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7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4. 1. 11:32

7세기의 2272(손진길 소설)

 

9. 부여풍을 추적하는 유기룡과 귀실집사

 

서기 6687월 하순 평양성에서 크게 멀지 아니한 사수(蛇水)에서 나당연합군과 고구려군 사이에 전투가 치열하다. 그런데 그 전투에는 신라군의 장군인 유기룡이 참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사치로 변장한 귀실집사군상(軍商)이 되어 당나라의 대장군 글필하력(또는 계필하력, 契苾何力, 677년 사망, 몽골의 유목민 철륵부,鐵勒部 추장의 후)이 지휘하고 있는 말갈인들의 진영에 머무르고 있다;

여기서 말갈인이라고 하는 말은 말갈전사들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말갈사람은 언제나 말을 달리며 자유자재로 무기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장정들이 곧바로 전사들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말갈군사 또는 말갈전사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그냥 말갈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귀실집사는 사비성에서 무예도장을 다니다가 20세의 나이에 무과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백제의 장교로 근무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부친 귀실복신을 도와서 오덕상단의 호위부대에서 오래 일했다. 그는 호위부대장으로서 때로는 상단 행수의 일도 맡아보았다. 그러므로 귀실집사는 장사에도 눈이 밝은 사람이다.

그와 같은 귀실집사의 경험이 부여풍에게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가 평양성 가까이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대장군 글필하력이 말갈인 50만명을 이끌고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가 장사치로 변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글필하력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자면 말갈인처럼 말을 타고서 화살을 쏠 수 있는 병사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할 수 있는 군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귀실집사는 군상으로서 그들에게 병참을 제공하겠다고 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밝혔다. 글필하력은 기뻐하면서 귀실집사의 상단을 말갈인 족장 계무치(桂武治)에게 소개했다.

귀실집사는 왜의 귀왕부에서 가지고 온 백제의 상품을 계무치의 병사들에게 팔면서 그들과 함께 남하했다. 그는 고구려 현지에서 식료품을 사서 말갈인 군대에 납품하는 일을 도맡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의 왕성인 평양성이 멀리 보이는 계곡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그런데 그 지역은 굉장히 특이하다.

따라서 귀실집사는 일찍이 고구려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정보수집을 오래한 바 있는 정탐부대의 백부장 양일우(梁壹宇)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 “양부장, 이곳의 계곡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평양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없는가? 내가 보기에는 여기의 계곡을 통과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야!... “.

그 말을 듣자 양일우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천천히 대답한다; “, 그렇습니다. 제가 현지에서 첩보일을 하면서 살펴본 평양성의 지형은 특이합니다. 한마디로, 마치 하나의 섬과 같아요. 삼면이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로지 북동쪽만이 뚫려 있지요;

 그렇지만 그곳으로 육군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계곡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양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실집사가 그 계곡주변을 계속 살핀다. 그리고 양일우가 숨을 돌리는 사이에 귀실집사가 말한다; “그렇군요.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그 양쪽으로는 산지가 계속되고 있군요. 그러므로 양편의 산에 고구려군사가 매복하고 있다면 적들이 계곡을 통과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되겠어요!... “.

그 말을 듣자 양부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대장군께서 벌써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니 계곡의 양쪽 산에는 벌써 고구려의 수비병들이 매복을 하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글필하력이 이끌고 있는 말갈인 50만명이 이곳을 제대로 통과하자면 아마도 한달은 전투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손실을 감수한 후가 되겠지요!... “.

귀실집사가 잠시 생각한다. 그 다음에 양부장에게 묻는다; “내가 알기로 말갈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나당연합군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어요. 그렇다면 나당연합군은 어디에서 평양성으로 접근하고 있지요?... “.

그 말에 양일우가 즉시 대답한다; “말갈인이 서편의 계곡을 통과한다면 나당연합군은 동편의 계곡을 통과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평양성의 외곽 북편에 있는 산맥에서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두 줄기 시내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동편과 서편에서 그것도 북에서 남으로 마치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시내가 흐르고 있어서 그 이름이 뱀 형상의 물줄기 곧 사수(蛇水)입니다. 요컨대, 두 군데의 사수에서 혈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일우가 친절하게 설명하였으므로 귀실집사가 고개를 크게 끄떡이고 있다. 그 다음에 벌어지고 있는 혈전의 전개는 양일우가 예측한 그대로이다. 무려 한달동안 그 계곡을 통과하기 위하여 50만명의 말갈인들이 필사적으로 고지전을 펼친다. 그 결과 산 위에 매복한 고구려병사를 소탕하지만 그 사이에 20만명의 말갈인이 죽고 만 것이다.

그런데 매복전을 펼친 고구려의 병사는 전사자가 2할에 불과한 1만명이다. 그것을 보고서 말갈인 족장 계무치가 속으로 글필하력을 원망한다; “글필하력 이 자식, 자기도 북방 유목민의 자손이면서 당나라에 빌붙어서 대장군 벼슬을 하더니 이제는 같은 유목민인 우리 말갈인을 숱하게 죽음으로 내몰고 있구나!... “;

계무치가 이를 악물면서 속으로 다짐한다; “이번 전투만 끝나면 우리 말갈인은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고 말 것이다. 당 황제의 신하국으로 계속 살아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와 같이 그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에 동원되면 우리 부족의 전사만 죽어 나는 것이야! 어리석게 더 이상 희생 당할 이유가 없다... “.

한편, 말갈인과 고구려의 매복군이 벌이고 있는 서편의 사수전투와 더불어 그 동편에서는 나당연합군이 역시 고구려의 매복군과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당군 20만명은 사령관 유인궤가 지휘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군사를 무척 아끼고 있다. 따라서 사수 골짜기를 먼저 건너는 것은 언제나 김인문이 지휘하고 있는 신라군 50만명이다.

