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77(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5. 08:02

서배 할배77(작성자; 손진길)

 

1919년 정월이 되자 귀한 손님이 내남 너븐들 서배 할배의 집을 찾아온다. 그는 그 옛날 1877년부터 양삼마을의 서당에서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다 1893년에 충청도로 이주를 한 오경덕 선생이다. 1855년생인 그도 이제는 65세의 노인이다;

오경덕 선생이 대문간을 들어서는 것을 마침 사랑방문을 열어 두고서 마당을 바라보고 있던 서배 할배 손상훈이 인지한다. 머리털이 희어져 있지만 오경덕 선생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69세의 노인이 된 서배 할배가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반갑게 마당으로 나선다.

두 늙은이가 감격적인 포옹을 한 다음에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사랑방에 들어선다. 그러자 그들이 마당에서 만나는 소리를 안방에서 듣게 된 이채령이 멀리 충청도에서 오경덕 선생이 온 줄을 알고 자신도 반가운 마음에 뒤따라 사랑방으로 들어선다.

방안에서 오경덕 선생이 서배 할배 부부에게 먼저 절을 하자 그들 부부도 맞절을 한다. 손상훈이 정월 차가운 날씨이므로 따뜻한 아랫목으로 옮겨 앉으시라고 오경덕 선생에게 권한다. 그러자 오선생은 한참 길을 걸어서 왔더니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극구 사양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이채령이 얼른 부엌으로 가서 술상을 보아서 온다. 탁배기를 서로 나누어 마시면서 서배 할배가 먼저 오선생에게 묻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우리가 함께 1901년에 일본을 다녀온 이후 지금까지 근 20년 동안 오경덕 선생의 소식을 듣지를 못하여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오경덕 선생이 18년 전의 그때가 생각이 나는지 한참 눈을 감고서 그 옛날을 회상한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을 뗀다; “가주께서 물으신 그대로 저는 이곳 사랑방동지들에게 그 오랜 세월 소식을 전하지도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이곳 남쪽이 아니고 먼 북쪽지방이지요…”;

이채령이 궁금한지 남편 손상훈의 옆에 앉아 있다가 재빨리 묻는다; “멀리 북쪽이라고 말씀하시니 그곳이 어디인데요?”. 오경덕 선생이 웃으면서 말한다; “어디긴 어디겠어요? 두만강 너머 북간도이지요…부인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시고 호기심도 많으십니다. 그 성품은 하나도 늙지를 않으셨는가 봐요…”.

서배 할배가 “북간도라…”하면서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를 들은 듯이 읊조리고 있다. 그러자 오경덕 선생이 상세하게 말한다; “1901년에 경주 읍내에서 일본방문단이 해산을 한 후 저는 처가 어르신인 김종민 부부의 댁에 하루 더 머물다가 충청도 집으로 갔지요. 그런데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오래 사시지를 못하시고 몇 년 후에 고향에서 별세를 하셨습니다. 저희 내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아예 한성으로 이사를 했지요”.

오경덕 선생의 가족이 한성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일이 궁금하여 손상훈 내외가 오 선생의 입을 쳐다본다. 오경덕이 이어서 말한다; “운이 좋은지 나쁜지 저희 가족은 한성에서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게 병합이 되는 것까지 전부 보게 되었지요. 그리고 제 둘째 아들놈은 그만 1907년 8월에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일본의 병사들과 전투를 하는 광경을 멀리서 보게 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해하는 두 부부에게 오경덕 선생이 짧게 말한다; “그 얼마후에 차남인 오동수가 일본과 싸우는 의병이 되겠다고 집을 나가고 말았지요. 1882년생인 둘째는 그때 26살이나 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피가 뜨거운 청년이었지요”;

오 선생이 이어서 말한다; “그후 여러 해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소식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1911년에 북간도 길림 용정에서 인편으로 연락이 왔지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으니 가능하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이주를 해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경덕 선생 부부는 그 소식을 듣고서 인편으로 와서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오동수 선생은 그곳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으면서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만 아시고 한번 방문을 하시라고 한다. 그리고 주소를 챙겨주고서 금방 떠나고 만다. 4년이 지나서야 자식의 소식을 알게 된 오선생이 먼저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오경덕 선생은 만주 벌판에 그런 한인촌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용정 명동마을인 그곳은 1900년이 되기 직전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한인촌으로서 상당히 개방적이고 개화가 잘된 곳이다. 그래서 오경덕 선생 부부와 장남인 오동휘의 가족들 전부가 그곳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나름대로 항일운동을 돕고 있다고 한다.

