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5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10. 16:26

천년의 바람소리50(손진길 소설)

 

군주 윤책은 압량주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기 659년까지 발생한 백제의 주요사건들을 다시 한번 머리속으로 정리해보고 있다. 그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31대 의자왕은 서기 6563월에 자신의 지나친 유흥과 향락을 비판하는 좌평 부여성충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그만 옥사에 가두어 버린다. 왕족인 성충은 51세의 장년이었지만 평소 소갈병을 지니고 있었기에 감옥생활을 하게 되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죽기를 작정하고 단식하면서 혈서를 작성하여 의자왕에게 전달한다.

그 내용이 미구에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집어삼키고자 달려올 것이니 효과적인 수비를 위하여 천혜의 요충지를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라군이 가잠성에 집합하여 험한 산지를 넘어 황산벌로 그 다음에는 사비성으로 곧바로 쳐들어 올 것이니 부디 유일한 고갯길인 숯고개 침현에서 방어하라는 것이다;

 

 그곳에 매복하여 대응하면 일당백의 지형이므로 충분히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제를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의 대군은 고구려를 통과하지 못하기에 부득이 전함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침공할 것인데 그들이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백강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입구인 백강하구 기벌포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 절묘한 섬이 기벌포를 가로막고 있으므로 매복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곳이다;

 

 한마디로, 수십만의 당군이 쳐들어오더라도 전부 물리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르고 의자왕이 퇴짜를 놓고 있다. 그것은 신라로서는 행운이지만 백제로서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둘째로, 성충이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단식한지 28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소식을 접한 좌평 흥수의직 그리고 달솔인 상영계백은 비통에 잠긴다. 그 반면에 의자왕은 그 기회를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 방법이 다음해 657년에 기어코 41명이나 되는 자신의 서자에게 전부 최고위직인 좌평의 벼슬을 하사하고 그에 해당하는 식읍을 준 것이다;

그와 같은 억지스러운 의자왕의 조치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명의 적자인 왕자에 이어 41명이나 되는 서자인 왕자에게 전부 식읍지를 주게 되니 국왕의 영지가 부족하여 결국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왕자들에게 주고 만다. 그 결과 두가지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 왕자들과 귀족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의자왕과 왕실에 대한 반감이 커져서 백제를 지키려고 하는 충성심이 귀족사회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자신만만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마련한 두가지 동맹체제가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6년전 곧 서기 653년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강화하였는데 그것이 잘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의자왕의 자식 가운데 지차들이 왜국으로 가서 식민지를 훌륭하게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하면 그들이 왜국의 함대를 몰고 달려올 것이다. 둘째, 동북아의 강대국인 고구려와의 군사동맹이 잘 작동하고 있다. 4년전 곧 서기 655년 가을에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 결과 30여개의 성을 점령했다. 특히 고구려는 휘하에 말갈군까지 거느리고 있어 군사력이 막강한 것이다. 그러니 의자왕은 나당의 연합군의 침공 정도는 자신의 동맹국의 힘을 이용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넷째로, 국가안보의 위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윤책이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의자왕은 내우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41명의 서자 왕자들에게 배분하여 준 것이 내부분열의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겁도 없이 좌평 흥수의 직언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그를 서기 659년말에 그만 오늘날 남해안 장흥에 해당하는 고마미지현으로 멀리 귀양을 보내고 만다;

 

 흥수의 직언은 3년전 좌평 성충의 충언과 같은 내용이다. 의자왕이 주흥과 향락만 즐기고 있으므로 부디 정신을 차리시고 국정을 세밀하게 살피시라고 직언을 하다가 그만 유배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백제의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직언과 충언이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서기 660년초부터 압량의 군주인 재사 윤책은 부지런히 서라벌을 방문하고 있다. 이제는 백제를 칠 여건이 제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인 김춘추는 빠른 군선으로 산동성에 있는 신라소의 책임자에게 전령을 보내고 있다. 국왕의 친서는 파발로 당의 수도 장안에 주재하고 있는 둘째 왕자 김인문에게 전달이 되고 있다;

서기 660년초 32세에 불과한 왕자 김인문이 현지에서 대()당외교를 전담하고 있다. 그는 9년전 서기 651년 그의 나이 23살에 벌써 판서에 해당하는 파진찬의 벼슬을 서라벌에서 받아 당의 수도 장안에 주재하면서 대당외교를 해온 인물이다. 친형이며 태자인 김법민과 함께 외교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이고 있는 김인문이다.

