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알고 모든 업적이 여호와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주님의 제자에게 벌써 내주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눅17:1-37)
설교일; 주후 2024년 12월 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월 23일 월요일 작성)
지난 주일에 제가 강해 설교한 누가복음 제16장은 상당히 난해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강해할 누가복음 제17장은 더욱 난해한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3가지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와 예화가 쉽사리 이해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먼저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이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생이 제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과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눅17:1-4).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이른바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눅17:7-10);
1) 그 요지는 하루 종일 바깥에서 노동한 종이 귀가하여서도 주인에게 만찬을 준비하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 앞에서 자신은 명령을 받은 대로 일했을 뿐 결코 유능한 종이 아니라고 하는 종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그 무익한 종을 통하여 주인인 창조주의 놀라운 영광과 권능이 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눅17:5-6).
2) 그런데 과연 그러한 ‘무익한 종의 법도’를 온전히 준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의사 누가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그러한 교훈과 이야기를 본문 첫머리에 배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한마디로, 그가 신앙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30세가 되자 복음전파를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눅3:23).
3) 3년 동안은 주로 고향이 있는 갈릴리지방에서 복음사역을 하였지만 마지막 6개월은 유대 땅의 중심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하면서 그 주변의 유대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성전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기관 산헤드린 대공회의 구성원들 곧 유대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천국복음의 전파와 신위적(神威的)인 치유의 능력 행함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는 한편 은근히 살해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4) 그와 같은 핍박과 위협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은 묵묵히 대속의 십자가 처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독생자로서의 영광과 위력을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고(마26:52-54, 요1:14-18) 오로지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세상적으로 보면 그 옛날 예루살렘성으로 개선하고 있는 다윗대왕의 영광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실패한 메시아 또는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사53:1-9). 그 점을 본문 제9-10절에서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끝까지 세상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행동을 지켜 보신 창조주 여호와의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마침내 인자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사53:10-54:10, 렘31:33-34).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속에서 3일만에 인류최초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한 사건이며 40일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한 사건입니다(눅24:33-53, 고전15:1-26). 그리고 오순절에는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에게 강림하여 그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교회가 발생하고 있습니다(행1:8, 2:1-4).
6) 그것이 소위 초대교회의 시작이며 새언약의 성취입니다(행2:40-47, 렘31:33). 그와 같은 여호와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찾아오게 되는 요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며 인자는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인식 곧 올바른 종의 법도입니다(눅17:9-10). 요컨대 그러한 깊은 진리의 말씀이 그 난해한 비유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로, 의사 누가는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행하는 길에 사마리아 못 미처 외딴 마을에서 직면한 한가지 이야기를 차제에 두번째의 예문으로 여기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상 주민들과 대면할 수가 없는 나병환자 10명이 멀리서 예수님께 소리치며 부디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였을 때에 예수님의 신위적(神威的)인 권능의 말씀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모두들 치유함을 입게 된 이야기입니다(눅17:11-14).
1) 그런데 10명 가운데 단지 1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직접 드리고 있습니다(눅17:15-16). 그것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결심을 동시에 밝히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자에게 육신적인 병에서 나은 것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를 담아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2) 물론 나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그 사람은 먼저 제사장을 찾아가서 희생제물을 드리고 완전히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후에 비로소 가족을 만나기 위하여 귀가하게 될 것입니다(레14:2-8).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새로운 삶을 선택할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것이 육신의 나음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치유함 그리고 영생의 구원을 얻는 비결입니다. 그와 더불어 거듭난 삶 가운데 반드시 명심해야만 하는 종의 법도가 그 앞부분에서 먼저 기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눅17:9-10).
