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상반된 평가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의인사상에 대한 예수님의 구체적 증언”(눅7:24-5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8. 5. 23:22

제목;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상반된 평가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의인사상에 대한 예수님의 구체적 증언”(7:24-50)

설교일; 주후 2024 9 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 6일 화요일 작성)

 

본문의 주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의인사상(義人思想)의 실체와 그 문제점입니다. 역사적으로 그 점에 대하여 명쾌하게 지적한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의 대선지서의 제29장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여호와)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2:22, 28-32, 여호와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나라가 성도의 마음속에 임하게 되는 새 언약 시대의 도래, 31:33, 11:20, 14:16-20, 12:31-32, 8:2)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6:9-13,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이므로 인간의 지혜로는 깨닫지 못할 것임).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이것이 외식적인 신앙인 곧 자칭 의인들의 사고방식임. 예를 들면, 4:8-9, 카인의 경우가 그러함. 39:9,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그 반대임) 하니”(29:13-15).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잘못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원용하여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15:7-9, 7:6-9). 그리고 마태복음 제23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예수님의 질책하는 말씀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종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의사 누가가 바리새인의 잘못된 의인사상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맥락이 같은 것으로 그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먼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이해하기 쉽게 그 의미를 괄호 안에 부기하여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번째 단락입니다; “27. (3:1절에) 기록된 바, 보라 (여호와)내 사자(my messenger) (구원주인 그리스도) 앞에 보내노니, (세례 요한)(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 28. (예수 그리스도)너희(제자와 백성들)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남녀가 합방하여)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1:13-17)”(7:27-28a).

(2)  두번째 단락입니다; “그러나 (21:27, 22:28-30,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마침내 입성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니라 하시니(세례 요한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만 실족하고 있음. 그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만 선민사상과 의인사상에 젖어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면 선민인 유대인만을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데 그러한 집단이기적 현세 구복사상에 세례 요한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임. 참고로, 유대교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사상과는 정반대임. 왜냐하면, 천국 복음이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기초하고 있기에 선민만의 현세적인 구원론이 결코 아닌 것임. 더구나 율법선생인 랍비들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해석은 선민만이 여호와 앞에 의롭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선민종교에 불과한 유대교의 집단 이기적인 의인사상인 것임)”(7:28b).

(3)  세번째 단락입니다;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3:7-14,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나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보시기에 그들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서 죄사함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한 것임. 그 말씀에 순종하여 물세례를 받는 자들이 많았음),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빠져서) (세례 요한)()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그러나 유대인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과 평가만 절대시하고 있는 이상한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젖어서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세례 요한의 물세례조차 받지 아니한 것임. 그런데 옥중의 세례 요한이 이제는 그러한 이상한 의인사상에 빠져들고 있는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도를 보내어 외세를 물리치는 메시아의 장래계획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기 때문임. 그에 따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그만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평가하고 계시는 것임)”(7:27-3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눈만 의식하면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있는 외식적(外飾的)인 신앙생활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유대교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서로서로 의인이라고 칭찬하기에 바쁩니다(1:32). 그 결과 자신들이 정말 대단한 종교적인 의인들이며 하나님나라는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기적으로 율법으로 배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이 역시 그러합니다. 그것이 죄인을 부르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동족들의 모습입니다(5:30-32, 10:2-3).

따라서 예수님이 로마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7:9);

