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갈릴리의 이방인지역과 유대인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차이”(눅8:26-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8. 13. 01:14

제목; “갈릴리의 이방인지역과 유대인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차이”(8:26-56)

설교일; 주후 2024 9 2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 13일 화요일 작성)

 

사도 바울이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4:16) 아브라함이 독자적인 믿음의 나그네길을 떠나게 되는 시점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명령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친척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아브라함은 부친 데라를 따라 벌써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왔기에 당시 북부 시리아인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하란에 머물고 있던 그 시점에서는 고향친척을 떠나온 것입니다(11:31). 한마디로, 이국 땅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께서 부자인 부친 데라가 계속 머물고자 하는 하란 땅까지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람이 부친 데라를 하란에 남겨두고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땅 가나안으로 남하를 합니다(12:4-5). 그렇게 아버지의 집을 떠남으로써 75세의 아브람은 당시 최고의 문명지역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변방인 미개지역 가나안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자식이 없던 늙은 부부 아브람과 사라는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24년을 살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그 땅의 가뭄을 피하여 블레셋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비옥한 평야 그랄로 이주하게 됩니다(19:28, 20:1).

여호와의 떠돌이 선지자인 아브라함은 그랄 평야의 변두리 물이 없는 들판에서 목축하고 있지만 종들과 함께 우물을 파면 지하수가 터져 나오는 이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21:25, 26:15). 더구나 그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에 90세의 안방마님 사라가 100세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아주는 놀라운 일이 여호와의 은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21:1-7).

그렇지만 원주민 블레셋 족속들이 떠돌이 호족인 아브라함의 우물을 계속 빼앗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 가족은 그랄 평야의 동쪽 변경인 브엘세바로 밀려나게 됩니다(21:14, 31). 그곳에서 원주민 블레셋 족속에게 다시 우물을 빼앗기게 되면 그때는 국경을 넘어 가나안 남부지역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탐내었다가 여호와의 역사개입으로 재앙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20:2-18). 그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그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여호와의 저주가 그 땅에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20:7).

따라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가족이 브엘세바를 떠나기 전에 급히 군대장관 비골만 대동하고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옵니다(21:22). 그리고 서로 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합니다(21:23-24).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판 우물을 다시는 원주민 블레셋인들이 빼앗지 아니한다는 조건으로 그 평화조약의 체결에 응하고 있습니다(21:30-31).

아비멜렉과 비골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 우물가에 에셀나무를 심고 약속의 아들 이삭과 함께 마치 그 옛날의 셋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영생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1:33, 4:26). 이 세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모든 기업과 영광을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더라도 유한한 인생을 벗어나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고 싶다는 아브라함의 결단이 과연 확고한 것일까요?... ;

그 점을 시험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명령이 바로 훗날 솔로몬의 성전이 자리를 잡게 되는 모리아산으로 올라가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22:1-2, 대하3:1). 브엘세바에서 3일간 북상하여 아브라함은 십대인 이삭을 데리고 종들과 함께 모리아산 기슭에 당도합니다(22:4-5).  

그리고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 정상에 올라간 그는 망설임없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여호와께 번제물로 바치고자 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급히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합니다(22:10-12a). 그리고 그 산에서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주어 그것으로 대신 번제를 바치도록 조치합니다(22:13-14). 그것이 소위 여호와 이레의 은혜이며 그때 아브라함은 진실로 여호와 경외자라고 불리게 됩니다(22:12b).

이상의 창세기 기록에서 다음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는,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 만민에게 골고루 전파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사람은 고향과 친척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이방 땅으로 나아가서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 동일한 취지에 따라 나사렛 예수가 만민구원을 위하여 고향사람과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특혜를 베풀지 아니하고 이방인에게 주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는 고향사람도 몰라보고 있는 고약한 선지자라는 비난을 받고 그만 내쫓기고 맙니다(4:27-30).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성취와 후계체제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창조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한한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3:10-16, 11:16). 여호와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영생구원의 목표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에 일부러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 것이지 모리아산에서 시험하고 계십니다(22:1-2, 21:33).

그와 같은 맥락에서 먼 훗날 나사렛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아 3가지 난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고향사람과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혈연과 지연적인 연고를 쫓아 자신들에게 특혜를 달라고 하는 이기적인 요청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선민과 이방인을 모두 구원하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1:12-13, 3:16). 그러므로 고향사람이라고 하여 또는 동족이라고 하여 그들에게 여호와의 공의의 원칙을 벗어나는 불공평한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4:24). 그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나고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당시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습이 지극히 현세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영생구원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질병과 장애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사렛 예수에 의하여 고침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선적으로 선포하고 계시는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은 뒷전이 되고 맙니다.

