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25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29. 09:01
 
사도행전 제25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베스도. 참조 24:27 주석.
도임. 그가 다스릴 지역으로 왔거나, 임무를 수행하려고 공직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참조 Josephus Antiquities xx. 8. 9; War ii. 14. 1).
가이사랴.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로마 행정기관 소재지(참조 8:40 주석).
예루살렘. 속주 산하 유대 영지의 수도. 베스도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총독으로 있는 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도임한 지 불과 3일 만에 이 여행을 시작한 것은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그는 벨릭스에 비해 성실성이나 능력이 아주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대제사장.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우두머리 제사장들”이라는 독법을 증거한다. 당시 대제사장은 얼마 전 아그립바 Ⅱ세가 임명한 이스마엘이었다(Josephus Antiquities xx. 8. 8).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은 베스도가 유대인의 사건들의 진상을 파악할 시간을 갖기 전에 그를 이용하고자 했다.
높은 사람들. 즉 “지도자들”, “주요한 사람들.” 가장 부요하고 유명한 유대인은 의회의 의원이었으며 대부분이 사두개인이었다.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로 바울의 혐의를 씌우는 일에 앞장선 것으로 보인다(참조 행 23:6~9; 11:46 주석).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호의로. 사두개인들은 바울에 대한 고소를 특별히 다루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대 민족 지도층에 속해 있었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명예와 성실성은 이들이 바울을 다루는 일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적대감으로 스스로 어려운 입장에 빠뜨렸다. 유대인들이 요구한 “호의”(카리스[charis])는 바울을 그들의 법정으로 소환하도록 공식 명령을 내려달라는 제안이었다.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해하려고 품었던 이전의 음모(참조 23:12~15 주석)를 포기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여론과 관습법은 종교적 규정을 위반한 범죄자에게 직접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있었다(참조 Mishnah Sanhedrin 9. 6, Soncino ed. of the Talmud, 542). 아마도 2년 전 어떤 광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회 의원 가운데 일부는 이미 맹세했을 것이다.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구류. 벨릭스가 바울을 그곳으로 보냈고 그는 로마인들의 손 안에서 안전했으며 다른 곳으로 이송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거기에 그냥 남아 있을 것이었다.
미구에.  10일 후.
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유력한. 헬라어 뒤나토이(dunatoi). 문자적으로 “강력한 [자들], “힘센 [자들], 즉 권위가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혹은 유대 민족을 대표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동일한 단어가 “능하신”( 24:19), “능하더라”( 7:22), “능한”(고전 1:26), “강한”( 6:15)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들은 지도력과 명망을 지녔으며 아마도 산헤드린 회원이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내려가서. 유대인 대표자들은 로마의 총독과 함께 여행하기에 손색이 없는 자들이어야 했다. 베스도는 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유대인들을 존중했으며 동시에 바울의 송사사건의 중대성을 인정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열심은 전에 있었던 심문(24:1, 27) 이후에도 여전히 식지 않았다.
옳지 아니한 일.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어떤 부적절한 일”, “어떤 부당함”, “어떤 잘못”이라는 독법을 증거한다. “옳지 아니한 일”에 해당하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는 없으며 「불가타역」을 번역한 사람이 크리멘(crimen)을 삽입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팔 일 혹은 십 일을. 이 말은 그 기간이 길다기보다 베스도의 예루살렘 체류(4) 기간이 짧음을 강조한다. 벨릭스의 행정으로 인해 남겨진 많은 문제가 주의를 끌고 있었으며 베스도는 통치의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참조 1절 주석).
이튿날. 즉 “다음날.” 유대인들은 바울 소송사건에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로마의 팔레스타인 행정자와 유대 백성들이 흡족할 만한 관계를 맺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베스도에게 확신시켰다.
재판 자리에 앉고. 공식적인 재판 절차였다.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내려온 유대인들. 유력한 자들과 영향력 있는 자들을 대표로 요청했던 베스도의 요구는 충족되었으며(5)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이 심문을 받으러 소환되었을 때 그곳에 임석했다.
둘러서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그를 둘러서서”라는 독법을 증거한다. 25년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극렬하게 박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바울의 대적하고 고소한 자들은 그를 유대인의 반역자로 미워했다.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이태 동안(24:27) 유대인들은 바울에 관한 온갖 종류의 보고와 소문을 모으는 데 바빴다. 아마도 이제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사례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상세한 기소장 사본이 후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참조 28:21).
