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같은 사건 가운데 담겨 있는 엄청나게 다른 두 입장, 바리새인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눅13:1-35)
설교일; 주후 2024년 11월 1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월 11일 수요일 작성)
본문인 누가복음 제13장에는 6가지 에피소드가 들어 있습니다. 알기 쉽게 한국어번역 개역개정판에서 소제목을 붙이고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리라”(1-5절). ②둘째,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9절). ③셋째,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시다”(10-17절). ④넷째, “겨자씨와 누룩 비유”(18-21절), ⑤다섯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30절). ⑥여섯째, “선지자들을 죽이는 예루살렘아”(31-35절) 등입니다.
그런데 그 6가지 에피소드의 내용을 깊이 음미해보면 그 속에 담겨있는 굉장히 다른 두가지 입장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시각인데 그들은 선민의 종교 유대교를 보전하고자 하며 현상태의 유지를 지극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와 완전히 다른 또 하나는, 예수님의 시각인데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두가지 입장이 6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바리새인들은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으로 복음사역을 펼치고 있는 예수님 일행을 얼른 변방 갈릴리로 다시 떠나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여호와께 매년 대(大)속죄일 제사를 드리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이 중요하며 자신들에게서 히브리경전을 율법으로 배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유대지역이 중요합니다.
1)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깨끗하게 보전하고 선민 유대인들의 유일한 종교인 유대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단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는 예수님 일행을 다시 사마리아를 넘어 멀리 변방 갈릴리지역으로 쫓아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의도를 감추고서 교묘하게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사람을 해친 적이 있다고 예수님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말은 언뜻 보면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깊이 생각해보면 별로 신통하지 아니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항의소동을 강력하게 진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다음과 같이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3) 첫째, 로마황제는 변방지역 가나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선민의식이 강하고 그 기질이 반항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로 강직한 성품의 총독을 유대 땅에 보내고 있는데 그 권한이 막강합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가 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총괄하고 또한 인구조사를 시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반란의 조짐을 조기에 강력하게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합니다.
4) 둘째,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유대총독을 지낸 빌라도는 주후 26년에 유대 땅에 부임한 때부터 강성이며 군인정신이 투철합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진 헌금에 대하여서도 총독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에 저항하는 무리들을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그 과정에서 극렬하게 저항하는 갈릴리 사람들이 상당수 희생되고 만 것입니다.
5) 셋째, 그 점에 대하여 유대의 역사에 밝은 의사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약간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눅13:1, 헤롯 안디바가 자신의 관할인 갈릴리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로마총독 빌라도가 살해한 일로 말미암아 기분이 상해서 한동안) 원수였으나, 당일에 (눅23:8-11, 예수의 심문과 관련한 입장에 있어서는)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 “37. 그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 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5:37).
6) 넷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따라서 주후 70년에 유대사회가 멸망을 당하자 아예 로마시로 들어가버린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미흡하여 성경학자들이 의사 누가의 위와 같은 매우 단편적인 기록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예루살렘에서 소동이나 반란이 있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갈릴리 출신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현지인 곧 유대 출신이 참여하고 또한 빌라도 군대의 진압과정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7)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두어 사람이 일부러 예수님을 찾아와서 로마인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을 해치는 일을 서슴지 아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의도적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나 유대교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임을 나름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지금처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계속하게 되면 로마총독은 그것을 반란의 조짐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 일행은 로마총독 빌라도의 군대에 의하여 횡액을 당할 수가 있으니 얼른 변방 갈릴리로 피신하는 것이 이롭다고 하는 말을 자신들의 의도를 감춘 채 슬쩍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8)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그들의 기대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에 건축한 망대가 부실공사로 말미암아 무너졌을 때에 그 주위에 있던 18명의 백성이 억울하게 희생을 당한 사례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불의의 사고로 횡액을 당한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며 그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지 아니하면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침내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현세적인 목숨과 신체의 위협보다는 여호와의 종말적인 심판과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다”(2-5절 의역).
(2) 선지자 이사야는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포도원과 같다고 그의 선지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justice, 동족을 이웃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 신14:29, 마5:43)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righteousness, 아가페 사랑으로서 이방인까지 구원하고 사랑하는 것, 마5:44)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
1)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가 사랑하는 포도원이 이스라엘 12지파인데 지금은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가 아끼는 포도나무가 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한가지 비유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2) 그 비유의 의미를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그 포도원에 함께 심기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들은 자신들과 달리 제대로 과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 무화과나무라고 지탄하면서 포도원주인에게 그것들을 베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선민이라고 한다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와 같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거름도 주고 잘 가꾸어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행하지 아니하면 함께 심판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6-9절 의역).