3) 그와 같은 의미의 연결에 유의하여 본문의 구성을 다시 살펴보면 저자인 의사 누가의 의도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치유함 보다는 영적인 치유함 곧 영생을 얻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 아무쪼록 여호와의 의로운 종으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의사 누가의 당부가 먼저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글의 저자인 의사 누가의 진정성 있는 권고입니다. 요컨대, 그러한 의사 누가의 진심이 앞서 엿보이고 있는 특이한 문장의 구성이 바로 본문 누가복음 제17장의 도치된 문장의 배열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로, 구약인 히브리정경의 내용을 참조하면 노아의 시대 방주 구원을 얻은 사람은 노아가족 8명에 불과합니다(눅17:26-27, 창7:7, 8:18).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등 4개의 성읍에 하늘로부터 불심판이 임한 그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은 롯과 두 딸 등 3명에 불과합니다(눅17:28-29, 32, 창19:30-31, 신29:23).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종말이 임할 때에 한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한사람은 버려 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독특한 예언의 말씀을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고 있습니다(눅17:34-35). 어째서 이 세상의 종말심판 가운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성도의 수가 그렇게 대폭 증가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1) 그 점에 대하여 의사 누가는 자신이 수집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본문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여) 있느니라!”(눅17:20-21);
2) 그 말씀은 이미 제11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내용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아주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3) 첫째,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에게 강림하여 그 심령속에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게 되면 성도들은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온세상에 전파하게 되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행1:8, 롬8:2-4).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을 마련하게 되면 그곳에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적으로 임재하여 동시에 내주 역사하시면서 성도의 거듭난 삶을 인도하십니다(요14:16-20, 고전6:19-20, 행16:6-7)”.
4) 둘째, “그와 같이 3위1체 하나님이 영적으로 성도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악한 영이 쫓겨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성도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보호장치가 마련되어 있기에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고 마르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요컨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는 3위1체 하나님이 내주하여 성령충만한 삶으로 인도하고 있기에 이 세상의 시험을 넉넉히 이기고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벌써 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확신 가운데 거듭난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라고 하는 의사 누가의 권면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신앙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하여 남을 실족하게 만들면 그 죄가 크다는 것임). 2. 그가 이 작은 자(학생 또는 사회적인 소외자, 마25:40)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선생이 되어 제자를 잘못 인도하거나 사회적인 소외자를 돌보지 아니하면 반드시 여호와의 심판이 있다는 것임, 마25:41-46). 3. (개인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집단적으로 교회생활에 있어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여호와로부터 1만 달란트 죄의 탕감을 받았기에 이 세상에서 100데나리온의 탕감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가 있다는 것임, 마18:24-35).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용서를 도저히 해줄 수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도와 달라는 것임)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재 창조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임, 창15:6, 17:1).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 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 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새 역사의 창조는 오로지 성도들의 심령속에 보이지 아니하게 임하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과 3위1체 하나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그 손발이 되고 있는 성도는 단지 그 명령을 실천하는 종에 불과하다는 그러한 종의 법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영생구원을 얻는 믿음생활의 비결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임)”(눅17:1-10);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신앙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하여 남을 실족하게 만들면 그 죄가 크다는 것임). 2. 그가 이 작은 자(학생 또는 사회적인 소외자, 마25:40)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선생이 되어 제자를 잘못 인도하거나 사회적인 소외자를 돌보지 아니하면 반드시 여호와의 심판이 있다는 것임, 마25:41-46). 3. (개인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집단적으로 교회생활에 있어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여호와로부터 1만 달란트 죄의 탕감을 받았기에 이 세상에서 100데나리온의 탕감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가 있다는 것임, 마18:24-35).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용서를 도저히 해줄 수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도와 달라는 것임) 하니”(눅17:1-5);
1) 선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경전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지난 3년간 주로 갈릴리에서 복음사역을 하다가 갑자기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하하기를 시작하자 아연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홈그라운드가 있는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에 나사렛 예수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2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2) 하나는, 예루살렘성전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바리새인의 대표자인 서기관들이 예수의 천국복음이 유대인의 선민사상과 메시아사상을 해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의 복음사역을 더 이상 버려두지 말고 공식적으로 체포조를 파견하여 나사렛 예수를 사로잡아와서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또 하나는, 랍비와 기타 바리새인들을 보내어 남하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면서 한층 비난과 흑색선전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여 유대교인인 선민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빗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병자와 장애자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 고쳐주자 수많은 군중들이 복음사역의 현장에 모여들고 있기 때문입니다(눅12:1).