증명하지 못한지라. 바울에 대한 소송의 증거가 법정에서 유효하지 않다는 것(참조 25:1 주석; 24:13, 19)이 베스도에게 분명했다. 그는 분명 이런 일에 풋내기가 아니었다.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변명하여. 문자적으로 “방어하여.” 아마도 바울은 사소한 혐의(7)에는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만약 그렇게 인정되면 로마 법정이 그에게 불리하게 판결을 내릴 것들에 대해서만 답변했던 것 같다. 곧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의 율법을 모독했다는 혐의와, 선동적인 폭동에 가담했다는 혐의이다. 로마는 그러한 일에 주목했으며 베스도는 바울에게 로마의 권위에 대한 반란죄가 있는 것으로 오판하도록 유도 될 수 있었다. 누가는 이 세 항목에 대한 바울의 변명을 기록한다.
율법이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할례가 단지 상징적인 행위(참조 롬 2:23~29)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알았으며 이것이 율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고 이해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를 이렇게 비난했었다(참조 마 5:17; 2:16; 7:1~5 주석). 유대인들은 이전에 예수를 비난했던 것처럼( 5:16~18) 안식일 문제로 바울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성전이나.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이전의 고소(21:27, 28)가 심문 과정에서 재검토되었을 것이다.
가이사에게나. 바울이 “가이사에게” 저촉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로마 법정도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피상적인 고소 내용에 반하여 바울의 솔직한 변명은 유능하고 정직한 행정가인 베스도에게 틀림없이 감명을 끼쳤을 것이다(참조 제10, 81).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마음(을 얻고자 하여). 즉 “호의”(참조 24:27 주석). 처음에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소환해 달라는 유대인의 요구를 거절했다(25:3, 4). 바울이 받는 혐의 때문에 적대적 영향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적어도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격렬한 감정을 이전보다 더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의 성공적인 통치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네가…올라가서. 바울에게 씌워진 혐의는 로마법이 아니라 유대법에 관한 것이 분명했으므로 베스도는 유대인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그 문제를 조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내 앞에서. 심문하는 자리에 베스도가 임석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직도 로마인에 의한 구류와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이 재판 절차를 관장하며 베스도는 흥미를 가진 관찰자의 역할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이 비록 시험적으로 이송의 의향을 묻긴 하였지만  그가 바울을 유대 법정에 이송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제안은 사실상 바울이 “가이사에” 대한 어떠한 죄목에서도 무죄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혐의란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로마의 대리인으로서 베스도는 이 소송건에 더 이상 직접적인 흥미가 없었으나, 새로 부임한 지역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바람으로 기꺼이 그들의 소원에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적으로 바울이 어떤 명백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를 하려는 의도를 가져서 유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정치적 편법이었다.
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내가…섰으니. 문자적으로 “내가 [서 있고] 지금 서 있다.” 처음부터 바울은 로마인에 의해 구류되었다. 그는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로 잔인한 채찍질을 면했다. 여기서 그런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바울은 23:11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둔 것 같다. 그는 가이사의 권위를 대리하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이태 동안 죄수로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로마 총독에게 상기시키면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공모했던 사실이 이미 탄로난 사람들(참조 23:12~15, 30; 25:2, 3) 앞에서 재판받기를 거절한다.
재판 자리. 즉 “법정.” 바울은 법률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편견만을 주장하는 성급한 동족의 변덕스러운 증오보다는 비교적 공정한 로마의 법을 선호하였다.
마땅히…심문을 받을 것이라. 로마 시민으로서 받는 것이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바울은 9절의 제안이 베스도가 유대인을 달래려고 한 것이었음을 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모든 혐의를 한마디로 부인했다. 그는 유대인의 신체, 재산, 인격 또는 종교를 전혀 침해하지 않았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만일. 문자적으로 “만약 진정이라면.” 바울은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어떤 범죄도 부인했으므로 베스도는 그를 유대 법정에 보내겠다는 제안을 통하여 그가 로마법으로는 무죄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범죄에 대해 유죄라는 의혹이 있다면, 바울은 로마법으로 재판을 받도록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문자적으로 “나는 죽음을 모면하고자 청원하지 않는다.(비교  Josephus Life 29). 바울은 그 선고가 무엇이든 간에 공의로운 재판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내어 줄 수. 헬라어 카리조마이(charizo- mai). “호의를 베풀다”, “만족시키다.” 바울은 단지 유대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그를 고소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인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바울은 베스도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고소자들을 기쁘게 하고 그의 생명을 취하려는 악한 계획이 성취되는 일을 더 쉽게 할 뿐인 로마 시민권 포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산헤드린에서 그에게 공의나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권리(참조 22:25~29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장으로 청원을 끝냈다. 