(3) 안식일이 되면 예수님은 회당에서 히브리경전을 읽고 그 뜻을 모인 회중에게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일은 갈릴리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 땅에서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절).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여전히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나사렛 예수가 감히 율법의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치료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4절).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율법을 사람들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취지가 모세오경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그 일 곧 피조물인 사람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15-16절, 신10:13). 그와 같은 입장의 충돌이 18년된 장애자에게서 꼬부랑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다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17절).
(4)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선민의 영광을 다시 사해에 떨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꿈은 매우 세속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중심의 세상제국을 형성하여 유대인들이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다시 한번 패권을 지닌 백성으로 떵떵거리며 살아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꿈은 전혀 그와 다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나님나라에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고 싶은 그것입니다(18절). 그것은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는 역사이므로 비유를 하자면,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 또는 적은 양의 누룩이 3말이나 되는 많은 밀가루를 전부 부풀리는 것과 같습니다(19-21절).
(5) 유대인들에게 히브리경전을 가르치고 있는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은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는 생활율법을 모두 지키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규정이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이어서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준수를 강조하고 있으니 눈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이중적인 종교생활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는 지키는 척하지만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는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질책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外飾的)인 율법생활의 진면목입니다(눅12:1-5, 마23:1-36).
1)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정답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후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2) 그 말씀의 의미를 훗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3) 요컨대,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새언약의 시대에는(렘31:3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적인 탐욕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는 성도들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26-27절). 마침내 성도들이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을 통하여 천국복음을 널리 선포함은 물론 끝까지 신실하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거룩한 자기성화를 이루어 천국의 좁은 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24-25, 29-30절).
4) 부연하자면,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생활을 강조하는 자들이 초대교회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이 이름하여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인위적인 노력으로 교회안에서 율법생활을 온전히 해보고자 노력하여도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이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그 옛날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머리는 비대하여 지는데 그 행함의 영적인 능력이 결핍하여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고 그만 다리가 풀려서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에서 실족하고 마는 것입니다(26-28절).
(6)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 일행을 내쫓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사주하고 있습니다;
1) “31. 곧 그때(22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예루살렘)를 떠나소서.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13:31).
2) 예수님의 답변이 실로 비장합니다; “선지자인 나는 이곳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33절). 대속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와 선민들은 여호와의 역사적인 심판을 받고 멀지 아니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그때까지는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3-35 의역).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그때(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때) 마침 두어 사람(2명이나 3명)이 (일부러 찾아)와서 (당시의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갈릴리 유다가 주동한 소동에 참여한 그의 일당의 희생을 말함)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그 일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발생한 것임)로 예수께 아뢰니(그와 같은 일을 일부러 찾아와서 전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차제에 겁을 집어먹고 로마총독의 관할인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주면 참으로 좋겠다는 것임), 2.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모두가 죄인이다)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여호와 앞에 회개하고 그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모두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 이치는 실로암 망대의 붕괴로 죽게 된 억울한 사람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예수님이 그들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앞잡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제사장나라의 주인 여호와를 상징하고 있는 포도원주인인) 한 사람이 (사5:7,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포도원에 (이방인의 상징으로서)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선민인 포도나무와는 달리 이방인을 상징하고 있는 그 무화과나무에서는 여호와께서 원하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주인이) 포도원지기(그리스도로 보임)에게 이르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그리스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사역을 하고 그 제자들이 그 뒤를 이어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것이니), 9.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때에는)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1-9);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그때(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때) 마침 두어 사람(2명이나 3명)이 (일부러 찾아)와서 (당시의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갈릴리 유다가 주동한 소동에 참여한 그의 일당의 희생을 말함)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그 일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발생한 것임)로 예수께 아뢰니(그와 같은 일을 일부러 찾아와서 전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차제에 겁을 집어먹고 로마총독의 관할인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주면 참으로 좋겠다는 것임), 2.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모두가 죄인이다)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여호와 앞에 회개하고 그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모두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 이치는 실로암 망대의 붕괴로 죽게 된 억울한 사람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1) 한마디로, “누구나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웅변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는 대목입니다. 두가지 사례가 그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총독 빌라도가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성전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소동을 진압한 것입니다. 그때 갈릴리사람들도 희생이 되었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절). 그렇다고 하면 예루살렘과 유대지역 출신은 더 많이 희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러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2절). 그 이유는 여호와 앞에 모두가 죄인들이며 다만 죽음의 시간이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부 여호와 앞에서 최후심판을 받을 운명입니다(3절). 그러므로 부디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아 그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3) 또 하나는, 예루살렘성 동남쪽에 있는 실로암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수로공사를 하면서 지휘소를 겸하여 망대를 건설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만 붕괴가 된 사건입니다(4a). 공교롭게도 그 부근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와 주민 등 18명이 억울하게 압사를 당한 것입니다(4b). 그 일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면서 그들 역시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그 자리에서 사고사를 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5절).
