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53(손진길 소설)
그와 같은 재사 윤책의 예측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백제의 멸망과정에서 백제의 부와 인력이 너무나 많이 왜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백제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왜국이 부흥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고 만다.
그들은 일단 백제국을 수복하기 위하여 군사적으로 원정에 나서지만 그것이 실패하거나 아예 불가능하게 된다면 다른 대안을 마련할 것이다;
그것은, 신라와의 교류를 일체 단절하고 나름대로 왜국을 독립적인 일본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 신라와 고구려에서는 동쪽의 섬나라를 왜국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백제인들은 해가 먼저 뜨는 땅이라는 의미를 붙여서 독자적으로 ‘일본’이라고 부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국은 국수주의적인 역사책을 작성하고 일본어를 만들어 보급하며 일본인과 예맥족은 인종상 다르다고 하는 인식을 후대에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조작이 시급하여 졸속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크다. 그에 따라 일본의 역사책의 내용은 실제역사를 급하게 단지 주어와 목적어만 바꾸어 위조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윤책이 내다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독자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자주적인 글자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보급할 것으로 재사 윤책이 예상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만주와 신라에서 벌써 사용한 적이 있는 올챙이 글자 또는 이두문자가 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재사 윤책은 훗날 자신의 예상이 서서히 맞아 들어가는 현실을 직면하고서 서기 680년에 그의 유훈과 같은 비망록 ‘천년풍음’(千年風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하였지만 그 이익을 일본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그 다음에는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다. 신라는 생각보다 적은 이익만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후세대가 할 일이 참으로 많다고 하겠다”.
한편, 당나라 원정군 사령관인 소정방이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과 그 동쪽에 있는 큰 성 웅진성만을 점령하고서 마치 백제의 강토를 전부 정복한 것인 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 신라군의 사령관인 김유신과 태자 김법민의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는 의자왕과 태자 효를 사로잡은 것으로 벌써 백제를 완전히 정복한 것으로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사비성을 지키라고 낭장 유인원에게 달랑 당나라 군사 1만명을 떼어주고 또한 웅진도독부 임시 책임자로 낭장 왕문도를 임명하면서 그 수하에 단지 2만명의 군사만을 주고 있다. 그것으로 어떻게 백제의 유민 380만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나서 소정방은 대군을 이끌고 또한 많은 전리품을 챙겨서 귀국하고 마는 것이다.
그 점이 하도 이상하여 국왕 김춘추 부자와 상대등 김유신이 재사 윤책에게 급히 자문을 구하고 있다. 그러자 윤책 군주의 답변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백제의 알맹이를 소정방이 쏙 빼어 먹고서 얼른 개선장군으로 당의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백제의 왕과 태자를 비롯한 대신과 장수 88명과 기술자 12,807명을 전리품으로 당 고종에게 바치고자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
국왕 김춘추와 상대등 김유신 그리고 태자 김법민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재사 윤책의 말이 이어진다; “백제 땅에 당나라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벌써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전국을 행정적으로 주와 현으로 나누었지요. 그것은 이제부터 그와 같은 당 고종의 뜻을 받아들이면 충실한 신하로 삼을 것이고 만약 백제의 유민들이 반발한다면 그것을 신라의 국왕이 책임지고 소탕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전부 왕서방이 차지하고자 하는 제국의 술책이지요”.
그 말을 듣자 김춘추와 김유신이 얼른 질문한다; “우리 신라가 누구 좋으라고 그 뒷감당을 한다는 말인가?... 안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소정방이 다시 대군을 몰고 쉽게 쳐들어올 수가 없을 텐데… “.