그에 따라 기껏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병과 장애를 치유하여 주지만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영생구원을 소망하지 아니하고 있기에 그만 재발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축사(逐邪)의 이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어주어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속에 온전히 깃들지 못하고 있기에 쫓겨난 귀신이 더 많은 귀신을 데리고 다시 그 몸에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11:24-26). 그 결과 나중의 참상이 더 심해집니다.

셋째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선민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굉장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유대 땅에 보내어 주시면 그가 여호와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과 같은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히스기야 왕 때에 그러한 여호와의 역사가 임한 적이 있습니다(왕하19:34-35). 그것이 선민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시온의 영광이며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선생인 랍비를 비롯하여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대교인들은 하나같이 메시아가 건설하는 선민의 제국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나사렛 예수가 외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구원하는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여호와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5:24-29).

그는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등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지만 결코 외세인 로마총독부와 이두매 출신인 헤롯 왕가를 가나안 땅에서 쫓아낼 생각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깊이 성찰해보면, 그것은 세상권력자의 변동만 가져오는데 불과하며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을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기에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교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이 소망하고 있는 단지 선민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여기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주장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은 유대교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체계를 해치는 지극히 위험한 사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때문에 유대교지도자들은 이단아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때 오늘의 본문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당시 가나안 지역의 동편은 헬라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이방 지역입니다. 헬라인들이 무려 10개의 성읍을 이루고 있기에 유대인들이 그것을 데가볼리(헬라어 Δεκάπολις, 영어로는 Ten Citie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호수의 동편에 있는 거라사인의 땅에 가셔서 복음사역을 하려고 합니다(8:26). 그러나 그 지역에는 많은 귀신들이 사람을 숙주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이름이 군대 귀신입니다(8:30). 예수님이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자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 문제는 군대귀신들이 이제는 숙주인 사람에게서 내쫓기게 되었기에 예수님에게 부디 돼지의 몸에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다. 내쫓긴 귀신들이 예수님의 허락을 얻어 일시에 2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8:32).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달리 육신만 지니고 있는 돼지에게는 악한 영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영성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돼지무리가 견디지 못하고 호수로 내달아 모두 죽고 맙니다(8:33). 그 모습을 보고서 많은 돼지를 치고 있던 목자들이 마을로 뛰어가서 양돈업자들에게 그 사실을 즉각 보고합니다(8:34).

(3)  셋째, 선민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돼지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돈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양돈업자들이 협회를 구성하고 목자들을 고용하여 돼지를 산과 들판에서 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선지자인 예수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협회의 이익을 크게 해치고 있습니다. 이익집단인 협회의 회원 곧 양돈업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당장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의 땅에서 내어쫓자는 것입니다(8:37a). 그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그들에게 전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그 지역에서 병든 자와 장애자 그리고 귀신들린 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줄 기회도 얻지 못하고 갈릴리호수 건너편 유대인지역으로 되돌아가고 마시는 것입니다(8:37b).  