4) 참고로, 그 2가지 사건이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주후 37년경 유대 땅에서 태어난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때 로마시로 들어가서 역사서를 남긴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행적과 초대교회의 역사를 조명하는데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세푸스가 유대인의 역사를 주전 100년부터 주후 100년까지 기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서 여전히 고증이 어렵습니다;
5) 그에 따라 성경연구자들이 두가지 사실에 유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장군출신인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유대인들의 소동을 진압한 적이 있다는 사실과 그가 예루살렘성전의 헌금에 대하여 처분권한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조심스럽게 그 사건을 추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구절이 본문의 사건을 조명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6) 구체적으로,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면(눅23:12) 그것은 갈릴리 출신 유다와 그를 따르던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총독의 군대에 의하여 무참하게 살육이 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추정입니다(행5:37).
(2) “6. 이에 (예수님이 그들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앞잡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제사장나라의 주인 여호와를 상징하고 있는 포도원주인인) 한 사람이 (사5:7,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포도원에 (이방인의 상징으로서)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선민인 포도나무와는 달리 이방인을 상징하고 있는 그 무화과나무에서는 여호와께서 원하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주인이) 포도원지기(그리스도로 보임)에게 이르되,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그리스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사역을 하고 그 제자들이 그 뒤를 이어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것이니), 9.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때에는)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1) 소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그런데 깊이 음미하여 보면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같은 신세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길가에 심겨져 있는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이적’(막11:12-14, 20-25)입니다. 예루살렘 근교 유대 땅에 심겨져 있는 그 무화과나무가 선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2)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열매가 없는 자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별이 없이 모조리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영적인 것이기에 자연계에서 말하고 있는 여름철이 되어야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요4:35). 성도들이 온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열매를 얻어 천국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실천해야만 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마28:18-20, 사66:20-21).
3)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와 같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전파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선민만의 구원사상이 너무나 확고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포도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사5:7).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대제사장이 매년 하루 대(大)속죄일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용서라는 신탁을 받아서 장로들에게 선포함으로써 백성들 모두가 의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레16:29-34) 그와 같은 제도가 없는 이방인들은 모두가 만군의 여호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길가에 심겨져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비록 봄철이지만 느닷없이 열매를 얻고자 하십니다(막11:12-13). 아직 여름철이 아니므로 당연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상관없이 열매가 없는 나무에게 저주를 하십니다(막11:14). 그 결과 이튿날 그 장소를 지나가다가 사도들이 그 무화과나무가 밤사이에 그만 말라죽어버린 현장을 발견하게 됩니다(막11:20).
5) 그 사건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민 포도나무, 이방인 무화과나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인위적인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 앞에 서게 되면 선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시행되고 있는 대(大)속죄일 제사를 의지하여 자신들은 여호와 앞에 의인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자신들의 유대교를 보존하기 위하여 구원주 그리스도를 처형하게 된 그들이 무슨 염치로 그러한 구약적인 주장을 계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깊은 의미가 깊숙이 숨어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6-9절).