4)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벗어나서 유대지역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의 대적행위가 더욱 조직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눈치채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장면마저 은근슬쩍 감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5) 첫째, 여호와를 섬기는 율법생활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완전하지 못하여 사소한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1a). 그렇지만 율법선생이 되어 백성들에게 올바른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이중적인 율법생활과 외식적인 신앙생활이라는 잘못된 행동을 보이게 되면(1b) 그것은 남을 실족하게 만드는 중차대한 범죄행위이므로 반드시 여호와의 심판을 받기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절);
그 점은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는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있는 율법선생과 유대교지도자들 그리고 여호와신앙인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6) 둘째, 상대방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비난함에 있어서도 그에 앞서 자신을 먼저 살피는 신앙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3a, 눅6:41-42). 그 이유는 창조주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너나없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의 탕감을 여호와로부터 받았다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백 데나리온 정도의 잘못을 범한 상대방에 대하여(마18:24-35) 하루에 7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용서를 구하면 성도는 그 자를 용서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4절).
7) 셋째, 개인적으로는 그러할지라도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함께 영위하고 있는 모임의 장소 곧 성전이나 회당 또는 교회에 있어서는 그보다 엄격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신앙공동체에서는 정식으로 경고하고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공중 앞에서 회개하면 그때 용서해주도록 하여야 합니다(3b). 잘못 사인간의 문제로 계속 버려두게 되면 그것이 악한 누룩이 되어 신앙공동체를 전체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8)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수많은 제자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생활과 신앙생활의 모범을 백성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줄 정도의 온전한 신앙의 경지에 올라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12사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멀찍이 무리들 가운데서 그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는 완벽하게 율법생활을 영위하였기에 그것으로 자신들은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의인들이라고 서로들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18:11-12).
9) 그들 바리새인들과 일반대중들의 귀에 느닷없이 나사렛 예수의 수행제자인 사도들의 질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용서를 도저히 해줄 수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도와 달라는 것임) 하니”(눅17:5). 과연 그들의 스승인 나사렛 예수는 어떠한 대답을 할까요? 바리새인들은 쉽지 아니한 사도들의 질문을 받고서 예수가 어떤 실수를 할지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대중들은 과연 온전한 율법생활과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설명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2)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재 창조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임, 창15:6, 17:1).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 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 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새 역사의 창조는 오로지 성도들의 심령속에 보이지 아니하게 임하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과 3위1체 하나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그 손발이 되고 있는 성도는 단지 그 명령을 실천하는 종에 불과하다는 그러한 종의 법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영생구원을 얻는 믿음생활의 비결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임)”(눅17:6-10);
1) 예수님의 답변내용이 한마디로, 사도와 제자들은 물론 바리새인과 일반대중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답이 두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겨자씨 한알만큼 작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는 그러한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일이 발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6절);
2) 또 하나는, 하루 종일 바깥에서 노동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의 만찬준비를 하고 또한 주인이 만찬을 끝낼 때까지 시중을 들고 있는 종이 끝까지 자신은 주인 앞에 무익한 종이라고 자처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예화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7-10절). 그 이유는 주인이 분부한 대로 일하고 봉사한 것이지 그 앞에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무익한 종임을 하루 종일 지치도록 일한 종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10절).
3) 아주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첫째, 믿음이란 본래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창15:6, 17:1). 쉽게 말하자면, 피조물인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에 비로소 여호와께서 새로운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미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6절, 사65:17-19).
4) 둘째, 여호와의 종은 생명의 주인을 섬기는 종의 법도를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신실한 종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창조하였다거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고 하는 등의 분수에 어긋나는 자랑을 절대로 행하지 아니합니다(9-10절). 단지 여호와께서 주시는 의로운 종의 사명 그리고 창조주의 은혜로운 선물과 영생의 상급에 언제나 만족할 따름입니다(7-8절). 그것이 이 세상에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이른바 온전한 믿음의 비결인 것입니다(눅4:6-8).