사도 마태는 그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좀더 강한 표현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선민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8:11-1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24. 요한이 보낸 자(2명의 생도, 19)가 떠난 후에(이해당사자가 떠났으므로 이제부터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객관적인 평가가 시작되고 있는 것임) 예수께서 무리(제자들과 모인 백성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엣세네인들이 고행하고 있는)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그들은 금욕생활을 하며 힘든 고행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그러한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다)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사두개인과 같은 교권주의자들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왕궁에 있느니라(영적으로 타락한 사두개인들이 교권을 차지하고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 당시 종교적인 특권을 보유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세속적인 왕이나 귀족과 같은 권세를 누리고 있음).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선지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엘리야와 같은 큰 선지자가 850년이 지나서 약속의 땅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의 사명은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1:14-17, 3:16, 7:16). 27. (3:1절에) 기록된 바, 보라 (여호와)내 사자(my messenger) (구원주인 그리스도) 앞에 보내노니, (세례 요한)(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 28. (예수 그리스도)너희(제자와 백성들)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남녀가 합방하여)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21:27, 22:28-30,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마침내 입성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니라 하시니(세례 요한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만 실족하고 있음. 그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만 선민사상과 의인사상에 젖어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면 선민인 유대인만을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데 그러한 집단이기적 현세 구복사상에 세례 요한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임. 참고로, 유대교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사상과는 정반대임. 왜냐하면, 천국 복음이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기초하고 있기에 선민만의 현세적인 구원론이 결코 아닌 것임. 더구나 율법선생인 랍비들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해석은 선민만이 여호와 앞에 의롭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선민종교에 불과한 유대교의 집단 이기적인 의인사상인 것임).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3:7-14,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나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보시기에 그들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서 죄사함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한 것임. 그 말씀에 순종하여 물세례를 받는 자들이 많았음),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빠져서) (세례 요한)()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그러나 유대인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과 평가만 절대시하고 있는 이상한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젖어서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세례 요한의 물세례조차 받지 아니한 것임. 그런데 옥중의 세례 요한이 이제는 그러한 이상한 의인사상에 빠져들고 있는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도를 보내어 외세를 물리치는 메시아의 장래계획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기 때문임. 그에 따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그만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평가하고 계시는 것임)”(7:24-30);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4. 요한이 보낸 자(2명의 생도, 19)가 떠난 후에(이해당사자가 떠났으므로 이제부터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객관적인 평가가 시작되고 있는 것임) 예수께서 무리(제자들과 모인 백성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엣세네인들이 고행하고 있는)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그들은 금욕생활을 하며 힘든 고행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그러한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다)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사두개인과 같은 교권주의자들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왕궁에 있느니라(영적으로 타락한 사두개인들이 교권을 차지하고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 당시 종교적인 특권을 보유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세속적인 왕이나 귀족과 같은 권세를 누리고 있음).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선지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엘리야와 같은 큰 선지자가 850년이 지나서 약속의 땅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의 사명은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1:14-17, 3:16, 7:16). 27. (3:1절에) 기록된 바, 보라 (여호와)내 사자(my messenger) (구원주인 그리스도) 앞에 보내노니, (세례 요한)(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 28. (예수 그리스도)너희(제자와 백성들)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남녀가 합방하여)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7:24-27a);

1)    갈릴리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행보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감옥생활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초조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메시아로 믿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히스기야 시대처럼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모습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것입니다(왕하19:34-37).

2)    그때에는 세례 요한 자신이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고 미리 감옥살이를 했다고 하는 그의 선택이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여러 회당을 돌면서 천국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백성들의 병과 장애를 치유하여 주시는 나사렛 예수가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구출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3)    세례 요한이 보기에는 그 점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가 거년에 요단 강변의 마을 베다니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물세례를 주었을 때에 분명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 그에게 강림하였으며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3:15-17, 3:21-22). 그런데 어째서 예수의 복음사역이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행보와는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아니하여 자신의 생도 둘을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급파한 것입니다.

4)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영적으로 눈먼 자를 고쳐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며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7:22).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단지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역할로 이해하는 것은 믿음생활에서 실족하는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7:23).

5)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생도 두사람이 돌아가고 나자 이제부터 자신의 제자와 모인 백성들에게 객관적인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십니다(24a). 그 첫마디가 굉장한 칭찬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곧 오신다고 하는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모든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26-27).

6)    더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생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내어 주었습니다(1:35-40).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매우 기뻐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그의 종에 불과한 세례 요한 자신은 이 세상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만족한다고 하는 언급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1:27, 3:28-30). 그 정도로 자신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고서 주어진 사명감당에 최선을 다한 세례 요한이야 말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신 것입니다(26절과 28a).