둘째로,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에 있는) 한 회당(synagogue)에서 가르치실(히브리경전을 읽고 그 뜻을 아버지 하나님의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강해 설교할) 때에, 11. (당시 40년 평균생존연령에 비추어보면,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18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꼬부랑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겨우 살아가고 있는 심히 불쌍한) 한 여자가 (회당의 앞쪽에 앉아)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교단 앞쪽으로)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귀신을 쫓아내고 장애를 치유하여 주고자 결정하신 구원주 그리스도의 선언인 것임), 13. 안수하시니(안수를 통하여 창조주이신 성자 하나님의 축사의 능력이 전달되고 있는 것임) 여자가 곧 (귀신이 쫓겨남에 따라 곧바로 스스로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바리새인이며 지방유지인)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회중인)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안식일을 제외하고)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평일에 치유사역을 할 것이지 안식일에는 하지 아니하는 것이 율법규정이라고 강조함)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회당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쉽게 그것을 어기고 있는 그들의 이중적인 종교생활을 지적하심) 16. 그러면(너희들은 목이 마른 집안의 가축에게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18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대적자들이 유구무언임) 온 무리는(다른 모든 회중은) 그가(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실제로 가나안에서 검은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라는 종자라고 함).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3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바리새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천국복음의 위력과 창조주가 건설하는 영적인 하나님나라의 엄청난 팽창을 알기 쉽게 말씀하신 것임, 계21:1-2, 16-17)”(눅13:10-21);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예루살렘 가까운 유대 땅에 있는) 한 회당(synagogue)에서 가르치실(히브리경전을 읽고 그 뜻을 아버지 하나님의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강해 설교할) 때에, 11. (당시 40년 평균생존연령에 비추어보면,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18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꼬부랑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겨우 살아가고 있는 심히 불쌍한) 한 여자가 (회당의 앞쪽에 앉아)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교단 앞쪽으로)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귀신을 쫓아내고 장애를 치유하여 주고자 결정하신 구원주 그리스도의 선언인 것임), 13. 안수하시니(안수를 통하여 창조주이신 성자 하나님의 축사의 능력이 전달되고 있는 것임) 여자가 곧 (귀신이 쫓겨남에 따라 곧바로 스스로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바리새인이며 지방유지인)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회중인)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안식일을 제외하고)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평일에 치유사역을 할 것이지 안식일에는 하지 아니하는 것이 율법규정이라고 강조함)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회당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쉽게 그것을 어기고 있는 그들의 이중적인 종교생활을 지적하심) 16. 그러면(너희들은 목이 마른 집안의 가축에게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18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대적자들이 유구무언임) 온 무리는(다른 모든 회중은) 그가(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13:10-17);
1) 창세기 제2장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일 규정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창세기 제1장에 기록되어 있는 6일 동안의 천지창조는 일종의 Hardware의 구축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가 되어 있는 천지만물을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맞게 올바로 경영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Software를 마련하여 운영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창세기 제1장 제26-27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2) 그들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창1:31). 그런데 세상을 경영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음 3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끝까지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피조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을 말씀드리고 그 대안을 얻어서 고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뜻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법률가가 수시로 판례집을 다시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3) 셋째, 여호와의 청지기인 남자와 여자 역시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병이 들거나 영적으로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주기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3가지 일이 제7일 안식일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식일은 여호와를 만나는 거룩한 날이며 이 세상과 청지기가 고침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복된 날입니다(창2:3). 그와 같은 안식일의 취지를 알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안식일의 율법적인 금지조항은 실로 수박 겉핥기라는 사실을 금방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4) 갈릴리지역에서 서기관을 위시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날 회당에서 설교하시는 예수님의 앞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배치하고서 그를 고쳐주는지 주시한 적이 있습니다(눅6:6-7). 그들의 함정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 자를 교단 앞으로 불러내어 그 손을 내밀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눅6:8, 10). 그때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6:9).
5) 동일한 사건이 안식일날 유대지역의 회당에서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10절). 회당장이 의도적으로 꼬부랑 귀신이 들려서 18년 동안이나 허리를 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오고 있는 불쌍한 여자를 회당의 앞좌석에 배치하고 있습니다(11절). 그는 예수님이 소문대로 그를 고쳐주게 되면 거룩한 안식일 율법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비난할 생각입니다(14절). 바리새인 서기관이나 회당장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6) 그러므로 다음 두가지 명분으로 안식일날 그자에게서 꼬부랑 귀신을 쫓아내고 장애를 치유하여 주십니다(12-13절). 하나는, 안식일날 회당에서 거룩한 척 예배를 드리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목마른 자신의 가축에게 물을 주는 노동행위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15절). 그와 같이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또 하나는, 평일에도 그러하지만 거룩하고 복된 날인 안식일에는 더욱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16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날 유대지역의 회당에서 병든 자와 장애자 그리고 귀신들린 자를 모른 척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질책하시면서 불쌍한 자를 변함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17절).
