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7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5. 00:24

서배 할배71(작성자; 손진길)

 

1909년 12월에 들어서자 훈장 이덕화가 병이 났다.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었는데 사랑방에 아무리 군불을 많이 지펴도 자꾸만 몸이 춥고 오한이 난다고 한다. 부인 김옥심이 독감과 몸살이 심하여 그런 줄 알고 남편이 빨리 쾌차하도록 땀을 푹 흘리게 하고 몸을 보신하도록 맛난 것을 만들어 대접하지만 그래도 별로 차도가 없다.

김옥심은 시골 한의를 찾아서 진맥을 부탁한다. 그러자 노환에 고열을 견디지 못하여 병자가 기진맥진을 하고 있으니 약재를 좀 써보자고 한다. 그래서 며칠간 정성스럽게 탕약을 달려서 계속 먹게 한다. 그러나 별로 차도가 없다. 열이 좀 떨어졌다가는 다시 고열이 찾아오고 식은 땀을 계속 흘리고 있다;

김옥심이 너무 걱정이 되어 너븐들로 찾아와서 사위 손상훈에게 소식을 전한다. 그러자 서배 아재 손상훈이 급히 경주 읍내로 가서 의원을 모시고 온다. 하루 왕진비 전부를 부담하고서 장인어른의 병을 진단하게 요청한 것이다. 그 결과 그것이 보통 병이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급한 대로 의사의 권고에 따라 환자를 시내 의원으로 옮기기로 한다. 겨울철이지만 낮에는 그래도 햇빛이 따뜻한다. 그래서 따뜻한 방낮에 소달구지에 많은 이불을 싸서 환자를 눕히고 손상훈이 장모 김옥심과 함께 경주 읍내로 간 것이다.  

경주 읍내 의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하고 그때부터 입원치료를 시작한다. 하지만 크게 차도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의사가 급하게 증세에 따라 처방을 하고 있지만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를 않는다. 할 수가 없어서 장모 김옥심과 그녀의 딸 이채령이 경주 시내 성동에 있는 김옥심의 오라버니 김종민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매일 병실로 찾아가서 간호를 한다;

그 보람도 없이 여러 날 고열에 시달리던 훈장 이덕화가 그만 회복하지를 못하고 혼절을 하고 만다.  의사가 위독한 상황이라고 한다. 마침 이틀이 멀다 하고 내남 너븐들과 경주 읍내 의원 사이를 부지런히 왕래하던 서배 아재 손상훈이 그 마지막 임종의 자리를 장모 김옥심은 물론 자신의 아내 이채령과 함께 지키게 된다.

정신을 한참 잃고 있던 훈장 이덕화가 무겁게 눈을 뜬다. 머리가 혼미한 가운데 그 눈에 사랑하는 아내 김옥심과 딸 이채령 그리고 사위 손상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것을 보고서 이덕화가 안간힘을 다하여 마지막 유언을 한다; “부인, 내가 죽거든 내 고향 서배 마을 선산에 나를 묻어 주시오. 그곳이 고향이니 부인도 아주 나중에 천천히 그곳으로 오세요. 채령이 생모의 무덤도 그곳에 있오. 나와 채령이를 진심으로 돌보아 주었으니 그녀도 당신을 반길 것이요. 당신을 만나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가 있었소. 참으로 고맙소…”.

훈장 이덕화는 이제 눈이 보이지 않지만 한마디의 말을 더 남긴다; “손 서방, 나는 자네가 나의 사위가 된 것이 참으로 좋았어… 내 딸 채령이와 함께 오래 오래 백년해로를 하시게. 선친께서도 그것을 바라실 것이네. 손영주가 결혼을 하였으니 이제 많은 자손을 볼 수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내 딸 채령아, 애비 생각 너무하지 말고 아무쪼록 행복한 여생을 보내도록 해라...”.

의사는 정확한 병명은 몰라도 노환과 고열로 인한 사망이라고 최종진단을 하고 있다. 장인 어른이 1832년생이니 금년에 조선의 나이로 78세이다. 당시로서는 장수를 누리신 것이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남과 경주까지 30리 길을 걸어서 가신 강건한 분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매제이며 친구인 훈장 이덕화가 운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종민 내외가 의원을 찾아온다. 김종민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평생 죽마고우인 절친 이덕화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아이고 덕화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다니… 함께 80수를 누릴 줄 알았는데 어찌 두 해를 더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고향산천으로 가시고 마는가? 네가 먼저 가니 나도 이제는 따라가야겠구나…아이고…”.  

김종민의 아내 정해옥이 너무 슬피 우는 남편을 야단치려다가 그만 둔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이 각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옥심이 말한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남편의 시신을 곧 운구하여 먼저 내남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눈에 안보면 오빠도 좀 마음이 진정이 되실 거예요…”.

그 말 그대로 훈장 이덕화는 살아서 경주 의원으로 갔다가 병이 낫지를 못하고 기어이 죽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양삼마을에 그 빈소가 차려지자 모든 마을사람들이 조문을 한다. 평생 양삼서당에서 훈장으로 일했으니 모두가 그 제자들이다.

