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믿고 있는 성도가 세상을 사는 방법 소위 산상수훈”(눅6:27-4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7. 30. 10:41

제목;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믿고 있는 성도가 세상을 사는 방법 소위 산상수훈”(6:27-49)

설교일; 주후 2024 8 2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 30일 화요일 작성)

 

20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크게 관심을 가진 역사적인 사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지도자 그룹에 두가지 서로 다른 학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샴마이학파힐렐학파입니다. 전자 곧 샴마이학파는 전통적인 히브리사상과 여호와신앙은 선민 유대인의 것이며 여호와의 구원역사는 선민에게 국한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후자인 힐렐학파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유대교를 개혁하여 그 종교를 헬라인과 로마인에게 개방하고자 하는 일종의 개혁개방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폐쇄적인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는 소수학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을 떠나서 중동과 유럽지역에서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주전 539년경 신바벨론제국이 멸망을 당하고 한두해가 지나 페르시아제국이 성립되었을 때에 초대황제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자유를 되찾은 유대인포로들 가운데 고토(故土)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돌아온 귀환자의 수가 그후 아닥사스다 황제의 시대를 합한다고 하더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1:1-2:70, 7:7-9, 8:1-20, 2:11).

아무리 많이 잡아도 그 수는 전체 유대인의 2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8할 정도는 그냥 페르시아제국에 흩어져서 살다가 주전 330년경 헬라의 시대를 맞이하고 주전 64년경부터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후손인 교포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큰 절기를 맞이하면 예루살렘성전의 순례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개방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의 눈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교의 국수주의적인 성격이 매우 답답하게 보입니다. 헬레니즘세계에서 자라고 성장한 그들이 보기에는 유대교를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게 개방하는 것이 시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원시적인 영지주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범신론적인 헬레니즘과 유일신 창조주 여호와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헤브라이즘은 서로의 영감을 주고 받으며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공존하다가 보면 보다 고차원적인 것이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특히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이 무척 개방적인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동과 유럽에 흩어져 있는 모든 속국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취급하고자 만민평등법을 정비하는 한편 전 시대의 헬레니즘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속국의 대도시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연결하는 도로를 잘 정비하여 물자와 군대의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로마제국의 실용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교포 유대인들이 편리한 신작로를 이용하여 더 많이 절기를 쫓아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로마시대에 발맞추어 이제는 유대교를 헬라인과 로마인에게 개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산헤드린 대공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헬레니즘이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경험을 지니고 있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성전을 찾아오고 있는 많은 교포 유대인들의 의견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후 1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경건한 헬라파 유대인들은(6:1, 9:29)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포들로서 무엇보다 현지의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는 한편 로마의 법제도를 공부하여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문화와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해외에 설립되어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매주 랍비들로부터 조상들의 히브리사상과 유대교의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헤브라이즘에 심취하여 나중에는 유일신 여호와사상과 신앙을 자녀들과 교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상당히 경건한 교포사회의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2:5).

그들이나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면서 랍비가 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극소수가 샴마이학파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힐렐학파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헬라파 유대인들은 당시의 중근동과 유럽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헬레니즘만큼이나 그들 유대인의 전통적인 헤브라이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브라이즘의 매우 독특한 가치를 충분히 재발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여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교포 유대인들의 주장에 호응하는 힐렐학파가 예루살렘 유대교지도자 사회에서도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뒤늦게 20세기 후반에 구미(歐美,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신학자들이 발견하고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힐렐학파의 개방과 개혁노선을 따른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사례가 유대교의 샴마이학파에 속하던 젊은 지도자 랍비 사울이 나중에 힐렐학파로 노선을 변경하고 사도 바울이 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22장 참조).

요컨대, 그것은 유대교인 사울이 기독교인 바울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대교의 샴마이학파에서 힐렐학파로 그 믿음의 노선을 변경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완전하게 독립된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의 하나의 분파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과연 20세기 후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사실은 그 신론(神論)의 차이에서부터 분명합니다. 유일한 산술적인 하나의 신 여호와만 신봉하고 있는 유대교와(6:4-9)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31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기독교가(1:1-18, 10:30-33, 14:16-20, 4:5-6, 고후13:13)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어불성설입니다;

더구나 복음서에 있어서는 특히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 곧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압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가르치심에서부터 그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이 전통적인 유대교에 물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6:27-38). 당시의 제자들은 큰 선지자 또는 메시아로 믿어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여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1:35-49, 16:14-16).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특별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서 수행제자로 따라다니다가 12사도로 임명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6:13-16).