(2)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실제로 가나안에서 검은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라는 종자라고 함).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3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바리새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천국복음의 위력과 창조주가 건설하는 영적인 하나님나라의 엄청난 팽창을 알기 쉽게 말씀하신 것임, 계21:1-2, 16-17)”(눅13:18-21);
1)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소원하고 있는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가 아닙니다.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보아야 선민 유대인들의 영생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다스리고자 할 것이며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여호와의 축복만을 탐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역시 타락한 제국에 지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그와 같은 제국이나 패권국의 교체라고 하는 피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도저히 선민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사상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국복음이 아니라 세상적인 제국의 영광을 추구하는 선민우월사상에 결코 호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세속적인 선민의 제국을 추구하고 있는 율법주의자 바리새인이나 유대교지도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나라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외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참으로 현실을 무시하고 있는 답답한 선지자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현세적인 여호와의 축복을 갈구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미래지향적인 그러한 천국사상이 뿌리내리고 자랄 수가 있다는 말일까요?(18절)
4)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을 믿고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은 대쪽과 같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과 비슷한 것입니다(창15:5-6).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검은 겨자나무의 씨앗은 참으로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비를 주시고 그 씨앗을 발아하여 자라게 하면 검은 겨자나무를 이루고 그곳에는 새들이 깃들 수가 있습니다(19절);
5) 또한 적은 양의 누룩을 가지고 3말이나 되는 반죽을 전부 부풀게 하듯이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이 함께하시면 천국은 엄청나게 팽창하여 큰 충격으로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21절, 계21:1-2). 한마디로, 자연을 창조하여 그냥 던져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태계를 돌보고 또한 만민과 만물을 살리고 계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을 다시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하는 예수님의 당부라고 하겠습니다(20절).
셋째로, “22. 예수께서 (유대 땅에 있는)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천국복음을)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진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선민 유대인)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유대교의 제사규정에 따르면 매년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일시에 일년간 지은 선민들의 죄가 한꺼번에 사함을 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그와 다른 것으로 보여서 질문한 것임.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선민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24. (천국에 입장할 수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자신의 인생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고 그 제자로 살아가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다). 25. 집(천국)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단지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그것으로 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임) 하나, 27. 저(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천국복음을 듣고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지 아니한)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창12:1-5, 22:12,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단지 혈통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요1:12-13)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저격병을 보내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로 돌아가게 되면 더 쉽게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할 수가 있을 것임.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는 것임. 그 점을 아시고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신의 일정이 바쁘므로)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헤롯 안디바 또는 너희들을 내게 보낸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 땅에서 당분간)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무덤에서 부활하여) 제3일에는 (영생의 몸을 입게 됨으로 말미암아 헤롯왕의 위해가 도저히 먹히지 아니하도록)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이제는 피신할 이유가 없다는 것임. 그 이유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예수님이 져야만 하는 대속의 십자가가 예루살렘에서 세워지기 때문임).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주후 70년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초토화를 의미함).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주님의 재림 전 모두가 회개하기) 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22-35);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22. 예수께서 (유대 땅에 있는)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천국복음을)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진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선민 유대인)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유대교의 제사규정에 따르면 매년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일시에 일년간 지은 선민들의 죄가 한꺼번에 사함을 받게 되는데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그와 다른 것으로 보여서 질문한 것임.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선민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24. (천국에 입장할 수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자신의 인생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고 그 제자로 살아가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다). 25. 집(천국)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단지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고 그것으로 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임) 하나, 27. 저(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천국복음을 듣고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지 아니한)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창12:1-5, 22:12,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단지 혈통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요1:12-13)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13:22-30);
1) 모세오경을 살펴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면목을 한번 보고 싶어서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진면목)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죄인인 피조물들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18-20). 간략하게 그 의미를 풀이하여 봅니다;
2) 첫째, 모세 역시 여호와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인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그 얼굴을 보게 되면 태양보다 더 찬란한 그 빛 앞에 모두 물질처럼 전부 녹아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벧후3:9-13, 계21:23-24, 22:5). 오직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주님의 제자로 평생을 신실하게 살아간 자들만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새 예루살렘에서 보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할 따름입니다(계19:1-10, 21:27). 따라서 모세 역시 생전에는 여호와의 현신만 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출19:21-25, 20:1).
3) 둘째,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두가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어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거룩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 창조주 여호와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 공평하게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4) 구체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을 내주 역사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남은 인생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게 됨으로써 이 세상을 이기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성화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마침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5) 또 하나는,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선민들은 그들의 사회에 있어서 생계의 수단이 사라진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 생계를 돌보아주라고 말씀하십니다(신14:29). 또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회개하는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출19:4-6, 욘1:1-2, 3:1-10, 욥42:10). 그와 같이 살아간 믿음의 열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행적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눅13:28).
