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69(작성자; 손진길)
서배 아재 손상훈은 1907년 5월 30일에 아들 손영주의 약혼식을 경주 읍내에서 가졌는데 두 달이 지나지 못하여 7월 20일에 고종이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인 순종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양위식을 거행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부왕이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세자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이므로 조선의 백성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참고로 사진은 순종황제와 그의 황후이다;
그러자 한성에서 발행이 되고 있는 신문에서는 일제에 의하여 고종황제가 폐위를 당하고 황태자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라고 보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는 것은 지난 6월에 네델란드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개최가 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몰래 3인의 특사를 보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보도를 접한 한성의 조선사람들이 격분하여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를 공격하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소동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자 일제는 7월 24일에 ‘정미7조약’을 순종황제와 맺고 소위 ‘차관정치’를 실시한다. 그리고 긴급하게 7월 27일에 언론을 탄압하는 ‘신문지법’을 발표하고 7월 29일에는 집회 및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발표하여 당장 시행을 한다.
마침내 일제는 7월 31일 밤에 전격적으로 순종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에 대하여 해산의 명령을 내리고 만다. 그에 불복하여 시위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을 하자 그 부대원들이 일본군대와 시가전을 벌인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므로 살아남은 군인들이 지방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지속적인 의병활동에 나서는데 그것을 ‘정미의병’이라고들 부르고 있다.
어떻게 1907년 6월과 7월 두 달 사이에 그러한 극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발생을 하고 있는지 서배 아재를 위시한 시골의 선비들인 사랑방모임의 인사들은 심히 궁금하다. 그들은 헤이그 특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그러한 사건을 초래하게 되는지 자세하게 모르고 있다.
더더구나 그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한 궁금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사가 사실은 안성기 교장이다. 그는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을 때에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현장까지 직접 방문을 한 전력이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
그 대신에 안성기는 일본 동경에 살고 있는 아들 안용운에게 서신으로 부탁을 한다. 그와 관련이 된 일본의 신문을 좀 오려서 보내라는 주문이다. 그러자 안용운이 부친의 요청대로 급히 소식을 보내준다. 그것을 읽고서 안성기 교장이 덕천 사랑방모임에서 발표를 하는데 그때가 1907년 8월말에 개최가 된 정기모임이다.
그날 안성기 교장의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저는 아들이 보내어준 자료들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한 결과 제 나름대로 다음 세가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 네델란드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지난 6월 15일부터 개최가 된 만국평화회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이위종이라고 하는 고종의 밀사들이 어떻게 무사히 헤이그까지 갈 수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한성의 일제의 통감부가 어째서 그렇게 초 강수를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두의 언급이 좌중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그 점을 알고서 안성기 교장이 자세하게 설명한다; “첫째로, 1899년에 이어서 1907년에 두번째로 개최가 되고 있는 만국평화회의는 그 목적이 산업선진국인 제국들이 식민지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피해가 너무 크므로 그것을 좀 줄여보겠다고 하는 성격의 회의입니다. 그러므로 그 회의를 주도하는 세력들이 바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그리고 일본 등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서배 아재 손상훈이 질문한다;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전쟁피해를 줄인다는 것이지요?”. 안성기 교장이 즉답을 한다; “그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에게 선전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피해를 초래하는 무기의 사용을 규제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이다.
이번에는 선비 김춘엽이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나라들은 해당사항이 없겠네요?”. 역시 안성기 교장이 즉시 답을 한다; “그렇습니다. 그들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입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진출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측에서는 조선에서 온 특사들에 대하여 호의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국가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론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여성을 대표하여 이채령이 묻는다; “그렇다면, 근대화가 된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나 영국이 일제의 편을 들고 조선에서 간 특사들의 편을 들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성기 교장이 간결하게 답변을 한다; “그것은 일본이 영국 및 미국과 벌써 그에 대한 협정을 맺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상호조약의 핵심은 조선반도를 일본이 차지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고 영국이 인도를 차지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상호이익의 교환입니다”.
모두가 ‘아 그렇구나’ 하고 금방 이해를 한다. 그러자 안성기 교장이 말을 잇는다; “둘째로, 1906년 2월부터 일제는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혹시 고종이 외국에 밀사를 보내어 을사조약이 강제라는 사실을 선포하지 아니할까? 우려하여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특사로 3인을 보낼 수 있었는 것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성기 교장이 드디어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다; “조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미국선교사인 호머 헐버트가 발벗고 나섰고 조선인으로서는 한성 남대문 근처에 있는 상동감리교회의 담임 전덕기 목사와 그 교회를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안창호, 이동휘, 김구 등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선비 최사권이 예리하게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헤이그 밀사사건에는 동학이 관계가 없군요. 전부 선교사를 포함하여 기독교계 인물로 보입니다”. 안성기가 답변을 한다; “그렇습니다. 동학의 손병희 교주는 친일파 일당을 동학에서 쳐내면서 아예 이제는 천도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집안문제를 해결하느라고 금년에는 다른 문제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성기 교장이 한 마디를 더 보태고 있다; “참고로, 미국의 조선인 애국지사들의 대표격으로 지난 2월에 고국에 돌아온 도산 안창호는 이동휘 등과 함께 언론인 양기탁은 물론 상동교회의 도움을 받아 4월초부터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덕기 목사는 김구와 함께 주변의 상인들과 기독교계의 도움을 받아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이위종 등이 네델라드 헤이그까지 여행하는 경비를 마련해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그들 세명의 특사가 비록 만국평화회의장에는 일제의 방해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여러 대표단들과 기자들에게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는 일에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내용을 7월 3일에 오사카에 있는 일본의 신문이 크게 보도를 하면서 일본정부가 그에 대하여 미리 대처하지 못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내각은 통감부에 강력하게 지시하여 지금과 같은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서 장인식 교장이 한마디를 보태고 있다; “제 생각으로는 일본이 어차피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집어삼키고자 계획을 하고 있는데 이번 헤이그 밀사사건이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수순은 정해져 있는데 그 수순 사이에 간격이 좀더 좁혀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자 안성기 교장이 결론을 맺는다; “제 생각도 장인식 교장의 생각과 같습니다. 이상으로 제가 일본에서 제 자식놈이 보내어 온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얻은 사실들을 전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쪼록 지금 한양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사태들에 대하여 이해를 하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일동은 “수고하셨습니다.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진실로 안성기 교장의 발표가 국제정세와 국내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 점을 감사하면서 1907년 8월의 사랑방모임이 그날의 의제를 마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그날 언급이 된 인물들의 사진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함께 짝은 사진인데 왼쪽부터 그러한 순서임;
둘째, 도산 안창호의 사진임;
셋째, 호머 헐버트 선교사임;
넷째, 김구의 사진임;
다섯째, 이동휘의 사진임;
여섯째, 전덕기 목사임;
일곱째,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인 발행인 양기탁의 모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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