왕자 김인문이 구체적으로 의자왕의 백제가 내우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지금 군사를 내어 사비성을 치는 것이 옳다고 당의 조정대신들을 설득한다. 그리고 신라 국왕의 친서를 당의 고종에게 올린다. 당의 황제와 신하들은 당의 군사 15만명만 지원하여 주면 능히 백제의 사비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신라 국왕의 친서에 호감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6607월에 원정군사령관 소정방이 13만명의 대군을 함선으로 운반하여 백제의 왕도 사비성을 칠 것이라는 당 고종의 친서를 그해 4월에 김인문이 받아낸다. 이제는 압량군주인 재사 윤책과 신라의 군부 및 조정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있는 상대등 김유신의 시간이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만나 백제를 점령할 대전략과 상세한 전술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이 마련한 병력이동계획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라군 5만의 정예병이 가잠성 인근에 집합하여 침현 또는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한다. 그것이 상대등 김유신이 직접 지휘하는 제1군이다. 탄현을 넘는 시점을 태양력으로 8월초로 정한다.

둘째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이 큰 함대로 먼저 인천 옹주에 있는 덕적군도에 도착할 것이다. 그와 연합하기 위하여 태자 김법민이 5만의 신라군을 함선에 태우고 덕적군도로 간다;

 

 그것이 신라의 제2군이다. 그들은 태양력으로 82일에 당나라의 군대와 조우하게 된다. 따라서 그때부터 연합함대를 이루어 기벌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당나라의 원정군이 딴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 따라서 국왕인 김춘추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상주와 영동 사이에 있는 백화산으로 가서 만약을 대비한다;

 

 그것이 후방부대인 제3군인데 그 역할은 만약의 경우 고구려가 남하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 군대가 약속을 어기고 별동부대를 만들어 서라벌을 노리는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나당연합군의 규모는 33만이다. 당의 소정방 사령관이 지휘하는 군대가 13만명이고 신라의 군대가 20만명이다. 그러므로 재사 윤책과 상대등 김유신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의 군대가 그 수에 있어서 당나라 원정군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으니 그들이 쉽게 딴 마음을 먹지는 못할 거예요… “.

한편, 백제의 조정에서는 좌평 의직이 달솔 상영계백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지난 7월초에 서라벌에서 대군이 움직였으며 그에 발맞추어 당나라의 대군도 산동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당연합군이 형성되어 백제를 노리고 쳐들어오고 있는 조짐이다.

장군 출신인 그들 3명의 대신이 의자왕에게 3가지 대비책을 보고한다;

첫째, 전국적으로 총동원령을 내려야 한다. 수도 사비성을 지키는 수비군이 10만명이고 지방의 각성에 20만명의 수비군이 있으니 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군사력을 집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둘째, 어전회의를 열어서 어느 지점에서 적들을 우선적으로 막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4년전 부여성충의 안이 있기는 하지만 의자왕의 의중이 다르니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 그것은 시급한 일이다.

셋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조정을 분리하는 분조(分朝)를 만들어야 한다. 보령 60세가 넘은 의자왕은 내륙 깊숙이 있는 웅주성으로 일단 대피하고 수도인 사비성은 태자가 아닌 왕자가 지휘권을 가지고 수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동맹국인 고구려와 왜국에 원병을 요청해야 한다. 역시 긴급을 요하는 사안이다;

3대신의 주청으로 급히 어전회의가 열린다. 한가지 사항만 미결이고 나머지 3가지 사항은 원안대로 결정이 된다. 따라서 각 성주에게 전시상황이므로 수도인 사비성으로 군사를 내도록 왕명이 내려가고, 동맹국인 고구려와 왜국으로 의자왕의 친서를 가지고 특사가 급히 떠난다. 분조의 문제는 전황을 보아가면서 따로 정하기로 하는데 일단 적자이며 두번째 왕자인 부여태가 유력하다;

이제 한가지 미결의 문제는 어느 지점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육군과 수군을 막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다수 대신은 의자왕의 복안을 은근히 지지하고 있다. 기마전에 강한 백제군이기에 들판에서 정면으로 부딪칠 때 승기를 잡을 수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계백이 보기에는 천혜의 매복지를 활용하지 아니하고 있는 무모한 전술이다. 따라서 의자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아니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반영시키기 위하여 3대신은 평소 성충의 계책을 지지하고 있는 흥수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밀어 부친다.

그 결과 왕명을 받은 전령이 급히 전남 장흥에 있는 유배지로 달려가서 흥수의 의견을 청취한다. 그 내용이 죽은 부여성충의 견해와 꼭 같다;

 

 그 내용을 보고 받으면서 의자왕이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먼 원정에 지친 당의 군대와 신라군을 격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먼저 지방의 원군을 끌어 모으라. 우리가 버티고 있으면 고구려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다… ”.

과연 의자왕이 바라는 대로 전쟁이 진행되는 것일까? 실제 전투는 그의 예상을 전부 빗나가고 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