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관념과 상상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고 있는 예수님의 2가지 비유”(눅16:1-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9. 20. 08:50

제목;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관념과 상상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고 있는 예수님의 2가지 비유”(16:1-31)

설교일; 주후 2024 12 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 20일 금요일 작성)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영이신 창조주 여호와의(4:24)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밀한 역사섭리를 말하고 있는 그 영원한 진리와(4:23)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인 현실은 그 차이가 어느 정도로 현격한 것일까요? 그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문장이 사실은 누가복음 제16장의 본문입니다.

게다가 의사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본문은 그 구성이 상당히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의미상으로 보아 일종의 대화의 형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일단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이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먼저 제자들에게 재미나게 말씀하십니다(16:1-13). 그런데 그 비유의 깊은 의미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비유를 은근슬쩍 옆에서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이므로 예수님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비웃고 있습니다(16:14).

1)   현실이 그러합니다. 각박한 이 세상에서 부자인 주인이 자신의 재물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가 그 맡은 재물을 낭비하여 주인에게 크게 손해를 입힌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조치할까요? 당장 그 청지기를 파면하고 배상을 요구하면서 곤장부터 쳤을 것입니다.

2)   그런데 그와 정반대로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는 그 부자 주인이 도리어 그 청지기가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였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가상적인 비유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16:8);

(2)  둘째, 의사 누가는 예수님이 차제에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그 가운데 중요한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준 아내를 버리고(2:20-25, 19:4-6)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하거나 버림 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이 모두 간음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16:18, 19:9). 현실적으로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혼증서만 발부 받게 되면 종교적으로 얼마든지 이혼이 가능한 선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19:7-8). 따라서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2)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그에 대한 설명을 겸하여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16:19-31)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점입가경입니다. 그 내용은 바리새인과 유대교인들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내용은 30년전에 나사렛 예수가 복음사역한 현지를 뒤늦게 의사 누가가 두루 방문하여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그가 엄선하여 여기에 독점적으로 수록한 것입니다(1:1-4, 16:1-31). 따라서 사도들의 기억에만 주로 의존하고 있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교훈과 메시지 가운데 과연 무엇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비유와 바리새인들의 현실적인 반응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나름대로 규명해보자면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생각과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각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영원한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섭리의 방향성이라는 사실을 의사 누가가 세상사람들에게 주지하고 싶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의 흐름을 나름대로 구성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영적인 진리와 육신적인 현실의 차이에 대하여 그 대략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미리 드려두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자는 혼자서 그 많은 재산을 전부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청지기로 삼아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 관리를 맡기고 있습니다(19:12-13, 25:14-15). 그리고 정기적으로 얼마의 이문을 남겼는지를 확인합니다. 만약 재물관리를 소홀히 하여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게 하였다고 하면 그 책임을 엄중하게 추궁하고 청지기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화의 관리 곧 돈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이며 계약사회의 현실입니다. 

(2) 둘째로, 그와 같은 현실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16:1-13)는 한마디로 난센스입니다. 재물관리를 소홀히 하여 주인에게 손해를 입힌 청지기가 파면을 당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자구책(自救策)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을 통하여 주인의 재물을 빌려 가서 제때 갚지 아니한 자들에게 자의적으로 일부 탕감의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인이 확인하게 되면 이제 그 청지기는 매를 맞고 쫓겨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3) 셋째로, 그러나 그 사실을 확인한 주인이 도리어 그 불충(不忠)한 청지기를 칭찬합니다(16:8).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분명히 주인에게 손해를 입힌 형편없는 청지기입니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 중요한 정상참작의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여호와의 뜻에 맞도록 경영하라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자신의 청지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1:26-27).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는 세상적인 이문을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청지기와는 달라야 합니다(16:9-10).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하여 청지기에게 재화를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6:9-10). 그러므로 부자에게서 빌린 재물을 도저히 갚은 수 없는 지경이 된 생계보호자에 대해서는 그 생명을 살리고 최소생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채무의 탕감은 물론 재화의 재분배를 해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16:8-13, 18:32-35);