선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호수 서편으로 돌아오자 예수님에게서 특이한 이적 2가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12해 혈루병에 시달리고 있던 여인이 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이상하게도 여호와의 치유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전이되고 있는 것입니다(8:44). 예수님이 그 사실을 인지하시자 급히 그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이 허락하지도 아니하였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과년한 딸이 죽게 되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녀를 예수님이 살려낸 것입니다(8:54-55). 그것은 나인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7:11-15).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각각 한번씩 죽은 자를 살려낸 기록이 있습니다(왕상17:21-22, 왕하4:33-37). 이제 나사렛 예수는 2차례나 죽은 자를 살려내었으므로 큰 선지자가 아니라 구원주인 그리스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주로 영접하면서 그동안 익숙한 세상적인 이익을 내려놓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시작합니다. 그와 달리 거라사의 주민들과 같이 경제적인 이익을 지키고자 협회의 힘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면 돼지나 키우면서 군대귀신과 함께 계속 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역적이고도 집단적인 이익을 떠날 때에 비로소 그 옛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행보를 이 세상에 보여줄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16:24, 28:18-20, 24:44-49, 1:8).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함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26. 그들이(예수님 일행이 호수의 서북부 유대인 성읍에서 어선을 타고서) 갈릴리 맞은편(호수의 동부를 말함거라사인(이방인 성읍 거라사에 살고 있는 헬라인을 말함. 참고로 가나안 동편에는 헬라인이 살고 있는 10개의 성읍이 있음. 그 중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거라사인의 성읍의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음, 5:1)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악한 영에게 심하게 시달리어 마을에서 쫓겨나 외떨어진 곳에서 마치 짐승처럼 살고 있는 자임).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첨하여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임)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악한 영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육신은 일부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쇠사슬과 쇠고랑을 끊기도 하는 것임. 그것은 무당이 접신하여 작두를 맨발로 타는 것과 같음).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창조주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적인 욕심만을 이루고자 살아가는 이방인 성읍이기에 귀신이 득실거리고 있는 것임). 31. 무저갱(20:3, 마귀와 그 부하인 악한 영들을 감금하게 되는 감옥으로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는 지하에 설치된 것임)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곳에(모세의 율법을 모르고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므로 돼지를 식용으로 키우고 있음, 15:15)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돼지는 먹성이 좋아서 산의 식물뿌리까지 파헤쳐서 먹어 치우고 있음. 그러므로 일부러 돼지 떼를 풀어서 손쉽게 정지작업을 하기도 함).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 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육신만을 가지고 있는 짐승인 돼지는 영성이 없으므로 악한 영인 귀신의 숙주가 될 수 없음. 그러므로 귀신의 지배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마는 것임), 34. (품삯을 받고 돼지를)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사실은 돼지 떼의 주인인 양돈업자들에게 보고한 것임),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이 그 몸에서 쫓겨)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그들 이방인들은 그와 같은 귀신을 쫓아낸 축사의 이적을 보고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도리어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을까 그것을 겁내고 있을 뿐임),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 대신에 그들은 하나같이 양돈협회에 모여서 의논한 결과 자신들의 재산을 축내고 집단의 이익을 해치고 있는)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악한 영들이 쫓겨나서 이제는 온전한 정신이 된 그) 사람이 함께 있기를(예수님 일행을 따라가서 그 제자로 살아가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이제부터 이방지역에서는 현지인을 통하여 여호와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고자 하시는 것임, 18:11, 19:8-1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그 결과 요단 강 동편에 살고 있는 헬라인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온 자들이 있는 것임, 12:20-24)”(8:26-39);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6. 그들이(예수님 일행이 호수의 서북부 유대인 성읍에서 어선을 타고서) 갈릴리 맞은편(호수의 동부를 말함거라사인(이방인 성읍 거라사에 살고 있는 헬라인을 말함. 참고로 가나안 동편에는 헬라인이 살고 있는 10개의 성읍이 있음. 그 중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거라사인의 성읍의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음, 5:1)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악한 영에게 심하게 시달리어 마을에서 쫓겨나 외떨어진 곳에서 마치 짐승처럼 살고 있는 자임).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첨하여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임)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악한 영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육신은 일부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쇠사슬과 쇠고랑을 끊기도 하는 것임. 그것은 무당이 접신하여 작두를 맨발로 타는 것과 같음).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창조주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적인 욕심만을 이루고자 살아가는 이방인 성읍이기에 귀신이 득실거리고 있는 것임). 31. 무저갱(20:3, 마귀와 그 부하인 악한 영들을 감금하게 되는 감옥으로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는 지하에 설치된 것임)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곳에(모세의 율법을 모르고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므로 돼지를 식용으로 키우고 있음, 15:15)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돼지는 먹성이 좋아서 산의 식물뿌리까지 파헤쳐서 먹어 치우고 있음. 그러므로 일부러 돼지 떼를 풀어서 손쉽게 정지작업을 하기도 함).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 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육신만을 가지고 있는 짐승인 돼지는 영성이 없으므로 악한 영인 귀신의 숙주가 될 수 없음. 그러므로 귀신의 지배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마는 것임)”(8:26-33);