1)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임명한 다음에 그들을 모아 산에서 집중적으로 특별교육을 실시하고 계십니다(6:20-49). 특히 유대교에 크게 물들어 있는 그들에게 재래적인 언약과 새로운 언약이 어떻게 다른 지(31:31-34) 그 점을 산상수훈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의 삶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6:20-26) 오늘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진정으로 창조주 여호와께서 원하고 계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어떻게 다른 지 그 점을 알기 쉽게 3가지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첫번째 가르침이 바로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가르침의 근거는 창세기 제7장에 기록되고 있는 노아 시대 홍수심판을 전후하여 2차례 여호와께서 중차대하게 말씀하신 내용에서 벌써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5-8), “20. (방주에서 동물들과 함께 새 세상에 나온) 노아 (가족들과 함께)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여호와의)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0-22).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3)   첫째, 사람들이 여호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제멋대로 세상을 경영하고 있습니다(6:2-5). 그들 세상사람들의 악함이 온세상을 포악하고 부패하게 만들고 맙니다(6:11-13). 그것을 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람과 코로 호흡하는 모든 짐승과 새를 전멸시켜버리고자 하십니다(6:17, 7:21-22). 그 가운데 오직 여호와의 뜻을 받드는 노아의 가족과 여호와의 선택을 받은 극소수의 동물들이 방주 구원을 얻게 됩니다(6:18, 22, 7:5-9).

4)   둘째, 노아시대 홍수심판이 끝난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전개가 되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족과 함께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정결한 제물로 번제를 드립니다(8:18-20). 그 향기를 맡으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십니다(8:21-22, 5:5-7). 다시는 노아 시대의 홍수와 같은 전면심판을 실시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의 악함을 곧바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노아와 같은 의인으로 만들어 구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5)   셋째, 어차피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영향으로 사람들이 여호와신앙을 떠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2:2, 6:12) 그들을 숙주로 삼아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그 몸에서 내쫓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11:25-29, 삼상16:18, 23). 그 일을 위하여 훗날 여호와께서는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선민과 이방인 등 모든 백성에게 회개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영을 이제는 죄사함 받고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게 하여 아예 악한 영이 발붙일 곳을 없게 만들고 마시는 것입니다(11:20, 8:1-2).

6)   넷째, 그러한 측면에서 유대교인들이 주변국의 이민족들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5:43-44). 왜냐하면, 그들 이방인 역시 악한 영을 쫓아내고 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66:20-23, 19:22-25). 그러므로 결론은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입니다(6:12). 그에 따라 성도들은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에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하고 그들을 회개의 마당으로 인도하는 것이 옳습니다(3:1-10, 11:29-30). 그와 같은 취지에서 누가복음 제6장 제27-38절 본문말씀 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제5장 제43-48절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십니다(6:39-45). 그 교훈에 비추어보면,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예수님 일행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금방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 백성들에게 유대교의 가르침을 율법규정으로 세세하게 풀이하여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율법상 의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18:11-12);

1)   율법의 세부규정을 위배하고 있는 백성들의 잘못을 자주 지적하다가 보니 어느 사이에 그 반사이익으로 자신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종교적 지도자들이며 의인집단에 속하고 있다고 하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체 하면서 끼리끼리 서로들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들 사회에 있어서는 자칭 의인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2)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산헤드린 대공회나 지방공회에서 또는 율법교육의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지 아니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15:8). 나아가서 그들은 종교적으로 의인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부르짖음에 전혀 동요함이 없으며 회개의 물세례를 받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7:30).

