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7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5. 07:54

서배 할배76(작성자; 손진길)

 

1917년 6월 5일 아침에 가주 손상훈은 구왕골에서 달려온 일가로부터 재종 동생 손형이 지난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별세를 하였다는 급보를 듣는다. 이름이 외자인 손형은 손상훈과 동갑이지만 몇 달 차이로 동생이다.

손형은 조선의 나이로 손상훈과 마찬가지로 금년에 67세이다. 장남인 손영로 내외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차남인 손영보 가족은 안심에서 살고 있다. 손상훈은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히 손형의 집으로 간다.

사랑방에 빈소를 차리고 고인의 시신이 보이지 아니하게 그 앞에는 병풍을 쳐서 가려 놓았다. 그 앞에서 제수씨 최인옥이 흐느껴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상주인 손영로와 손영보가 시립해 있다;

사랑방에 들어온 손상훈이 먼저 최인옥에게 말을 한다; “영로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으니 얼마나 슬픔이 크시겠습니까? 제가 병풍 뒤 고인을 좀 봤으면 합니다마는…”. 최인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비켜서서 그냥 고개를 끄떡인다.

손상훈은 병풍 뒤에 이불에 싸여 있는 고인을 보고 한참동안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상심에 찬 독백을 한다; “여보게 손형, 우리는 서로 자기가 형을 하겠다고 아웅다웅하면서 그동안 정답게 살아온 동갑내기가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영원히 형 노릇을 하겠다고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좀더 살다가 나중에 나하고 같이 손을 잡고 그곳으로 가도 충분한 것을… 야속하이, 손형…”.  

그 소리를 듣고서 한쪽에 서있던 상주 손영로와 손영보 형제가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는지 ‘흑흑’ 울음을 터뜨린다. 가주 손상훈이 상주들의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한다; “너무 슬퍼서 울지 말게. 이제는 자네 영로 조카가 이 집의 가장이야. 그리고 영보는 형을 많이 도와주어야 해. 내가 우선 일가들과 상의하여 고인의 염을 하고 입관을 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상주들과 가족들이 입을 상복을 빨리 준비하여 보내 오도록 조치하겠네”.

간밤에 가주 손상훈의 재종인 손형이 구왕골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너븐들과 안심 그리고 박달까지 전해지자 농사일이 바쁜 6월이지만 많은 일가들이 낮에 문상을 온다. 그보다 먼저 월성 손씨의 장례일을 도맡아 보고 있는 손석환이 상복을 가지고 온다. 그는 가주 손상훈의 재종형이다. 그리고 1914년에 별세를 한 재종 동생인 손섭의 아들 손영호가 염을 할 때 필요한 삼베와 수의 등을 널과 함께 달구지에 싣고 온다.

오후에는 일가들이 막걸리와 음식 등을 부조로 가지고 온다. 그것으로 오늘 조문객들이 밤을 지샐 수 있도록 식사준비까지 해야 한다. 그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여자가 고인의 누나로서 덕천에 살고 있는 손예진이다.

손예진의 남편 최사권 선비가 고인의 매형이므로 손형의 초상에는 내남에 살고 있는 월성 최씨들이 많이 조문을 오고 있다. 가주 손상훈은 상주인 조카 손영로를 사랑방 옆방으로 불러서 장례에 대하여 의논을 한다. 그 결과 장지는 상신의 선산으로 정하고 장례는 삼일장으로 하기로 결정한다. 6월 농번기이므로 장례절차를 빨리 마치기로 한 것이다.

손상훈은 덕천으로 가서 재종 매형 최사권과 산소의 자리에 대하여 상의를 한다. 그러자 최사권은 금방 말한다; “서배 아재, 내가 진작에 상신의 뒷산에서 좋은 자리 하나를 찾아 놓은 게 있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 처남 손형을 모시도록 하면 좋겠는데…”. 그 말을 하면서 가주 손상훈의 눈치를 본다;

그러자 손상훈이 통이 크게 말한다; “자형이 보시기에 좋다면 명당인 모양입니다. 자형만큼 좋은 지관이 어디 흔한가요? 그런데 저희들 윗대 조상들의 묘소를 건드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최사권이 ‘껄걸’ 웃으면서 말한다; “염려 마시게나, 처남. 내가 본 자리는 뚝 떨어져 있는 곳이라네. 그럼 승낙으로 알고서 내가 상주들하고 그렇게 처리를 하겠네”;

그것으로 급한 일은 모두 끝났다. 손형의 초상은 그렇게 삼일장으로 잘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넉달 남짓 지나 1917년 11월이 되자 가주 손상훈의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장손을 품에 안게 된 가주 손상훈은 그때부터 ‘서배 아재’가 아니라 ‘서배 할배’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길사와 흉사가 번갈아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 다음해 1918년 2월말이 되자 갑자기 가주 손상훈에게 덕천에서 부고가 날아든다. 재종 매형이며 오랜 세월 사랑방모임의 어른이었던 선비 최사권이 별세를 했다는 내용이다. 1836년생이니까 향년 83세이다. 주변에서는 80세 이상 사셨으니 참으로 ‘호상’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유가족의 입장으로는 그것이 아니다.

