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7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3. 30. 17:02

7세기의 2271(손진길 소설)

 

무왕인 무영은 애초에 군부에 약속한 그대로 새로 얻은 청백성의 성주로 대장군 노하덕(盧下德)을 임명한다. 그리고 1만명의 군사를 노하덕 성주에게 준다. 무왕좌백 상장군의 판단으로는 동부 국경지역에 있는 청백성에 그 정도의 군사가 있어야 북동부 북해도의 원주민이 쳐들어올 경우 자체 방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무왕은 왕부(王府)동북성(東北城)으로 옮긴다. 그는 그곳에서 무왕국의 5개의 성을 다스리고자 한다. 그리고 전방사령부를 서부로 옮겨 국경지역에 있는 삼산성(三山城)에 둔다. 그곳에서 전방사령관 좌백 상장군으로 하여금 3만명의 군사로 서쪽에 있는 번왕국에 대한 방어를 확실하게 담당하도록 조치한다.

그렇게 결정이 되자 좌백 상장군은 대군을 이끌고 동북성을 거쳐 삼산성에 이르러 그곳에 전방사령부를 설치한다. 좌백은 그곳 삼산성주인 대장군 파천득(派天得)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서 업무협조를 긴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귀왕국으로 돌아가는 장조카 싸울에게 2가지 부탁을 한다; 하나는, 귀왕에게 안부를 대신 전해 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가족을 삼산성으로 보내어 달라는 것이다.  

한편 북구주성의 귀왕부에서 4개의 성을 다스리고 있는 귀왕 책귀는 새해 668년이 시작되자 천문을 살피고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 “천궁의 별자리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국운이 위태롭고 금년에 운이 다할 수도 있겠구나!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반면에 신라의 국운은 계속 상승하고 있구나. 당나라가 대국이라고 하지만 신라를 잡아먹지 못하겠구나! 그렇다면 여기 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

귀왕의 결론이 다음과 같다; “우선 서쪽에 있는 방계왕국의 성을 2개쯤 점령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귀왕국이 지금 4개성인데 방계왕국이 7개성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냥 둘 수가 없다. 우리 왕국이 6개가 되고 그들이 5개가 되어야 우리가 우위를 점할 수가 있는 것이야! 게다가 무왕국이 5개성을 가지고 있고 번왕국은 8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우리 귀왕국이 6개성을 보유하는 것이 그래도 균형에 맞는 것이야!... “.

따라서 귀왕 책귀는 간자를 풀어서 방계왕국의 7개성에 대하여 깊숙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이 미래의 지도를 머리속에 그리고 있다;

(1)  첫째, 귀왕부가 있는 북구주성의 바로 서쪽에 있는 박다성(博多城)과 남쪽에 있는 지열성(地熱城)은 북구주성의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반드시 정복하고 귀왕국에 편입하여야 한다.

(2)  둘째, 그렇게 되면 방계왕국은 박다성(博多城)의 서쪽에는 북에서부터 남으로 장만성(長灣城), 화본성(火本城), 그리고 다도성(多都城) 3개성이 있고 지열성(地熱城) 남쪽으로는 온천성(溫泉城)일향성(日向城) 2개성 도합 5개성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3)  셋째, 방계왕국은 그 옛날 서기 500년에 백제의 무령왕(武寧王)이 왕자시절 ()에서 건설한 야마토제국(大和帝國)의 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왕조이다. 그 조상은 무령왕의 동생인 부여대(扶餘大)이다. 그들이 무령왕의 직계들과 야마토제국을 서로 차지하고자 전쟁을 벌인 결과 서부의 7성을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본래 가야제국의 식민지이다. 그러므로 가야인 출신의 토호들과 어떠한 타협을 하고서 방계왕국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4)  넷째, 귀왕인 책귀가 그 점에 유의하여 정보를 수집하도록 첩보부대에 지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보고를 받고 있다; “방계왕국의 연맹왕은 가야출신의 호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집안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당금의 연맹왕이 장만성주(長灣城主)부여천(扶餘天)인데 그의 부인이 가야 출신 카라 가문의 장녀인 이찌미입니다. 그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훗날 방계왕국의 연맹왕이 될 것입니다. 연맹왕은 만약 옛날 야마토제국이 아직 남아 있다고 가정하면 제국의 황제인 천황(天皇)으로 불릴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

이상과 같은 정보수집을 하여 분석한 결과 귀왕인 책귀가 실로 놀라운 계책을 생각하고 있다. 그의 숨은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

그 대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책귀는 장차 왜의 천하를 통일하여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중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고자 한다. 겉으로 보면, 천황을 모시는 왕들이 왜의 땅을 나누어서 다스린다. 하지만 속내는 하나의 무신정권이 천하를 호령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 무신정권의 실력자가 바로 귀왕인 책귀이다”;

