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예수님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주신 교훈과 이 세상을 이기는 제자의 길”(눅14:1-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9. 14. 10:15

제목; “예수님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주신 교훈과 이 세상을 이기는 제자의 길”(14:1-35)

설교일; 주후 2024 11 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 14일 토요일 작성)

 

누가복음 제14장 본문의 말씀은 아무래도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을 때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제1절의 기록 때문입니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3절을 참조하면 랍비들과 기타 바리새인들임) 엿보고 있더라”(14:1).

그 근거를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안식일에 예수님은 주로 회당에서 히브리경전을 읽으시고 그 뜻을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회중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병든 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이지만 회당이란 장소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지방에 있는 회당이 아니라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를 보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이외지역에서는 안식일날 회당예배가 끝나면 예수님 일행은 주로 회당장이나 그 지방의 유력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식사를 초청한 사람이 어느 바리새인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서 함께 떡을 떼고 계십니다. 그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그 집주인은 산헤드린 대공회에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율법학자이며 서기관으로 보입니다. 대공회원인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 집주인이 율법교사인 랍비와 기타 바리새인을 역시 식사자리에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기관이 랍비는 물론 기타 바리새인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제23장에서는 바리새인으로서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3:50-52).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동료이며 역시 바리새인 대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등장하고 있습니다(3:1-5, 7:50-51, 19:39).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그와 달리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바리새인 지도자는 전혀 호의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가 둘입니다;  

하나는, 그 집주인은 일부러 수종병자를 예수님 앞에 두고서 그를 예수님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쳐주는지 않는지 시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2). 만약 병자를 고쳐준다고 하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예수님을 비난할 속셈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그날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들의 신앙상의 주요 문제점 4가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의 ①율법주의(1-6), ②지나친 명예욕(7-11), ③사회적 약자 무시(12-14), ④세속주의(15-24) 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날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수많은 무리와 함께 길을 가면서 한가지 사실을 더 지적하십니다(25). 그 내용이 바로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모든 일을 실행하고자 할 뿐 그 일에 여호와의 영적인 도우심을 전혀 간구하지 아니하고 있는 소위 영적인 맹인들이라는 것입니다(28-32).

그 결과 율법선생인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으니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33-35).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게 되면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26-27, 33).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본문을 한 구절 씩 풀이하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율법학자이며 산헤드린 대공회원임)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집주인을 위시하여 제3절을 참조하면 랍비들과 기타 바리새인들임) (예수님이 또 안식일 율법규정을 어기고 병자를 치료하는지) 엿보고 있더라. 2. (예수님) (식사자리) (맞은편)수종병(水腫病, dropsy,  혈액 가운데 액체 성분이 신체 특정 부위에 가득 차 몸이 붓는 질환이며 고창병이라고도 부르고 있음) 한 사람이 (앉아) 있는지라(본래 병자는 뒷자리에 배치하는데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시비거리를 얻고자 수종병자를 앞쪽에 자리잡게 한 것임). 3. 예수께서 대답하여(그들의 속셈을 진작에 파악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에 대답하는 심정으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바리새인)들이 잠잠하거늘(의중을 단숨에 파악 당한 바리새인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됨을 보고서),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이고도 외식적인 종교생활의 실상을 너무나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세속적인 명예욕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사회적 종교적 신분이 더 높은 인물을) 청한 자(집주인 또는 주최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자연히 모양 좋게 승차가 되는 것임),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당사자의 겸손함을 본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게 되니 그것으로 본인에게도)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살아간 자가 천국에서 높임을 받게 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임). 12. 또 자기를 청한 자(집주인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이 세상에서 모두 보상을 받게 되면 천국의 크레딧이 올라가지 아니함).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주님이 자신의 작은 형제라고 지칭하는, 25:40)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님이 대신 갚아줄 것이므로, 25:40, 46)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왜냐하면) 의인들의 부활 시(5:24-29, 살전4:16, 주님이 그들을 부활시킬 것임)(천국에서) 네가 (여호와로부터) 갚음을 받겠음이라(25:40) 하시더라”(14:1-14);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율법학자이며 산헤드린 대공회원임)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집주인을 위시하여 제3절을 참조하면 랍비들과 기타 바리새인들임) (예수님이 또 안식일 율법규정을 어기고 병자를 치료하는지) 엿보고 있더라. 2. (예수님) (식사자리) (맞은편)수종병(水腫病, dropsy,  혈액 가운데 액체 성분이 신체 특정 부위에 가득 차 몸이 붓는 질환이며 고창병이라고도 부르고 있음) 한 사람이 (앉아) 있는지라(본래 병자는 뒷자리에 배치하는데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시비거리를 얻고자 수종병자를 앞쪽에 자리잡게 한 것임). 3. 예수께서 대답하여(그들의 속셈을 진작에 파악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에 대답하는 심정으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바리새인)들이 잠잠하거늘(의중을 단숨에 파악 당한 바리새인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됨을 보고서),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이고도 외식적인 종교생활의 실상을 너무나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14:1-6);