7)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설명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세례 요한이 맡은 역할은 광야에서 고행생활을 하면서 세상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엣세네인들의 신앙태도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교권을 틀어쥐고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24b-26절 의역). 그러나 이 세상에 빛과 어두움이 있듯이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혹할 정도로 냉정한 평가는 가히 제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21:27, 22:28-30,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마침내 입성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니라 하시니(세례 요한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만 실족하고 있음. 그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만 선민사상과 의인사상에 젖어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면 선민인 유대인만을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데 그러한 집단이기적 현세 구복사상에 세례 요한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임. 참고로, 유대교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사상과는 정반대임. 왜냐하면, 천국 복음이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기초하고 있기에 선민만의 현세적인 구원론이 결코 아닌 것임. 더구나 율법선생인 랍비들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해석은 선민만이 여호와 앞에 의롭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선민종교에 불과한 유대교의 집단 이기적인 의인사상인 것임).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3:7-14,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나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보시기에 그들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서 죄사함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한 것임. 그 말씀에 순종하여 물세례를 받는 자들이 많았음),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빠져서) (세례 요한)()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그러나 유대인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과 평가만 절대시하고 있는 이상한 종교적인 의인사상에 젖어서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세례 요한의 물세례조차 받지 아니한 것임. 그런데 옥중의 세례 요한이 이제는 그러한 이상한 의인사상에 빠져들고 있는 것으로 보임.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도를 보내어 외세를 물리치는 메시아의 장래계획에 대하여 문의하고 있기 때문임. 그에 따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그만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되고 말았다고 평가하고 계시는 것임)”(7:27b-30);

1)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얻도록 원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3:16). 그와 같은 영생의 천국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백성의 자격이 따지고 보면, 다음과 같이 둘입니다;

2)    하나는,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민은 의인,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유대교의 의인사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할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이 세상에 건설하는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4)    요컨대, 그리스도가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영생의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이지 이 세상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그러한 현세적인 선민의 이스라엘제국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이 그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헤롯 왕가를 쳐부수고 자신을 구출하여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그야말로 혹평입니다(28b).

5)    그런데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많은 백성들이 현세적인 구복사상을 버리고 천국복음을 영접하고 있습니다(29). 그러나 율법선생을 위시한 바리새인들은 끝끝내 자신들의 의인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척하고 있습니다(30b).

6)    하기야 세례 요한이 주고 있는 물세례마저 외면한 그들입니다(30a). 왜냐하면, 자신들은 회개할 죄가 전혀 없는 의인들이므로 세례 요한 앞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나 실로 당당하다고 하는 것이 그들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의 공통된 입장인 것입니다(18:9-14). 

둘째로, “31. (예수님이 제자와 모인 백성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에게서 히브리의 율법과 선민사상을 배운 선민들)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새언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는 다음 세대)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이 세대의 사람들 곧 어른인 선민들)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아버지 하나님이 만민을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삼고자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냈지만 그 뜻을 외면하고 바리새인들이 의인사상에 빠져서 율법생활만 강요하는 종교인 유대교를 파수하고 있다는 것임). 33.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바리새인들이 금욕주의 엣세네파에 대하여 그러한 터무니없는 공격을 한 것처럼 광야에서 고행과 경건생활을 영위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공격한 것임. 그것은 그 중심과 내용을 따지지 아니하고 외양만 가지고 비난하는 얄팍한 외식주의자의 행태임),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죄인을 불러서 구원하고자 그 자리에 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근본적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여호와 뜻을 모르고 오로지 율법 위반이며 죄인과 한패라고 비난하기에 바쁜 바리새인들의 지극히 지엽적이고도 말초적인 행동임),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5:38-39,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말과 같이 그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면 훗날 허물어지게 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면 후세에 도리어 굳건히 세게 되는 것임)”(7:31-35);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1. (예수님이 제자와 모인 백성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에게서 히브리의 율법과 선민사상을 배운 선민들)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새언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는 다음 세대)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이 세대의 사람들 곧 어른인 선민들)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아버지 하나님이 만민을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삼고자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냈지만 그 뜻을 외면하고 바리새인들이 의인사상에 빠져서 율법생활만 강요하는 종교인 유대교를 파수하고 있다는 것임)”(7:31-32);

1)    나사렛 예수가 고향을 떠나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30세쯤이며(3:23) 대체로 주후 28년에 초막절이 있는 10월경으로 보입니다(3:1). 예수님은 요단 강변의 마을에서 세례 요한이 베풀고 있는 회개의 물세례를 받자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성령충만을 얻게 됩니다(3:21-22, 4:1). 