윤책이 즉시 대답한다;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당 고종이 신라에도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신라의 국왕을 임명하는 절차를 밟을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당 고종의 명령에 불복하게 되면 역신으로 간주하여 그 책임을 묻고자 나설 것입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지요… “;
깜짝 놀라고 있는 3인을 바라보면서 윤책이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요컨대, 우리 신라까지 완전히 길을 들여서 아예 신하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저들의 속셈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어 버린다면, 우리 신라인들은 점차 당나라가 원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열패의식에 젖어 소국의식만을 가지고 대국 당나라의 황제를 대대로 섬기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저는 그것을 장기적으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
모두가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흔들었지만 불행하게도 재사 윤책의 예상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왕과 태자를 사로잡은 지 3년이 되지 아니하여 드디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한다는 당 고종의 칙령이 반포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서라벌에 오인회의 구성원들이 전부 모여서 그 대책을 숙의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재사 윤책의 대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된다;
첫째로, 지금 백제의 각 지방에서 백제부흥운동을 벌이고 있는 세력을 점검하고 그들 가운데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반당(反唐)투쟁에 함께 나설 수 있는 자들을 적극 포섭한다;
둘째로, 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우리 신라는 두가지 명분을 내걸어야 한다; 하나는, 비록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을 쳤지만 그것은 당나라의 배만 불리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신라 역시 그들의 꾐에 빠진 피해자이다. 왜냐하면, 신라에도 그들이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족과 예맥족은 역시 말과 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민족 외세인 당나라의 침략군을 함께 물리치고 예맥족의 통일왕국을 다시 세워야만 한다.
셋째로, 백제의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반당활동으로 거세게 일어나게 되면 당나라에서는 틀림없이 친당파가 되어버린 부여융을 태자로 삼아 백제 땅에 보내어 선무공작을 진행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라는 부여융의 꾀임에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백제의 유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을 하여야 한다.
넷째로, 당나라가 토벌군을 대대적으로 백제 땅에 보낼 수 없도록 서돌궐과 토번국에 은밀하게 특사를 파견하여야 한다. 당나라가 백제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이어서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군사력을 동쪽 국경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당의 국경을 침범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재사 윤책의 대안을 신라의 국왕을 비롯한 오인회의 구성원들이 실천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때 불행하게도 서기 661년 6월에 국왕 김춘추가 급서하고 있다. 서기 654년에 52세의 나이에 신라의 왕으로 즉위하여 단지 8년 동안 통치하고서 그만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오인회의 구성원들은 그 슬픔이 너무나 크다. 국왕이기 이전에 그는 30여년 전에 서부전선에서 초임장교로 서로 만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 전우인 것이다. 그리고 삼한일통의 찬란한 꿈을 함께 꾸면서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한길을 달려온 동지이다.
그러한 오인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 임종자리의 김춘추가 태자 법민에게 가느다란 소리로 말한다; “법민아, 네 뒤에 있는 4분이 나의 가장 오랜 동지이며 이 나라 신라의 기둥이다. 너는 나를 이어 새로운 국왕이 되겠지만 저들을 나 보듯이 대하면서 신라가 기어코 삼한일통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 내 소원과 유언은 그것 뿐이다”.
태자 김법민이 입술을 깨물면서 다짐한다; “국왕 폐하의 유언을 제가 종신토록 명심하여 저분들과 함께 반드시 삼한일통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그 맹세를 담아 제가 큰 절을 저분들에게 올리겠습니다… “.
김법민이 진지하게 김유신, 김흠순, 최추랑, 그리고 재사 윤책에게 큰 절을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국왕 김춘추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숨을 거둔다. 윤책은 슬픈 눈으로 이 세상을 떠난 김춘추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서 태자 김법민을 바라본다. 이제는 자신의 지혜를 새로운 국왕 김법민에게 빌려주어 기어이 삼한일통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승하한 김춘추 국왕에 대한 윤책 자신의 의리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은 국왕 김춘추가 서기 661년 6월에 숨을 거두기 몇달 전에 그 부친 김용수 공이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책과 추랑은 장인의 상을 치르고 몇달이 되지 아니하여 이제는 처남 김춘추의 국상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홀로 남은 미도 옹주가 슬픔에 젖어서 사위인 윤책과 추랑에게 말한다; “남편 김용수 공도 그리고 그 아들인 국왕 김춘추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군요. 이 적막한 강산에 이제는 나 혼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러니 부디 두 분의 사위들은 나의 두 딸을 잘 돌보아 주세요. 이 에미가 죽고 나면 딸들이 모두 고아가 되고 말기 때문이지요… “;
그와 같은 나라와 집안의 큰 일을 치르면서 재사 윤책이 깊은 생각에 빠진다. 생각보다 김춘추의 아들인 새로운 국왕 문무왕이 국정을 잘 다스리고 있다. 부왕인 김춘추보다 오히려 더 뛰어난 인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큰 홍복이다;
따라서 윤책은 서서히 마지막 남은 숙제를 하고자 한다. 그것은 조기에 동방의 강대국인 고구려를 나당연합군이 정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발맞추어 자신의 가문이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과연 그 문제를 재사 윤책은 어떻게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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