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68(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4. 03:16

서배 할배68(작성자; 손진길)

 

1907년 5월달에 들어서자 양삼마을에 살고 있는 훈장 이덕화가 너븐들에 살고 있는 사위 손상훈을 방문한다. 서배 아재 손상훈이 장인어른을 사랑방으로 인도한다. 5월달이 되자 이제는 완연한 봄이다.  따뜻한 날이므로 안방마님 이채령이는 거랑가에 빨래를 하러 나간 모양이다.

그래서 손상훈이 부엌에 가서 손수 술상을 차려서 사랑방으로 온다. 사위가 직접 차려준 술상이다. 그러므로 손상훈이 한 사발 따라준 막걸리를 훈장 이덕화가 맛나게 마신다. 그리고 탁배기 사발을 사위에게 내민다. 손상훈이 한잔 더 잔을 채웠더니 그것을 이덕화가 마시지 아니하고 사위에게 주면서 말한다; “서배 아재, 같이 늙어가면서 나 혼자 마셔서야 되겠나? 자네도 한 잔 하시게…허허…”.

제자이며 사위인 손상훈이 얼마나 마음에 들면 그런 말씀을 하시고 탁배기가 든 사발을 그에게 권하겠는가? 훈장 이덕화의 마음을 살핀 손상훈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인어른”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약간 돌린 채 마신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나이가 드시니 장인어른이 많이 외로우신 모양이다. 19살이나 연하인 사위에게 직접 술을 다 권하시다니…’.

손상훈이 탁배기 한잔을 다시 장인 이덕화에게 권한다. 그 술을 마시고 나서 이덕화가 입을 뗀다; “사위, 사실은 날씨도 따뜻하여 내가 어제 내자와 함께 경주 오일장에 갔었네. 오래간만에 친구이자 손위 처남인 김종민이를 만났지. 다들 이제 노인이 되었기에 처남댁도 집에 계시더군…”.

76세 고령이라 힘이 드는지 훈장 이덕화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말한다; “그 자리에서 김종민 내외가 우리 부부에게 손영주와 정애라의 약혼식에 대하여 말을 꺼냈네. 그들은 자신들의 외손녀 정애라가 나의 외손자인 손영주와 장차 혼인을 하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했어. 그것이 양쪽 집안의 경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허허..”.

그 말씀을 하시면서 장인 이덕화가 마음이 즐거운 모양이다. 연신 ‘허허..’라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김종민 부부가 말하기를 자신들도 얘들 혼례는 2년 후에 시키더라도 미리 약혼식은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들은 약혼식 준비는 본래 신부측에서 하는 것이니까 이달 하순에 자리를 마련할까 하는데 우리 쪽 사정이 어떠한지를 묻더군”. 

서배 아재 손상훈이 정확하게 알아 들었다. 참으로 좋은 반응이다. 따라서 기쁘게 장인에게 말한다; “장인어른,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부부도 그렇게 혼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정초에 장인 장모님과 함께 서배 마을 김춘엽 집을 방문했을 때에 그쪽 어른과 당사자인 처녀 정애라의 생각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이제 그 답이 온 것이군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집사람과 상의를 하지요”.

훈장 이덕화도 즐거운지 연신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 참 좋은 일이야. 그렇구 말구. 내가 오래 살았더니 이렇게 기쁜 날도 있구만. 그러면 손서방이 이번 오일장에 채령이와 함께 경주 읍내에 가서 그쪽 어른들을 만나 한번 약혼식 날짜를 정해보게. 우리 부부도 약혼식날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게나. 허허…”.

서배 아재 손상훈이 즉시 말한다; “허 참, 장인어른도… 그날 빠지신다면 저희들이 섭섭하지요. 꼭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하니 건강이나 잘 돌보십시오. 하하하”. 그렇게 장인과 사위 사이에 참으로 흐뭇한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사랑방에서 계속이 되고 있다.