둘째로, “11. 예수께서 (사도 및 제자들과 함께 유대교의 성전이 있으며 자신이 지게 되는 대속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눅10:1, 접경 지역으로) 지나가시다가, 12. (어느)한 (외딴)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나(발견하고), 멀리 서서(접촉하면 율법위반이 됨, 레13:45-46),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긍휼히 여기고 불치의 나병을 치유하여 달라는 것임) 하거늘, 14. (멀리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병이 나았으므로 이제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14:2-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불치의 나병이 완전하게 치유가 되었음을 확인한 것임). 15. 그(10명)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선민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치부하고 있는 사마리아 출신이라는 것임).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그리스도를 주신 여호와의 은혜조차 감사하지 아니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형편없는 여호와신앙의 타락을 질타하신 것임)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롬8:1-2, 질병과 사망의 그늘에서) 일어나(여호와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유한한 육신의 병 고침 뿐만 아니라 영생의 구원까지 받았음을 선포하신 것임) 하시더라. 20. (예수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감히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대담한 행동을 보고서 천국에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권능을 모독한 행동임을 지적하고자 짐짓 의도를 숨긴 채 묻고 있는 것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아직, not yet 이지만).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는 자의 심령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영이 떠나가고 성령의 역사로 벌써 already임하고 있다는 것임. 그것은 악한 의도를 숨긴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일종의 예수님의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우문현답인 것임)”(눅17:11-21);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1. 예수께서 (사도 및 제자들과 함께 유대교의 성전이 있으며 자신이 지게 되는 대속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눅10:1, 접경 지역으로) 지나가시다가, 12. (어느)한 (외딴)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나(발견하고), 멀리 서서(접촉하면 율법위반이 됨, 레13:45-46),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긍휼히 여기고 불치의 나병을 치유하여 달라는 것임) 하거늘, 14. (멀리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병이 나았으므로 이제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14:2-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불치의 나병이 완전하게 치유가 되었음을 확인한 것임)”(눅17:11-14);
1)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갈릴리호수의 서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남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는 사마리아인이 살고 있는 지역이 멀리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에는 외딴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 부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갈릴리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혼혈족속 쌍방으로부터 소외된 무리입니다. 그 이유는 불치의 나병에 걸린 저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어떤 경로로 전염이 되는지는 몰라도 나병환자와 접촉하면 문둥병에 걸린다고 하는 속설이 지배하고 있는 고대사회입니다. 따라서 선민들은 율법조항 레위기 제13장에 의거 나병환자를 일반백성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격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격리조치는 사마리아지역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지역 외딴 마을에는 유대인출신과 사마리아인출신이 나병환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함께 거주하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나병환자의 마을에 겁도 없이 접근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멀리서 보고서 환자 10명이 절호의 행운을 만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가나안 서부지역에서 들려오고 있는 소문에 따르면 선지자 예수는 못 고치는 질병과 장애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한마디에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도 되살아나는 이적이 발생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을 그들이 진작부터 듣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체 없이 멀리서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습니다;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긍휼히 여기고 불치의 나병을 치유하여 달라는 것임) 하거늘”(눅17:13);
4) 그들의 형편을 벌써 파악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즉시 그들에게 마주 외치고 있습니다; “14. (멀리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병이 나았으므로 이제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14:2-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눅17:14a). 그 말을 듣자 10명의 나병환자들은 망설임이 없이 제사장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나고 있으며 그때 그들은 몸이 기이하게 치유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불치의 나병이 완전하게 치유가 되었음을 확인한 것임)”(눅17:14b).
