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59(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20. 13:05

천년의 바람소리59(손진길 소설)

 

 일광스님의 정보가 정확하다. 고종이 고구려와 백제에 있는 당나라 군사들을 비밀리에 철수시키고 있다. 시급한 철수를 위하여 많은 함선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에 다행스럽게도 문무왕이 재사 윤책을 다시 압량군주로 발령한다.

윤책은 그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서 676 9월에 백제의 고토를 사비성에서 다스리고 있는 소부리주의 군주 진왕을 만난다;

 

  자리에서 윤책이 말을 꺼낸다; “금년 봄부터 서쪽 영토에서 공격하고 있는 토번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당의 조정이 고심 중에 있어요. 따라서 여기 백제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모두 선박으로 철수하려고 해요. 우리는 그들을 고이 돌려보낼 수가 없지요. 진왕 군주 나와 함께 그들의 수송선을 공격하도록 합시다”.

군주가 벼르고 있는 사이 마침내 서기 676 11월에 백강 입구 기벌포로 당의 수군 대군단이 들어오고 있다. 정보를 미리 파악한 소부리주의 군대와 압량주의 군대가 협공하여 공격을 가한다. 당군을 배에 태우고 있던 수송선이 엄청난 불화살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결과 천하의 명장이라고 소문이 설인귀 많은 군선과 병사를 잃어버리고 당나라로 도망치고 만다.

뒤를 이어 고구려의 고토에서 철군하고 있던 당군들도 서해로 들어설 수가 없다. 신라의 수군이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서 고종 이치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고종이 신라의 문무왕에게 급히 특사를 보내어 자신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는데 내용이 일종의 애원이다.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 “우리 대당은 28 서기 648년에 신라의 김춘추와 전임황제 태종이 맺은 동맹조약을 성실하게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무력충돌을 이제는 끝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동맹조약을 앞으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으로 간주할 것이니 철수하는 우리 당군을 공격하지 말기 바란다”.

그와 같은 고종의 친서로 7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나당전쟁이 드디어 서기 676년말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 예맥족의 절반을 당나라에게 내주고 말았으니 앞으로 땅을 되찾는 것이 후손들에게 남겨진 크나큰 과제라고 하겠다;

당나라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자 한달이 지난 다음해 서기 677 정월에 신라의 문무왕이 전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한다. 자리에서 재사 윤책과 군주 최추랑에게 식읍이 하사가 된다. 물론 사람에게 사전에 어느 지역을 식읍으로 받고 싶은지 의사를 타진한 다음의 조치이다.

군주 윤책은 칠중성이 있는 파주 지역을 달라고 희망했다. 지역이 한반도의 중심권역에 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살고 있어야 자신의 후손들이 한반도 전체를 있는 눈을 가지게 것이고 장차 예맥족을 통일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있을 것이라고 재사 윤책이 판단한 것이다.

그와 같은 선견적인 재사 윤책의 이야기를 듣게 아래동서 최추랑도 결단을 내린다. 따라서 그는 낭비성이 있는 의정부 지역을 식읍으로 달라고 희망하고 있다. 문무왕은 고맙게도 그들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고 있다.

그에 따라 군주 윤책은 칠중성주로 발령이 나고 군주 최추랑은 낭비성주로 발령이 난다. 사람은 15년전에 장모 미도 옹주가 별세하면서 남긴 서라벌 교리의 대저택을 차제에 처분하고서 처자식을 솔거하여 아예 중부지역으로 이주를 단행한다. 그때가 문무왕 17년인 서기 677 3월이다. 당시 재사 윤책의 나이가 벌써 85세이다;

 

신라의 문무왕이 삼한일통에 공이 신하들에게 식읍을 하사하면서 중심지에 있는 성의 성주로 발령한 뜻은 대대로 성을 다스리면서 자신의 식읍을 적의 침탈로부터 지켜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전방에서 무인의 가계가 대를 이어 자리를 잡고 있으면 자연히 신라조정으로서는 일종의 방어막이 형성된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전략이다.

그와 같은 신라국왕과 조정의 뜻을 이해하고 있기에 노년의 윤책이 성을 다스리고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식읍 농경지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보다 소작료를 적게 받고 있다.

이제 노년의 재사 윤책이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문무왕이 고맙게도 다음해 678 정월에 공신들을 서라벌 왕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푼다. 자리에서 통일신라의 발전을 위하여 좋은 정책들을 제시하여 보라고 권한다.

좋은 기회이므로 사인회 구성원들이 차례로 발언한다. 김유신 형제와 최추랑 그리고 재사 윤책이 건의하고 있는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북벌을 주장하고 있다. 당나라가 서쪽 땅에서 토번의 공격을 막아내느라고 정신이 없는 이때가 고구려의 땅을 수복할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고구려의 유민과 고토를 신라가 온전히 소유하게 되면 당나라가 함부로 다룰 수가 없는 강대국이 있다. 따라서 그것이 국가안보를 확실하게 구축할 있는 방법임을 재삼 강조한 것이다.