6)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의 의미가 본문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을 이끌고 유대 땅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행하면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천국복음을 유심히 듣고 있던 한 유대인이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22-23절);
그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옛날의 선지자 요나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에게 나아가서 전하는 자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23a, 눅11:29-32). 둘째,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24a). 또 하나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4b).
7) 약간의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큰 대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를 조사한 후에 한사람씩 통과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심을 한 자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 역사하심을 따라 온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성화를 이루는 인생을 실제로 살아간 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 요건을 전부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지 못하여 천성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이유는 첫번째 요건은 쉽게 만족시키지만 두번째 요건까지 충족한 성도가 적기 때문입니다(26-27절).
8) 성도들이 좁은 문의 확인과정에서 탈락하게 되는 주요한 요인은 자꾸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을 뒤로 미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사명을 나중에 감당하고자 작심합니다. 당장은 세상적으로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일에 매여서 지내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향년을 맞이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지상명령도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화도 이룬 흔적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좁은 성문에서의 조사과정에서 그만 탈락하고 맙니다(24절);
9) 성문이 그만 닫히고 나면 아무리 외쳐도 그 문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25절). 그 결과는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벌의 지옥불에 들어가서 이를 갈게 된다는 것입니다(28절,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와의 비유는 눅16:19-23임). 오로지 주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간 증거에 따라서 천국에 입장시키고 있으므로 혈통적으로 선민이라고 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28-30). 그와 같은 사실은 일찍이 이방인인 로마인 백부장의 여호와신앙을 칭찬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내용과 같습니다(눅7:9, 마8:10-12).
(2)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저격병을 보내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로 돌아가게 되면 더 쉽게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할 수가 있을 것임.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라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는 것임. 그 점을 아시고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신의 일정이 바쁘므로)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헤롯 안디바 또는 너희들을 내게 보낸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 땅에서 당분간)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무덤에서 부활하여) 제3일에는 (영생의 몸을 입게 됨으로 말미암아 헤롯왕의 위해가 도저히 먹히지 아니하도록)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이제는 피신할 이유가 없다는 것임. 그 이유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예수님이 져야만 하는 대속의 십자가가 예루살렘에서 세워지기 때문임).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주후 70년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초토화를 의미함).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주님의 재림 전 모두가 회개하기) 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1-35);
1) 다음 3가지 사실을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시는 예수님에게 어떤 바리새인이 겁을 주고 있습니다(31절). 둘째, 예수님의 입장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결심하였기에 그 누구의 위협도 전혀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32-33절). 셋째, 여호와를 섬기는 선민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이며 또한 그리스도까지 처형하게 되니 그들은 여호와의 역사적인 심판을 곧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34-35a).
2) 그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회복은 선민 유대인들이 회심하고서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게 되는 그때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35b). 참고로 두가지 사실이 더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질 결심이 확고하므로(33절) 더 이상 변방 유대 땅이나 더 멀리 갈릴리 지방으로 피신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릴리 분봉왕이 예수님을 해치고자 사람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하등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32a). 더군다나 예루살렘까지 저격병을 보내는 권력자 헤롯이므로 예수님이 변방 갈릴리로 피신한다면 더욱 위험해질 뿐입니다.
3) 또 하나는,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에서 여러 날 마지막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32b).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적인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제3일에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32c).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며 주님이 승천하시고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시게 되면 이 세상의 역사는 마침내 마지막 종말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고 맙니다(요14:1-3, 16-20, 마28:18-20, 눅22:28-30, 롬8:17-18);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유대 땅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일행의 발걸음을 사마리아 건너 갈릴리지방으로 되돌려버리고자 하는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전파와 치유의 이적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 선민만의 현세적인 구원과 이스라엘제국의 영광을 세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유대교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벌써 결심하셨기에 그때부터 그 어떠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위협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며칠간 마음껏 천국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전파하고 대속의 죽으심에 이어 영생의 부활이라는 새역사를 맞이하고자 하십니다.
주님이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사도와 제자들을 다시 모아 천국복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감람산에서 40일만에 승천하고 나면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눅24:49, 행2:1-4). 그때부터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자신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의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행1:8, 롬8:13-15).
그와 같은 새언약의 시대에는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성도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간 성화된 인생살이의 모습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흔적이 있어야 새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의 확인과정을 통과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눅13:24-28).
그와 같은 의미의 맥락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영적인 교훈과 메시지를 발견하여 복음의 깊은 뜻을 제대로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