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55(손진길 소설)
서기 665년 8월에 소위 ‘취리산 회맹’이 있고 나서 한달이 지나자 사비성 ‘월궁’의 행수인 월녀에게서 고급정보를 얻은 윤하신이 압량주로 돌아온다. 하신이 부친 윤책 군주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지금 백제의 고토에서는 웅진도독인 부여융이 마치 그 옛날 의자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
윤책이 관심을 보이자 하신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말한다; “그는 당 고종의 신임을 얻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백제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우리 신라군이 피를 많이 흘렸는데 그 열매는 이상하게도 의자왕의 3남인 부여융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유민들과 병사들이 이제는 부여융의 명령에 따르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그 말을 듣자 윤책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말한다; “하신아, 너는 당의 황제가 어째서 백제의 왕자였던 부여융을 그렇게 중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구나. 거기에는 당나라 왕가의 3가지 핵심정책이 들어있지. 첫째로, 과거의 수나라나 지금의 당나라나 모두 한족의 왕조가 아니고 사실은 그 옛날 훈족이 장안을 중심한 서쪽 지역에 정착하여 세운 왕조들이지… “;
하신이 경청하자 윤책이 이어서 설명한다; “그들이 섬서지역과 그 서편에 정착하여 황하유역에서 농업을 경영하고 있지만 역시 피는 유목민의 것이지. 따라서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고 무척 용맹하다. 그 덕분에 그들의 후손들이 왕가를 이루고 천하를 통일했지. 예를 들면… “;
윤책이 잠시 숨을 쉬고서 이어 말한다; “장안이 그 옛날 함양으로 불리고 있던 시대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고 그 뒤를 이어 유방이 천하통일을 하고나서 장안을 역시 수도로 삼았지. 따라서 장안을 중심한 지역 곧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는 말이 생겨났지. 그러나… “;
윤책이 잠시 숨을 쉬고서 이어 말한다; “나중에는 낙양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소위 중원사상을 지닌 한족의 눈치를 보고서 후한은 그 수도를 880리 동쪽에 있는 낙양으로 옮긴 것이다. 그후 수나라와 당나라가 역시 장안에서 천하를 통일한 것이야. 그러니 소수 훈족의 후예인 그들이 다수인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옛날 유목민의 후손들을 널리 포섭하여 중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
윤책이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북방 부여족의 후손인 백제의 왕자를 포섭하고 중용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지. 둘째로, 백제의 유민과 땅을 욕심이 많은 당 고종이 결코 신라에게 주고 싶지가 않아서 웅진도독부를 임시로 부여융에게 맡겨 놓은 것이지. 망국의 왕자인 부여융은 결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
드디어 윤책이 세번째의 설명을 한다; “셋째로,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하여 쉬운 방법으로 투항을 생각하고 있어. 고구려는 국왕이 아니라 대막리지가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어. 만약 정통성이 약한 최고권력자 연개소문의 일신에 변고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내분이 발생할 것이야. 그러면 당나라에 투항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그들을 우대한다는 선례를 미리 부여융을 이용하여 백제에서 마련해두는 것이지. 그것이 당의 지략가들의 술책이야. 실로 대단한 정책이지… “;
하신은 의문이 해소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윤책이 한가지 중요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와 같은 당 고종의 정책은 백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장차 고구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해. 따라서 고구려의 핵심권력층에서 내분이 발생하게 되면 먼저 당 고종에게 투항하는 자가 부여융처럼 출세하게 되겠지. 그러므로… “.
갑자기 윤책이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신라도 그와 같은 포용정책과 투항자 우대정책을 사용하자고 내가 벌써 국왕에게 말씀을 드려 두었다. 그러니 머지 아니하여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이야… “.
‘부친 윤책의 생각대로 과연 연개소문의 일신상에 변고가 발생할 것인가?... ‘, 알 수가 없어서 하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 윤책이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하신아, 천하의 대영웅인 연개소문이 금년에 벌써 71세이다. 나보다 한살이 적지만 그는 너무 많이 늙어버렸어. 왜냐하면 지난 642년 10월에 정변을 일으켜서 고구려의 독재자 대막리지가 된 이후 쉬지도 못하고 줄곧 24년간이나 막강한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내느라고 정신이 없었거든… 그러니 그 몸이 더 이상 배겨내지를 못할 것이야… “;
재사 윤책의 예상이 적중하고 있다. 그해 곧 서기 665년 겨울이 되자 연개소문이 향년 71세로 급서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갑작스럽게 연개소문이 사망할 것으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660년대에 들어서서 연개소문의 전공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서기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그해 겨울 평양성으로 진격해오자 연개소문이 그것을 물리치고 661년에도 당의 수군이 대동강을 타고 들어오자 그것을 격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기 662년에는 당나라의 방효태가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대동강 하구 사수에서 거의 몰살시키는 놀라운 승전보를 올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해 겨울까지 평양성을 공격하고 있던 소정방의 군대가 병참이 끊어져서 별수 없이 철수하고 만다.
