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72(작성자; 손진길)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나라인 대한제국 곧 조선이 망하게 되는 운명의 해가 1910년 8월 29일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를 그들의 힘으로 지키지를 못하고 외세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린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날을 소위 ‘국치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제국으로서는 그날을 축하하며 기념우표까지 발행하고 있다;
그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일본제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루아침에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는 백성으로 바뀌고 만다. 예를 들면, 일본말을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는 조선사람들이 일본관리가 일본어로 말하는 명령을 들어야 하고 그들이 행하는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이 전혀 동의를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조선의 주권과 영토를 대한제국의 황제와 대신들이 제멋대로 합병조약의 형식으로 일본제국에게 팔아 치울 수가 있을까?
그것은 왕이나 황제가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는 전제시대의 논리에 있어서는 가능한 법적인 해석이 될지 몰라도 백성들이 바로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사상에 따르게 되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한일합방 이후에 서양의 민주주의사상을 받아들인 조선의 백성들이 ‘민주공화정’을 꿈꾸면서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17년에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생하고 낡은 체제인 러시아제국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그 영향이 조선반도에도 밀어 닥치게 된다.
러시아 혁명을 러시아공산당이 전세계에 수출하고자 한다. 사실은 돈을 주고서라도 식민지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싫어하는 나라들이 러시아 주변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 옛날 불란서 시민혁명이 발생했을 때에 주변국들이 연합하여 왕정복고를 외치며 불란서와 전쟁을 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들의 시민혁명의 정신을 지키고자 불란서의 시민들이 스스로 군인이 되어 나폴레옹의 지휘를 받아 수많은 전쟁을 치룬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러시아공산당은 영리하게도 자신들의 피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러 식민지에서 제국주의 외세를 물리치고자 민족주의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 민족지도자들에게 자금지원을 하여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이 한일합방조약을 맺는데 성공한다고 하여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가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업합병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골치 아픈 노동자 문제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장차 노동자의 지위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경영자가 기업을 팔아 치울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계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노동자의 인권과 생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착취를 하며 고대사회처럼 노예로 계속 부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민족국가의 시대로 그리고 민족 독립의 시대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반도와 그 땅에 살고 있는 조선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의 왕이나 대한제국의 황제 그리고 그들의 수족이 되고 있는 신하들은 하나의 정치조직이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유구한 역사를 생각하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 등이 그 땅에 벌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국체가 바뀌고 정치집단이 바뀌고 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그 땅의 주인으로 조선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9일에 종말을 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조선반도와 조선의 백성들의 삶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서배 아재 손상훈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 자손들의 이야기는 조선의 땅에서 계속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경주 월성 내남에 살고 있는 서배 아재 손상훈이나 외동 서배 마을에 살고 있는 지주 김춘엽에게 있어서는 대한제국의 멸망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그들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다. 1910년 4월에 손상훈의 장모 김옥심이 별세를 하고 그해 12월에는 김춘엽의 부친 김종민이 세상을 떠나고 말기 때문이다.
김옥심 여사는 남편 이덕화가 1909년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함께 살던 양삼마을의 집에서 지극정성으로 매일 상식을 올리고 남편을 그리워한다. 노부부의 사랑이 깊고 너무나 서로 의지를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1910년 2월에 서배 아재 손상훈과 부인 이채령이 장모 김옥심을 모시고 외동 서배 마을에 있는 훈장 이덕화의 산소를 찾아가서 49제를 드렸다. 그리고 양삼마을의 재산을 정리하고 장모 김옥심을 자신들의 너븐들 집에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원인도 모르게 김옥심 여사가 병이 든 것이다.
손상훈이 동네 한의를 불러서 진맥을 하게 했더니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세상에 74세나 되는 노인 김옥심이 어째서 심화를 앓고 있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이채령이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모친의 일을 깊이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이채령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남편 손상훈에게 말한다; “여보, 저는 알 것만 같아요. 새 엄마는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오래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사시다가 저희 아버지와 재혼을 하셨잖아요? 그것이 가장 큰 행운이며 행복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행복이 작년말에 다시 남편의 사별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제 무슨 낙으로 더 사시겠어요?...어머니는 더 이상 세상을 살고 싶지 아니하신 거에요…”.
그 말끝에 이채령이 눈물을 떨구고 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손상훈도 가슴이 아프다. 세상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면 사람의 생기는 그 몸을 빠져나가고 만다.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므로 노인의 경우에는 마음의 병이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매일같이 서배 아재와 이채령이 맛있는 음식도 해 드리고 그 마음을 돌리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김옥심 여사는 그 모든 것이 허무해 보인다. 그저 하루속히 남편 이덕화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만 한다.
