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56(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17. 03:47

천년의 바람소리56(손진길 소설)

 

서기 670년에 고종은 안동도호부에서 도호 설인귀가 보낸 급보를 보고서 엄청 분노하면서 요동지방으로 대군을 파견하고자 한다; “조그마한 신라가 감히 당의 황제인 나를 무시하고서 쥐가 고양이에게 대드는 모양새로 만용을 부리고 있구나. 초전에 박살을 내지 아니하면 계속 달려들 것이야. 그러므로 최근 전쟁에서 적이 없는 말갈족 출신 이근행에게 정예병을 주어 그들을 모조리 쳐부수고 차제에 신라까지 점령하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라!... ”;

  결과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고구려의 강토를 되찾으려고 신라 문무왕의 계획은 671년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이근행이 지휘하고 있는 막강한 당나라의 정예병이 설인귀의 군대와 함께 남진하여 672년에는  평양성까지 차지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진하여 신라의 서라벌까지 쳐들어오게 되면 신라의 존립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문무왕은 재사 윤책의 건의를 받아 들여 급히 서돌궐과 토번 그리고 남만에 밀사를 파견한다. 내용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리 신라가 지금 고구려의 강토를 차지하고자 당의 군대와 혈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고종은 차제에 정예병 20만명을 동원하여 동방 땅을 완전히 평정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다음 정복의 대상은 그대들이다. 따라서 부디 실기하지 말고 지금 당장 당나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면 승리는 우리들의 것이다. 아무쪼록 깊이 유념하여 우리와 함께 행동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상”;

사실 신라가 전군을 동원하여 당나라 원정군과 결전을 벌인다면 그렇게 밀리지 아니하는 실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후부를 동시에 치는 양동작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압량군주인 윤책이 그동안 조정대신들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포용하고 남겨진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외세인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자 작전계획을 철저하게 세웠다. 그리고 강병을 만들기 위하여 신라군에 대한 훈련을 강화했다. 나아가서 고구려의 유민들을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로 만들고 있다.

그와 같은 준비가 끝나는 시점을 대충 672년으로 잡고 있는데 도중에 그만 두가지 사건이 발생하여 신라의 군부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나는, 고종이 나당연합군의 선례를 따라 신라군의 작전지휘권 안동도호인 설인귀에게 넘기라는 것이다;

 그가 당의 황제를 대리하여 이제부터 군사작전을 총괄할 것이라는 지시이다. 그와 같은 무례하기 그지 없는 고종의 조치에 대하여 신라 군부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무모한 고종의 명령이 뒤를 잇고 있다; “평양과 한강 사이에 있는 땅으로 진출할 있는 동쪽의 산지 비열홀 신라는 안동도호부로 넘기도록 하라. 땅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방어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충지이다. 계림도독부는 안동도호부의 하급기관이므로 당장 시행하도록 하라”.

서기 550년경 신라의 24 진흥왕은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원산의 남쪽에 인접하고 있는 고구려의 비열홀을 차지하고  이름을 비열주로 바꾸고 있다. 위치는 오늘날 강원도 안변이며 서쪽의 평양과 같은 위도이다;

 군사적으로 비열홀이 중요한 이유는 그곳 산지에서 군사를 이동시키면 서쪽으로 평양을 노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도호인 설인귀는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상 비열홀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흥대왕 당시의 신라영토의 동북면 한계선 비열홀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북쪽의 원산까지를 얻고자 하는 신라 군부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심리적인 타격이 대단하다.  

그에 따라 신라국왕의 존재와 신라인의 주권을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있는 고종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신라의 군부와 대신들이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이제는 이상 관용하거나 인내할 수가 없다. 패권국으로 행세하고 있는 고종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 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우리 신라는 영원히 당나라의 개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때이다”;

그와 같은 분노의 함성을 들으면서 재사 윤책이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 “ 2년만 기다리면 한꺼번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가 있는데 안타깝구나. 도중에 일이 터져버렸으니 장차 당의 원정군을 막을 일이 쉽지가 않겠는데그렇지만 한번 부딪혀 보아야지. 보급선만 끊으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으니까!... “.

드디어 문무왕이 670 3월에 대장군 설오유에게 1만명의 기병을 주고 고구려 유민으로 이루어진 기병 1만을 고연무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지금 안동도호부가 고구려 유민들의 반격에 밀려서 급히 요동의 신성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은 뒤를 쫓아가서 압록강 유역의 오골성 차지하라. 그곳을 점거하고서 이제부터 남진하는 당의 군대를 막도록 하라”;

작정이 성공적이다. 그러나 고종이 다음해에 이근행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그때부터 밀리기 시작한다. 671 7월에는 요동지역을 빼앗기고 다음해에는 황해도에서 전투가 계속되는데 그만 8월에 석문전투에서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패하고 만다;

 석문의 위치는 오늘날 황해도 서흥의 넓은 들판이다;

그것을 보고서 문무왕이 재사 윤책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군사작전 외교작전 병행하기 시작한다. 군사적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최후의 배수진을 구축한 것이다. 따라서 서기 673년에 당나라 원정군의 남진을 임진강에서 막고 있다. 다른 한편 외교적으로는, 문무왕이 특사를 고종에게 보내어 잘못을 시인하면서 부디 군사작전을 멈추어 달라고 읍소를 한다.

