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78(작성자; 손진길)
18. 평화적 만세운동이 남긴 교훈
1919년 1월말에 오경덕 선생이 내남 너븐들 서배 할배의 집을 떠나 한성으로 상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떠나 보내면서 서배 할배 손상훈은 지난 밤에 사랑방에서 그와 둘이서 나눈 은밀한 이야기를 새삼 생각해본다. 그 내용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작년부터 북간도 용정 명동마을에 살고 있는 오경덕 선생이 한성을 방문하여 손병희 선생과 권동진 선생을 몇 번 만났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천도교를 후임자에게 완전히 맡겨 두고 학원사업과 언론사업 그리고 기금마련에만 전념하고 있는 손병희 선생 그리고 그의 한쪽 팔이 되고 있는 권동진 선생에게 오경덕 선생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엄중한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첫째,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예정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사를 보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해 2월부터 그 일을 추진한 세력이 한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예를 들면, 조선을 사랑하는 선교사 호머 헐버트, 상동감리교회의 담임인 전덕기 목사, 그 교회 지하실에서 민족운동을 협의하고 있던 안창호와 양기탁 그리고 이동휘와 김구 등이다. 비록 헤이그 밀사 사건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 일을 추진한 기독교인사들은 조선백성들에게 민족지도자로서 크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 영향은 북간도에서의 의병활동에까지 크게 미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동학을 계승하고 있는 천도교는 조선의 독립을 희구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자꾸만 그 영향력이 줄어 들고 있다. 그 옛날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고 조선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용감무쌍하게 싸우던 동학의 모습은 오늘날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손병희 선생과 권동진 선생은 조선인들의 실력을 배양하여 장기적인 관점에서 독립을 얻겠다고 민족교육과 언론창달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줄 알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왜냐하면, 군대의 헌병을 앞세운 조선총독부의 무도한 억압에 시달려서 조선백성들이 독립과 항일의지를 거의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 민족혼을 깨우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도교지도자들은 실기를 하지 말고 조선인은 외세의 지배가 아니라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원하며 그것을 온 겨레가 하나같이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조선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만세운동으로 일시에 전개하게 되면 대내적으로는 민족혼이 깨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의병들이 사기충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망명정부가 수립이 되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넷째, 1897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서재필이 주장한 영국식 ‘입헌군주제’보다는 1907년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신민회를 통하여 주장한 미국식 ‘민주공화제’가 더 조선백성들의 요구에 맞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조선의 백성들이 너무나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가 시키는 대로 순종한 왕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러한 군주제로의 복귀를 조선의 백성들이 다시는 원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 점을 주지하면서 민족의 혼을 깨우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필요하다.
다섯째, 만약 그러한 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 이롭다고 본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만세운동이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하여 실패하게 될 때에는 천도교나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가 남아 있어야 그 다음을 기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거사에 앞장을 서는 민족지도자 대표들은 현재 천도교나 기독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미 그 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자들이어야 한다;
그와 같은 오경덕 선생의 건의에 대하여 손병희 선생과 권동진 선생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오세창을 위시한 여러 동지들과 깊이 상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현재 은밀하게 해외의 민족지도자들에게도 전파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달 정도의 준비가 끝나게 되면 일제히 국내외의 조선백성들이 전부 무저항 만세운동에 나설 것이니 미리 서배 할배 손상훈 형님께서는 그렇게 아시고 추이를 조용히 지켜 보시라고 오경덕 선생이 언급을 한 것이다. 고마운 말씀이다. 오선생이 서배 할배 손상훈을 믿고 그와 같은 중대사를 미리 말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손상훈은 2월 한달동안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이 지내고 있다. 그저 조용하게 경주 오일장만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언제 그 만세사건이 발생하는지 내심으로는 궁금한 것이다. 그렇지만 경주 일원에서는 1919년 3월달이 되어도 전혀 만세사건이 발생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한성에서는 3월 1일에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경찰서에 수감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기폭제로 하여 경인지역에서는 만세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멀리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의 유학생 6백여명이 2월 8일에 벌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현장에서 17명의 대표자가 체포를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3월 1일을 만세시위의 날로 잡은 이유는 이틀 후가 바로 고종황제의 장례일이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21일에 승하한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40일후에 거행하도록 결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3월 1일에는 그 행렬이 한성의 중심인 종로를 지나게 된다. 그때를 택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과거 천도교의 지도자였던 인물 15인, 기독교지도자 출신 16명 불교계 인사 2명 등 도합 33명의 민족지도자들이 성명서에 연명으로 서명을 하고 일시에 3.1만세사건을 일으켰는데 어째서 경주 일원에서는 조용하기만 한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현상인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 수수께끼가 풀리고 있다.
