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선민 기득권자가 아니고 소외자 그리고 이방인이 천국잔치에 초청된다는 3가지 비유”(눅15:1-3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9. 17. 18:49

제목; “선민 기득권자가 아니고 소외자 그리고 이방인이 천국잔치에 초청된다는 3가지 비유”(15:1-32)

설교일; 주후 2024 12 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 17일 화요일 추석날 오클랜드에서 작성)

 

12사도는 예수님의 복음전파를 위한 3 6개월 동안의 공생애 전과정에 있어서 일종의 수행제자의 역할을 담당한 남자제자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의사 누가가 작성한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 제1장입니다.

참고로 그 대목을 옮겨봅니다; “21. 이러하므로(가룟 유다의 자살로 12사도에 1명 결원이 발생하였으므로) (침례)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로) 올려져 가신 까지(24:50-51, 1:9-11)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공생애 전체기간 중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하루 24시간 같이 먹고 마시며 전도여행을 함께 수행하던 남자제자)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1:16-20, 스승을 배신한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사도)와 더불어 (스승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24:45-49) 하거늘, 23. 그들이 2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1:21-23).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수행제자로 일한 12사도 가운데 헬라어를 읽고 헬라어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사도 마태 한사람 뿐입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에서 세관원으로 근무했던 레위(5:27) 바로 사도 마태인데(9:9) 그는 관세업무의 성격상 헬라어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가나안 땅을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던 시대입니다. 로마황제는 속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내국세는 거두어 현지에서 사용하고 관세는 전부 황제에게 바치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국의 세관원은 2가지 임무를 수행합니다; 하나는, 주변국과의 교역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또 하나는, 로마황제에게 관세를 징수한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공용어인 라틴어나 헬라어로 문서를 작성하여야 하는데 그 가운데 주전 4세기 헬라 시대부터 사용하여 그들에게 익숙한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60년경에 12사도가 아닌 마가가 헬라어로 짧은 문장의 복음서를 저술하여 초대교회에 회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읽고 있는 16장으로 되어 있는 마가복음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헬라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태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스승 예수님의 교훈과 메시지를 중심으로 마가복음의 내용을 보완하여 긴 문장의 복음서를 세상에 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을 증보하고 있는 복음서 곧 오늘날 28장으로 되어 있는 장문의 마태복음입니다.  

그리고 후속사도인 바울의 주치의로서 그의 제2차 선교여행 때부터 동행했던 의사 누가가 사도 마태의 뒤를 이어 제3복음서를 저술하여 초대교회에 회람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천국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얻게 된 이유는 사도 바울이 개설한 성경학교에서 그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서방에 대한 선교일정이 무척 바쁜 사도 바울이지만 그가 선교일꾼을 양성하기 위하여 2차례나 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후 50년대에 그리스의 고린도에서 1 6개월 그리고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2 3개월 동안 자신의 선교일정에 동참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주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입니다(18:11, 19:8-10).

사도 바울은 그 옛날 신분이 히브리경전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친 랍비 사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메섹에서 만난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사상에 비추어 자신이 이미 배우고 익힌 히브리정경인 구약을 새로이 조명하고 그 내용을 다듬어 나름대로 영적 기독론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교리서신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으며 그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주 역사하시는 복음이라고 알기 쉽게 주장하고 있습니다(1:1-2, 9-11, 2:16, 16:25-27).

그렇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경험하고 또한 십 수년에 걸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던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선교일꾼들에게 4년간이나 가르치고 있습니다(9:3-22, 22:3-21, 1:11-2:2). 그 성경학교에서 공부한 의사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아 다시 천국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와 같은 점을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4:44-49). 

그와 같이 사도 바울과 그의 수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의사 누가는 히브리경전의 메시아에 대한 내용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그리고 부활과 승천 및 재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주님의 천국복음이라고 아주 체계적으로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로부터 배운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의 내용을 히브리경전을 가진 선민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들 특히 철학적인 사고와 현실타당성을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그리고 실용주의에 익숙한 로마인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복음의 뿌리와 예수님의 생애를 현지에서 밝히기 위하여 과거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했던 지역을 두루 직접 방문하여 당시의 증인들을 만나 필요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 그것을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제3복음서를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1:3-4).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제15장에 들어서게 되면 의사 누가가 얼마나 문서작성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인물인지를 또한 파악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14장에서 이미 기록한 내용 곧 예수님의 큰 잔치 비유’(14:15-24)에 있어서 천국잔치에 추가로 초청되고 있는 2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먼저 언급한 다음에 드디어 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15장에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공관복음에 있어서는 사도 마태가 작성한 마태복음에서 그 이슈를 다루고는 있지만 의사 누가의 누가복음만큼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충분한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평가하자면 누가복음이 훨씬 논리성과 체계적인 설명에 뛰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쉽게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려두고 싶습니다;