1)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는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는 회당(synagogue)이 성읍마다 건설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장정 10명이 합의하면 회당을 지을 수가 있으므로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성읍에는 언제나 회당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유대인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도행전 제16장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50년경 사도 바울이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읍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그곳에 회당이 없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로마의 색채가 원체 강해서 유대인들이 정착하기에 매우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일행은 안식일에 유대인 부녀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강가를 찾아가서 그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16:12-15).

3)    특히 예루살렘성전에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공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공회는 모세오경의 선례를 전통으로 삼아 대제사장 이외에 70인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24:1, 11:24-25). 원로들 가운데 다수파가 사두개인인데 그 출신성분이 주로 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그리고 소수파로서 바리새인의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1a).

4)    백성들에게 히브리경전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랍비들 가운데 명성을 얻은 인물을 산헤드린 대공회가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맡고 있는 주요한 일이 바로 종교재판에 있어서의 율법의 해석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을 교법사 또는 율법학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히브리경전의 해석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학식이 높아 산헤드린 대공회의 문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5)    따라서 그 옛날 왕정시대의 관직으로도 부르고 있는데 그것이 사관과 학자를 의미하고 있는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은 바리새인 지도자이므로 히브리경전을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풀이하고 그것을 율법으로 가르치는데 있어서 매우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가 아니기에 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그 가르침을 받은 영적체험이 없습니다.

6)    그에 따라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으로 풀이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상과는 정반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선민만의 구원과 세속적인 선민제국의 패권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가 만약 메시아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7)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선민과 더불어 이방인을 모두 구원의 대상을 삼는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의 판단으로는 예수의 복음사역을 그대로 버려두게 되면 유대 땅에 이어서 예루살렘까지 위험합니다. 그와 같은 배경사를 알게 되면 어째서 바리새인 지도자 서기관이 본문에서 안식일날 자신의 집 식사자리에 나사렛 예수를 초청하고서 그 맞은편에 수종병자를 배치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1-2).

8)    만약 예수가 식사도중에 그 병자를 낫게 한다고 하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대대적으로 성토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흉계를 아시는 예수님이 선수를 치고 있습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그들의 속셈을 진작에 파악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에 대답하는 심정으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14:3).

9)     졸지에 자신들의 은밀한 속셈이 들키고 말았기에 그들은 일시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있습니다(4a). 그 순간 예수님의 빠른 치유행위가 발생합니다. 수종병자를 고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합니다(4b). 그리고 바리새인 지도자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아예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안식일 노동행위금지라는 율법조항을 스스로 어기고 있는지 그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5-6).

10)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의 안식일 예배과정과 지도자의 집에서 떡을 떼는 과정에서는 지극히 거룩하고 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들의 집에 돌아가게 되면 가장 먼저 목이 마른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노동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5). 외식적이고 이중적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의 진면목을 밝히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6).

(2)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세속적인 명예욕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사회적 종교적 신분이 더 높은 인물을) 청한 자(집주인 또는 주최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자연히 모양 좋게 승차가 되는 것임),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당사자의 겸손함을 본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게 되니 그것으로 본인에게도)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이 세상에서 겸손하게 살아간 자가 천국에서 높임을 받게 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임)”(14:7-11);

1)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로 명성이 높은 바리새인 지도자가 주최하고 있는 식사 자리입니다(1). 그러므로 그 휘하에 있는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습니다(3). 그들이 집주인인 지도자 가까이에 자리를 잡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예수님이 진작에 보신 바가 있습니다(7a). 그것을 보고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히브리경전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 얼마나 그들로부터 존경과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지 그 속물근성을 차제에 비유를 사용하여 알기 쉽게 지적하고자 하십니다(7b).