그러므로 한달간 사수 골짜기에서 그 벼랑으로 올라가 고구려의 고지를 공격하는 선봉부대는 전부 신라군이다. 김인문과 신라의 대장군들은 눈물을 삼키면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15만명의 병정이 목숨을 잃고 만다. 마침내 고구려군이 매복을 풀고 평양성으로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당의 원정군 사령관 유인궤가 거만스럽게 말한다; “김인문 대감, 생각보다 사수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하지만 적들을 물리치느라고 노고가 크셨어요. 이제부터는 우리 대당 황제의 군사가 앞장을 서서 평양성을 아주 빨리 정복할 것이요. 한번 구경해 보시구려, 하하하… “.

그 말을 듣고서 김인문이 속으로 억울한 눈물을 삼키면서 다짐한다; “교만한 당나라 놈들! 재주는 신라가 부리고 항상 전리품과 땅은 자기들이 모조리 차지하고자 하는구나. 그러나 다음번에는 그렇게 되지 아니할 것이다. 일단 평양성을 함락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우리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너희 당나라 놈들을 우리 삼한의 땅에서 전부 몰아내고 말 것이다! 기다려보거라 “;

그해 6689월에 들어서자 평양성의 외곽인 동북면에서 나당연합군과 말갈인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 당의 대장군 글필하력이 거느리고 있는 말갈인이 30만명이다. 그리고 당나라 원정군 사령관 유인궤가 지휘하고 있는 군사가 20만명이다. 게다가 신라의 원정군의 수가 35만명이다.

신라의 군부지도자인 김유신 공은 애초에 신라군 20만명에 백제의 장정 30만명을 더하여 50만 대군을 만들었다. 백제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라군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지만 고구려까지 멸한 후에 한민족이 서로 전쟁을 하지 말고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 평화스럽게 살아가자고 하는 삼한일통의 구호50만 대군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사수전투의 결과 3할의 군사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신라의 국왕 김법민의 아우인 김인문은 속이 쓰린다. 그리고 신라의 장수들은 약소국의 설움을 되씹고 있다. 더구나 평양성 동쪽 외곽에서는 신라군이 뒷전으로 밀려서 이제 말갈인과 당나라 군사들이 공격을 펼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는 입장이다.

만약 그들이 평양성을 함락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고구려의 왕과 왕족들 그리고 귀족들을 당나라 사령관이 자신들의 포로로 삼을 것이다. 고구려의 강토도 그들이 모두 차지하고자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미래가 다가올 것만 같아서 김인문과 신라의 장수들은 속으로 애가 타고 있다.

그런데 예상보다 평양성의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대막리지 연남건14만명의 고구려군사로 결사적으로 성을 사수하고 있다. 또 하나는, 평양성의 성벽이 워낙 튼튼하기 때문이다. 여러 겹의 돌로 두껍게 성을 쌓고 있어 투석기를 사용하여 큰 돌을 날려도 전혀 파괴가 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격군의 수가 무려 85만명이나 된다. 20일간 공성전을 계속하다가 보니 연남건이 지휘하고 있는 고구려군사의 수가 절반이 죽고 7만명이 남아 있다. 그것으로 65만명이나 되는 적군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당나라의 군대에 지원병이 도착하고 있다. 75세의 노장 이적(李勣)10만 대군을 이끌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사령관 유인궤와 대장군 글필하력이 얼른 상장군 이적에게 군지휘권을 넘긴다. 그때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 이적이 당군 20, 말갈전사 20만 신라군 35만 등 도합 75만 대군을 전부 동원하여 한꺼번에 평양의 성벽을 공격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국왕 보장(寶臧)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7만명의 수비군으로는 75만 대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왕 보장은 은밀하게 대막리지의 아우 연남산에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훗날 고구려의 부흥운동이라도 할 수가 있어요. 여기서 계속 싸우다가 죽고 나면 고구려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아요!... “.

그 말의 뜻을 연남산이 알아들었다. 따라서 그는 비밀리에 당의 사령관 이적을 찾아가서 항복의 뜻을 밝힌다. 그 결과 고구려의 국왕 보장연남산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많은 신려들이 이적에게 투항하고 만다;

그때가 서기 668921이다.

그것을 보고서 대막리지 연남건이 전투의욕을 상실한다. 그는 차제에 군사지휘권을 심복인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기고 뒷방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다. 신성은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신의와 충성심이 부족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장군 오사(烏沙) 요묘(饒苗)와 의논하고 은밀하게 반란을 도모한다. 당군이 평양성 가까이 쳐들어오면 자신들이 안에서 내응하여 성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려준다.

마침내 926일 승려 신성과 그의 심복들이 성문을 열고 당나라의 군사를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대막리지 연남건은 할복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해행위에 그치고 그는 죽지도 못한 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만다.

그와 같은 변화가 급격하게 발생하자 신라군의 장군으로 따라온 유기룡과 말갈전사의 군상으로 그 신분을 숨기고 있는 귀실집사가 빠르게 움직인다.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평양성으로 들어가서 부여풍을 잡아서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발 늦고 만다. 부여풍의 처세술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모른다. 그는 얼른 연남산의 편에 서서 고구려의 국왕과 함께 당나라 이적 사령관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이다. 이적은 그 사실을 5일후에 평양성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에야 연합군에게 공포하고 있다.

그러한 속사정을 미처 모르고 있었기에 유기룡 장군과 귀실집사가 용감하게 평양성에 쳐들어가서 부여풍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나중에 이적 사령관의 말을 듣고서야 부여풍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당군은 그를 고구려 국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제는 부여풍을 추적하여 그를 처치하자면 어찌해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