(4) 넷째로, 창세기 제6장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 홍수를 초래하고 있는 인류의 타락상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 2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여호와신앙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이 세상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다수 선택하여 제 마음대로 아내로 삼고 있습니다(6:2). 그로 인하여 창세기 제2장 말미에 수록되고 있는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인간의 결혼제도인 11처제’(monogamy)가 사라지고 일부다처제’(polygamy)의 무서운 사회가 전개되고 맙니다(6:4-5). 부와 권력만 있으면 아름다운 여인을 많이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가 있지만 그 반면에 부와 권력이 없는 자는 가정을 이룰 수가 없고 자식을 생산할 수가 없는 마치 노예와 같은 비참한 사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일종의 돈벌이의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없는 자는 가진 것을 빼앗기고 마침내 사회적인 강자의 종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와 같이 온세상에 만연한 강탈과 포학의 지배관계를 청산하고자 여호와 하나님이 전면적인 홍수심판을 노아의 시대에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6:11-13). 그와 같은 창세기의 내용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일부일처제 가정제도의 중요성’(16:18)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16:19-31)의 깊은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또한 (19:1, 15:1-2,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가지 비유의 말씀을)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그 재물의 일부를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정탐꾼의 보고를 통하여)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현지조사를 하기 전에) 그를 불러 (사전통보를 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집으로 돌아와서 살 궁리를 모색하고 있는 것임),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하나의 묘책을 발견한 것임),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5할의 탕감임),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2할의 탕감임).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18:27, 32-36, 16:19, 긍휼과 탕감 그리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여호와의 뜻에 맞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4:26, 21:33, 그 옛날 셋이나 아브라함처럼 진실로 영원히 살길을 모색한다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22:12, 1:23-24, 16:31, 자신의 인생 가운데 이웃에게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임).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뜻밖에 여호와로부터 얻게 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22:21-27, 밥을 사고 재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주님께 간구하여) 너희를 (주님이) 영주할 처소로(14:1-3) 영접하리라. 10.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것(18:28, 백 데나리온 탕감한 것)에 충성된 자는 (18:24, 천국에서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탕감의 은혜를 얻게 될 정도로)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1:21,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 잠시 이 세상에서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창조주의 것으로도 여호와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누가(여호와께서) 참된 것(22:28-30, 8:18-22,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헌신하는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영적인 진리와 세속적인 현실이 대립하고 있으므로),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그러므로 재물을 주신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우선하여야 할 것임)”(16:1-13);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또한 (19:1, 15:1-2,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가지 비유의 말씀을)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그 재물의 일부를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정탐꾼의 보고를 통하여)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현지조사를 하기 전에) 그를 불러 (사전통보를 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집으로 돌아와서 살 궁리를 모색하고 있는 것임),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하나의 묘책을 발견한 것임),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5할의 탕감임),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2할의 탕감임).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18:27, 32-36, 16:19, 긍휼과 탕감 그리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여호와의 뜻에 맞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4:26, 21:33, 그 옛날 셋이나 아브라함처럼 진실로 영원히 살길을 모색한다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22:12, 1:23-24, 16:31, 자신의 인생 가운데 이웃에게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임)”(16:1-8);

1)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일본의 역사의 한대목을 가지고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일본은 주후 1868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발생하기 전까지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독특하게도 쇼군(將軍)이라고 하는 권력자가 자신의 관료조직인 바쿠후(幕府)를 통하여 일본 열도를 장악하여 철저하게 지배한 이른바 무신시대(武臣時代)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초대 쇼군이 천하통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독재체계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다음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2)    첫째, 자신에게 충성하는 막료들에게 수도 가까운 지역을 봉토로 주어 각각 자신들의 영지를 세습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들의 명칭이 다이묘(大名)입니다. 둘째, 쇼군에게 대항하다가 마지막에 항복한 적장들에게는 먼지역에서 다이묘로 생활하도록 봉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비밀감찰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셋째,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신하들에게 대해서도 쇼군은 바쿠후를 통하여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게 되면 배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넷째, 만약 지방정권에서 반란의 조짐이 포착되면 간단하게 다이묘를 암살하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따라서 그 일을 전당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부대원의 이름이 그 유명한 닌자(忍者)입니다. 본문에서는 일본의 쇼군에 해당하는 인물이 어떤 부자(富者)입니다(1). 그리고 그의 청지기를 다이묘로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마치 쇼군처럼 자신의 심복을 통하여 여러 청지기의 행동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불충하여 주인의 재산을 축내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면 먼저 그를 불러서 엄히 문책한 다음에 직접 자신이 현지를 방문하여 실태조사를 진행합니다.