3)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선포하며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도 실로 당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도가 지나쳐서 자신의 백성들인 유대교인들이 소망하고 있는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비난을 일삼는 한편 아예 해치려고 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6:11, 20:13-15, 5:16);

4)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현세적으로 선민을 구원하는 그러한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신위적으로 큰 능력을 행사하여 불치의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더라도 전혀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다고 바리새인들은 서로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한마디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를 보지 못하고 백성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고자 하는 이기적이고도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행태이며(6:39-45) 더구나 여호와의 진정한 뜻을 도외시하고 있는 외식적(外飾的,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하고 있는)인 종교행위라고 예수님께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23). 

(3)  셋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듣고 온전히 행하는 자와 그러하지 아니하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 쉽게 말씀하여 주십니다(6:46-49). 전통적인 유대교의 주장 곧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이스라엘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집단이기적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면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은 멀지 아니하여 완전히 파괴가 되고 말 것이며 선민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 다시 온 세상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의 뜻이 본문 6:46-49에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빠른 속도로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12사도들)에게 내가(예수님이)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5:43-48),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그것이 대속의 중보자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18:22-32, 19:6, 예수님의 경우는, 23:34).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5:39),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예수님의 경우에는 요19:23-24절 참조 요망).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5:42, 아예 손해볼 생각을 하고서 그냥 주도록 하라. 그것이 재물을 천국에 쌓는 방법이 된다, 35절과 마6:19-20),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그것이 황금률이다, 7:12).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세리도, 5:46)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남을 해치는 마피아도 그러하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이방인들도, 5:47)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천국에서)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곧 창조주 여호와)의 아들이 되리니, (창조주 여호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仁慈)하시니라(헤세드 하나님,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임, 1:1, 9).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16:25,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사도 바울의 자비가 그의 복음이기도 함).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21:23-25, 고대 보복법 정신과 같은 일종의 상호 호혜주의임. 그러나 성도는 그 언약의 대상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그 상급이 엄청난 것임, 5:38-45). 38. 주라. 그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보상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11:1-2, 8:18, 여호와의 상급은 훨씬 큰 법이다. 그것은 마치 백 데나리온과 일만 달란트의 비유와 같다, 18:32-35).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남을 비판하면 너도 그만큼 비판을 받게 되는 법이다, 31절 황금률 참조 요망)”(6:27-38);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12사도들)에게 내가(예수님이)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5:43-48),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그것이 대속의 중보자 거룩한 백성의 삶이다, 18:22-32, 19:6, 예수님의 경우는, 23:34).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5:39),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예수님의 경우에는 요19:23-24절 참조 요망).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5:42, 아예 손해볼 생각을 하고서 그냥 주도록 하라. 그것이 재물을 천국에 쌓는 방법이 된다, 35절과 마6:19-20),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그것이 황금률이다, 7:12)”(6:27-31);

1)    어째서 사람을 미워하면 되지 않는지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뜻을 음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죄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끌어가고 있는 악한 영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면 그들 역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8:1-2, 11:20). 그러므로 사람을 원수로 여겨서 미워하지 말고 그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5:43-48).

2)    그렇게 하면 우리가 원수같이 미워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진정으로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아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66:20-22, 19:22-25). 그와 같은 측면에서 예수님이 12사도에게 먼저 4가지 신앙태도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3)    첫째, 내가 원수같이 여기고 있는 상대방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7a).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대속의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중보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보혜사 성령님에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나의 사랑을 뛰어넘어서 내가 원수로 여기고 있는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절실한 것입니다. 그때에만 여호와의 은혜로 나의 원수가 회개하고서 영생의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12:17-21).

4)    둘째,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이웃을 잘 대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27b). ‘Give and take’의 냉정한 세상에서 그러한 역설적인 행동이 과연 가능할까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주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도 사실 그러한 취지의 율법정신이 벌써 들어 있습니다;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23:5). 예수님은 나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요지는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취급을 받고 있는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맞고 길가에 버려져 있는 예루살렘사람을 잘 돌보아주었다는 것입니다(10:33-37). 요컨대, 그것이 바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의 사명입니다;

5)    셋째, 우리를 저주하는 상대방을 축복한다는 것은 인간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28a). 넷째,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그들의 구원을 중보기도한다는 것은 대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28b, 23:34,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못박는 병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부득불 실천해야만 하는 일입니다(16:24).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우리가 흔쾌히 용서할 때에 하나님나라에서 우리가 여호와께 지고 있는 그 엄청난 빚 1만 달란트가 한꺼번에 탕감되는 놀라운 은혜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8:24-35).