1)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편에 있는 산골마을 나사렛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자신에게 익숙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갈릴리 호수 서편에서 주로 활동을 했습니다(4:14-16, 31-37).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8명이 갈릴리 출신입니다(6:14-15a). 그런데 이번에는 갈릴리 호수의 동편으로 건너가서 이방인 특히 헬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성읍에서 복음사역을 하고자 하십니다. 어선을 타고 가서 호수 동편에 당도하였는데 그곳이 요단강 동편에 있는 거라사인들이 북상하여 만든 작은 성읍입니다(26). 일부 학자들이 그 이름을 거라사(쿠르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그 위치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도 마태가 그 지명을 거라사인의 땅이나 지방’(8:26, 5:1)이 아니라 아예 가다라 지방’(8:28)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성경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활발합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서 무역업을 경영한 것으로 보이는 마가나 가나안 일대의 역사와 지리에 정통했던 의사 누가의 기록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의사 누가가 갈릴리 맞은 편 거라시인의 땅’(26)이라는 표현에 충실하게 한번 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3)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에 거라사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큰 성읍 거라사(제라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거라사인들이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북상하여 작은 성읍 거라사(쿠르시)를 건설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거라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므로 그곳에서는 두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돼지 떼를 많이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있지만(11:7-8) 이방인들은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4)    또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악한 영들이 득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 두가지 현실이 당장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고 있습니다(27-32). 많은 귀신에게 지배를 받고 있기에 예수님을 만난 그 사람은 먼저 귀신소리를 내고 있습니다(28). 하지만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성을 대하자 비록 수가 많은 군대귀신이지만 창조주의 위력 앞에 복종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29-30). 그러나 예수님의 한마디에 속절없이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와 무저갱으로 곧바로 들어가게 되는 신세만은 면하고 싶습니다(31);

5)    그러므로 귀신들이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쫓아내시니 그 대신에 산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저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굽어 살펴주십시오”(32절 의역). 그러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영성이 없는 돼지는 악한 영들이 들어와서 거주하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 곧장 호수로 내리 달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목자들과 돼지 떼의 주인들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요?...

(2)  34. (품삯을 받고 돼지를)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사실은 돼지 떼의 주인인 양돈업자들에게 보고한 것임),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이 그 몸에서 쫓겨)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그들 이방인들은 그와 같은 귀신을 쫓아낸 축사의 이적을 보고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도리어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을까 그것을 겁내고 있을 뿐임),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 대신에 그들은 하나같이 양돈협회에 모여서 의논한 결과 자신들의 재산을 축내고 집단의 이익을 해치고 있는)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8:34-37);

1)    양돈업이라고 하는 것이 가족들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가 아니라 거라사인의 성읍에서는 일종의 기업입니다. 그리고 양돈업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강력한 경제적인 공동체인 협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이익집단의 힘이 실로 막강합니다. 그 이유는 지방유지들이 양돈업에 손을 대고 있으므로 자연히 그들의 이익집단인 그 협회가 성읍의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양돈협회의 돼지 떼를 치고 있던 일꾼들이 2천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일시에 호수로 내달아 익사하게 되는 광경을 보고서는 즉시 성읍으로 달려가 협회에 보고하고 있습니다(34). 양돈협회에서는 현지조사를 위하여 조사원을 파견합니다(35a). 조사원들이 현지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 두가지입니다;

3)    하나는, 많은 귀신이 들려 있던 외톨이 정신병자가 멀쩡하게 나아 있는 광경입니다(35b). 그 모습을 보고서 나사렛 예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35c). 또 하나는, 2천마리나 되는 돼지의 시신이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입니다;

그날 협회에서는 즉각 회원인 양돈업자들을 소집합니다(36).

4)    의견수렴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민의 이익을 크게 해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일행을 즉시 우리 성읍에서 물러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귀신이 들어있는 정신병자 하나 고치겠다고 멀쩡한 우리의 돼지를 2천마리나 희생시키고 있는 그런 인물을 우리 성내에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37).

5)    그런데 아주 소수의견이지만 여호와의 선지자 예수의 일행을 맞이하여 차제에 성내의 불치병자와 장애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구제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당장 그것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훗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 일행을 찾아오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12:20-24).

(3)  38. 귀신 나간(악한 영들이 쫓겨나서 이제는 온전한 정신이 된 그) 사람이 함께 있기를(예수님 일행을 따라가서 그 제자로 살아가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이제부터 이방지역에서는 현지인을 통하여 여호와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고자 하시는 것임, 18:11, 19:8-1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그 결과 요단 강 동편에 살고 있는 헬라인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온 자들이 있는 것임, 12:20-24)”(8:38-39);

1)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그녀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어주자 그때부터 물심양면으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에 도움을 주면서 여제자로 따라다니고 있습니다(8:2-3). 훗날 여리고성의 거지 바대매오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신위적인 능력으로 맹인신세를 면하게 되자 즉시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18:43).