그와 같이 강건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665년 말에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연개소문의 권력을 장남인 연남생이 계승하지만 두 아우 남건과 남산이 흔쾌하게 형을 보좌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면, 두 동생이 국사를 나누어 보면서 대막리지인 큰형 남생을 돕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선친 연개소문보다 한참 자질이 뒤떨어지는 남생이 큰 권력을 장악한 것이 불만인 것이다;
그와 같은 낌새를 눈치챈 중신들이 남생과 두 동생 사이를 이간하기 시작한다. 남생이 처음에는 믿지 아니하였지만 나중에는 불안하여 동생들을 비밀리에 사찰하기에 이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동생들이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평양성으로 부른다. 그렇지만 동생들의 술책을 눈치챈 연남생이 서기 666년 6월에 국내성에서 수하들을 이끌고 당군에게로 가서 신변보장을 요청한다.
평양성의 보장왕은 연남건과 연남산을 붙들고 사정사정한다;
“지금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였기에 국가적으로 그 어느때보다 큰 위기가 닥치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두 분이 누란의 위기에서 우리 고구려를 구해주세요. 이제부터 연남건이 대막리지가 되어 전군을 지휘해주세요… “;
한편, 그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나당연합군이 놓칠 수가 없다. 서기 668년 2월에 연남생을 앞장 세워 당나라 군대가 요동의 신성과 부여성을 함락하고 평양성으로 향하고 있다;
동시에 신라군이 북진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가 12개성을 신라의 문무왕에게 바치고 있기에 고구려 군대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그것을 보고서 동해안의 고구려인들이 집단적으로 왜국으로 이주하고 있다. 그 수가 1천 8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다. 그와 같이 왜국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그들을 받아 들여서 일본의 발전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큰 이득을 보던 왜국이 8년후에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하여 또 이득을 보고 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먼 훗날 20세기 중반에 남북한 간의 비참한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이 또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세계 제2차대전에서 처참하게 패전한 일본이 뜻밖의 전후 경제회복의 천금 같은 기회를 한국인의 골육상쟁으로 말미암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기 668년 8월에 평양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되고 만다. 보장왕이 성문을 나서서 항복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서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검모잠 등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고구려 유민 약 2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문무왕에게 귀순하고 만다;
그것은 재사 윤책이 일찍이 문무왕에게 건의한 고구려 유민 포용정책이 크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문무왕은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의 귀순자들을 오늘날의 전북 익산인 금마저에 옮겨 살게 하면서 안승을 보덕왕에 봉하고 있다. 그와 같이 고구려의 유민과 투항자들을 우대함으로써 그들과 힘을 합하여 장차 당나라의 군사를 몰아내려고 하는 신라조정의 깊은 의도인 것이다.
신라의 국왕과 조정이 그러한 계산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 고종은 기고만장하고 있다. 그는 그 다음해 서기 669년에 고구려의 귀족과 평민 등 약 15만명을 당나라로 끌고가서 멀리 동(東)돌궐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변경 오르도스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만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예 668년 9월에 평양성에서 안동도호부를 발족시키고 있다. 당 고종의 특명을 받은 설인귀가 2만명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안동도호부의 수장인 도호로 취임한다;
그의 임무는 고구려의 유민과 땅을 다스리는 군정을 실시하는 것이다. 도호부 아래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있다.
나중에는 안동도호부가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까지 관할하는 것으로 권한이 확대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신라의 문무왕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안승과 검모잠을 지원하면서 안동도호부를 공격하게 한다. 그 작전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670년초부터 신라군이 당나라 군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설인귀는 위협을 느끼고 얼른 안동도호부를 변방 신성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670년 3월에 신라군 1만과 고구려 부흥군 1만이 연합하여 압록강을 건너가서 피신한 안동도호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 결과 대대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나당(羅唐)전쟁의 경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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