(1) 첫째로, 누가복음 제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큰 잔치 비유’(14:15-24)를 마태복음 제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22:1-10)과 비교해보면 다음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1)   첫째, 누가복음의 기록은 그렇지 아니한데 마태복음의 기록에 있어서는 마치 포도원 농부의 비유’(21:33-44) 한자락을 다시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잔치에 참여하라고 임금이 보낸 종을 유대교의 지도자인 선민의 기득권자 일부가 감히 잡아서 모욕하고 종래 죽이고 말기 때문입니다(22:6). 그것을 보고서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맙니다(22:7). 반면에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전혀 그러한 대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14:15-24). 다만 결론에 가서 점잖게 한마디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4:24).

2)   둘째,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 없는 예복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인 선민의 기득권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천국잔치에 이제는 초청되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평소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선민 유대인과 주변의 이방인을 딱히 구별하거나 차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누구나 혼인잔치에 초청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2: 9-10). 다만 잔치자리에 앉아서 천국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는 마지막 통과의례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임금이 손님들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들어오면서 예복을 입지 아니한 한사람에 대해서 불호령을 내리고 아예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처해버리고 맙니다(22:11-13). 그 결과 사도 마태가 오래 기억하고 있는 스승 예수님의 마지막 한마디가 다음과 같습니다;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그 말씀과 관련하여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제3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4)   이제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이 무엇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간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복음사역의 공생애 가운데 경험한 여러가지 시험은 초기에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으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믿음생활의 비결이란 누가복음 제4장과 마태복음 제4장에 따르면 의미상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성도는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4:4, 4:4). ,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영광을 취할 뿐 마귀가 제안하는 세상적인 것은 일체 탐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4:8, 4:10);

5)   , 창조주 여호와는 나의 인생의 주인이지 결코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나의 종처럼 부리거나 우상처럼 이용하려고 하는 생각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4:12, 4:7). 그것이 모든 성도들 곧 주님의 종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종의 법도입니다. 요컨대, 모든 성도는 주님의 종으로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갔다는 증거를 그 깨끗한 예복으로 제시하는 인생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2) 둘째로, 누가복음 제15장에는 예수님의 3가지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가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15:1-7)이고, 둘째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15:8-10)이며, 셋째가 탕자의 비유’(15:11-32)입니다. 그 가운데 사도 마태가 저술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단지 예수님의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만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18:12-14).

1)   그와 같은 엄청난 기록상의 차이는 사도 마태의 관심사와 의사 누가의 관심사가 어떻게 다른 지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사 누가는 후속사도로서 이방인사도로 불리고 있는 사도 바울의 주치의이면서 바울의 제2차 선교때부터 끝까지 그를 수행한 선교 일꾼이며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토 유대인이 아니라 교포 유대인으로 보입니다.

2)   특히 그는 로마제국의 필요에 의하여 유대 땅에 파견되어 의사로 생활하면서 정보기관의 장으로 보이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보고한 인물입니다(1:1-4, 1:1-2). 그것도 직접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문서로 작성하여 보고한 것입니다.