2)    그런데 거라사인의 성읍에서 군대귀신의 지배로부터 나음을 입게 된 그 사람이 예수님 일행을 쫓아가서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하자(38a) 예수님의 답변이 의외입니다(38b);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8:39a). 그 의미는 두가지로 풀이가 됩니다;

3)    하나는, 고향에 남아서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에 대하여 이웃에게 증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지인에 의한 전도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39b).  또 하나는, 지금은 양돈협회의 요청에 의하여 부득이 그 성읍을 떠나게 되지만 훗날 사도와 제자들에 의하여 천국복음이 그곳에 전해질 것입니다.

4)    그때를 위하여 그 사람의 이야기가 두루 전해지고 많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증거자로 그자가 현지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훗날 베다니의 나사로가 무덤에서 4일만에 예수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자 그 집을 찾아오는 자들이 많아지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12:11). 그래서 그런지 훗날 그 지역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헬라인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12:20-24).

둘째로,40. 예수께서 (갈릴리호수 서편 유대인 지역으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그 지역의 회당을 운영하고 있는 유력한 자이며 경건한 자)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내려놓고)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왜냐하면)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당시에는 13-14세에 시집을 가므로 과년한 딸이며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무남독녀이거나 고명딸임)이 있어 죽어감이러라(위독한 상태이므로 체면을 차릴 형편이 아닌 것임). 예수께서 (백부장의 청을 받아 들여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49절 참조) 가실 때에 (때마침 많은)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오랜 지병이며 불치의 병, 그것도 피를 흘리는 병이므로 율법상 불결한 것으로 치부가 되어 심히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만 여인임), 44. 예수의 뒤로 (살그머니)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예수님의 선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많은 사람이 서로 밀치고 있으므로 누구인지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임).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여호와의) 능력이 (빠져)나간 줄 앎이로다(내가 인지하고 있다) 하신대, 47. 여자가 (예수님이 벌써 알고 계시므로)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실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의 전이로 혈류병이 나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완전한 영원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여기서 얻게 된 것임)”(8:40-48);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40. 예수께서 (갈릴리호수 서편 유대인 지역으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그 지역의 회당을 운영하고 있는 유력한 자이며 경건한 자)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내려놓고)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왜냐하면)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당시에는 13-14세에 시집을 가므로 과년한 딸이며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무남독녀이거나 고명딸임)이 있어 죽어감이러라(위독한 상태이므로 체면을 차릴 형편이 아닌 것임). 예수께서 (백부장의 청을 받아 들여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49절 참조) 가실 때에 (때마침 많은)무리가 밀려들더라”(8:40-42);

1)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이방지역 거라사(쿠르시)에서 어선을 타고 갈릴리호수의 건너편 유대인지역으로 건너왔습니다(40a). 그런데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수평으로 이동하여 막달라 지경으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북서쪽으로 비스듬히 이동하여 게네사렛 지경으로 들어왔는지 가름할 수가 없습니다.

2)    어느 방향으로 호수를 건너왔는지 몰라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서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오시기를 고대하면서 연일 그 어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도착소식이 성읍에 전해지자 순식간에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40b).

3)    그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예수님을 당장 모시고 가서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가족을 치료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날 가장 먼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고 있는 신분이 높은 인물이 한사람 있습니다(41b). 그가 바로 그 마을의 유지인 회당장 야이로입니다(41a). 그는 경건한 자이며 부자로서 지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위신과 체면을 내려놓고 연하인 나사렛 예수에게 엎드려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4)    회당장 야이로의 사정이야기가 의사 누가에 의하여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대충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부디 저의 집을 방문하셔서 저의 딸의 중병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집안의 금지옥엽이며 혼기를 앞두고 있는 과년한 딸인데 그만 위독합니다. 이렇게 엎드려서 간청을 드립니다”(42a). 많은 마을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지만 회당장 야이로는 그러한 눈치와 체면을 볼 처지가 전혀 아닌 것입니다;