2)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신 후 마귀로부터 3가지 시험을 받습니다(4:1-13).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마침내 믿음생활의 비결 3가지를 확립하게 됩니다(4:4, 8, 12, 8:3, 6:13, 16). 이제 성령충만과 믿음생활의 비결 일체를 얻게 되었으므로 고향이 있는 갈릴리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십니다(4:14-15).

3)    이듬해가 되자 갈릴리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이 보낸 2명의 생도를 접견하게 됩니다(7:19-20). 그들을 돌려보낸 다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①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와 ②당시의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행태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이채롭습니다. 여기서는 전자가 아니고 후자에 대한 평가입니다.

4)    예수님이 당시 선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경전의 내용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랍비 등 바리새인들의 신앙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31) 다시 한번 다음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환영하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기뻐하고 있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피리를 부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32a).

5)    그러나 선민사상과 세속적인 의인사상에 물들어 있는 바리새인과 유대교 신봉자들은 전혀 기뻐하지 아니하고 있는데 그것이 피리소리를 듣지만 전혀 춤추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32b). 또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게 되면 영생구원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영벌의 심판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6)    그와 같은 역사적인 심판과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백성들은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32c). 그러나 의인사상과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바리새인과 그들을 추종하는 선민 유대인들은 전혀 애통함이 없다는 것입니다(32d). 참으로 절묘한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2)  33.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바리새인들이 금욕주의 엣세네파에 대하여 그러한 터무니없는 공격을 한 것처럼 광야에서 고행과 경건생활을 영위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공격한 것임. 그것은 그 중심과 내용을 따지지 아니하고 외양만 가지고 비난하는 얄팍한 외식주의자의 행태임),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죄인을 불러서 구원하고자 그 자리에 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근본적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여호와 뜻을 모르고 오로지 율법 위반이며 죄인과 한패라고 비난하기에 바쁜 바리새인들의 지극히 지엽적이고도 말초적인 행동임),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5:38-39,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말과 같이 그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면 훗날 허물어지게 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면 후세에 도리어 굳건히 세게 되는 것임)”(7:33-35);

1)    히브리경전을 율법으로 풀이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선민사상과 의인사상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신앙이 너무나 강하여 이방인까지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장의 육신적인 구원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영생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천국복음에 대하여서도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훼방하면서 시비를 걸기가 일쑤입니다.

2)    특히 예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며 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고 있는 형편없는 선지자라고 비방하고 있습니다(34). 스스로 의인인 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예수 그리스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벌써 선지자인 세례 요한에 대하여서도 자행된 바가 있습니다.

3)    세례 요한이 엣세네인처럼 금욕주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방했던 것입니다(33).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소결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5). 그 의미는 그들의 자녀의 시대가 되면 그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발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    그 말씀 그대로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고 선민 유대인들은 3분의 1이상이 살육을 당하며 남은 자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아시는 예수님이 훗날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19:41);

참고로,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가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포도원농부의 비유가운데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20:14-18);

  셋째로,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안식일에 회당에서 히브리경전을 읽고 강해를 한 예수님을 그 마을의 유지인 바리새인이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 하고자 한 것임),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8:5,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라고 하면 돌팔매로 죽임을 당했을 것임.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직업적인 창녀로 보임)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여인의 향유 담은 옥합은 혼인을 위하여 마련하고 있는 비싼 물건임, 12:3-5)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예수님의 등뒤로 슬며시 들어온 것이며 정식으로 그 식사자리에 초청을 받지 아니한 여인임) (예수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부디 죄사함의 은혜를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얻고자 하는 행동임),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5:30, 죄인과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의인이 바로 선지자라고 하는 선입견임),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집주인 바리새인)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집주인의 이름을 예수님이 연하를 대하듯이 시몬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랍비 선생님으로 대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임.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말로만 공경하지 사실은 그것이 전혀 아닌 것임. 그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자가 바리새인 시몬인 것임, 15:8, 29:13).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20:2, 당시 1데나리온은 포도원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함),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빚을 탕감하는 은혜를 베푼 채권자, 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18:23-25)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바리새인 집주인)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29:13, 45:15, 중동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남자 간에 입맞춤을 하고 있음)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스스로 의인사상에 물든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그것은 마치 죄인과 바리새인의 기도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와 같음, 18:14).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20),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예수가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내심 여기는 것임, 5:21).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바리새인들이 내심 수군거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 전에 중풍병자의 경우와 동일하게 예수님이 죄사함의 은혜를 선포하심, 5:24)”(7:36-5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안식일에 회당에서 히브리경전을 읽고 강해를 한 예수님을 그 마을의 유지인 바리새인이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 하고자 한 것임),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8:5,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라고 하면 돌팔매로 죽임을 당했을 것임.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직업적인 창녀로 보임)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여인의 향유 담은 옥합은 혼인을 위하여 마련하고 있는 비싼 물건임, 12:3-5)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예수님의 등뒤로 슬며시 들어온 것이며 정식으로 그 식사자리에 초청을 받지 아니한 여인임) (예수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부디 죄사함의 은혜를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얻고자 하는 행동임),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5:30, 죄인과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의인이 바로 선지자라고 하는 선입견임)”(7:36-39);