말은 간단하지만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다. 그렇지만 그 추운 만주 벌판에 그래도 조선사람들이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기지가 있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이야기이다. 그러한 설명을 듣고서 서배 할배가 오경덕 선생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니 백발이 성성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고 손병희 선생과 비슷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서배 할배가 고개를 연신 끄떡이고 있는데 이제는 오경덕 선생이 묻는다; “이덕화 훈장님이나 최사권 선비님은 지금 아주 고령이실 텐데 어떻게 잘 지내시는지요. 그리고 경주 읍내에 사시는 연로하신 김종민 부부께서도 잘 계시는지요?”. 서배 할배 손상훈은 오선생이 경주 읍내를 들르지 아니하고 곧바로 내남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직감한다. 아마도 일제의 감시가 심한 읍내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가급적 보이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쯤 짐작을 하고서 서배 할배가 그에게 그 동안의 소식을 간략하게 전해준다; “훈장 이덕화 부부는 벌써 돌아가셨고 김종민 어르신도 별세를 하셨지요. 경주 성동의 그 집에는 선비 김춘엽 부부가 이사하여 여동생 가족과 함께 살고 있지요”. 그 말을 듣자 오경덕 선생이 묻는다; “그러면 장인식 선생과 안성기 선생은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서배 할배가 ‘허어..”하고 한숨을 쉰 다음에 말한다; “두 분 다 이곳을 떠나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으로 이사를 한 지가 여러 해 전입니다. 그 두 분은 내남 이조와 외동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오래 일을 하셨는데 현재는 그 후임 교장들이 소학교를 운영하고 있지요…”.

오경덕 선생이 옛날일이 생각이 나는듯 문득 묻는다; “그러면 양삼마을의 서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배 할배 손상훈이 웃으면서 답한다; “오선생님이 옛날 생각이 나시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이덕화 훈장의 뒤를 이어서 그 제자분들이 3년 과정으로 어린아이들에게 한학의 기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학부모들이 형편이 되면 자식들을 이조에 있는 소학교에서 계속 공부를 하도록 하지요. 외동 서배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경덕 선생이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보고서 서배 할배가 이어서 설명을 한다; “최사권 선비께서는 작년에 돌아가시고 그 부인께서 이곳의 재산을 정리하신 후에 한성에 있는 아들 집으로 이사를 하셨지요. 그런데 일부 논밭을 그들이 세운 소학교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외동의 소학교는 김춘엽 선비가 서배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을 통하여 재정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지요”.

그 말을 듣자 오경덕 선생이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을 한다; “제가 이곳에 먼저 들린 이유는 1901년에 일본을 여행했을 때에 형님께서 그곳의 우량품종인 볍씨를 가지고 오신 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소출이 어떻게 증대가 되었습니까?”. 서배 할배가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오경덕 선생이 묻는다; “일본에서 본 그대로 2할의 증산이 이곳에서도 이루어 진 것입니까?”. 손상훈이 답을 한다; “처음 3년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토착화에 성공을 했지요. 그 볍씨가 이곳 경주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산미증산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 말을 듣자 오경덕 선생이 다시 묻는다; “그 볍씨 가운데 혹시 추운 곳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그러한 종자가 있습니까?”. 서배 할배가 오경덕 선생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인식을 한다. 그래서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 “추운 북간도에서도 자랄 수 있는 볍씨라고 하면 내한성이 뛰어나고 바람에도 강한 품종이여야 하는데 그러한 품종이 하나 있지요. 이곳 너븐들과 덕천의 거랑가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결실을 맺고 있는 종자가 그러합니다”.

오경덕 선생이 기쁜 낯빛으로 말한다; “형님, 그 품종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길림 용정에서도 조선사람들이 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 수확을 늘려야 독립운동에 도움이 됩니다”. 서배 할배가 즐거운 마음으로 말한다; “여보게 동생, 원없이 줄 터이니 먼 길에 잘 가지고 갈 생각이나 하시게. 하지만 그곳의 토양이 이곳과는 또 다를 터이니 몇년간 토착화하기 위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여야 할 것이야. 경험이 많은 농사꾼들의 도움을 받아서 한번 못자리에서 볍씨를 뿌려 모로 잘 키워보도록 하시게”;

오경덕 선생도 성격이 안성기 선생과 비슷하다. 한곳에 오래 있지를 못한다. 돌아다니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그 볍씨를 서배 할배에게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서는 한 열흘 경주 읍내 김춘엽 집을 비롯하여 그 일대를 누비고 다니다가 돌아온다.

오경덕 선생이 돌아와서 한 이틀 머물면서 양삼마을과 박달까지 쭉 둘러본다.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아 있어서 그들과 회포를 푼다. 그리고 그 볍씨를 고이 간물하여 등짐으로 지고서 ‘철마’라고 불리고 있는 열차를 타기 위하여 경주 읍내로 향한다. 서배 할배는 이채령이와 함께 오경덕 선생을 배웅하면서 먼 길에 여비로 사용하라고 넉넉하게 용돈을 챙겨 준다.

함께 늙어가면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나름대로 항일운동에 일조를 하고 있는 오경덕 선생을 바라보니 흐뭇하고도 기꺼운 마음이 들어서 넉넉하게 챙겨준 것이다. 서배 할배 자신은 천상 농사꾼이므로 우량품종을 재배하여 수확을 늘리는 일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경덕 선생과 같은 인물은 그 추운 만주 벌판에서 독립의 일꾼을 길러 내기 위하여 동분서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만주에서 오경덕 선생이 그 미묘한 시기 1919년 정월에 조선에 들린 이유는 또 다른 밀명이 있는 것이다. 그는 한성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도록 되어 있다.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여 무저항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은밀하게 접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역사적인 3.1만세 사건이 터지고자 용트림을 하고 있는 시기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