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75(작성자; 손진길)
그 다음해 1912년 6월에 경주 성동 김춘엽의 사랑방 정기모임에서 토의한 안건이 인상적이다. 먼저 그 집의 주인인 김춘엽이 다음과 같이 현안문제를 의제로 말한 것이다; “오늘은 먼저 조선총독부가 금년에 발표한 전국 토지에 대한 신고의 건에 대하여 한번 의논들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 신고기간을 1918년까지로 길게 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장기로 설정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 일본제국의 소식에 대하여 박식한 안성기 교장이 먼저 말을 한다; “저도 그 점이 궁금하여 동경에 있는 아들 용운에게 좀 알아보아 달라고 요청을 했지요. 그런데 참으로 재미가 있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통감부가 1908년에 진작 조선에 설치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옛날에 영국이 인도에 설치한 수탈회사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좌중의 선비와 부인들이 안성기의 입을 쳐다보면서 그의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다. 안성기가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한다; “영국의 그 회사는 인도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양귀비와 차를 재배하여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고 해요. 특히 영국은 청국으로 엄청난 양의 아편을 수출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그 회사는 식민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그 생산물을 본국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그러한 회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차 동양척식주식회사도 그러한 일을 조선에서 실시하겠지요…”.
그러자 서배 아재 손상훈이 무엇이 생각이 나는지 급히 말을 한다; “아 참, 그러고 보니까 그 옛날에 손병희 선생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장차 개인소유가 아닌 토지를 국가가 가지고 갈 수가 있으므로 얼른 개인의 이름으로 소유주 등록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장차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손병희 선생이 예견한 것과 같이 개인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아니한 토지를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서 모조리 몰수하고자 하는 것이군요…”.
그 말을 듣고서 좌중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집의 주인인 김춘엽이 결론을 내린다; “알겠습니다. 충분한 등록의 시간을 준 것은 나중에 그 기간이 지나게 되면 조선 백성들에게 그 해태의 책임을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속셈이군요. 그러니 이웃에게 말하여 빠짐없이 개인소유로 토지등록을 하도록 권장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말을 끊은 다음에 김춘엽이 다른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참으로 섭섭한 말씀을 미리 드려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두 분의 가정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남쪽의 부산으로 이사를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서배 아재 손상훈 부부의 눈이 커지고 있다.
그러자 김춘엽이 곧 설명을 한다; “그 이유는 부산 동래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함께 모시고 생활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득이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의 두 가정이 함께 그렇게 결정을 하여 저에게 미리 언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들 아시고 마음의 준비들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그들은 1877년부터 내남 덕천과 외동 서배 마을에서 줄곧 이웃으로 살아온 자들이다. 두 사람은 서당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신학문선생으로 일하면서 결혼도 그 연줄로 그곳에서 했다. 장인식 교장은 1854년생이고 최사권의 소개로 그의 일가 질녀와 혼인을 하고서 계속 내남 덕천에서 살았다.
안성기 교장은 가장 나이가 어려서 1856년생인데 서배 마을의 서당에서 생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춘엽과 이가연 부부의 눈에 들어서 이다연과 결혼하여 김춘엽의 아래 동서가 되었다. 이제 그도 조선나이로 57세가 되니 소학교의 교장 자리를 내려놓고 늙으신 부모님을 보살피고자 바다가 보이는 부산으로 장인식 교장 부부와 함께 떠나가려고 한다;
그 두사람과 함께 1877년에 서당의 선생으로 초빙이 된 오경덕은 부산에서 충청도로 이주하신 부모님이 난리통에 어떻게 되셨는지 걱정이 되어서 1893년에 진작 충청도로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 장인식과 안성기 두 부부마저 떠나고 나면 사랑방모임에는 김춘엽 부부와 손상훈 부부만이 남게 된다. 앞으로 사랑방모임의 계속 여부도 차제에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을 붙잡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님께서 너무 연로하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집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계신 것만 하더라도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라고 하는 부모님의 고마운 마음이다. 따라서 그날은 김춘엽과 손상훈이 장인식과 안성기를 껴안고서 사나이의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이채령과 이가연은 그보다 더하다. 아예 이다연과 최순옥의 손을 다 함께 마주 쥐고서 ‘엉엉’ 목을 놓아서 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들은 십여 년 전에 일본방문도 한달이나 같이 한 너무나 친한 사이이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이제는 한배를 타고서 멀리 자신들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이가연과 이다연은 친자매이기에 그 이별의 슬픔이 더 크다;
그들이 아무리 슬퍼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어도 세월은 그저 무심하게 흘러만 간다. 그래서 두달이 지나서 1912년 8월달 사랑방 정기모임에 서배 아재 손상훈 부부가 참석을 하였을 때에는 두 교장 부부는 벌써 부산으로 이주를 하고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1851년생 동갑인 손상훈과 김춘엽은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던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생각이 나서 한참 허공을 쳐다보게 된다. 자식이 먼저 떠나가고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곁을 떠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의 나이가 벌써 62세이다. 작년에 각자 진갑연을 지냈다. 조선말로 환갑과 진갑을 모두 지났으니 이제는 볼 장을 다 본 나이인지도 모른다. 김춘엽은 딸 김영란이를 진작에 대구로 시집 보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영식 부부는 외동 서배 마을에서 전답을 관리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있다.