1)    본문은 의사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복음사역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고향이 있는 갈릴리지역에서 여러 회당을 중심으로 천국복음을 갈릴리의 주민들에게 전파하고 있던 초창기 시절에 발생하고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바리새인들의 행동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저자인 의사 누가가 의도적으로 그들 선민의 특권과 종교적인 의인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누가복음 제7장 후반부에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특히 그 에피소드의 도입부가 마치 예수님의 우화의 하나인 바리새인과 죄인인 세리와의 기도의 비유’(18:9-14)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안식일 회당에서 히브리경전을 읽고 천국복음에 비추어 그 뜻을 풀이하여 주신 예수님을 그 마을의 젊은 유지인 바리새인 시몬이 랍비를 대하듯이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오찬을 시작하고 있는 바로 그때입니다(36). 그 마을에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창녀 한사람이 은밀하게 식사자리에 좌정하시는 예수님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37).

3)    그 여인은 느닷없이 큰 선지자 또는 메시아라고 불리고 있는 예수님의 발등에 자신의 옥합을 열어 그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기면서 부디 여호와 앞에 죄인인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눈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38). 여기서 옥합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여인에게 있어서 대단한 결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비싼 향유를 조금씩 사모아 옥합에 담아서 시집갈 때에 그것을 지니고 가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그러한 비싼 향유를 예물로 삼아 선지자에게 부어주는 것은 그녀의 소원 곧 여호와의 큰 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타까운 소원을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마을의 창녀에 불과한 죄인을 당장 물리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임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도 아니며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자격이 없는 인물이라고 마음속으로 비난하기에 바쁜 것입니다(39).

5)    참고로,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사회에 있어서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이 없는 청상과부는 재산을 가질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으므로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평소 그러한 여인을 대하고 있는 마을의 남정네들은 두가지 모순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적은 돈을 주고서 그러한 여인과 은밀하게 잠자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는 몸을 파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떠들면서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그런데 그러한 여인을 대하고 있는 예수님의 긍휼은 두가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이미 율법상으로도 생계수단이 없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기업이 없는 레위인의 생계를 돌보아주라고 하는 것인데(14:29) 그러한 율법의 취지를 잊어버리고 선민 유대인들과 그들의 율법선생인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잘도 의인행세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7)    둘째, 생계를 이어갈 방도가 사라진 청상과부가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하나의 생존의 방법인데 그러한 불쌍한 여인들을 이용하여 사내들이 스스로 욕심을 채우면서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그러한 사회적 모순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질타가 그 속에 엄중하게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조선시대에 역사적으로 나라를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부정한 여인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2)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집주인 바리새인)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집주인의 이름을 예수님이 연하를 대하듯이 시몬이라고 편하게 부르고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랍비 선생님으로 대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임.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말로만 공경하지 사실은 그것이 전혀 아닌 것임. 그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자가 바리새인 시몬인 것임, 15:8, 29:13).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20:2, 당시 1데나리온은 포도원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함),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빚을 탕감하는 은혜를 베푼 채권자, 또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18:23-25)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바리새인 집주인)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7:40-43);

1)    예수님이 집주인 바리새인을 시몬이라고 쉽게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랍비가 아니고 생도로 짐작이 됩니다(40a). 그러하기에 집주인 시몬이 예수님을 선생인 랍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40b). 그 젊은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 한가지 쉬운 예화를 들어서 두가지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여 주십니다(41-42);

2)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50데나리온 빚진 자 또는 500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여호와께 빚진 자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두가 회개를 하면 여호와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많이 빚진 자가 여호와의 죄사함의 은혜를 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집주인이며 바리새인인 시몬도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43). 그렇다고 하면 마을에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그 불쌍한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다.