3)   그러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에 의사 누가는 마치 데오빌로 각하를 대하듯이 그렇게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잃어버린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참으로 열심입니다. 그와 같은 그의 진심이 본문 누가복음 제15장에서 한층 돋보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로, 의사 누가의 기록은 아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마태의 경우에는 그와 좀 다릅니다. 그는 본토 유대인이면서 유대교인들이 지탄하고 있는 로마의 세관원으로 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리와 죄인이라고 하는 항목에 들어가는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선민 가운데 잃어버린 양입니다(9:9-13).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그 비유에 대해서만 유독 오래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마태와 비교한다면 갈릴리의 부자였던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 요한 그리고 예루살렘의 부자였던 마리아의 아들인 마가는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양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족으로부터 매국노나 죄인으로 결코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복음서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아예 등장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모든 세리(유대교인들이 매국노로 치부하고 있는 세관원을 말함)죄인(선민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그들의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나사렛 예수)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선지자인 그가 사실은 타락한 죄인의 친구인가?고 비난)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가름하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양떼의 주인)이 양 백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99마리를 들에 (양치기의 손에 맡겨) 두고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많은 친지를 불러모아 집에서 크게 잔치를 벌인다고 하면 그 비용이 도로 찾은 양 한 마리의 값보다 훨씬 더 나갈 것임. 그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되찾은 여호와의 기쁨은 대단하다는 것임). 7. 내가 너희에게 (그 비유의 교훈을 설명하여)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결혼한) 여자가  드라크마(열개의 헬라 시대의 은전으로 만든 세메디라고 불리는 일종의 머리 장식이며 결혼선물임)가 있는데 (세메디에서 하나의 은전을)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결혼선물인 세메디의 은화 하나)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그 머리장식의 값어치는 돈으로 평가할 수가 없을 것임).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여호와와의 언약에서 이탈한 자 또는 종의 법도에서 이탈한 자)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10);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모든 세리(유대교인들이 매국노로 치부하고 있는 세관원을 말함)죄인(선민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그들의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나사렛 예수)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선지자인 그가 사실은 타락한 죄인의 친구인가?고 비난)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가름하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양떼의 주인)이 양 백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99마리를 들에 (양치기의 손에 맡겨) 두고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많은 친지를 불러모아 집에서 크게 잔치를 벌인다고 하면 그 비용이 도로 찾은 양 한 마리의 값보다 훨씬 더 나갈 것임. 그와 같이 잃어버린 자를 되찾은 여호와의 기쁨은 대단하다는 것임). 7. 내가 너희에게 (그 비유의 교훈을 설명하여)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1-7);

1)    이스라엘의 국부(國父, 건국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작성한 오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율법사회에서 소외되어 생계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레위인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민 유대인의 책무입니다(14:29). 달리 말하자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백성에게 명하고 계시는 정의의 구현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히브리경전의 말씀의 뜻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유대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전혀 그와 다릅니다.

2)    그들은 고대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조에 푹 젖어 있습니다(4:7-9, 8:5-6). 이 세상에서 기득권자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하고 생계의 어려움에 직면한 자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바리새인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죄인과 어울리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할 따름입니다(1절과 2).

3)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기에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는 물론 예수님이 나중에 제시하시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16:19-23)의 교훈이 그들에게는 또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징벌을 받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복락을 누리던 부자가 어째서 죽은 다음에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까?...

4)    그것은 여호와가 창조한 이 세상의 인과율을 어기고 그와 반대로 설명하여 선민 유대인들을 현혹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있는 대단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마침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나사렛 예수를 여호와를 모독하는 인물이라고 정죄하고 마는 것입니다(22:69-71). 그와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줄 번연히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5)    그러나 예수님은 선민 유대인들이 이 세상의 경제적인 가치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평가하고 유대교의 기득권자만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처사임을 비유를 통하여 거듭 밝히고자 하십니다. 가장 먼저 본문에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15:3-7).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알기 쉽게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6)    옛날 시골에서 염소를 키우는 경우와 소를 키우는 경우에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염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하여 산이나 들판으로 가는 경우에는 반드시 튼튼한 나무에 목줄을 단단히 묶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제멋대로 가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와 달리 소는 대충 목줄을 나무에 묶어 놓아도 됩니다. 그만큼 주인을 잘 따르는 충직한 가축이 바로 소이기 때문입니다. 양떼의 경우는 염소가 아니라 소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가 마태복음 제25장에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25:32-46).

7)    양을 키우다가 보면 한가지 행동의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양의 무리 가운데서 리더가 생기면 그가 호기심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무리들이 군말 없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리더가 아니면서 제마음대로 호기심 때문에 홀로 행동하는 양이 발생합니다. 그러한 경우 그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주인이 산천을 헤매고 있음을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3-5). 그 다음에 주시는 말씀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되찾은 한 마리의 양의 값어치를 결코 물질적으로 평가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그 양의 주인은 그보다 몇 배의 재화를 가지고 친지들을 모아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6). 그러므로 그 잃어버린 양이 바로 천국을 제대로 찾아서 돌아오고 있는 길 잃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 생명의 값어치가 창조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귀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비유입니다(7). 창세기 제1장을 참조하면 창조주 여호와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진 유일한 존재가 남과 여이며 그들의 자손이 하나님의 청지기이기에(1:26-27) 영육합일체인 사람이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을 올바로 경영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심히 좋아하시는 것입니다(1:31).

