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5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17. 21:43

천년의 바람소리57(손진길 소설)

 

고종 이치는 동방 예맥족의 3국을 정벌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한때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던 부황 태종 이세민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 것이 동북아의 강대국 고구려에 대한 정벌이다. 그런데 고종 이치는 부황의 위업을 넘어서서 당대에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까지 전부 정복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부황 태종과 신라의 김춘추가 서기 648년에 맺은 군사동맹을 이용하여 나당연합군을 만들어 660년에 백제를 멸하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아예 동맹국인 신라까지 집어삼키는 것이다

고종 이치가 서기 660 9월에 백제를 멸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한 소정방에게 질문한 내용이 점을 말하고 있다; “그대는 13만명의 대군을 끌고 가서 어째서 신라까지 도모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인가?... “;

원정군 사령관 소정방이 현실적인 대답을 한다; “이번에 백제를 멸하는데 동원이 신라군은 전방에 1군과 2군이 각각 5만명씩이고 후방에는 신라왕 김춘추가 별도로 10만명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 13만명으로는 도저히 신라군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

말을 들은 고종은 속으로 입맛이 쓰다. 그래서 다음 기회를 엿보고 있다. 참으로 운이 좋게도 서기 665 겨울에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고 3아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하고 있다. 결과 서기 666 6월에 동생에게 쫓기게 장자 연남생이 아예 당나라에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고종은 나당연합군을 동원하여 668년에 고구려를 멸하는데 연남생이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크게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평양성을 점령한 고종은 설인귀를 안동도호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고구려 땅에 군정을 실시한다. 그리고 아래에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를 다스리는 계림도독부를 소속하게 한다;

 

고종이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점령한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663년에는 의자왕의 3남인 부여융을 당에서 백제 땅으로 보내어 아예 665년에 웅진도독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663년에 신라의 국왕인 문무왕을 고종이 제마음대로 계림도독에 봉하고서 665년에는 부여융과 서로 평화협력을 하라는 맹약까지 억지로 맺게 한다.

그와 같이 신라국왕을 길들이고 있는 고종의 의도는 뻔한 것이다. 당의 황제를 대리하여 예맥족을 다스리는 수장이 안동도호 설인귀이며 아래에 웅진도독 부여융과 계림도독 문무왕이 동격으로 소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멸감을 문무왕이 참으면서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낼 준비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

재사 윤책과 상대등 김유신이 일을 적극 돕고 있다. 신라의 군사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유민을 정예병으로 만드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무기체계를 개량하고 전방의 성들을 튼튼하게 수축한다.

그렇게 중기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하고 있는 도중에 그만 당의 횡포를 인내할 없는 사건이 둘이나 발생하고 것이다.   고종이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있다. 나당연합군의 선례에 따라 신라군의 작전지휘권을 안동도호 설인귀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동도호부의 중심인 평양성의 안보를 보강하기 위하여 멀리 동쪽 산지와 바닷가에 있는 신라의  비열홀주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무례하고 무리한 요구에 크게 분노한 신라의 군부가 당과의 일전을 국왕에게 강력하게 건의한다. 서기 670 신라통치 10년을 맞이하고 있는 문무왕이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고구려부흥군을 적극 지원하여 평양성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쫓아내면서 신라군과 함께 별도로 양성한 고구려군으로 하여금 압록강변의 오골성을 점령하게 것이다.

문무왕은 압량군주인 재사 윤책이 수립한 백제 접수전략을 실천하여 전광석화와 같이 1년만에 백제의 유민과 고토를 점령하고 만다. 그에 따라 크게 당황한 고종이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 땅을 다시 차지하려고 하며 동시에 육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땅으로 들어와 신라로 남진한다.

고종이 말갈출신의 용장 이근행에게 4만명의 정예병을 주어 안동도호인 설인귀와 함께 고구려 땅을 회복하고 신라까지 정복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나 673년에 임진강에 배수진을 치고서 신라군이 끝까지 항전을 하고 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서 고종 이치가 서기 674년에 별도로 명장 유인궤에게 4만명의 정예병을 주어 신라를 치라고 명령한다. 추가병력이 도착하자 당의 2장군 이근행과 유인궤는 신라군의 배수진인 임진강을 돌파하여 양주 지역에 있는 매초성을 정벌하여 전진기지로 삼는다;

유인궤가 지휘하고 있는  4만명의 당군은 675 2월에 파주에 있는 칠중성을 빼앗고 주둔하기를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서 신라의 문무왕은 5월에 압량군주인 재사 윤책을 의정부에 있는 낭비성으로 보내어 북벌을 수행하고 있는 신라군 사령관 김유신을 도와 당군을 임진강 북쪽으로 다시 몰아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낭비성으로 떠나기 전에 재사 윤책이 사제인 일광스님으로부터 급한 보고를 받고 있다. 내용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형, 드디어 토번이 움직이고 있어요. 명장 가르친링 지휘하고 있는 토번군이 지난 3월부터 당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있어요… “;

윤책의 얼굴에서 모처럼 미소가 피어난다. 그것을 보고서 일광스님이 신이 나서 말한다; “따라서 위기를 느낀 고종이 서부전선에 군대를 보강하고 있어요. 고구려 땅에 파견한 용장들과 군사들을 상당수 서부전선으로 보낼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당군을 몰아내세요”;

사제 일광스님이 백제의 사비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당나라 장안으로 들어가서 첩보활동을 하더니 참으로 중요한 고급정보를 얻어서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윤책이 말한다; “사제, 정말 중요한 정보야. 우리가 서돌궐, 토번, 남만으로도 불리고 있는 남조 군데에 협력을 요청하였는데 이제서야 토번이 움직이고 있구만. 참으로 되었어. 이제 고구려 땅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있을 것이야… “.