4)    그 결과 그것이 사실인 경우에는 파면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에 나타나고 있는 청지기는 주인에게 불려 가서 경고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2). 그는 부자인 주인이 자신을 찾아와서 실태조사를 진행할 경우에는 꼼짝 없이 파면을 당하고 손해배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빈털털이가 되고 가족들은 남의 종살이를 하면서 연명해야 할 형편입니다(3). 그와 같은 절박한 지경에서 그 청지기는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족이 그나마 이웃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을지 그 묘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4a).

5)    그 유일한 방법이 자신이 주인의 재물을 제공하고 그 이식과 재물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채무자들에 대하여 엄청난 탕감의 은혜를 미리 베푸는 것입니다(4b-5). 실제로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그 청지기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기름을 빚진 자에게는 5할의 탕감을, 곡식을 빚진 자에게는 2할의 탕감을 해주고 원천자료를 각색하여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7). 그러나 현지에 당도한 부자 주인은 아주 유능합니다. 그와 같은 이중장부의 존재까지 파악하고 그 청지기를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 추궁의 현장에서 청지기는 초주검이 되어 있습니다.

6)    그러나 전혀 뜻밖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주인이 갑자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진심으로 그 청지기의 비리를 칭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 그 말을 듣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1) 그 주변에서 귀동냥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그들의 귀에 알듯 모를 듯한 예수님의 한마디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4:26, 21:33, 그 옛날 셋이나 아브라함처럼 진실로 영원히 살길을 모색한다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22:12, 1:23-24, 16:31, 자신의 인생 가운데 이웃에게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임)”(16:8b).

7)    이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빛의 아들들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할 것입니다(22:28-30, 8:18-22).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온갖 유혹과 시험을 받고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의 본 취지를 그대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 불충한 청지기가 과정이야 다르겠지만 그가 행한 채무자에 대한 탕감의 조치는 여호와의 뜻에 합치가 되는 것이라는 칭찬의 말씀인 것입니다(18:32-35). 그 점을 의사 누가가 비유 가운데 주님의 뜻이라고 부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주변의 백성들이 전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떠한 설명이 더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2)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뜻밖에 여호와로부터 얻게 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22:21-27, 밥을 사고 재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주님께 간구하여) 너희를 (주님이) 영주할 처소로(14:1-3) 영접하리라. 10.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것(18:28, 백 데나리온 탕감한 것)에 충성된 자는 (18:24, 천국에서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탕감의 은혜를 얻게 될 정도로)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1:21,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 잠시 이 세상에서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창조주의 것으로도 여호와의 뜻대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누가(여호와께서) 참된 것(22:28-30, 8:18-22,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헌신하는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영적인 진리와 세속적인 현실이 대립하고 있으므로),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그러므로 재물을 주신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우선하여야 할 것임)”(16:9-13);

1)    그 옛날 족장시대의 인물로 보이는 여호와의 제사장 이 불의의 사고로 자식들이 모두 죽고 약탈 족속의 침입으로 전재산을 잃고 말았을 때에 창조주 여호와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1-22).

2)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전부 창조주 여호와의 배려이며 그 역사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원소유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다만 피조물인 인간은 그것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여호와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이며 그 직분이 세상만물을 인생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스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 어떠한 마음으로 직책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1:26-31).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3)    하나님은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를 통하여 이방 땅에 여호와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12:3) 그 언약을 시내산 언약으로 계승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뜻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19:4-6). 요컨대, 여호와의 말씀의 뜻은 선민만 구원하고 주변의 이방인들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인과응보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왜곡과 변질을 바로잡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위탁하시던 성자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11:27).

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백성들에게 풀이하여 주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선민 유대인들이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현실세계의 인과응보 철칙에 맞게 심판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선민사회 내의 소외자를 구원하거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4:1-3). 그러한 선민 유대인출신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추가로 그 비유의 의미를 풀이하여 주십니다;

5)    첫째,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맞게 세상 재물을 사용하면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이며 그 은혜를 얻은 자들이 여호와께 그 사실을 증거하게 되니 자연히 은혜를 베푼 당사자가 천국에서 영생의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9). 둘째, 그와 같이 이 세상의 시험에서 이기고 승리한 자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더 많은 피조물을 구원하는 일에 더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10-11). 셋째, 이 땅에서 사람이 얻고 누리게 되는 것은 모두 세월과 함께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생의 하나님나라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재물과 유한한 인생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여호와의 뜻에 맞게 사용하면 그 상급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것을 얻어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12-13).   