(2) “15. 그(10명)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선민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치부하고 있는 사마리아 출신이라는 것임).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그리스도를 주신 여호와의 은혜조차 감사하지 아니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형편없는 여호와신앙의 타락을 질타하신 것임)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롬8:1-2, 질병과 사망의 그늘에서) 일어나(여호와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유한한 육신의 병 고침 뿐만 아니라 영생의 구원까지 받았음을 선포하신 것임) 하시더라”(눅17:15-19);
1) 그 중의 한사람은 갈릴리의 선민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처음에는 9명의 동료인 갈릴리 출신과 함께 레위인 제사장을 만나서 나병이 완쾌되었다는 증명을 받고 같이 행동하고자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일단 제사장으로부터 완쾌판정을 받으면 소정의 제사를 드린 다음에 모두들 뿔뿔이 헤어져서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마을을 찾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마리아출신인 자신은 그야말로 외톨이가 되고 맙니다
2) 따라서 그 사람은 달리 행동합니다. 먼저 9명의 유대인 동무들을 떠나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5-16절). 예수님이 그자의 속마음을 벌써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종교지도자에게 나병이 완쾌되었다는 판정을 받고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갈릴리출신의 선지자 예수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각별하게 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 점은 다른 선민 유대인 출신 나병환자보다 더 나은 선택입니다.
3) 그 점을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두가지 의미의 말씀을 그 자리에서 하십니다; 하나는,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는 사마리아 출신 이 사람과 달리 선민 유대인출신 나병환자 9명이 배은망덕하다는 것입니다(17절). 그들 9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의 뜻을 전혀 표현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지적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대접하는 자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대접할 줄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마10:40).
4)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호와께 영광을 올려드릴 줄 아는 그 사마리아 출신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그리스도를 주신 여호와의 은혜조차 감사하지 아니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형편없는 여호와신앙의 타락을 질타하신 것임)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롬8:1-2, 질병과 사망의 그늘에서) 일어나(여호와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유한한 육신의 병 고침 뿐만 아니라 영생의 구원까지 받았음을 선포하신 것임) 하시더라”(눅17:15-19).
5) 간단하게 그 의미를 파악해봅니다; 첫째, 구주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렸기 때문에 창조주의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18절). 둘째, 질병과 사망의 그늘에서 일어나 이제부터는 육신적인 치유와 영적인 생명의 길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9a).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가 창조주의 권능을 믿고 종의 법도를 지키면 영생의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19b).
(3) “20. (예수일행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감히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대담한 행동을 보고서 천국에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권능을 모독한 행동임을 지적하고자 짐짓 의도를 숨긴 채 묻고 있는 것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아직, not yet 이지만).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는 자의 심령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영이 떠나가고 성령의 역사로 벌써 already임하고 있다는 것임. 그것은 악한 의도를 숨긴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일종의 예수님의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우문현답인 것임)”(눅17:20-21);
1) 예수님의 말씀 곧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b)는 선포를 듣자 은밀하게 그 행동을 감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성소에서 일년에 한번 신탁의 말씀으로 대제사장에게 주시는 그 귀한 선포를 일개 선지자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가 제마음대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며 참람죄입니다.
2) 그러한 내심을 숨기면서 교묘하게 올무를 예수님의 목에 걸고자 한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20a). 예수님이 벌써 대적자 바리새인들의 계획을 알아채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과 천국이 이 세상에 임하는 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극비사항 중의 극비입니다(행1:7). 만약 예수님이 그만 우쭐하여 그 비밀을 발설한다고 하면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며 여호와의 권능에 대한 참람죄로 몰려서 산헤드린 대공회의 정죄를 받고 말 것입니다.