경주는 동학의 발상지이다.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경주 최씨이며 경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대 교주인 최시형도 경주 출신이며 최제우의 족질이다. 그러므로 경주는 영남지방 천도교인들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영남지역의 천도교인들이 2월달부터 경주의 본당에 모여 촛불을 켜고서 계속 기도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거사를 위한 준비모임인 것이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모임을 하다가 보니까 그만 일제가 모종의 낌새를 채고서 강제로 해산조치하고 만다. 그러므로 천도교 경주지부에서는 한번 제대로 만세운동을 일으켜 보지도 못하고 사전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세력이 기독교이다. 경주에는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지방에 배부하고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쉽지가 않다. 천도교 지부의 수상한 움직임을 사전에 간파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당에 대해서도 너무 심한 것이다.
그러한 형편이므로 할 수없이 3.1만세시위에 바로 동참하지를 못하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경주의 외곽에서 만세운동이 발생을 하게 된다. 그 진원지가 3월 13일 외동에서 오일장이 열렸을 때이다. 갑자기 장터에 수백개의 태극기가 배급이 되면서 조선사람들이 만세를 외친 것이다. 시골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아니했던 일본 헌병들이 허를 찔린 것이다;
그러나 경주 읍내까지 만세시위가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는 헌병들이 진입을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틀 후에 경주 읍내 작은 오일장이 서게 되면 그때 그곳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하려고 계획을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 이유는 태극기를 비밀리에 만든 혐의로 경주 읍내의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를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세한 이야기를 서배 할배가 듣게 된 것은 순전히 친구 김춘엽 때문이다. 이제는 사랑방모임의 가정이 서배 할배 부부와 김춘엽 부부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냥 2달에 한번씩 경주 읍내 성동에 있는 김춘엽의 사랑방에 모여서 이야기나 나누고 있다.
1919년 4월에 서배 할배 손상훈 부부가 김춘엽의 사랑방에 들렀을 때에 그가 최근소식을 그들 부부에게 이야기한다; “아들 김영식이 외동 소학교의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최근에 교장 이영수가 애로사항 하나를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젊은 선생 강신권이 만세시위사건에 관련이 되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것이야. 잘 풀려나와야 할 터인데 걱정이야…”.
그 말을 듣고 손상훈이 질문을 한다; “강신권 선생이 혹시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러자 김춘엽이 즉시 답한다; “맞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서배 할배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손상훈이 말한다; “한성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지도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그래서 한번 짐작을 해본 게야…”.
그날은 대충 그 정도의 이야기만 듣고서 손상훈 부부가 내남 너븐들로 돌아오고 있다. 4월 중순인데 봄이 아직 오지를 아니하고 있다. 3월 만세시위가 일본 헌병에 의하여 강제로 진압이 된 영향인지 그해 4월 조선사람들의 마음은 전혀 봄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일본제국의 영향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기에 북간도와 상해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이 엄청 바빠지고 있는 것이다;
3.1만세 시위로 조선백성들의 생각과 민족의 저력을 일단 확인하였기에 이제는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임시정부를 만들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 비로소 따뜻한 봄기운을 조선반도에서 모두들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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