2)    요컨대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명예욕입니다. 우선 비유를 사용하여 상대방 바리새인들이 덜 미안해 하도록 말씀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의 지위와 신분보다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자가 있어 마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8a). 둘째, 뒤늦게 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손님으로 들어오자(8b) 주인이 나서서 그 자리를 내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9a). 셋째, 더 높은 남의 자리를 탐낸 자신의 명예욕이 들통나게 된 그 사람이 부끄러워서 그만 말석으로 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9b). 

3)    예수님의 교훈 2가지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하나는, 손님으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미리 좌석이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예 말석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좋습니다(10a). 왜냐하면, 주인이 와서 그 신분과 지위를 알아보고서 더 높은 자리로 이동을 요청하게 되면 그 모습을 지켜본 일동들이 모두 그 사람의 겸손함을 칭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0b);

또 하나는, 세상의 이치도 그러하지만 특히 하나님나라에서의 이치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현세적인 영광을 추구한 자는 천국에서 비천한 자가 되고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희생하고 헌신한 자는 천국에서 상급과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11).

4)    예수님의 판단으로는 그와 같은 세상적인 명예욕을 청산하지 못하면 히브리경전에 담겨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를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게 되는 불이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천국에서의 상급을 추구하는 것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2-23). 위와 같이 예수님이 벌써 산상수훈에서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12. 또 자기를 청한 자(집주인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이 세상에서 모두 보상을 받게 되면 천국의 크레딧이 올라가지 아니함).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주님이 자신의 작은 형제라고 지칭하는, 25:40)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님이 대신 갚아줄 것이므로, 25:40, 46)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왜냐하면) 의인들의 부활 시(5:24-29, 살전4:16, 주님이 그들을 부활시킬 것임)(천국에서) 네가 (여호와로부터) 갚음을 받겠음이라(25:40) 하시더라”(14:12-14);

1)    선민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율법학자인 산헤드린 대공회원입니다. 바리새인 대공회원이 랍비 중의 랍비이며 모든 바리새인의 지도자입니다(1). 사실 유대교인인 선민들이 배우고 있는 탈무드는 히브리경전에 대한 그들의 율법적인 해석입니다.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히브리경전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생활율법으로 만들어 동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핵심이 선민만의 구원사상이며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현세적인 선민의 영광과 제국적인 패권을 장악하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그에 따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리 선민 유대인들에게 외쳐도 그 효과가 미미합니다. 그 점을 뼈아프게 실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 화 있을진저 벳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0:12-16).

3)    이 세상에서 유대교인인 선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 대공회원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임을 밝히고 있는 인물이 복음서에 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니고데모입니다(23:50-52, 3:1-10, 7:50-51, 19:38-40). 그리고 당대에 율법학자로 가장 명성이 높은 바리새인 대공회원의 이름이 가말리엘입니다(5:34, 22:3).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집주인 바리새인 지도자가 누구인지는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식사 초대한 것으로 판단해보면 그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트집잡아 한번 크게 성토를 해보고자 하는 의중을 지니고 있는 인물입니다(1-2).

4)    후자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이 예리하게 지적하였기에 이제부터는 집주인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자 합니다(12a). 그것이 바로 이왕 식사초대를 하고 싶으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손님을 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높은 신분의 손님 그리고 영향력이 있는 손님을 식사 초대하여 친분을 돈독하게 하면 주인장의 입지구축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그것으로 give and take’가 끝나고 말지만(12b), 그와 달리 주님이 나의 형제인 소자’(25:40)라고 칭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의 비천한 자와 생계의 위험에 처한 자를 식사 초대하여 그들을 섬기고 돌보아주면 그 상급은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크게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13-14, 25:34-40, 46).   