5)    그 점을 파악하신 예수님이 기꺼이 그의 안내를 받아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42b). 그런데 여러 달 전 대도시 가버나움에서 로마인 백부장의 부하를 낫게 해준 일이 기억나고 있습니다(7:6-10). 만약 회당장 야이로가 그때의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그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집에 있는 제 딸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을 보였다고 하면 그 순간 집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그의 딸이 낫게 되는 이적이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6)    하지만 야이로는 자신의 집에 의원을 모셔가듯이 그렇게 나사렛 예수를 모시고 가야만 외딸의 중병이 낫게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한사람의 선지자가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을 발휘하는 구원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회당장인 야이로가 무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7)    참고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창조주로서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는 엄청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데(15:6, 17:1) 그러한 여호와신앙이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없습니다. 그에 따라 여호와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창조주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점은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선민의 현세적인 구세주로만 믿고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교인의 이기적인 믿음의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8)    당장은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과 유대인인 지방유지 회당장의 믿음의 차이를 비교해 보더라도 그 수준이 다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담담하게 야이로의 뒤를 따라 그 집으로 행차를 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러한 믿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새로운 사건이 무리가 밀려들고 있는 현장에서 하나 발생하고 있습니다(42c).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2)  43.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오랜 지병이며 불치의 병, 그것도 피를 흘리는 병이므로 율법상 불결한 것으로 치부가 되어 심히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만 여인임), 44. 예수의 뒤로 (살그머니)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예수님의 선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많은 사람이 서로 밀치고 있으므로 누구인지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임).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여호와의) 능력이 (빠져)나간 줄 앎이로다(내가 인지하고 있다) 하신대, 47. 여자가 (예수님이 벌써 알고 계시므로)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실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의 전이로 혈류병이 나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완전한 영원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여기서 얻게 된 것임)”(8:43-48);

1)    여인의 몸에서 피가 비치고 있으면 그것을 율법에서는 불결하다고 보고 그와 접촉이 된 자는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5:19). 그러므로 혈루병 여인은 마치 나병환자처럼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음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소망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두고 있습니다.

2)    그의 옷자락만 살며시 만져도 창조주 여호와의 긍휼과 능력 베푸심으로 당장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녀의 절실한 소원이 현장에서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44). 몇 달 전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깨끗함을 받기를 소원한다고 하는 말이 없었으며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선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5:12-13) 창조주의 능력이 예수님의 옷을 통하여 그녀에게 흘러 나가는 기가 막힌 일이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44절과 46).

3)    깜짝 놀라신 예수님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누가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당사자인지를 찾고 계십니다(45a). 두리번거리시는 예수님에게 당사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사도 베드로가 밀고 당기는 무리가 많아서 누구인지 특정할 수가 없다고 대답할 뿐입니다(45b).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단호하십니다. 나에게 살그머니 손을 댄 자가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로 말미암아 빠져나갔는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십니다(46).

4)    그 눈길을 12년 혈루병에 시달린 그 여인이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47a). 지난 12년 동안 자신의 혈루병을 고쳐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가진 재산도 거의 사용해버린 불쌍한 여인입니다(43). 이제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으므로 그 사실을 그리스도에게 고하고 다시 재발되는 불행을 막아야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실토를 하고 있습니다(47b);

 

그녀의 자초지종을 듣자 예수님이 쾌히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

셋째로,49. 아직 (예수님이 병이 나은 여인과)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예수님을 중한 병을 고치는 선지자 정도로 보고 있는 것임)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이제는 사후약방문, 死後藥方文이라고)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11:26). 그리하면 (회당장 야이로 너의) 딸이 구원(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측근인 3수행제자, 9:28, 26:37-38)아이(당사자)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영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육신이 아니라 영이 죽은 것이 진짜 죽음임, 7:4. 영이 살아 있는 자는 그 영을 죽은 육신에 들어가게 하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임, 37:9-10, 왕상17:22, 11:11)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며 영이신 하나님의 세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달리달굼, 5:41)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예수님이 2번째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므로 그것은 그 옛날 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는 여호와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위력임. 그런데 영생의 부활이 일시적인 부활보다는 훨씬 중요하며 진정한 구원이므로 단지 육신적인 부활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 것임. 따라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음, 24:45-48)”(8:49-56);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49. 아직 (예수님이 병이 나은 여인과)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예수님을 중한 병을 고치는 선지자 정도로 보고 있는 것임)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이제는 사후약방문, 死後藥方文이라고)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11:26). 그리하면 (회당장 야이로 너의) 딸이 구원(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얻으리라 하시고”(8:49-50);

1)    집으로 가는 도중에 그와 같은 놀라운 치유의 사건을 목격한 회당장 야이로는 이제 집에 예수님이 도착만 하면 외딸은 당연히 낫게 된다는 희망에 부풀고 있습니다(49a). 바로 그때 집에서부터 급히 사람이 달려와서 급보를 전하고 있습니다(49b). 따님이 그만 죽고 말았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모셔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49c).