(2)  8. 어떤 (결혼한) 여자가  드라크마(열개의 헬라 시대의 은전으로 만든 세메디라고 불리는 머리 장식이며 결혼선물임)가 있는데 (세메디에서 하나의 은전을)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결혼선물인 세메디의 은화 하나)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그 머리장식의 값어치는 돈으로 평가할 수가 없을 것임).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여호와와의 언약에서 이탈한 자 또는 종의 법도에서 이탈한 자)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8-10);

1)    마태복음 제20장 제2절에서 포도원 일꾼의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δηνάριο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전이며 1데나리온은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드라크마(δραχμή)는 본래 헬라의 은전입니다. 그 값어치 역시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은화의 무게로 따지면 데나리온보다는 드라크마가 약간 무겁습니다. 보통 로마의 은화인 데나리온의 무게가 약 4g인데 헬라의 은화인 드라크마는 약 4.3g인 것입니다.

2)    하지만 10개의 드라크마를 모아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여 머리장식을 만들어서 결혼선물로 신랑이 신부에게 주고 있습니다(8a). 그것을 세메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0개의 드라크마를 끈으로 묶어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냥 은전 하나의 값어치가 아닙니다. 남편의 결혼 예물의 중요 부분입니다. 따라서 부인이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를 찾기에 열심입니다(8b). 찾아낸 결과 그 기쁨이 너무나 큽니다. 마치 남편의 사랑을 다시 회복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친지들을 모아서 그 은전의 수십배에 이르는 잔치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9).

3)    그 비유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12:1-5). 이방인에게 여호와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한평생 그들을 구원하는 선지자로 살아가라고 하는 목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제사장이며 중보자인 아브라함의 후계자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19:4-6). 그런데 그 언약과 사명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다시 찾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선민사회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살펴서 선민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천국에서 여호와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10)...

둘째로,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상속이 아니라 사전 증여를 원하고 있는 것임). 아버지가 그 살림을 (장남과 차남에게 사전에)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이방인이 살고 있는)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재산을 탕진한) 후 그 (이방)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부잣집 아들인)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도시에서 먹고살 재산이 전혀 없음). 15. (탕자가 시골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농부 또는 목축업자)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로 보내어 (이방지역에서 많이 사육하고 있는, 8:32-34)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짐승인) 돼지(가 주로) 먹는 쥐엄 열매(메뚜기 모양의 씨주머니가 있는 일종의 야생 콩과 식물이며 주로 짐승의 먹이로 사용이 됨. 그러나 흉년에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먹기도 함)배를 채우고자 하되, (소중한 구황작물이기에 그것을)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천국의 풍요로움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나는 여기서(이방 땅에서 흉년으로 말미암아)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회심하여)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창조주에 대한 반역을 말함) 아버지께(부친에 대한 패륜을 말함) 죄를 지었사오니(패역함이 곧 죄임을 말하고 있음, 32:20, 대하6:37, 2:40),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스스로 아버지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임),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지극히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있음)”(15:11-2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상속이 아니라 사전 증여를 원하고 있는 것임). 아버지가 그 살림을 (장남과 차남에게 사전에)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이방인이 살고 있는)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재산을 탕진한) 후 그 (이방)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부잣집 아들인)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도시에서 먹고살 재산이 전혀 없음). 15. (탕자가 시골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농부 또는 목축업자)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로 보내어 (이방지역에서 많이 사육하고 있는, 8:32-34)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11-15);

1)    선민사회에는 2부류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지도자들과 기득권 세력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비록 로마제국의 속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 유대교의 자치권을 부여 받고 있기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종교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부유한 유력가문들이 있어서 그 부를 세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 가운데 서기관과 랍비 그리고 회당장 등 유력인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선민사회에서 기득권자들입니다.