둘째로, “15. 함께 먹는 사람(예수님 일행을 제외한 바리새인)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여)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 16. (예수님이 그자를 가상하게 여기고 진정으로 그 바리새인이 세속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모두가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  사양하여(천국잔치에 참석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이 세상에서 재산을 늘리는데 바빠서)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농사일에 바빠서),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이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므로),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재산도 없고, 직업도 없고, 가족도 없는 불쌍한 자들에게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음. 그것이 신분을 중시하는 고대사회에서는 놀라운 복음임).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선민을 채워도 천국은 그 자리가 남는 법임).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선민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천국복음을 힘있게 전파하여 회심하는 자를 많이)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배척한 선민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8:12, 13:28) 하시니라”(14:15-24);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5. 함께 먹는 사람(예수님 일행을 제외한 바리새인)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여)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 16. (예수님이 그자를 가상하게 여기고 진정으로 그 바리새인이 세속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모두가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  사양하여(천국잔치에 참석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이 세상에서 재산을 늘리는데 바빠서)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농사일에 바빠서),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이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므로),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4:15-20);

1)    바리새인 지도자가 자신의 집에 식사 초대한 손님 중에는 예수님 일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랍비와 기타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손님으로 온 바리새인 중 한사람이(15a)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천국의 잔치에 대하여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15b). 천국 잔치자리에서 떡을 떼는 복을 누리는 것이 참으로 좋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2)    그 바리새인의 태도를 예수님이 좋게 보십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천국의 잔치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는지 그 비결을 차제에 알기 쉽게 하나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해주고자 하십니다. 그 비유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제 시간에 손님들이 오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6-17a). 둘째, 주인이 종을 보내어 오시라고 재촉했지만 그 결과는 비관적입니다(17b). 모두들 그 시간에 다른 급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18a).

3)    셋째, 거절하고 있는 이유가 크게 보아 둘입니다; 하나는, 밭을 사고 소를 사서 농사를 늘리는 재미에 빠져 있어서 잔치자리에 참석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18b, 19). 또 하나는, 가정을 이루었으므로 이제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이 우선이므로 잔치자리에 참석한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20). 요컨대, 세상일에 바빠서 죽은 다음에 가게 되는 천국에서의 잔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반응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세속주의입니다.

4)    실제로 종교의 세속적인 타락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를 동경하거나 그 상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보이는 현실세계의 문제해결이 우선이며 그 열매가 달콤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천국의 잔치자리에 들어가고 싶다면 양손에 떡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 있는 떡 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라는 떡을 손에서 내려놓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5)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지상명령을 실천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여 이 세상에서의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한 성도에게는 주님이 이 세상에서 돌보아 주는 은혜가 또한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2:31).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사도 바울처럼 간구함으로써 그 열매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9:1-3, 10:1, 16:7, 11, 4:11-13).

(2)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재산도 없고, 직업도 없고, 가족도 없는 불쌍한 자들에게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음. 그것이 신분을 중시하는 고대사회에서는 놀라운 복음임).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선민을 채워도 천국은 그 자리가 남는 법임).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선민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천국복음을 힘있게 전파하여 회심하는 자를 많이)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배척한 선민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8:12, 13:28) 하시니라”(14:21-24);

1)    여기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는 집주인은 여호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21a). 여호와가 천국잔치를 베풀면서 가장 먼저 초청한 대상은 선민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입니다(1절과 3).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온통 현세적인 것이며 세속적인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갈 수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천국의 잔치자리는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18-20). 당장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 즐겁고 바쁩니다;

2)    히브리경전을 선민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그들에게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그 존경과 섬김이 참으로 달콤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특권을 가진 그들이 서로서로 의인이라고 칭찬하는 그것이 이미 하나님나라에 들어간 것 이상으로 흡족합니다(11-12). 결국 그들은 천국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자 합의하고 있습니다(18a). 그 사실을 파악한 집주인은 그 대안으로 선민사회에서 비천하고 가난한 자로 자리매김이 되고 있는 자들을 전부 잔치자리에 초청하고 있습니다(21).

3)    그래도 빈 자리가 많습니다(22). 따라서 마지막으로 초청이 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23). 처음에는 초청대상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차례로 초청되고 있는 그 2집단은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결코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 첫번째 집단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입니다. 그 두번째 집단은 선민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4)    구체적으로,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거지 나사로(16:20-21)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자가 아니며 무위도식하고 있는 걸인에 불과합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천국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선민 유대인들을 괴롭히며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하여 징벌을 받을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천국잔치에 초청대상이 된다는 것입니까?...