서기 6683월이 되자 거년에 원정을 떠났던 싸울13천명의 군사와 포로병 4천명을 데리고 북구주성으로 돌아온다. 그것을 보고 귀왕 책귀싸울을 대전으로 불러서 자세하게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 받는다. 그리고 나서 귀왕은 대장군 싸울의 노고를 치하하는 동시에 그에게 3가지 사항을 말한다;

(1)  첫째, 좌백 상장군은 이제 그 소속이 귀왕국에서 무왕국으로 바뀌고 또한 무왕국의 전방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살고 있는 그의 가족을 안전하게 삼산성으로 보내주도록 하라. 통행의 안전을 위하여 호위부대를 붙여줄 것이며 사전에 번왕국의 북부에 있는 성주들에게 협조를 구하도록 하라.

(2)  둘째, 금년 668 5월에 서쪽에 있는 방계왕국의 박다성(博多城)을 치고 그 다음에 9월경에는 남쪽에 있는 지열성(地熱城)을 칠 것이다. 그렇게 알고 싸울 대장군은 4천명의 포로병을 재교육시킨 후에 조속히 우리의 군대에 편입시키도록 하라.

(3)  셋째, 이번의 원정에는 660년에 우리 왕국으로 망명한 과거 백제의 장군들을 동참시킬 것이다. 그야말로 방계왕국과의 총력전이 될 것이니 싸울 대장군은 그 점을 장졸들에게 주지시키도록 하라;

귀왕 책귀가 언급한 그대로 서기 6685월이 되자 귀왕국의 군사 3만명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다. 귀왕은 싸울 대장군을 상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그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는다. 참고로, 귀왕 책귀가 올해 44세이고 싸울 상장군이 37세이다.

귀왕이 싸울의 숙부인 좌백 상장군의 절친이므로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싸울이 귀왕 책귀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그를 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귀왕은 문무에 두루 밝고 천문과 지리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 그리고 싸울이 알기로는 백제와 왜에서 귀왕 책귀를 따라갈 수 있는 책략가가 없다;

그러므로 귀왕을 모시고 정복전쟁에 나선다고 하는 것은 무장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가 있다. 그 점을 이번의 정복전쟁에서 여실하게 실감하게 되는 싸울 상장군인 것이다.

3만명에 이르는 원정군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박다성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 이른다. 그때 귀왕은 그곳에 진영을 설치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척후를 내보내어 박다성의 형편을 다시 파악하라고 명령한다. 상장군 싸울이 특수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장군 장하륵(張夏勒)에게 왕명을 전한다.

그날 밤 장하륵이 일단의 인자부대를 인솔하여 적성을 넘는다. 그의 부대는 가까운 동편이 아니라 일부러 빙 둘러서 북편의 가파른 성벽을 타고서 성안으로 침투한다. 그것은 방심하고 있는 수비병들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왜냐하면, 박다성의 수비병들이 설마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고 있는 가파른 북쪽 성벽을 타고서 한밤중에 적들이 침입할 것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성벽을 고양이처럼 타고서 넘어가자 성벽위에 수비병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500명의 인자부대가 마치 제집을 드나들듯이 어두운 밤에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하고서 성안을 누빈다. 그들은 운이 좋게도 박다성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저택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장군 장하륵이 수하들에게 지시한다; “나는 백부장 오삼규(吳森奎)와 함께 그의 부대원 100명을 이끌고 저 저택에 들어가서 적장을 해치우고자 한다. 너희들 4명의 백부장들은 수하들을 이끌고 먼저 성안의 창고를 발견하면 방화부터 하도록 하라. 서너 군데에서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속히 남문으로 이동하여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을 해치우고 성문을 활짝 열도록 하라. 바깥에서는 싸울 상장군의 군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그날 밤 장군 장하륵과 백부장 오삼규가 엄청난 전과를 거두고 있다. 그 이유는 대저택에서 성주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암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두번째로 큰 저택을 발견하여 지붕으로 침투한 결과 역시 잠자리에 들어있는 수비대장을 암살한 것이다.