2)    또 하나, 그 반대로 선민사회에는 멸시의 대상이며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바닥인생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쉽게 제14장에서 벌써 거론하고 있습니다;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은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13-14),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14:13절과 동일함) 하니라”(14:21).

3)    예수님이 제15장 앞부분에서는 약간 달리 표현하십니다;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기득권자들이 무시하고 있는 소외된 자를 여호와는 자신의 잃은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임) 하리라”(15:6), “10.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언약에서 벗어난 자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고 있다는 것임)하리라”(15:9).

4)    본문에 들어서게 되면 회심한 탕자를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삼고 있다는 내용을 예수님이 비유 가운데 확인하여 주십니다;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임)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언약의 백성으로 다시 삼은 것임)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4). 그러므로 이른바 탕자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5)    첫째, 그것이 패륜인 줄 모르고 차남이 부친의 재산을 사전에 증여 받아 제멋대로 이방 대도시에 가서 향락과 사치를 누려보고자 합니다(11-13a). 둘째, 재산을 완전히 탕진한 후에 낙향하여 이방인에게 빌붙어 비참하게 연명하고 있습니다(13b-15). 흉년이 들자 기아에 시달린 탕자가 마침내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고 있습니다(16-18). 셋째, 풍요로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품꾼의 하나로 살아가고자 합니다(19). 그러나 돌아온 탕자를 환대하면서 부친은 그를 다시 아들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20-22). 그것이 천국잔치의 기쁨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23).

(2)  16. 그가 (짐승인) 돼지(가 주로) 먹는 쥐엄 열매(메뚜기 모양의 씨주머니가 있는 일종의 야생 콩과 식물이며 주로 짐승의 먹이로 사용이 됨. 그러나 흉년에는 사람들이 그 열매를 먹기도 함)배를 채우고자 하되, (소중한 구황작물이기에 그것을)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천국의 풍요로움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나는 여기서(이방 땅에서 흉년으로 말미암아)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회심하여)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창조주에 대한 반역을 말함) 아버지께(부친에 대한 패륜을 말함) 죄를 지었사오니(패역함이 곧 죄임을 말하고 있음, 32:20, 대하6:37, 2:40)”(15:16-18);

1)    누가복음 제8장에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갈릴리호수 동편에 있는 헬라인의 작은 성읍 거라사 쿠르시를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두가지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많은 귀신들이 기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8:27-30). 또 하나는, 모세의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으므로 돼지고기를 즐기며 양돈업이 발달하고 있습니다(8:32-34).

2)    그러므로 탕자가 사전 증여 받은 부친의 재물을 이방도시에서 탕진한 후에 별 수 없이 낙향하여 이제는 들판에서 이방인 목축업자의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돼지가 산이나 들판에서 자생하고 있는 열매를 따먹고 있는데 그것이 쥐엄나무의 열매입니다. 야생하는 일종의 콩과 식물이므로 씨주머니가 메뚜기 모양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단백질 공급원이기에 짐승들이 즐겨 먹는 먹거리입니다. 돼지를 치면서 탕자는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허기를 면하고 있습니다;

3)    그런데 흉년이 찾아옵니다. 쥐엄나무의 열매를 그 지방에서는 구황작물로 사용하기에 이릅니다. 탕자는 그것조차 얻지 못하여 기아선상을 헤매게 됩니다(16). 아사의 위기에 처한 탕자가 마침내 부친의 집에 양식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17). 그는 이방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사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릅니다(18a).

4)    예수님은 이상과 같은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탕자의 죄의 성격이 이중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8b);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 곧 생명의 주인에 대하여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반역(反逆)을 도모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생명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44:30) 그 진리를 모르고 탕자가 감히 생명의 아버지께 패륜(悖倫)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5)    그 두가지 죄를 합하여 하나의 용어 패역’(悖逆)으로 한국어성경에서 등재하고 있습니다(32:20, 대하6:37, 2:40). 참으로 한글은 히브리어를 번역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좋은 용어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래 한국어성경은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뛰어난 외국인 선교사들이 구약인 히브리어성경과 신약인 헬라어 성경을 곧바로 조선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들이 조선인들의 용어를 익혀서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서 알기 쉽게 그 의미를 번역하였기에 그것이 대단히 유용합니다. 새삼 그들의 수준 높은 학문적 노고에 감사합니다.