5)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선민 유대인만의 구원과 여호와 말씀의 독점주의가 빗어내고 있는 엄청난 잘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선민의 제국을 건설해주고 유대인들이 세상적인 패권을 행사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여 주는 우상이나 도구로 여기고 있는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주객이 전도가 된 선민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바로 잡자고 하면 그들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의 행태부터 시정해야 합니다. 만약 시정이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 본문 24절의 말씀이 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과 비판이 본문에서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25. 수많은 무리가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 식사를 끝내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갈새 (앞서가시던) 예수께서 (그 몸을) 돌이키사 (무리를 보면서)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많은 무리인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신분과 소유를 뛰어넘어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천국에서 영생의 상급을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의 것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임),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6:24, 이른바 예수님의 제자도임. 예수님처럼 그 제자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자기 희생과 헌신이라는 대속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임).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11:4-9, 세상적인 것으로 하늘에 닿는 망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법임. 바벨탑이 그 좋은 선례임)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진인사 대천명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임. 사람이 계획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도모할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창조주 여호와이신 것임, 16:9). 31. (이 세상의) 어떤 임금다른(천상의)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병사) 일만 명으로써 저(하늘의 군사)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영적인 안목을 발휘하여 승리하지) 못할 터이면 그가(여호와나 그리스도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종말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이 세상에서 이룩한 위업을 포함하여)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영적인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라고) 하시니라”(14:25-35);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5. 수많은 무리가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서 식사를 끝내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갈새 (앞서가시던) 예수께서 (그 몸을) 돌이키사 (무리를 보면서)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많은 무리인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신분과 소유를 뛰어넘어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천국에서 영생의 상급을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의 것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임),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6:24, 이른바 예수님의 제자도임. 예수님처럼 그 제자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자기 희생과 헌신이라는 대속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임)”(14:25-27);

1)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한사람의 바리새인 지도자가 식사를 같이하자고 예수님 일행을 자택으로 초청했습니다(1). 그날 식사자리에는 집주인의 휘하로 보이는 랍비와 기타 바리새인도 초청되어 있습니다(3a). 그리고 예수님이 앉으신 맞은 편에는 수종병자를 일부러 배치하고 있습니다(2). 주인장의 의도를 알아챈 예수님이 선수를 쳐서 그의 입을 봉한 다음에 그 병자를 고쳐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3b 4).

2)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종교생활의 문제점을 위시하여 그들의 세속주의 및 명예욕에 대하여 예리하게 지적하십니다(5-14). 끝으로 천국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들이 세상적인 종교생활에 바빠서 영생구원과 천국복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 잔치자리에는 선민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가게 된다는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대한 말씀까지 전해 주십니다(16-24).

3)    할 말을 마치신 예수님은 일행과 함께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그때 그 집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무리들이 합세하여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25a). 그 도중에 뒤를 돌아보시면서 예수님이 군중에게 주시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25b).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그때 자세하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요체가 다음과 같습니다;

4)    첫째, 성도가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온전히 살아가자면 무엇보다도 양손에 쥐고 있는 떡 가운데 하나를 미련 없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인간관계를 뒤로하고 육신 및 목숨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26). 한마디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은 인생 가운데 오로지 그 푯대만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 세상에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유한한 삶 가운데 구원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제자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그 점을 훗날 사도 바울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영생의)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3:10-12);

6)    둘째,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7). 그런데 성도가 져야만 하는 자신의 십자가의 무게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보다는 훨씬 가벼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 한 겨리가 되어 복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성도가 감당하는 사역의 무게가 훨씬 약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은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하신 주님이 감당하십니다.

7)    참고로, 마태복음 제11장의 말씀이 그와 같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그런데, 마태복음 제16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도에 있어서 한가지 내용이 더 들어 있습니다.

8)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16:24)라는 구절입니다. 의사 누가는 어째서 그 구절을 생략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로는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도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구절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것”(14:27)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2)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11:4-9, 세상적인 것으로 하늘에 닿는 망대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법임. 바벨탑이 그 좋은 선례임)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진인사 대천명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임. 사람이 계획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도모할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창조주 여호와이신 것임, 16:9). 31. (이 세상의) 어떤 임금다른(천상의)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자신이 가진 세상적인 병사) 일만 명으로써 저(하늘의 군사)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영적인 안목을 발휘하여 승리하지) 못할 터이면 그가(여호와나 그리스도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종말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14:28-32);

1)    창세기 제10장과 제1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류 최초의 ()영웅 니므롯이(10:8-9)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로 진출한 다음에 북동진하여 마침내 메소포타미아의 원주민인 셈족을 정복하고 함족의  제국을 건설합니다(10:10-12, 11:2). 그는 수가 많은 셈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에 닿고자 하는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11:3-4). 그것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처럼 제국의 영광을 온세상에 드러내면서 백성들의 대동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조작의 상징적인 방법입니다.