둘째로, 백제의 식민지였던 왜국을 신라의 속국으로 삼아야 한다;

 

 왜국을 정벌하여 신라가 다스리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이 국력을 길러서 훗날 신라를 침공할 것이다. 그와 같은 우환거리를 남겨두는 것은 신라의 안보에 있어서 위협인 것이다.

셋째로, 화랑제도를 보전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삼한일통에 있어서 화랑 출신의 장군과 장수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귀족과 백성들이 젊은 시절 향도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단체생활을 하였기에 신라의 군부가 일체감이 있고 신라의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통일신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있는 원동력이 화랑제도의 운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화랑제도의 철폐나 축소를 논의하는 주장을 물리쳐야 한다.

넷째로, 동족인 예맥족의 상당부분을 우리 신라가 통합하였기에 신라의 군대는 언어가 하나이고 문화가 하나이다. 그러므로 군령의 시달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한자를 사용하여 군령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문제이다. 한문을 배우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있으므로 차제에 뜻글자인 한자 대신에 예맥족의 말을 글로 바로 적고 소리로 전달할 있는 일종의 소리글자 창제와 사용이 시급하다;

 

 그렇게 되면 군의 작전과 군령의 전달이 빨라지고 백성들도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과 글을 함께 사용할 있게 되어 문맹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문화의 창달과 민족의 보전을 위하여 필요한 사업이다.

다섯째로, 천도를 해야 한다. 과거 신라의 왕도로서 서라벌은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제는 백제와 일부 고구려의 땅을 병합하였기에 통일신라의 도성으로서는 너무 남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도성을 멀리 북서쪽으로 옮겨야 한다. 도성이란 나라의 중앙에 자리를 잡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당장 어렵다고 하면 과도기적으로 내륙인 달구벌 쯤으로라도 천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와 같은 요지의 사인회의 주장에 대하여 그날 신라의 국왕인 문무왕이 그에  반대하고 있는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사인회가 북벌을 주장하지만 문무왕 자신은 그것에 반대한다.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외교관례상 태종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태종의 아들인 고종을 설득하여 전쟁을 그칠 수가 있다. 하나는, 나라와 비교할 신라는 작은 나라이다. 소국이 대국을 상대하여 오래 전쟁을 벌이게 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소 굴욕적이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 짐이 고종에게 같은 흉노족의 후예인 신라왕조를 살려 달라고 말한 것이다.

(2)   비록 상호불가침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역시 당은 대국이고 신라는 소국이다. 그러므로 당의 황제는 항상 신라의 군사행동을 주시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군이 북벌에 나서거나 왜국을 치기 위하여 원정에 나서는 행위를 결코 용인하지 아니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나서면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 신라는 당과 싸워서 다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고 짐은 생각한다;

 

 그것은 신라의 존망에 관한 문제이니 다시는 거론하지 말아 달라.

그와 같이 문무왕의 입장이 확고하므로 재사 윤책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기고 입을 다물고 만다; “폐하, 이번 기회에 고구려의 고토를 완전히 얻지 못하면 신라의 삼한일통은 절반의 통일에 불과하며 민족의 통일은 미완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신이 드릴 있는 말씀은 이상입니다”;

김유신과 그의 동생인 김흠순은 그와 같이 발언하고 있는 재사 윤책을 안타까운 눈길로 보고만 있다. 자신들이 나서서 이상 윤책의 발언을 지지해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신라의 국왕인 문무왕과 자신들 사인회 원로들이 완전히 국론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무왕의 외숙이자 매제인 김유신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폐하, 군주 윤책의 건의는 어디까지나 신라의 천년대계를 위하여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압니다. 당장은 지난 660년에 시작된 전쟁이 18년이 지나 이제서야 끝이 났기에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폐하의 의견대로 국정을 운영하시면 것으로 소신은 사료가 됩니다. 부디 그렇게 국정을 운영하시고 아무쪼록 강건하시기를 소신은 바랄 따름입니다”;

 

노신 김유신의 말을 듣자 문무왕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그리고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모습을 보고서 재사 윤책은 이상의 건의를 삼가하고 만다. 신라 국왕의 최측근이며 국가의 최고 원로인 김유신 공이 그와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이상 말해 보아야 헛수고가 것이기 때문이다.

재사 윤책이 국가적으로는 이상의 기대를 접고 만다. 하지만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자신의 뜻이 후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파주의 칠중성에 도착하자 윤책이 자손들에게 남기는 비망록 천년풍음’(千年風音) 작성에 몰두하게 된다.

(양해말씀; 명장 김유신은 서기 673년에 별세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설이므로 678 현재 살아있는 것으로 각색하고 있다. 이점 착오가 없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