(3)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29:13, 45:15, 중동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남자 간에 입맞춤을 하고 있음)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스스로 의인사상에 물든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그것은 마치 죄인과 바리새인의 기도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와 같음, 18:14).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20),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예수가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내심 여기는 것임, 5:21).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바리새인들이 내심 수군거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 전에 중풍병자의 경우와 동일하게 예수님이 죄사함의 은혜를 선포하심, 5:24)”(7:44-50);

1)    그런데 집주인 시몬과 그의 동료로서 역시 그 식사자리에 초청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예화를 듣고서 내심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율법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자신들은 종교적으로 의인들인데 나사렛 예수가 그들을 죄인인 여인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속마음을 벌써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그들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죄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 여인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다음과 같이 그 행동을 상호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질타하고 있습니다;

2)    첫째, 손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하였으면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이 손님 대접인데 집주인 시몬은 그러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나를 홀대한 것이다(44a). 반면에 그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내 발을 씻어주었으니 그것은 비교도 할 수가 없는 훌륭한 그리스도에 대한 대접인 것이다(44b). 둘째, 귀한 손님을 맞이하면 주인이 입을 맞추는 것이 예절이다. 그런데 시몬은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다(45a). 그런데 그 여인이 내 발에 연거푸 입을 맞추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손님대접이 없는 것이다(45b).

3)    셋째, 그리스도에게는 기름을 붓는 것이다. 그런데 집주인 시몬은 올리브기름도 붓지 아니했다(46a). 대신에 그 여인은 값이 훨씬 비싼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46b). 누가 더 그리스도를 지극히 섬긴 것이냐? 넷째, 그리스도에게는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다. 누구에게 더 많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줄 것으로 보느냐? 그리스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 그 여인에게 여호와의 죄사함의 은혜가 더욱 넘친 것이다(47a).

4)    그러하지 아니하고 죄가 없다고 스스로 의인인 체 하고 있는 너희 바리새인들에게는 죄에 대한 여호와의 용서가 임할 수가 없는 것이다(47b). 설명을 마치신 예수님이 마을에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그 불쌍한 여인에게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많은 죄가 여호와의 용서함을 받았음을 선포하시고(48)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구원의 은혜까지 받았음을 밝혀 주십니다(50).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 신앙이 현세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영생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49).

5)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오로지 히브리경전의 율법에 따르면 선민의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고 비로소 여호와의 죄사함의 응답을 받고 있는데 그 율법을 어기고  감히 선지자에 불과한 예수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권세를 침범하고 있으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뿐입니다(49).  그와 달리 예수님을 구원주인 그리스도로 믿은 그 여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또한 구원의 은혜까지 얻게 되었으므로 참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50);

결론적으로, 히브리경전의 내용을 공부하여 그것을 율법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랍비를 위시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유대교의 파수꾼이며 종교적으로 의인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게다가 현세적인 선민의 영광을 떨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오래 갈릴리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 역시 자유스럽지가 않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지적하고 있는 3가지 사실에 대하여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주 여호와 앞에 서면 바리새인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지상에 선민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히브리경전의 내용을 율법규정으로 선민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오로지 선민의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고 비로소 여호와의 죄사함의 응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어기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죄사함의 권세를 침범하고 있으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생각에 바리새인들이 몰두하고 있습니다(49).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달리 행동하시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주인 그리스도로 믿은 그 여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의 은혜까지 얻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편안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50).

그 결과 3 6개월의 공생애 끝에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예수님은 죄인으로 정죄가 되시고 그들의 압박으로 로마총독마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처참한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죄사함의 은혜를 얻게 된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다시 한번 주님이 베풀어 주신 그 만민구원의 은혜와 영생구원의 은혜를 되돌아보면서 아무쪼록 이기적인 현세주의 종교생활 그리고 인위적인 선민사상과 의인사상을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