2)    그러나 제국을 형성한 정복자들의 그러한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이유가 둘입니다; 하나는, 인위적인 노력을 총동원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마천루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14:30). 또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자 하는 인간제국의 황제의 야심을 여호와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11:6-9).

3)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정복왕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군대로서는 여호와의 군대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31-32, 왕하19:34-35, 26:53).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두가지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옛날 바벨탑을 쌓듯이 높은 망대를 건설해보아야 도저히 천국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28). 그 점을 파악하게 되면 얼른 창조주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생각을 접는 것이 옳습니다(32). 끝까지 고집을 피우게 되면 창피만 당할 따름입니다(29-30);

4)    둘째, 아무리 패권국의 군대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천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31). 그 점을 알게 되었으면 얼른 여호와 앞에 겸손하게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32). 고집을 부리게 되면 제국이나 패권국이 생각보다 일찍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리석은 시도를 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바로 선민사상과 현세적인 구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교지도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대중에게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그들 유대교지도자 집단의 회심을 종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이 세상에서 이룩한 위업을 포함하여)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영적인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라고) 하시니라”(14:33-35);

1)    창세기 제21장에서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는(4:16) 아브라함이 그랄 땅의 동쪽 변경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뿌리 깊은 에셀나무(tamarisk tree)를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21:33). 그 의미는 그 옛날의 셋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부디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입니다(4:25-26).

2)    과연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모든 위업은 물론 후계자인 약속의 아들 이삭까지 여호와께 바치고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 점이 궁금하신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중심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이삭을 데리고 브엘세바에서 3일길 떨어져 있는 모리아산까지 북상하여 그를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22:1-4).

3)    여호와의 요청에 아브라함이 엄청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여호와의 손에 맡길 수가 있는 것일까요? 다른 이방인들의 큰 우상처럼 여호와도 인신제사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많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지만 아브라함이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 내용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9. 그가(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9).

4)    나름대로 쉽게 설명을 해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늙은 부부인 자신과 아내 사라가 얻을 수 있는 아들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두사람을 젊은 몸으로 회춘하게 하고 또한 불임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라에게 임신의 능력을 부여하여 낳게 한 기적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여호와의 선물이며 여호와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생명의 주인이 이제 돌려달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은 거절할 명분이 없습니다. 더구나 창조주 여호와는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게 되면 그를 다시 살려서 아브라함 부부에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역사섭리와 그분의 인간사랑을 믿고서 아브라함이 따르도록 결심합니다!”.

5)    여호와께서는 모리아산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여호와께 번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그 목을 내리치는 아브라함의 팔을 천사를 보내어 급히 중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22:10-12). 그리고 숫양을 주어서 대신 번제물로 삼도록 조치합니다(22:13, 1:29). 그것이 훗날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지는(대하3:1) 모리아산에서 발생하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입니다(22:14).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22:12).

6)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올바르게 살아가자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소유물을 전부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며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33). 그것은 모리아산의 시험을 통과하는 아브라함의 마음가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의 방식입니다(16:24);

7)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유한한 육신과 목숨 그리고 모든 소유물을 바쳐서 창조주 여호와로부터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면 그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달성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35b, 22:28-30). 그와 같은 신앙자세로 살아가는 성도가 이 세상의 만민을 영생으로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34). 그러므로 그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지 아니하는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35a).

결론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안식일날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게 되신 예수님 일행입니다. 그 자리에 수종병자를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자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진작에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이고도 이중적인 율법생활의 모습을 적시하면서 무사히 그 병자를 고쳐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세속주의와 명예욕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나아가서 유대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 곧 선민만의 구원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이 세상에서 외세를 굴복시키고 선민의 제국을 만들어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패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그 야욕을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나아가서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있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천국복음이 비천한 자와 가난한 자에게 먼저 받아들여지고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됨을 설명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의 식사가 끝나자 예수님은 길을 가면서 많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그 요지는 양손에 떡을 쥐고 있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얻자면 그보다 못한 것을 주님께 바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자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소유와 유한한 목숨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창세기 제22장에 기록되어 있는 모리아산에서의 아브라함의 신앙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아무쪼록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