그와 동시에 재사 윤책의 비책을 시행한다. 밀사를 서돌궐과 토번 그리고 남만으로 보내어 당나라의 배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한반도에서 신라가 당의 정예병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

한편 재사 윤책이 구상했던 양동작전 백제의 고토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라 30 국왕인 김법민은 통치 10년이 되자 서기 670 1월에 백제의 고토와 고구려의 고토를 얻기 위하여 () 전투에 들어간다. 준비를 위하여 재사 윤책의 건의로 그동안 3가지 준비를 했다; 첫째, 고구려 부흥군에게 자금지원을 하고 군사훈련을 맡아서 해주었다. 그들이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평양성에서 요동지역 신성으로 몰아내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둘째, 신라군의 무기체계를 당나라의 무기를 연구하여 개량하고 화랑과 향도들을 대거 동원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셋째, 전방에 있는 성들을 튼튼하게 수리하였다.

둘째로, 본래의 계획은 서기 672년경 ()당전쟁의 준비가 완성되면 당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계획의 실시가 부득이 2 앞당겨진다. 이유는 고종이 신라군의 작전지휘권은 물론 동해안 국경지대의 비열홀 지방까지 안동도호부의 설인귀에게 넘기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한 신라의 군부와 대신들이 이상 인내하지 말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자고 궐기한 것이다. 그에 따라 문무왕은 재사 윤책의 건의로 서기 670 3월에 신성으로 이주하고 있는 안동도호부를 치기 위하여 압록강 오골성 점령하라고 군대를 보낸다.   

셋째로, 당군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고구려 부흥군에게 시달리면서 신라의 정예병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에 문무왕은 윤책의 책략에 따라 670 음력 6월경부터 백제 땅을 다스리고 있는 웅진도독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필요하므로 한창 익어가고 있는 호남평야의 벼를 짓밟도록 한다. 그것을 보고서 웅진도독부의 군대가 출동한다. 그러나 2만명에 불과한 웅진도독부의 군사로는 도저히 신라군을 상대할 수가 없다. 따라서 당의 군부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토를 침범하고 있는 신라군과 한창 전쟁 중이므로 크게 보내어줄 군사가 없다. 그에 따라 말갈군을 파견하고 있다. 신라군이 태안반도를 통하여 들어온 말갈군이 설구성 주둔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서 그들을 공격한다.   결과 671 1월에 그들을 도륙하고 아예 태안반도를 통하여 들어오지 못하도록 옹포 신라군을 주둔하여 지키게 한다. 일대가 훗날 신라의 웅주인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안동도호부를 다스리고 있는 설인귀가 웅진도독부의 위기를 보고서 동원가능한 당군을 육로로 내려 보내고 있다. 신라군이 671 6월에 웅진도독부의 군대와 설인귀의 원군을 홍성에 있는 석성전투에서 격파하고 만다. 신라의 대승으로 백제의 고토에서 웅진도독부와 당군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신라의 문무왕이 서기 671 7월에 백제의 유민과 고토를 다스리도록 소부리주 설치한다.  

다섯째로, 신라가 아찬 진왕을 사비성에 파견하여 백제의 땅을 소부리주라고 부르면서 통치하게 되자  당나라에서는 땅을 다시 찾기 위하여 군사행동을 실시한다. 우선 671 10월에 당나라 수송선이 들어왔으나 격퇴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672 2월에는 사비성 인근의 가림성에서 웅진도독부의 잔당이 끝까지 수성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한 사태를 지켜보다가 드디어 당에서는 676 11월에 백강을 통하여 들어와서 웅진도독부의 땅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라군의 철저한 방어로 기벌포에서 패하고 물러가게 된다;

 

 그것으로 당은 백제 땅을 끝까지 얻지를 못하게 된다. 이유는 서쪽 국경을 토번이 대대적으로 침범하여 그들을 격퇴하는데 군사력을 집중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1 전에 발생한 고구려 땅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아직 남아 있다. 대략을 살펴보면, 당나라는 마지막 남은 군대를 끌어 모아 675 9월에 남진한다. 그것을 신라군이 연천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매소성에서 쳐부수어 대승하게 된다;

그것으로 육로를 통한 당나라의 침입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이상 신라를 침공할 여력이 사라지고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의 과정은 어떠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