3) 그러나 그 다음 예수님의 답변이 바리새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지혜를 진작에 뛰어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아직, not yet 이지만).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는 자의 심령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영이 떠나가고 성령의 역사로 벌써 already임하고 있다는 것임. 그것은 악한 의도를 숨긴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일종의 예수님의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우문현답인 것임)”(눅17:20b-21);
4) 요컨대,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여호와의 나라이므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임재의 때가 언제인지 말하는 것은 피조물이 경험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있는 영적인 차원이므로 특정하여 말할 수가 없다는 답변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인간의 영성이 담겨있는 그 심령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다는 참으로 현명한 답변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대답을 듣자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이 그만 입을 다물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차제에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고자 하심) 너희가 인자의 (영생구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9명의 선민 유대인 출신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고 시비나 걸고자 하는 자들은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거짓선지자와 그 추종자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그들이 단지 소돔성과 같은 그 옛날의 국지적인 불심판을 상상하고서)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온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새역사의 창조인 것임).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반드시 고난을 통과한 다음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 롬8:17-18,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새 역사가 발생한다는 것임.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어야 여호와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발생하는 것임, 사65:17-18, 계21:1-2).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세상사람들이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를 비웃은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세상사람들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배척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음).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단지 노아가족 8명만이 방주 구원을 얻었음, 창7:7, 8:18),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등 4성읍에서 단지 롯과 2딸 등 3명만이 구원을 받았음, 창19:23-24, 30, 신29:23).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불시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같음). 32. (창19:26, 다만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세상 재물을 되돌아본) 롯의 처를 기억하라(그 죽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것임).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살리리라!(요11:25-26)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무려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임).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구원받는 자가 절반이나 된다는 희소식을 다시 전하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이 구원받는 자의 수를 대폭 증가하기 위하여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강력하게 내주 역사하시는 것임, 눅24:49, 행1:8) 36. (없음). 37. 그(제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아직도 온세상에 대한 종말심판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등의 국지적인 불심판을 상상하고 있는 제자들임.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디에서 불심판이 발생할 것인지를 묻고 있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 땅에서는 전쟁으로 희생되는 자가 엄청 많아지고 하늘에서는 악한 영들이 극성을 부릴 것임) 하시니라”(눅17:22-37);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차제에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고자 하심) 너희가 인자의 (영생구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9명의 선민 유대인 출신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고 시비나 걸고자 하는 자들은 믿는 자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거짓선지자와 그 추종자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그들이 단지 소돔성과 같은 그 옛날의 국지적인 불심판을 상상하고서)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온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새역사의 창조인 것임).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반드시 고난을 통과한 다음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 롬8:17-18,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새 역사가 발생한다는 것임.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어야 여호와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발생하는 것임, 사65:17-18, 계21:1-2).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세상사람들이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를 비웃은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세상사람들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배척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음)”(눅17:22-26);
1) 어떻게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20a)고 예수님에게 질문한 내용과 예수님이 차제에 상세하게 대답하신 내용은(20b-25절) 서로가 동문서답(東問西答)인 것만 같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그대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시기를 예수님에게 물었는 이유는 창조주 여호와의 고유권한을 나사렛 예수가 침범하도록 만들어 그것으로 산헤드린 대공회에 끌고가서 신성모독죄를 적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러한 대적자들의 의도를 번연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설명은 굉장히 친절하며 또한 상세합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 그대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29, 36). 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
3) 그러면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는 새언약의 시대가 전개되고 영적으로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전에 임재하여 함께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3위1체 하나님과의 동행이며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내주입니다(요11:26, 14:1-3, 16-20). 그와 같은 이치를 예수님이 알기 쉽게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설명하고자 하시지만 그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4) 아직 도래하지 아니한 미래지사(未來之事)이며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그렇지만 예수님의 설명을 간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전파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과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정치적 메시아사상에 아직도 매어 달리고 있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예수님이 재림하는 광경을 보고자 하지만 결코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22절).