시신을 염하고 널을 만들어 입관을 하는 것도 모두 나이가 든 장년의 제자들이 실시한다. 내남의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의 주민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훈장 이덕화는 칠성판에 누워 경주 외곽 남산 앞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따라 외동 서배 마을까지 30리길을 가게 된다;

1909년 그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삼일장으로 장례를 치룬 것이다. 그가 묻힌 야산이 바로 몇 년 전에 다 함께 성묘를 갔던 그 선산이다. 그러므로 서배 마을에 살고 있는 지주 김춘엽의 가족들과 고향에 남아 있는 고인의 친척들이 애도를 하면서 매장을 할  때까지 일손을 보태어 주고 있다.

서배 아재 손상훈과 부인 이채령은 홀로 남은 장모 김옥심을 자신의 너븐들 집에 모시고자 한다. 그러나 김옥심이 반대를 한다. 자신은 한동안 남편 이덕화와 함께 살던 그 초가집에서 그냥 살겠다고 한다. 그리고 49제가 지나면 그때가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49일 동안 남편 이덕화의 신위를 모시고 매일같이 그녀가 따뜻한 밥으로 상식을 올리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훈장 이덕화의 장례를 치르면서 1909년 한해가 시골인 내남 너븐들에서는 저물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 땅의 중심인 한양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일본은 한양을 청국처럼 ‘한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조선 땅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하여 먼저 대대적으로 지방의 의병들을 모조리 토벌하고자 한다. 그 작업이 1909년말에 거의 마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1907년 7월 20일에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순종은 일제가 시키는 대로 서명만 하는 꼭두각시와 같다. 고종은 스스로 1897년에 대한제국의 태황제라고 칭하면서 1905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을사보호조약에 끝까지 서명하지 아니하는 최소한의 강단이라도 보였지만 순종에게서는 그러한 면모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효황제라고 칭하고 있는 순종이 융희 3년 곧 1909년 7월에 일본과 ‘기유각서’를 맺고 마는데 그것은 대한제국의 사법질서를 유지하고 반란세력을 모두 잡아 다스릴 수 있는 일체의 권한을 일제의 통감부에 넘긴 것이다. 따라서 그 기상천외한 협정에 의거하여 일본의 군대는 제마음대로 조선 땅에서 의병 토벌작전에 돌입하고 만다.

일본이 조선 땅의 의병을 완전히 없애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그 다음 수순은 강제협약에 의하여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일본이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일본에게 무조건 순종을 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융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의 총독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조선의 땅은 일본의 영토로 지도상에 표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황실은 그 대신에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이야기가 1909년 말에 조선 땅에서 식자들 사이에 다음과 같이 번지고 있다; “나라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왕실은 일제로부터 두가지의 특권과 특혜를 얻어서 누리게 된다고 한다; 첫째, 더 이상 황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씨 성을 가진 왕’이라고 하는 왕의 대접은 여전히 받게 된다. 그것이 특권이다. 둘째,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에서의 소득과 상당한 전매수익은 그대로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엄청난 특혜이다”.  

그러한 특권과 특혜를 계속 누리게 된다면 골치가 아픈 대한제국의 황제의 노릇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좋다고 융황제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차피 힘이 없는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것이 신분과 혈통에 의하여 높은 자리를 상속하고 있는 나약한 인물의 특징일 것이다. 중국의 고전인 ‘삼국지’를 보더라도 촉나라의 황제인 유선이 나라가 망한 다음에 여전히 그러한 특혜를 누리고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이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는 일찍이 1907년 2월에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신민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신민’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주권의식을 가진 새로운 백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백성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도산 안창호의 ‘신민운동’이다.

그리고 안창호가 건설하고자 하는 나라는 서재필이 독립협회에서 말하고 있는 영국식의 ‘입헌군주국’이 아니고 미국식의 ‘민주공화국’이다. 그러한 새로운 이상을 구체화하고 있는 안창호의 ‘신민회’는 비밀리에 점조직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 가입회원의 수가 800명이 훨씬 넘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하여 다양한 국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시점에 멀리 만주의 하얼빈에서 급보가 하나 조선 땅에 날아 든다. 그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마지막 명치원로이며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거의 집어삼킨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에 사살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처음에는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가 강압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재빠르게 강탈하는 모습을 보고서 정미의병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그것도 기유각서에 의거 일본군대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토벌을 당하게 되자 그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안중근은 자신이 비록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지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침략의 원흉인 명치원로 이토 히로부미 곧 이등박문을 사살하여 일본의 잘못된 시도를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으로 안중근 자신은 일제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 싸워 자기희생으로 개인적으로 역사를 이긴 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집단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일제는 이등박문 한사람의 죽음으로 결코 조선 땅을 완전히 집어삼키고자 하는 그 정책을 그만 두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땅을 온전히 일본의 영토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운명의 해인 1910년에 찾아 오고야 마는 것이다. 힘이 없는 약소국은 그렇게 힘이 있는 강대국에게 먹이감이 되고 마는 것이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 식민시대의 특징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