(3)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스스로 아버지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임),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지극히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있음)”(15:19-20);

1)    창세기 제3장을 살펴보면,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자신도 얻으려고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3:5-6). 그러나 그 결과는 여호와의 사전 고지와 같이 죽음의 심판입니다(2:17, 3:19). 비록 마귀의 화신인 뱀이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전혀 효력이 없는 거짓말입니다(3:4). 그에 따라 여호와의 판결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만약 아담부부를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면 엄청난 비극이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여호와 말씀 그대로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마저 제멋대로 따먹게 되면 죄악 가운데 영생하는 마귀가 되고 맙니다(3:22). 그 점을 우려하신 여호와께서는 아담부부를 에덴동산 동쪽 바깥으로 쫓아내고 그 입구와 진입로를 천사들을 보내어 방어하게 합니다(3:23-24).

3)    이제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살아가게 되는 아담부부는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여호와의 생명의 기운을 더이상 얻을 수가 없어서 그만 유한한 삶을 살게 되고 향년이 되면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맙니다(4:26, 5:4). 아버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져버렸기에 부자관계도 사라지고 맙니다.

4)    그와 같은 현실을 탕자의 고백 곧,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스스로 아버지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임)”(15:19)라는 구절에서 실감나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작은 아들이 회심하고 찾아오기를 일구월심(日久月深, 지극한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짐)으로 학수고대하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20, 65:1-2);

 

셋째로,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41:42-43, 고대사회에서 그 신분을 회복하거나 높이는 방법임).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잃은 양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의 비유와 같은 것임, 6절과 9)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11:19, 1:29, 여호와 이레의 은혜이며 만민을 대속하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은혜임),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사실은 부친을 섬긴 것이 아니라 부친의 집에 함께 동거함으로써 생활비를 절감한 것임)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부친이 자신의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하고 있는데 그것을 장남이 비난할 수는 없음. 비록 부자간이지만 엄연히 재산의 소유주가 다른 것임).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차기 족장이라는 것임),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7:4, 생명의 주인인 여호와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탕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임),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6-7, 9-10, 잃은 양 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은 것과 같다는 것임)”(15:21-32);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41:42-43, 고대사회에서 그 신분을 높이는 방법임).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잃은 양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의 비유와 같은 것임, 6절과 9)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11:19, 1:29, 여호와 이레의 은혜이며 만민을 대속하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은혜임),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15:21-28);

1)    탕자를 맞이하는 창조주 여호와의 마음과 선민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극명하게 예수님이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선민이라고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일신 여호와만을 섬기는 신앙에서 솔로몬시대 후반기부터 벌써 이탈하고 있습니다(왕상11:1-13). 그 이유는 주변의 이방 족속에게서 받아들인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현세적인 자신들의 탐욕과 일방적인 이기적 소원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훨씬 간편하며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21:9-11).

2)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에서 일년 중 하루 ()족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까지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지성을 드리고 여호와로부터 일년간 지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사해준다는 신탁말씀을 받아 나오면 그만입니다(16:29-34);

지난 죄를 여호와로부터 매년 율법의 제사의례에 따라 탕감 받고 있으니 기타의 이기적인 소원성취에 대해서는 우상을 섬기는 무당에게 돈을 주고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11:9-14);

3)    그와 같이 이중적인 장치를 가지고 편하게 종교생활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는 거룩한 백성인 선민이며 율법과 성전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의인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훗날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의인이며 선민인 자신들은 역사적인 구원을 얻고 시온의 영광이 빛날 것이지만 주변의 이방인들은 모두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4)    역사적으로 주전 586년에 다윗왕조의 남조 유다왕국이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후 70년만에 예루살렘 제2성전이 건축되지만 다윗왕조가 다시는 유다왕국을 재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전 430년경 느헤미야 총독의 유대교 갱신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대제사장과 선민들의 타락이 계속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주전 410년경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활동하지만 주후 28년경 선지자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유대사회에 나타날 때까지 400여년간은 아예 선지자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그 사이에 주전 140년경부터 바리새인들이 등장하여 사람의 경험과 지성으로 히브리경전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동행하거나 내주 역사하지 못하고 있는 인위적인 종교적 율법생활일 따름입니다. 자연히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의 영적인 안목이 사라진 외식적인 율법생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탕자의 시대가 사실은 예수님 당시의 선민 유대사회인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심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하는 소위 본문의 회개하는 탕자와 같은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종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것은 심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여 주고자 하십니다(22).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7)    그 깊은 의미가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잃은 양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의 비유와 같은 것임, 6절과 9)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11:19, 1:29, 여호와 이레의 은혜이며 만민을 대속하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은혜임), 그들이 즐거워하더라”(15:23-24)는 구절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니 천국잔치를 열어서 그 생명의 회복을 축하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11:20).