6)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나라에 크레딧(credit)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첫째, 억울하게 뺨을 치는 자에게 대항하지 말고 나머지 뺨도 치도록 대주도록 하세요(29a). 그리하면 뜨거운 숯불을 상대방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과 같아서 그 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줄 수가 있습니다(12:20-21). 둘째, 겉옷을 빼앗는 자를 만나면 그 자를 불쌍하게 여겨서 속옷까지 벗어주는 마음을 가지세요(29b). 그러한 희한한 일을 만나게 되면 그 자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7)    셋째, 내게 있는 것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아낌없이 베풀어주도록 하세요(30). 손해보는 그만큼 하나님나라에서 당신의 크레딧이 올라갈 것입니다. 넷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남을 대접하지 아니하면 크게 2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31); 하나는, 이 세상에서 그 보답을 받을 기회가 사라집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당신이 천국에서 크레딧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더이상 없는 것입니다”.     

(2)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세리도, 5:46)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남을 해치는 마피아도 그러하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이방인들도, 5:47)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6:32-34); 예수님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2가지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1)    하나는,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세상사람들을 설혹 그들이 이방인이거나 죄인이거나 세리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2-33).

2)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받기를 바라고 꾸어 주거나 선의를 베풀지 말고 그냥 주고 베품으로써 훗날 하나님나라에서 주님으로부터 그 보답을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34). 천국에서 받게 되는 보상과 상급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헌신하고 희생한 그것과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22:28-30, 8:18);

 

(3)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천국에서)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곧 창조주 여호와)의 아들이 되리니, (창조주 여호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仁慈)하시니라(헤세드 하나님,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임, 1:1, 9).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16:25,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사도 바울의 자비가 그의 복음이기도 함).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21:23-25, 고대 보복법 정신과 같은 일종의 상호 호혜주의임. 그러나 성도는 그 언약의 대상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그 상급이 엄청난 것임, 5:38-45것임). 38. 주라. 그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보상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11:1-2, 8:18, 여호와의 상급은 훨씬 큰 법이다. 그것은 마치 백 데나리온과 일만 달란트의 비유와 같다, 18:32-35).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남을 비판하면 너도 그만큼 비판을 받게 되는 법이다, 31절 황금률 참조 요망)”(6:35-38);

1)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면서 헌신하고 희생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나라에서 여호와의 상급과 보상이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강조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성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 세상에서 실천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상급이 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획득하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35a).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 제8장에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벌써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서 누리고 있는 것으로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8:15).

3)    둘째, 여호와의 양자의 영을 받아 빛의 아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인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5:32) 스스로 세상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35b-36). 셋째, 자비를 베푸는 성도의 삶은 구체적으로 두가지 차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4)    하나는, 비판과 정죄를 자제하면서 용서하기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37절과 38c). 또 하나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남는 장사임을 아는 것입니다(38a). 왜냐하면, 그 보답과 상급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엄청나게 거대하기 때문입니다(38b, 8:18).

둘째로,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15:14)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10:24),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10:25a,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7:4) (바리새인과 같이, 23)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7:5).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12:35)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12:34b)”(6:39-45);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15:14)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10:24),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10:25a,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7:4) (바리새인과 같이, 23)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7:5)”(6:39-42);

1)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일일이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떠한 인간들인지 다음 4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그 영적인 현주소를 밝히고 있습니다; ①영적인 소경(39), ②온전하지 못한 신앙인(40), ③자신의 눈에 들보를 가지고서 남의 티끌과 같은 잘못을 곧잘 지적하는 자(41-42a), ④사람들의 눈만 의식하고 있는 외식적인 신앙인(42b) 등입니다.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바리새인은 사제지간에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사상을 공부하고 연구하기에 참으로 열심입니다(10:2). 그런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말씀을 오직 피조물인 사람의 지성과 이성적인 노력으로 풀이하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영성을 잃어버리고 지성이라는 한쪽 바퀴만 열심히 돌리고 있는 형국이므로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스승이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므로 그 제자를 맹인으로 만들고 종래 다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39).