김영식에게는 18세나 되는 아들 김호길이 있다. 그러니 김춘엽은 그야말로 할아버지이다. 그리고 금년에 79세인 모친 정해옥이 아직 정정하시니 그것이 김춘엽 가족에게는 큰 복이다. 또한 김춘엽의 여동생 김경화 가족이 한집에 살고 있다. 김경화의 아들 정한욱은 올해 19세이다.
그런데 서배 아재 손상훈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1909년 10월에 며느리를 얻었는데 아직 아기가 없다. 3년을 기다려왔으나 삼신할미가 아기를 점지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따라서 손상훈과 그의 부인 이채령은 속으로 답답하다. 시부모가 그러하니 당사자인 손영주와 정애라의 심정은 어떠할까?...
손상훈은 나이로는 벌써 진갑도 지났으니 당연히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아직도 단지 ‘서배 아재’라고 불리고 있다. 손주를 얻어야 아들인 ‘봉천 아재’ 손영주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웃들이 ‘서배 할배’라고 불러줄 터인데 아직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안타까운 세월이 1년 더 흘러가자 마침내 1913년에 정애라가 아기를 생산한다. 아들이 아니고 딸이다. 그렇지만 워낙 손이 귀한 집안에 처음으로 태어난 아기인지라 너무나 기뻐한다. 이채령이 여자아기가 인물이 참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름을 ‘손해선’이라고 짓고 있다.
손상훈도 그 이름의 뜻이 ‘바다가 앞에 창창하니 그 여아가 남동생을 많이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찬성을 한다;
4년이 지나 1917년 11월 15일이 되자 드디어 며느리 정애라가 아들을 낳는다. 손상훈과 이채령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비로소 천석꾼 살림을 대물림할 손자가 탄생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을 ‘손수정’이라고 짓고 있다. 그 이름의 뜻은 부디 ‘곰배’처럼 세상이 험하더라도 한세상 잘 살아 주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지주 손상훈의 집 대문에는 고추가 달린 금줄이 매달려 있다. 아들을 낳았으므로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이다. 그 금줄을 보고서 너븐들 사람들이 손영주의 생모 홍신옥 여사와 친형 손영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서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홍신옥은 장남인 손영한을 데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한 칠이 지나자 미역을 구해서 차남 손영주 내외를 찾아본다. 이채령이 그들을 먼저 반긴다. 이채령은 그들에게 안방에서 몸들을 좀 녹이게 한 다음에 조용히 옆방으로 데리고 간다. 며느리 정애라가 갓난 아기 손수정을 품에 안고 있다. 낯선 사람을 보고서도 사내아기는 생글생글 잘도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서 이채령이 말한다; “갓난아기가 친할머니와 친삼촌이 온 줄 아는 모양입니다. 한번 안아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정애라가 남편 손영주의 생모인 홍신옥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면서 아기를 그 품에 넘겨 준다. 그리고 아주버님이 되는 손영한에게도 인사를 한다.
정애라의 인사를 받으며 손영한이 말한다; “제수씨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한 아드님을 생산하셨습니다. 얼마나 바라왔던 아들입니까? 저의 집에는 아직 아들이 없는데 동생 집안에서 먼저 경사가 났군요.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정애라는 자신이 참으로 큰 일을 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더욱 기쁘다.
한편, 손자 손수정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손상훈이 ‘서배 할배’가 된다. 이제 자손들을 위하여 1917년 12월부터 남은 세월을 손상훈은 명실상부하게 ‘서배 할배’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의 남은 인생이 얼마이며 어떠한 간난신고를 더 겪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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