둘째로, “14. 바리새인들돈을 좋아하는(계약사회에 살고 있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현실에 맞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고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하면서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삼상16:7, 사람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여호와의 판단은 그와 다르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9:24, 3:9, 사람들 앞에서는 의인일지 몰라도 여호와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임, 14:11).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24:44, 구원주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것들임),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31:33, 3:16,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영생구원의 새언약이 발동하는 것임).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31.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2:20-25, 6:1-8,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일부일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질서를 파괴하고 여호와신앙인들이 타락하여 세상적인 아름다움만을 보고서 여인을 취하여 제멋대로 일부다처제사회를 만들고 만 것임. 그것이 홍수심판의 원인이 되고 있음).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는 그것을 세습하여 일부다처제를 이루며 세상의 향락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임). 20. 그런데(그 반대로)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사회적인 소외자가 된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인간취급을 못 받고 개처럼 살아가고 있더라)”(16:14-21);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4. 바리새인들돈을 좋아하는(계약사회에 살고 있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현실에 맞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고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하면서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삼상16:7, 사람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여호와의 판단은 그와 다르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9:24, 3:9, 사람들 앞에서는 의인일지 몰라도 여호와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임, 14:11).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24:44, 구원주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것들임),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31:33, 3:16,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영생구원의 새언약이 발동하는 것임)”(16:14-16);

1)    주후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그의 인간불평등기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것이 유명합니다. 그의 주장은 인간관계가 계약으로 이루어지고 돈으로 묶여 있는 도시생활보다는 자연적인 인간관계가 살아 숨쉬고 있는 자연부락에서의 삶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게 되면 바리새인들의 관념은 다분히 계약사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돈에 매여 있는 사고방식입니다(14);

2)    그와 반대로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에는 본질적으로 2가지 관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계약의 이행보다는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계의 위험에 처하고 있는 자를 돌보아야 하며 도저히 채무를 갚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자에게 탕감의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뜻의 실천입니다(4-9).

3)    또 하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영위하는 종교생활과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15a, 17:1, 39:9).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눈 앞에서는 율법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제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15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    16절 말씀은 누가복음 제24장 제44-49절을 참조할 때에 그 의미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깨달음과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의 글에 담겨서 히브리경전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약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의사 누가가 수록하고 있는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    구약상의 선지자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구원주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사실을 모두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끝에 세례 요한이 서 있으며 그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백성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천국복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고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였으므로 새언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가 바로 여러분입니다”(24:44-48절 의역);

  

(2)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31.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4).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2:20-25, 6:1-8,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일부일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질서를 파괴하고 여호와신앙인들이 타락하여 세상적인 아름다움만을 보고서 여인을 취하여 제멋대로 일부다처제사회를 만들고 만 것임. 그것이 홍수심판의 원인이 되고 있음) ”(16:17-18);

1)    구약은 율법중심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있어서 2가지 관점이 서로 상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관점입니다. 그들은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 역사적인 구원을 얻을 수가 있으며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모르고 있으며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이 세상에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데 그 핵심은 그 옛날 이방인선지자로 살아간 아브라함처럼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9:4-6). 어느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영생의 부활을 통하여 판가름이 나고 있습니다.

3)    역사를 섭리하시는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고 천국으로 승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이 창조주 여호와의 뜻입니다. 그 명령을 어긴 자들은 노아 홍수와 같은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의미가 본문 제17-18절에 진하게 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3)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는 그것을 세습하여 일부다처제를 이루며 세상의 향락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임). 20. 그런데(그 반대로)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사회적인 소외자가 된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인간취급을 못 받고 개처럼 살아가고 있더라)”(16:19-21);

1)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기득권자와 소외자의 대표적인 예를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들고 있습니다. 먼저 기득권자인 부자는 3가지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19); 첫째, 자색 겉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옷의 색깔로 그 신분을 구별하고 있는데 특히 자색 옷은 왕이나 왕족이 입을 수 있는 옷의 색입니다. 그 이유는 보라색 염료가 가장 비싸기 때문입니다.