그래서 4월 20일께부터는 아예 식사도 마다 한다. 오로지 “나도 가야지…나도 가야지…”라고만 자꾸 읊조리고 있다. 그 말을 계속하면서 눈의 초점이 먼 곳을 쳐다보면서 흐려진다. 그렇게 지내다가 24일밤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배 아재 손상훈과 이채령은 그렇게 가슴이 먹먹하고 아프다. 부부의 지극한 사랑이 무엇인가? 백년해로가 좋다고는 하지만 한쪽이 먼저 떠나고 나니 그 남아 있는 사람이 그 사랑을 못 잊고 자꾸만 뒤따라가고자 애를 쓴다. 그 생각을 하면서 조용하게 장모 김옥심의 초상을 치르고자 한다. 그러나 많은 여자분들이 찾아와서 조문을 한다;
그래도 김옥심이 74세의 나이로 별세를 했다는 소식을 그 친정인 김종민의 집에 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 그녀의 친정 오빠인 김종민이 금년에 79세이다. 그리고 그 부인 정해옥이 77세이다. 그분들도 고령이다. 더구나 여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그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니 김종민의 마음이 어떠할까?
4월 26일에는 삼일장으로 김옥심의 시신을 운구하여 멀리 외동 서배 마을의 산으로 장례행렬이 향한다. 작년에 훈장 이덕화의 무덤을 섰는데 이제는 그 부근에 김옥심의 산소를 쓴다. 이덕화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위에는 전부인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김옥심의 산소가 있다.
서배 아재가 이채령의 마음을 살펴서 그렇게 가깝게 위아래로 산소를 배치하고 있다. 돌아가신 순서대로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상을 치르고 넉달이 지나자 한성에서 비보가 날아든다.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한일합방조약을 일본제국과 맺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는 소식이다.
서배 아재는 장모 김옥심마저 자신들에게서 떠나더니 이제는 나라마저 일제에게 넘어가고 마는가? 라고 생각이 되어 자꾸만 옆이 허전하다. 그래서 1910년 10월달에 덕천 사랑방모임에 모인 5부부는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면서 장래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제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없으니 조선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일어서야만 한다.
그렇게 하자고 서로가 결속을 다지고 헤어졌는데 두달이 채 지나지 못하여 김춘엽의 부친상 소식이 사랑방모임의 식구들에게 전해진다. 초상집이 경주 읍내 성동이므로 내남에서 경주까지 걸어서 간다. 선비 최사권도 노인이다. 75세나 되었기에 경주까지 30리길을 가는데 그 걸음이 이제는 힘이 들고 가볍지가 아니하다.
김춘엽의 춘부장인 김종민은 작년 이맘때에 절친인 훈장 이덕화를 떠나 보내고 한해가 지나 같은 12월에 이제는 자신이 별세를 하고 만 것이다. 향년이 79세이다. 그 상여가 경주 읍내에서 역시 고향인 서배 마을의 선산으로 향한다. 선산에 도착을 하니 고향사람들이 몰려온다. 따라서 상주가 된 지주 김춘엽이 그들의 조문을 받으면서 일일이 절을 하느라고 바쁘다;
서배 아재 손상훈은 친구 김춘엽이 상주이므로 그와 동행하여 그날 서배 마을까지 가서 산소를 쓰는 것까지 본다. 그리고 그날 밤은 서배 마을에 있는 김춘엽의 집에서 머무른다.
상주인 김춘엽이 사랑방에서 손상훈과 탁배기를 한잔 나누면서 말을 한다; “상훈이, 이제 내 부친까지 별세를 하고 나니 우리 주변에 어른들이 별로 남아 계시지 않네 그려. 그래도 덕천 사랑방에 최사권 선비께서 아직 살아 계시는 것이 다행이야. 그 어른이라도 오래 우리 곁에 계셔야 할텐데…”.
손상훈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그분도 내년이면 76세가 되시지. 여든을 넘기시면 좋을 텐데…”. 그것은 그들의 바램이다. 개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1910년 말에 여든을 넘기시는 분이 별로 없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그들로서는 장차 덕천의 사랑방모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사실은 서서히 논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12월이 지나가면 1911년이 된다. 1851년생 동갑인 손상훈과 김춘엽이 모두 61세가 되는 것이다. 금년에 그들은 환갑연을 지냈어야 하는데 어른들이 별세를 했기에 초상을 치루느라고 바빠서 그 생각도 제대로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므로 내년에는 진갑연을 치루어야 할 형편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춘엽이 손상훈에게 말한다; “상훈이, 나는 이집을 아들 김영식 내외에게 맡기고 경주 성동으로 이사를 할 생각이네. 병석에서 선친께서 내게 성동 본가에 들어와서 모친을 잘 모셔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네. 그러면 내년부터는 그 집이 넓으니 사랑방모임을 거기서 해도 무방하이”.
그 성동집은 규모가 커서 서배 아재의 사돈이 되는 정진평의 가족도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김춘엽 내외가 그곳으로 이사하게 되면 그집 사랑방에서 모임을 계속하면 될 것이다. 부친의 초상을 치루고 황망한 중에도 그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춘엽도 사랑방모임을 통하여 많은 위로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60이 넘은 서배 아재 손상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는 재종 매형인 선비 최사권과 상의를 한다. 그러자 최사권이 자신이 연로하니 내년 봄부터는 그렇게 하라고 동의를 한다. 그렇게 내남 덕천 사랑방모임은 자연스럽게 경주 성동 사랑방모임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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