수비대장은 대담하게도 적들이 내일부터 성을 공격할 것으로 예단하고서 한밤중에 잠을 청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불행이다. 설마 도착한 그날 밤에 은밀하게 인자부대가 기습할 것으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4명의 백부장은 3군데의 양곡창고를 찾아서 한꺼번에 방화한다. 그 다음에는 약속한 대로 남문으로 달려가서 500명의 수비병을 해치우고 성문을 열어 제친다;

 그 순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싸울의 군대가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앞장을 서고 있는 3천명의 기마병이 맹활약을 한다;

그 뒤를 2만명의 보병들이 따라가면서 대항하는 수비병들을 전부 해치우고 있다. 그 결과 2만명이 수비하고 있는 큰 성 박다성이 동이 틀 무렵에는 귀왕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하기야 성주수비대장이 사전에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들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을 접수하고 보니 수비병 가운데 포로가 17천명이나 된다. 그들 가운데 쓸 만한 장수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 모두가 사실은 백제 계통이거나 아니면 백제인에게 동화되고 있는 가야계 출신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포로병들을 장졸로 분류하고 재교육시켜서 귀왕국의 군대에 편입하는 일이 생각보다는 수월하다.

그 일을 전부 6688월말까지 마무리하고 있는데 고구려에 파견한 첩자에게서 급한 보고들이 연이어 날아들고 있다. 그 멀리 반도의 북쪽에서 바다 건너 왜의 땅까지 들어오고 있는 첩보이므로 벌써 보름이나 지난 구소식이다. 그렇지만 귀왕에게는 소중한 정보이다.

그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귀왕인 책귀가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가 그려보고 있는 나당연합군과 고구려군과의 전투상황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서기 666년 음력 5월에 연개소문이 병사하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권력을 승계하고 전방시찰에 나선다. 그는 2아우에게 왕성인 평양성을 맡기고 지방시찰에 나선 것이다;

 그때 신라의 첩자가 연남생 2아우 사이에서 이간책을 사용한다. 2아우 연남건연남산에게는 전방과 지방시찰을 마치고 연남생이 왕성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2아우를 제거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또한 지방시찰 중인 연남생에게는 2아우가 왕명을 사칭하여 평양성으로 형을 불러들이고 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형과 2아우는 서로를 불신한다. 먼저 움직인 측은 둘째인 연남건이다. 그는 왕명을 빌려서 형을 평양성으로 불렀으나 그가 불응하자 역심을 품은 자라고 단정하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형을 토벌하고자 나선다.

(2)  그 결과 장자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피신한다. 그를 추격하고 있는 2아우의 세력을 피하면서 그는 살길을 모색한다. 아들 연헌성(獻誠)을 급히 당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당의 조정에서는 연남생 일행의 망명을 허용하고 그를 보호하다가 그해 6669월에는 연남생요동대도독으로 삼는다. 그 이유는 그를 길잡이로 활용하여 훗날 고구려를 손쉽게 도모하고자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3)  고구려의 앞날이 암담하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가 그해 66612월에 35백명이 넘는 백성과 관리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다. 이듬해 6679월에는 당의 사령관 이적이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자 그 성의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성주를 당군에게 바치면서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만다. 고구려군의 사기가 그와 같이 하락하고 있으므로 당의 대장군 설인귀에게 고구려군사 5만명이 허무하게 희생되기도 한다;

(4)  668년에 들어서자 2월에 당군 사령관 이적이 만주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휩쓸고 있다. 막리지 연남건5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만주의 부여성을 수복하려고 나섰으나 대패하고 만다. 그 결과 고구려는 압록강 이북의 땅을 그해 4월에 당군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5)  그것을 보고서 6686월에는 당의 함선이 대군을 싣고서 신라의 지배하에 있는 당항진에 도착한다. 신라에서는 국왕 김법민의 아우 김인문이 당군을 이끌고 온 유인궤 사령관을 맞이하여 함께 나당연합군이 어떻게 고구려의 왕도인 평양성을 공략할 것인지를 협의한다. 그에 따라 신라에서는 50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북벌을 감행한다. 그들의 목표는 평양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군부의 최고지도자 김유신이 서라벌에 남아서 출진하는 장수들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그때가 그해 6월 하순이다.

(6)  신라의 대군 50만명이 북진하는 것을 보고서 고구려의 성주들이 저항하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에 625일에 그들은 웅진도독 유인원에게 투항하고 만다. 그로 말미암아 신라의 대군은 전투를 치르지 아니하고 평양성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7)  한편 당의 황제는 몽골 출신 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령하여 말갈인 50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사수(蛇水)지역을 점령하도록 조치한다. 사수는 평양성과 인근의 대성산성 사이에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합장강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수지역은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요지에 해당한다. 요컨대, 6687월 현재 신라의 대군과 당군 및 말갈인들의 군대 가운데 누가 먼저 사수전투에서 승리하고 평양성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과연 귀왕 책귀는 왜의 땅에서 남쪽에 있는 지열성을 그해 9월에 무사히 정복하게 되는 것일까?... ;

그리고 고구려에 잠입하고 있는 귀실집사유기룡은 원수인 부여풍을 어떻게 발견하여 그 척결에 성공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패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