2)   주후 50년경 사도 바울이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을 때에 유럽으로 건너가서 처음 만난 성읍이 빌립보인데 그곳에는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가 살고 있습니다(16:12-14). 그녀의 고향인 소아시아의 내륙도시 두아디라에서는 바다의 소라가 아니라 꼭두서니(Madder) 식물의 뿌리에서 자주색 염료를 뽑아 사용함으로써 큰 이익을 남기고 있습니다;

3)   그 옷감을 가지고 루디아가 마케도니아의 로마식 성읍 빌립보에서 거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부자는 그 신분이 대단한 왕족입니다. 둘째, 그 부자는 또한 속옷으로 세마포를 짜서 만든 고운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거친 베옷이 아니라 부드러운 세마포는 그 값이 고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부자인 경우에 세마포로 수의를 만들고 있을 정도입니다(23:53, 예수님의 경우에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장례물품을 가지고 왔으므로 고운 세마포를 수의로 입고 있는 것임).

4)   셋째, 날마다 연회를 즐기는 등 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 상류사회의 풍습입니다. 기득권자들이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은 내세가 필요 없을 정도로 현세에서 즐길 것을 모두 즐기고 누릴 것을 실컷 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자는 대문간에서 거지 나사로가 웅크리고 있지만 전혀 눈길을 주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이 아니라 개가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5)   그렇지만 종을 시켜서 거지 나사로를 멀리 내다버리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이 그래도 최소한의 자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덕분에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그 부자의 대문 앞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의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애자입니다. 그는 사지를 휘둘러서 자신의 헌데를 핥고 있는 개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21b). 둘째, 병자입니다. 몸에 난 헌데가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거지 신세입니다. 그 부잣집에서 혹시 종들이 먹을 것을 주면 그것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21a). 그러므로 거지 나사로야 말로 율법사회에서 소외된 바닥인생의 상징인 것입니다.

셋째로,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이 세상에서 말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마친 후) 천사들에게 받들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였기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거지 나사로가 선지자 대접을 받고 천국에 들어갔음을 의미함),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현세적인 노아 홍수라는 역사적인 전면심판 대신에 이제는 여호와께서 세상의 종말과 영생의 천국이라는 영적인 심판을 실시하고 계심. 그 결과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 그 부자는), 23. (부자)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부디 불쌍하게 생각하여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임) 나사로를 보내어(그 부자가 현세에게 끝까지 외면한 거지 나사로에게 아브라함을 통하여 부탁하고 있음)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12:2, 온전한 보상은 이 세상과 천국의 것을 합해야 하는 것임. 그러므로 현세에서 거지 나사로가 보내고 있는 말없는 여호와의 메시지를 끝까지 외면한 결과 부자가 영벌을 받고 있는 것임, 22:22-27, 14:29. 그것이 온전한 보상인 것임).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영생과 영벌이 최종심판의 결과임. 다시는 번복이 없음). 27. (그 부자가 또다른 소청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4:44-49, 히브리경전에 이미 메시아의 오심과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까지 새언약으로 예언이 되어 있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깨달아 알 수가 있다는 것임).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천국에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과연 회개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이 나타나게 됨).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천국복음으로 히브리경전의 뜻을 제대로 살펴야 하며,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하고 천국이 현실적으로 도래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천국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말은 거짓임)하였다 하시니라”(16:22-31);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1)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이 세상에서 말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마친 후) 천사들에게 받들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였기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거지 나사로가 선지자 대접을 받고 천국에 들어갔음을 의미함),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현세적인 노아 홍수라는 역사적인 전면심판 대신에 이제는 여호와께서 세상의 종말과 영생의 천국이라는 영적인 심판을 실시하고 계심. 그 결과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친 다음 그 부자는), 23. (부자)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부디 불쌍하게 생각하여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임) 나사로를 보내어(그 부자가 현세에게 끝까지 외면한 거지 나사로에게 아브라함을 통하여 부탁하고 있음)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12:2, 온전한 보상은 이 세상과 천국의 것을 합해야 하는 것임. 그러므로 현세에서 거지 나사로가 보내고 있는 말없는 여호와의 메시지를 끝까지 외면한 결과 부자가 영벌을 받고 있는 것임, 22:22-27, 14:29. 그것이 온전한 보상인 것임).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영생과 영벌이 최종심판의 결과임. 다시는 번복이 없음)”(16:22-26);