8)    영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구원주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여 주겠다고 하는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요한복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14:16-20). 그러한 맥락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하시면서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9)    참고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20. (부활하신 주님)너희(사도와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성도들)와 항상 (14:16-20, 영적으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10)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5-18).

11)  그러나 스스로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맏아들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동생이 사전 증여를 부친으로부터 받았을 때에 동일한 증여를 받아 많은 전답을 벌써 소유하고 있습니다(12절과 25). 게다가 부친의 집에서 함께 동거하면서 생활비를 아끼고 있으며 부친이 서거하면 그 재산을 전부 차지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29절과 31). 그것이 고대사회 장남이 지니고 있는 차기 족장의 권리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선민임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예수님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2)  장남은 새삼 부친의 집을 찾아온 동생의 존재가 눈에 거슬리고 있습니다. 탕자를 위하여 동네잔치를 부친이 베풀고 있으며 종이 아니라 아들로 다시 맞아들이고 있으니 장차 상속재산이 줄어들 형편입니다(25-27). 그 점이 분하여 장남이 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사태를 파악한 후에 자신을 찾으러 나온 인자한 부친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있습니다(26-28). 그것은 이방인의 회심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있는 선민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11:14);

(2)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사실은 부친을 섬긴 것이 아니라 부친의 집에 함께 동거함으로써 생활비를 절감한 것임)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부친이 자신의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하고 있는데 그것을 장남이 비난할 수는 없음. 비록 부자간이지만 엄연히 재산의 소유주가 다른 것임).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차기 족장이라는 것임),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7:4, 생명의 주인인 여호와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탕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임),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6-7, 9-10, 잃은 양 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은 것과 같다는 것임)”(15:29-32);

1)    선민이라고 자처하면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어떠한 특권을 잘못 주장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요컨대 유대인들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이방인들의 구원을 도모하라는 선민의 책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면서(19:4-6) 선민의 특권만 여기서의 장자처럼 주장하고 있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9-30).

2)    비유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장남의 주장은 이 세상 고대사회의 전통일 뿐 영생하는 천국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세계를 사랑하여 아주 공평하게 만민의 생명을 살리며 만물을 돌보시는 일을 기뻐하십니다(3:16, 8:19-22). 그러므로 여호와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1:26-27) 창조주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잘 다스리고 있을 때에 그 모습을 여호와께서 심히 좋아하시는 것입니다(1:31).

3)    그런데 선민의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장남이 이방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탕자의 구원을 전혀 기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이방세계에 전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더구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 나아가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지도 아니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죄의 탕감만을 간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4)    게다가 선민이요 거룩한 백성이라고 외부적으로 선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이방에서 도입한 우상을 또한 매우 편리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백성이며 사악한 종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패역함을 심판하고자 역사적으로 여호와께서는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하게 하고 주전 586년에는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왕국마저 망하게 하였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자 헛수고에 그치고 맙니다.

5)    그에 따라 본문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차기 족장이라는 것임),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7:4, 생명의 주인인 여호와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탕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임),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6-7, 9-10, 잃은 양 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은 것과 같다는 것임)”(15:29-32).

6)    그 깊은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선민이 회개하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이방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살려서 함께 천국에 들어오게 되면 창조주 여호와의 기쁨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둘째, 히브리경전과 율법을 공부하여 알고 있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그 뜻을 해석하여 이방인 구원에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셋째, 그와 같은 여호와의 뜻을 알고서 후속사도인 바울은 물론 그에게서 천국복음의 깊은 의미를 배운 의사 누가가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천국의 잔치자리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여호와의 뜻을 알고서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는 인물이 선민 유대인 출신인 12사도와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 그리고 후속사도인 바울과 본서의 저자인 의사 누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선민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기를 원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주님의 천국복음으로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선민의 상징인 장자의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이 3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권면 또 권면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함께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