낭비성에 도착한 재사 윤책이 고급정보를 북방사령관 김유신에게 알려준다. 그도 크게 기뻐하면서 차제에 고구려의 고토를 완전히 신라에 병합하자고 합의를 한다;

  사람이 오인회의 다른 구성원인 최추랑과 김흠순을 아예 낭비성으로 불러 올린다. 이제 김춘추는 가고 없지만 남은 4명의 동지들이 백제 땅에 이어 고구려 땅을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만들어 명실상부한 삼한일통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나선다.

따라서 재사 윤책이 당장 필요한 전술 두가지를 고안하여 이제는 오인회가 아니라 사인회가 4명의 모임에서 발표한다; “지금 안동도호부의 군사는 전부 이근행이 지휘하고 있어요. 설인귀가 필요한 병참을 담당하고 있지요. 그리고 칠중성을 차지한 유인궤의 움직임이 수상해요. 아무래도 장안에서 전보명령을 받은 같아요. 따라서 다음 두가지 전술을 구사하면 좋겠어요… “.

김유신 형제와 동서인 최추랑의 얼굴을 한번 살핀 다음에 윤책이 천천히 설명한다; “첫째, 설인귀가 수군을 이용하여 군량미를 임진강으로 가져오고 있는데 그것을 탈취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양주의 매초성을 매섭게 공격하면 그들은 북쪽 연천에 있는 매소성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반은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

윤책이 잠시 숨을 돌리고서 이어 설명한다; “매소성은 아주 추운 곳이지요. 그러니 그곳에서 겨울을 맞이하게 되는 당군들이 추위에 덜덜 떨게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효과적인 방법이 솜옷과 솜이불을 운반하고 있는 그들의 보급부대를 공격하여 탈취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당군은 보급이 원활한 임진강과 한탄강 북쪽으로 전부 퇴각하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계책이라고 찬성한다. 따라서 그들은 9월에 임진강 하류에 있는 파주의 천성 병력을 배치하여 두었다가 임진강으로 진입하고 있는 당의 병참선을 공격한다. 작전에 부친을 따라 낭비성에 와있던 윤책의 장남 윤상신 참여하고 있다. 당의 수군을 지휘하고 있던 설인귀 모처럼 패전을 맛보고 도망을 치고 만다;

한편 칠중성을 차지하고 있던 유인궤 갑자기 7월에 인사이동이 되어 장안으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양주의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는 이근행 칠중성의 방어책임까지 맡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신라군의 공격이 심해지고 있다. 이근행은 매초성이나 칠중성보다는 한탄강에 가까운 매소성 방어하기가 쉬워 보인다. 따라서 그곳으로 전군을 지휘하여 작전상 후퇴를 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패착이다. 왜냐하면, 명장 김유신과 김흠순과 최추랑 그리고 재사 윤책이 한마음이 되어 신라군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임진강과 한탄강을 통하여 수송되고 있는 당군의 보급로를 철저하게 차단한다. 그리고 매소성을 포위하고서 연천의 추위를 온몸으로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이근행은 자신의 군대 4만명, 유인궤가 맡기고 2만명 그리고 설인귀의 안동도호부 군대가 4만명이나 되므로 10만명의 대군이다. 그런데 매소성을 포위하고 있는 신라의 군대도 언뜻 보기에 정도의 병력이다. 하지만 신라군은 병참이 원활하다. 당군인 자신들은 보급이 차단된 상태이다.

추위가 10 하순에 벌써 시작되고 있다.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이라 군사들이 기아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이근행 결단을 내린다; “작전상 후퇴를 것이다. 매소성을 버리고 한탄강을 건너 북쪽으로 탈출한다. 선봉부대가 길을 뚫으면 전군은 뒤를 따른다”;

그러나 탈출이 용이하지가 아니하다. 그럴 벌써 알고서 재사 윤책이 김유신과 합의하여 가는 길목의 양편 산지 여러 곳에 신라군을 많이 매복해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나라 군사들이 협곡을 따라 북행을 하면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기마병은 군마를 버리고 탈출하고 있다. 나중에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군비도 버리고 달려가고 있다;

그것이 이름하여 매소성 전투인데 사실은 재사 윤책의 계책이 성공하여 이삭줍기를 것이다. 하지만 말갈 출신으로 당의 명장인 이근행이 손해를 보고서 북으로 달아난 전투이니 역사에 길이 남는 사건이다. 일로 말미암아 훗날 이근행은 서부전선으로 이동되어 토번군을 막는데 동원된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인 요동 말갈의 땅으로 들어오지를 못한다.

일설로는 그가 요동으로 돌아가면 독자세력을 만들 가능성이 있어 그것을 미연에 예방한 고종의 계책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매소성 전투의 대패로 말미암아 이근행의 연전연승의 신화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인회 구성원들은 신라군을 지휘하여 평양성 가까이 당군을 추격한다. 그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군령이 서라벌의 문무왕으로부터 전방으로 급히 전해지고 있다. 내용이 무엇일까? 군령 때문에 윤책과 추랑의 선택이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천추에 한으로 남는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비판이 생겨나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