1)    인과응보(因果應報)철칙(鐵則)’을 굳게 믿고 있는 고대사회입니다. 부자로 복을 누리고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현세에 받을 만한 의인이라는 것이며 또한 거지로 살면서 생존에 급급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으로 간주하는 매우 편리한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욥기에 나타나는 그의 절친 3사람의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2)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동방 땅의 제사장 욥은 그 견해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녀들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잘못을 여호와 앞에 범했는지 우려하여 가족잔치가 끝나면 언제나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 앞에 지내기도 했습니다(1:5).

3)    따라서 욥은 죽기 전에 여호와를 직접 만나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꼭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손수 여호와께서 현신하여 그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고 있는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을 때에 욥이 비로소 자신의 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자신은 미워하는 자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42:10);

4)    그리고 여호와의 상급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합하여 온전하게 보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제25절의 말씀의 의미가 그러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욥은 다른 재산은 전부 갑절로 배상을 받지만(10, 12) 자녀만은 동수인 10명으로 다시 받습니다(42:13). 그 이유는 훗날 그가 천국에서 20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은 본문에서 그 옛날 여호와의 제사장 욥의 마지막 깨달음이 바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천국복음의 요체라는 의미의 말씀을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12장 첫머리의 기록에서 용어 하나를 빌려와서 설명하자면, “여호와의 온전한 보상이란 현세와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부 아우르고 있는 개념이지 그것이 현세적인 인과응보에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12:2 의역)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자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외치고 있던 거지 나사로는 그 보상으로 천국에 들어가서 아브라함과 함께 거처하고 있습니다(22). 그와 달리 그 부르짖음을 끝까지 외면하고 살아간 기득권자 부자는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들어가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23).

7)    사람이 죽고 나면 무덤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 부활하여 여호와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5:24-28).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올바로 살아간 자는 영생으로 들어가고 그러하지 아니한 자들은 전부 영벌로 들어가고 맙니다(25:40-46). 그것은 역사의 종말심판과 같은 개인적인 최종 심판입니다. 따라서 그 후에는 다른 심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24절과 제26절이 그와 같은 사실을 매우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2)  27. (그 부자가 또다른 소청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4:44-49, 히브리경전에 이미 메시아의 오심과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까지 새언약으로 예언이 되어 있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깨달아 알 수가 있다는 것임).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천국에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과연 회개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이 나타나게 됨).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천국복음으로 히브리경전의 뜻을 제대로 살펴야 하며,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하고 천국이 현실적으로 도래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천국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말은 거짓임)하였다 하시니라”(16:27-31);

1)    부자가 영벌의 고통 가운데 천국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한가지 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현세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 5명에게 부디 나사로를 보내어 회개를 종용하도록 조치하여 달라는 것입니다(27-28). 형제를 생각하는 부자의 마음이 갸륵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한번 죽고 나면 현세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건너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26). 게다가 선지자들의 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설혹 지옥과 천당에서 현세로 가는 자가 있어서 그 실상을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그 회심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9절과 31). 그와 같은 설명은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치심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3)    참고로 그 대목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4-45). 요컨대, 구약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고 회심하는 자들에게는 역시 영생의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5:24-29, 11:16, 26). 아브라함의 대답이 그러합니다.

4)    그렇지만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영적으로 재림하여 랍비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빛 가운데 만나 주었을 때 그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성령세례를 받아 마침내 이방인사도로 살아가면서 그 심령속에 함께 내주 역사하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면서 고린도후서의 축도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났을 때에 사도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와 손에 난 못자국의 흔적을 보여주면서 한번 만져보고 부활에 대한 의심을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20:27). 도마는 그것을 만져보지도 아니한 채 스승 예수님의 영생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게 됩니다(20:25, 28).

그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주신 말씀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장차 영적으로)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영적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9:3-22, 고전15:8).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영적체험에 의거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영생의 부활과 천국의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대로 (끝까지) 행할 것이라”(3:14-16).

성도는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생의 상급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동안 여러가지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비록 현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이 조롱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본문입니다. 아무쪼록 자주 음미하시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영적인 깨달음의 힘을 풍성하게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