2)    피조물에 불과한 회당장 야이로는 순간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창조주 여호와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11:26). 그리하면 (회당장 야이로 너의) 딸이 구원(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얻으리라”(8:50). 3년후 예루살렘 동편의 교외지역 베다니에서 죽은 지 4일이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벌써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11:40).

(2)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측근인 3수행제자, 9:28, 26:37-38)아이(당사자)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영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육신이 아니라 영이 죽은 것이 진짜 죽음임, 7:4. 영이 살아 있는 자는 그 영을 죽은 육신에 들어가게 하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임, 37:9-10, 왕상17:22, 11:11)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며 영이신 하나님의 세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달리달굼, 5:41)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예수님이 2번째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므로 그것은 그 옛날 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는 여호와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위력임. 그런데 영생의 부활이 일시적인 부활보다는 훨씬 중요하며 진정한 구원이므로 단지 육신적인 부활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 것임. 따라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있음, 24:45-48)”(8:51-56);

1)    마가복음 제5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 달리다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41a). 그 말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5:41b).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2)    그러므로 두가지 사실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으로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습니다(2:7). 다만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52b). 또 하나는, 그 잠을 깨우기 위하여 훗날 무덤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5:24-29).

3)    그러나 그와 같은 여호와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6:63) 피조물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전혀 다릅니다; 첫째, 한번 죽고 나면 만사가 끝이라는 것입니다(53a).  그러므로 구원주 그리스도도 영생의 소망도 일단 죽고 나면 이제는 필요가 없다고 하는 완벽한 현세주의적 절망에 빠져들고 맙니다.

4)    둘째, 영원한 가족의 이별을 슬퍼하면서 통곡하고 있을 뿐입니다(52a). 영적으로 살아있으며 다만 육신적인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아니하고(52b) 오히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53).

5)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엄격한 조치를 취하시고 계십니다; 첫째, 소녀의 부모와 측근인 수행사도 3명만 부활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미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달리다굼)”고 말씀하시니(54) 그 영이 죽은 소녀에게 들어가서 그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55a);

6)    셋째, 금방 살아난 소녀는 마치 잠에서 오래 자고 깬 것처럼 배고파 합니다. 그 점을 아시고 예수님이 그 부모에게 식사를 제공하라고 지시하십니다(55b). 넷째, 그 방에서 기적의 현장을 본 소녀의 부모와 3명의 수행사도에게 예수님이 한가지 엄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7)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56).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시는 그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고전15:20);

결론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적은 구약에서는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두가지 경우 뿐입니다. 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각각 한번씩 금방 죽은 자를 살려낸 것입니다(왕상17:21-22, 왕하4:34-36).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나인성에서 한번 이번에는 갈릴리 서편 마을에서 또 한번 두번이나 죽은 자를 살려내고 있습니다(7:14-15, 8:54-55).

그러므로 예수님은 큰 선지자의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창조주의 생명살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여호와의 독생자입니다(1:14-18). 그리고 에스겔이 그의 대선지서 제37장에서 환상가운데 보고 있는 장면이 현실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소위 달리다굼의 은혜로 이제 발생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8:54-56).

부모와 제자들이 그 경이로운 기적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일체 대외비로 하라고 강력하게 당부하십니다. 그 이유는 현세적인 구원에 매달리게 되면 영생구원과 천국에서의 영광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큰 자들이 바로 이 세상을 모든 것으로 믿고서 살아가고 있는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죽이나 현세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라는 말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야 말로 죽고 나면 만사가 그만이라고 하는 현세주의적 세속주의 사상이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새언약의 시대(31:33) 곧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3일에 (영생의 몸으로, 고전15:44)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보혜사 진리의 성령, 14:16-17)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5-49).

그 뒤를 잇고 있는 말씀입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영생의 몸을 입고 그대로 승천하심, 3:10-12),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1:7-9).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읽고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뜻을 깨달아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28:18-20). 그러한 성도들에게 영육간의 치유와 강건함이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주님의 은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14:19-20, 8:27-30, 37-39).

아무쪼록 한시적인 육신적인 부활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생의 부활을 소망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