장인 이덕화가 집으로 돌아가고 한시간쯤 지났을 때에 이채령이 빨래를 하고 집에 돌아온다. 사랑방을 나와 마당에서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던 손상훈이 반갑게 맞는다. 그리고 오늘 장인 이덕화가 방문하여 말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녀도 참으로 기뻐한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1907년 5월 30일에 경주 읍내에서 손영주와 정애라의 약혼식이 있게 된다. 양쪽 어른들만 모시고 두 청춘남녀가 평생을 함께 하자고 약속을 한다. 17세의 정애라가 7살이나 많은 약혼자 손영주를 보고서 생긋 웃는다. 그녀는 경주 오일장에 올때마다 부친 손상훈과 함께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 손영주 총각을 잘 알고 있다.

24살이나 된 노총각이 얼마나 숫기가 없고 어리숙한 지 모른다. 그녀는 그런 성격의 손영주를 보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일부러 쳐다보고 있는데 그는 그것이 어색한지 자신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정애라는 7살 나이 차이를 넘어서서 마치 자신보다 3살이나 적은 남동생 한욱이를 보는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수년을 보아서 그런지 어리숙한 손영주가 남 같지가 않다. 마치 오빠처럼 은연중에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딴 곳을 보고 있을 때에 손영주가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얼굴에 기쁜 안색을 띄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정애라는 처녀의 직감으로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17세가 된 자신에게 이제서야 손영주가 어른들을 통하여 혼담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도 당장은 약혼식만 하고 2년 후에 결혼식을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났지만 어른들에게는 고분고분하게 그렇게 따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녀는 그 2년 동안에 자신이 약혼녀의 자격으로 손영주와 경주 읍내에서 자주 만나면서 아주 적극적이고도 사내다운 모습으로 그를 바꾸어 놓을 생각이다.

약혼식이 있는 그날은 김경화와 정진평 부부가 식당을 하루 쉬기로 했다. 본래 그렇게 하고자 일부러 경주 오일장이 있는 날 22일과 27일을 피하여 5월 30일로 약혼식을 잡은 것이다. 약혼식 장소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종민 내외와 김경화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경주 성동의 그 큰 저택의 마당으로 정했다.

그날은 양가의 어른들만 초청을 하고 간소하게 행사를 한다. 그렇지만 약혼녀의 집안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정애라의 외조부모인 김종민과 정해옥, 부모인 정진평과 김경화, 그리고 외삼촌내외인 김춘엽과 이가연, 외사촌인 김영식 부부와 그 아들인 김호길, 그리고 정애라의 동생인 정한욱 등 전부 10명이다.

그에 비하여 손영주의 어른들은 그 수가 적다; 외조부모인 이덕화와 김옥심, 부모인 손상훈과 이채령 등 단 4명에 불과이다. 그렇지만 그날 약혼식 자리는 그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남자 쪽보다는 여자 쪽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장차 시댁이 될 어른들에게 잘 보이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그날 참으로 흐뭇하게 대접을 잘 받고 있는 쪽은 내남에서 참석한 손영주 쪽의 어른들인 것이다.

그렇게 약혼식은 약혼녀의 저택 마당에서 간소하게 식사를 하면서 따뜻한 봄날에 치루었지만 그 분위기는 참으로 좋다. 젊은 손영주가 한참 어린 정애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하고 애정이 넘친다. 그리고 17세에 불과한 정애라가 상당히 당당하다. 빤히 손영주를 쳐다보고서 무엇이 즐거운지 말을 적극적으로 걸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분위기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보면서 서배 아재 손상훈이 부인 이채령에게 귓속말을 한다; “이거 우리 영주가 2년 후에 정식 결혼을 하면 어린 신부에게 꽉 잡혀서 살 것 같지 않아요?...”. 이채령이가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렇기나 말기나 당사자인 손영주는 자신이 정애라의 약혼자가 된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부친을 닮아서 평생 그녀만을 일편단심으로 좋아하며 살 것 같다. 하기야 그렇게 만나서 백년해로를 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참으로 감사한 축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