3)    둘째, 스승의 학문을 제자가 물려받고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전통이 경전을 해석하는 지성적인 노력에 불과하므로 그 제자가 대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영적인 경지에 올라서지 못하고 맙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은근히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10:24),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10:25a,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고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40).

4)    셋째,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며 근본적으로 하나의 진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①처음과 나중이 같은 것이며, ②안과 밖이 같고, ③성부 성자 성령의 말씀이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히브리경전의 풀이와 그들의 삶이 일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는 거룩한 율법선생으로 행동하지만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그때에는 탐욕과 이기심이 그 마음속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5)    그와 같은 외식적인 비()진리가 바리새인 선생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눈을 마치 피조물인 인간의 눈처럼 취급하고 말기 때문입니다(41-42). 그것은 그 옛날 창세기 제4장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여 땅에 묻고서 완전범죄를 계획한 것과 같습니다. 아벨이 흘린 피의 억울하다는 호소와 그 무죄한 자의 피를 얻어 먹게 된 땅의 견딜 수 없는 호소를 창조주 하나님이 벌써 듣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적으로 참으로 무지한 카인입니다. 그와 같은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입니다.   

(2)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12:35)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12:34b)”(6:43-45); 성도들이 천국복음을 전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    먼저 그 과정에 있어서는 마음과 행동이 전부 생명을 살리고 돌볼 수 있도록 거룩하고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45). 그것은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소위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며 그에 따라 성도들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서 천국의 잔치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22:11-13).

2)    그러므로 성도가 입으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마음에는 탐욕과 시기심이 들어있어 그것을 행동으로 은연중에 표출한다고 하면(45)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선한 행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생명을 해치고 죽이는 악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3:4).

3)    또한 그 결과는 많은 생명을 살려서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좋은 열매(43-44) 예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66:20). 그러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유한한 인생을 벗고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했던 그 대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21:33).

4)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심히 건조한 가나안 남부지역에서 유일한 상록수가 침엽수인 에셀나무(tamarisk tree)입니다. 그 나무가 사철 푸른 잎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 뿌리가 자신의 키보다 3배나 길어서 지하 깊숙이 흐르고 있는 샘물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 마치 에셀나무처럼 여호와의 영생의 생명수를 마시기 위하여 그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듯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결과 마치 에셀나무와 같이 사철 푸르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천국복음의 전파에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3:13-16, 6:43-44 반대해석임).

셋째로,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7:21a,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48절의 지혜로운 자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7:21b,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7:25),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모래, 7:26a) 위에 집 지은 (어리석은, 7:26b)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7:27, 그와 같이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진군으로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고 선민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마는 것임)”(6:46-49);

1)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12사도들에게 ①말로만 하는 신앙생활, ②행동과 실천이 뒤따르지 아니하고 있는 절름발이 신앙, ③나아가서 면종복배(面從腹背, 주인이 보는 데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배신을 도모하는 행위를 말함)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혀 주십니다.

2)    결과적으로, 말로만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으면서 행동과 실천이 없는 절름발이 신앙인들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면종복배의 이중적인 신앙인의 모습은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아예 불합격입니다. 그들 모두가 주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는 불행을 경험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1:27).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요한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교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기고 있으며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여호와의 능력으로 그들을 모두 무찌르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 진정한 원수이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방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회개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성령님의 강림과 그 심령 속 임재로 말미암아 그들에게서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선민 이방인 구별없이 모두가 영생구원을 받아 천국의 백성이 되는 그것이 그리스도 천국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마치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인 힐렐학파의 후신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은 종교지도자나 사람의 눈치를 보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중심을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눈을 의식하고서 그 앞에서 종의 법도를 온전히 지키라고 하는 뜻입니다(17:1).

그리하지 아니하게 되면 백성들에게서 의인으로 칭찬받는 거기에 속아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대면하고서도 그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한 자는 그 종교생활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자주 음미하시면서 스스로 옷깃을 여미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