미망인 손예진의 슬픔이 너무나 크다. 아들 최경도는 한성에 살고 있고 딸 최영란은 출가하여 경기도에 살고 있으니 초상이 나도 바로 달려올 수가 없다. 그녀의 친정 조카인 손영로와 손영보가 고모부의 장례를 상주 대신에 치르고 있다. 작년에 작고한 손형의 부인 최인옥이 이번에는 손위 시누를 도와 초상집 손님들을 대접하기에 분주하다. 그녀로 보면 고인이 된 선비 최사권이 가까운 일가 숙부이므로 더욱 열심이다.

상주들이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여 내남으로 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하여 미망인 손예진은 남편의 초상을 오일장으로 하자고 한다. 농번기의 시작이라 바쁘기는 하지만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그렇게 결정을 한다. 그러자 정말 4일만에 상주 최경도와 최영란이 도착을 한다. 정말 열차가 빠르기는 빠른 모양이다;

5일째가 되는 날 일찍 발인하여 구왕골 남쪽에 있는 두서면 깊은 산골로 향한다. 그곳 산록에 진작에 고인이 찾아 놓은 명당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산록으로 운구를 하느라고 그날의 발인행렬은 참으로 힘이 든다;

그렇게 초상을 치르고 나서 3일쯤 지났을 때에 상주인 아들 최경도는 한성으로 돌아가고 딸 최영란도 경기도 시집으로 열차편으로 상경을 하고 만다.

아들과 딸이 집을 떠나고 나자 덕천의 그 큰 집에는 70세가 된 손예진만이 덩그러니 남아서 매일 고인에게 상식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초상 때 내려온 아들 최경도의 제안을 깊이 생각한다. 49세가 된 최경도는 모친에게 자기와 함께 한성으로 가서 여생을 편하게 지내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최경도는 모친에게 내남의 논밭과 저택을 정리하여 한성 자기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말한다. 딸 최영란이도 오빠의 생각과 같다. 그녀가 경기도 원당에 살고 있는데 모친 혼자 내남에 사시도록 버려 두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성에 와서 사시면서 때로는 경기도 원당에 들러 외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손예진으로서도 남동생 손형마저 작년에 별세하고 말았으니 내남에 정을 붙이고 살기가 힘이 든다. 가까운 구왕골에는 친정 조카인 손영로가 살고 있고 그 동생인 손영보는 내남 안심으로 이사를 가서 살고 있다. 가까운 덕천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손예진은 아들과 딸에게 49제가 끝나면 금년안에 재산을 정리하여 기별을 할 터이니 그렇게 하자고 답을 하고 만 것이다.

고인이 된 최사권의 49제에 서배 할배 손상훈이 참석을 했다. 그러자 산에서 내려온 재종 누나 손예진이 따로 손상훈을 사랑방으로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생, 나는 아들의 권유를 받아 들여 이제부터 재산을 정리하여 한성으로 올라가려고 하네. 그런데 천석지기 논밭을 파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 같네. 동생이 혹시 얼마 사볼 생각이 없는가?”.

서배 할배 손상훈이 고개를 가로 젖는다. 그리고 말을 한다; “누나, 저는 거랑에 물이 넘칠 때마다 자갈이 논을 덮어서 그것을 다시 개간하느라고 별로 여력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교리 최부자 집의 가주에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덕천이 이조에 접하고 있으므로 인접한 농토는 그 집안에서 사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3분의 1정도나 될까요?...”.

그 말을 듣자 손예진이 답을 한다; “알겠네, 동생, 그렇게 3분의 2정도를 교리 최부자 집에 팔아만 준다면 나머지는 내가 친정 조카인 손영로에게 소작 일체를 관리하도록 맡기고자 하네. 왜냐하면, 남편이 생전에 매년 300석 정도의 수입을 마련하면 이조의 소학교를 충분히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했다네…”;

선비 최사권은 오랫동안 이조 소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렇다면 그 이사장 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손상훈이 궁금하여 묻는다. 그러자 손예진이 명확하게 답변을 한다; “소학교의 경영은 장인식 교장의 뒤를 잇고 있는 최인배 교장이 잘하고 있네. 그러므로 계속 그에게 맡기고 싶어. 그리고 재단의 이사장은 친정 조카인 손영로가 맡아서 학교의 재정적인 문제를 최 교장과 협의하여 결정하면 될거야…”;

좋은 생각이다. 서배 할배 손상훈이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경주 읍내로 가서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현식의 의향을 타진한다. 별로 어렵지 않게 그 일이 처리가 되자 손예진은 그해 가을에 다시 내남 덕천에 내려온 아들과 함께 상경을 하고 만다. 그렇게 오랜 세월 서배 할배 손상훈의 지적인 보금자리와 활동무대가 되었던 덕천의 사랑방 자리는 완전히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