5) 둘째, 그 옛날 여호와의 불심판이 국지적으로 임한 선례가 있는데(창19:23-25) 그러한 현상의 재현이 이 세상의 심판과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3절). 셋째, 마치 번개가 하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한꺼번에 치는 것처럼 여호와의 심판과 하나님나라의 강림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고 전면적인 심판과 새 세상의 창조라는 것입니다(24절);
6) 넷째,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 전에 구원주 그리스도가 반드시 대속의 죽임을 당하는 절차가 선행된다는 것입니다(25절). 다섯째, 그 옛날 노아의 시대 홍수심판 당시와 지금의 시대가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흡사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26절). 그러므로 제26절 말씀의 깊은 의미는 노아가 여호와의 명령으로 구원의 방주를 만들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의 길을 마련할 것인데 한가지 명백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
(2)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단지 노아가족 8명만이 방주 구원을 얻었음, 창7:7, 8:18),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등 4성읍에서 단지 롯과 2딸 등 3명만이 구원을 받았음, 창19:23-24, 30, 신29:23).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불시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같음). 32. (창19:26, 다만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세상 재물을 되돌아본) 롯의 처를 기억하라(그 죽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것임).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살리리라!(요11:25-26)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무려 절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임).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구원받는 자가 절반이나 된다는 희소식을 다시 전하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이 구원받는 자의 수를 대폭 증가하기 위하여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강력하게 내주 역사하시는 것임, 눅24:49, 행1:8) 36. (없음). 37. 그(제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아직도 온세상에 대한 종말심판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등의 국지적인 불심판을 상상하고 있는 제자들임.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디에서 불심판이 발생할 것인지를 묻고 있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 땅에서는 전쟁으로 희생되는 자가 엄청 많아지고 하늘에서는 악한 영들이 극성을 부릴 것임) 하시니라”(눅17:27-37);
1) 노아 시대 홍수심판 가운데 이 세상의 복락만을 즐기던 사람은 다 멸망을 당하고 오직 방주 구원을 얻은 사람은 노아가족 8명입니다(27절). 그리고 롯의 시대 역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등 4개 성읍에 대한 여호와의 불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 향락에 빠져서 제멋대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전부 멸망을 당하고 오로지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구원을 얻은 자는 롯과 2딸 등 3명에 불과합니다(28-29절).
2) 그런데 이 세상에 대한 종말심판과 새 세상의 창조의 과정에서 장차 현세의 복락과 향락에 정신이 팔려서 살며 그 미련 때문에 결국 롯의 아내처럼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매우 많겠지만(30-32절) 그래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예언에 따르게 되면 반반(半半, half and half)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33-35절). 그것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실로 고무적인 예언의 말씀입니다;
3) 어째서 그러한 혜택이 훗날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들의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는 새언약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렘31:33).
4) 그때에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전에 임재하여 영적으로 성도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놀라운 시대가 전개됩니다(요14:16-20). 그와 같은 두터운 보호하심이 있기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이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마침내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승 예수님이 아직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입니다.
5)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에 대하여 확연히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지사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아니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찾듯이 한가지 질문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스승님은 어디에 계실 것입니까?”(37a 의역). 예수님의 대답이 일종의 선문선답(禪問禪答)입니다.
6) 그 내용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난리가 나면 죽는 자가 발생하고 그 시신을 노리고 하늘에서 독수리가 날아들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악한 영들이 공중에서 나타나 이 세상의 전쟁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면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위임 받은 내가(요5:27) 이 세상에 재림하여(살전4:16-18) 악한 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를 구원하지 않겠는가?”(37b 의역);
결론적으로, 아직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수개월 전입니다. 그때 벌써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당할 것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예언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 첫째, 그 옛날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롯 시대의 불심판과는 달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아 대속의 희생을 하시고 나면 이 세상의 종말심판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방주 구원 8명, 롯 시대의 천사 구원 3명과 비교하면 멸망을 당하는 자와 구원을 얻는 자가 거의 반반(半半)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그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2) 둘째, 그렇게 많은 성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여호와의 제도적인 장치가 영적으로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②흩어진 제자들을 모아 40일간 재교육을 시킨 다음에 천국복음의 전파자로 온세상에 파송하십니다. ③승천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주님이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십니다. ④성도의 심령 속 성령님의 전에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십니다. ⑤그 덕분에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기고 시험을 통과하여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자녀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숨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자주 음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말씀의 은혜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