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월성 내남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서배 아재 손상훈도 그 내용을 자세히 모르고 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고 한다면 여전히 2달마다 열리는 덕천 사랑방모임에 참석을 하여 약간의 정보를 더 얻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세하게 모르고 있는 러일전쟁의 전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190428일에 요동반도 여순 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공격하고 29일에는 제물포항에 들어와 있는 러시아의 군함을 공격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10일에 비로소 러시아 황제인 짜르 니콜라이2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둘째, 러시아가 8일이 지나서야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황해에서는 해전을 벌이고, 만주로 육군을 남하시키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일본이 28일 러시아의 전함을 선제 공격하여 쳐부수고 뒤이어 29일에는 제물포를 장악하고 그곳을 통하여 5만명이나 되는 육군을 조선에 상륙시키자 212일 러시아공사가 조선을 포기하고 떠나고 마는 것이다. 참고로 한양 인근에 주둔한 일본 육군의 모습이 아래와 같다;

셋째, 만주로 북진한 일본의 육군이 남하하는 러시아 군대를 19048월에 봉천으로 밀어내면서 요동반도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그리고 1904년말에 일본의 육군이 요동반도로 상륙하여 그곳을 장악한다. 육군의 지원이 완전히 끊어지자 러시아의 해군함정이 더 버티지를 못하고 190512일에 항복을 하고 만다. 아래 그림은 요동반도에 상륙하는 일본 육군의 모습이다.

넷째,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발틱 함대가 희망봉을 돌아 블라디보스톡 항으로 들어가서 극동함대를 재건하려고 했으나 1905527일 그만 현해탄에서 일본의 해군에게 적발이 되어 패전을 하고 만다. 그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일본에게 이길 승산이 거의 없어진다.

다섯째, 그것을 보고서 러시아 내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일본은 현해탄 소위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재정의 압박으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형편이 안된다. 미국의 금융기관에서 군비의 4할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을 빌려와서 사용했지만 여전히 자금압박이 너무 심한 것이다.

여섯째, 양국의 사정을 눈치챈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기지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주선한다. 한달간 밀고 당기다가 결국 190595일에 종전협정을 맺는다. 그 조약은 러시아의 짜르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중재한 것이다. 사진은 포츠머스 회담장의 러시아 대표와 일본 대표의 모습이다.

참고로,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이 다음과 같다; (1)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 (2)청국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요동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에게 주고 ‘남만주철도’ 곧 장춘과 여순 사이의 철도를 일본에 위양한다. (3)전쟁배상금조로 북위 50도 이남의 러시아 영토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한다. (4)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준다.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의 육군이 5만명이나 1904년 2월 9일 제물포에 들어온다. 2월 12일 러시아공사는 조선을 떠나고 만다. 그 결과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아무 효력이 없다. 일본이 러일전쟁에 있어서 조선은 일본을 지원한다는 협정을 강제로 체결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립국이라는 것도 충분한 자위권을 행사할 정도로 자국의 힘이 강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 힘이 없기에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에게 가장 먼저 빼앗기게 된다. 명분은 동해로 들어오는 러시아 군함을 살피기 위한 망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일본은 독도의 군사적인 그리고 영토적인 가치를 알아보고 1905년 2월 22일에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만 것이다. 행정상으로 일본의 시마네현 다께시마라고 제멋대로 고시한다. 더구나 20세기 후반이 되면 독도 주변의 해저에 엄청난 자원이 매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그때부터 현대 일본은 그 옛날 일방적인 제국주의시대의 행정조치를 가지고 계속 자신들의 영토 다께시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아직도 조선의 뒤를 이은 한국의 힘이 일본보다 약하기에 계속 침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1904년 가을은 서배 아재 손상훈과 그의 가족에게 있어서는 다시 천석꾼이 된 기쁨의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 곧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그 반대이다. 러일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배 아재가 천석꾼의 꿈을 다시 실현하는 그때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으로서는 그 주권이 실질적으로 일본에게 거의 넘어가게 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자신의 꿈과 야망을 성취했다고 크게 기뻐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조국과 지역사회가 모두 잘 살고 강성해야 자신의 부와 권력도 보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해주는 것이 구한말의 역사이며 서배 아재의 일대기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