로마에서 그에게 어떤 판결을 내린다 해도 그것을 감수하며, 증거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로마 황제의 공정성에 운명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 비록 구속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는 로마를 방문하려는 목적을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12; 15:23, 24). 제국의 하급 법정에서 올라오는 모든 상소는 마지막 법정인 황제에게 올라갔다.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된 이래 바울은 고난을 당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의 봉사를 방해했다(참조 고후 11:24~27). 이 반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업이 진전될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을 감내할 것이었다( 20:22~25; 고후 4:5~18; 6:14; 1:12). 그러나 그는 유죄 선고도 받지 않은 채, 새로운 재판에 대한 기대도 없이 가이사랴에 이태 동안 구류되어 있었다. 루시아(22:29), 벨릭스(참조 24:23~27 주석) 그리고 베스도(참조 25:8, 9, 25 주석) 모두 바울이 어떤 로마법도 범하지 않았고 무죄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개인적인 이유로 그리고 유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울을 구류해 두었으며, 이제 베스도는 바울의 희생을 통해 유대인을 회유하려는 정책을 지속시키려고 제안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 로마 총독의 사법권 아래 남아 있는 한 무죄 방면이나 석방의 가망성은 없어 보였으며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로 구속되는 것이나 단순한 정치적 인질로 구류되어 있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복음을 자유롭게 전파할 수 없었으며, 평생 복음 외에는 다른 포부나 관심이 없는 바울에게 그러한 전망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십자가의 사신(使臣)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봉사에 방해를 받고 있었다.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로마법상 인정받은 지위를 향유하지 못하였으며, 인정받지 못한 종교를 믿거나 전파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처음에 로마는 그리스도교가 인정을 받은 유대교의 일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용인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소송을 강하게 밀어붙임으로 마침내 이 특권마저 박탈당하고 로마법 아래서 그들의 지위가 법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소송 사건에 대한 결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스도교가 자체의 권리를 가진 합법적인 종교라는 얼마간의 인정도 받을 작정이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십자가 사신들은 어디로 가든지 좀 더 자유로우며 선교지역에서의 반대를 좀 더 쉽게 극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는 동안에라도 황제의 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았고 적어도 “가이사집 사람 중”( 4:22) 몇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다른 그리스도인 일꾼들로 하여금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참조 빌 1:12~14) 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황제가 그리스도교 전도자들 중의 으뜸 인물을 무죄 방면하는 칙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제국 전역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아주 자유로울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제가 바울을 무죄 방면하는 것은 복음 전파를 공식적으로 허락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배석자들. 헬라어 쉼불리온(sum- boulion). 총독의 “자문위원단.” 누가가 유대인 “의회”인 산헤드린에 대해 말할 때는 일관되게 쉬네드리온(sunedrion)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한다(5:21; 6:12; 22:30; 23:1; 24:20 ).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자문회의에서 바울이 로마 시민이므로 그의 호소를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수 일 후에. 짧은 기간(참조 9:19 주석).
아그립바왕. 헤롯 아그립바 Ⅱ세이다. 그는 헤롯 아그립바 Ⅰ세(그의 죽음이 12:20~23에 묘사되어 있음)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참조 제9, 50, 148; 10, 78). 자기 자매 드루실라(참조 24:24 주석)처럼 이 군주도 헤롯 대왕의 유대인 아내인 마리암네의 후손인 까닭에 유대인이었다. 아그립바 Ⅱ세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AD 44; Jose- phus Antiquities xix. 9. 2) 팔레스타인의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되었으나, 직후에 한 숙부가 죽자 남부 레바논 칼키스(Chalcis)의 통치권을 얻음으로 위안받았다(ibid. xx. 5. 2). 후에 아그립바는 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이전에 빌립과 리사니아스의 통치하에 있던 북방의 영지를 받았다(ibid. 7. 1). 그 후에 네로가 다른 도시들을 주었다. AD 68~73년에 있었던 유대 전쟁에서 아그립바는 그가 반란을 포기하도록 애쓰던 유대인들을 대적해서 로마의 편을 들었다(Josephus War ii. 16. 4[345~401]). 그는 은퇴하여 AD 100년에 로마에서 죽었다. 베스도는 자연히 바울의 사건을 취급하는 일에 관하여 아그립바 Ⅱ세에게 충고를 구하게 되었다. 아그립바는 성전 보물을 관리했으며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특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면에서 로마 총독의 종교적 동료였으며 이 사건에 대해 실질적으로 충고할 수 있는 위치였다.
버니게. 버니게는 아그립바 Ⅰ세의 장녀이며 아그립바 Ⅱ세의 누이이자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와 자매이다. 처음에 그녀는 아그립바 Ⅱ세가 그 뒤를 이은(참조 제9, 148), 칼키스의 왕이자 숙부인 헤롯과 결혼했다(참조 제9, 51). 유대와 로마의 저술가들은 버니게와 그녀의 남자 형제 아그립바 Ⅱ세와의 관계를 죄악적으로 묘사한다. 후에 그녀는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 결혼했으나 곧 폴레모를 떠나 로마로 가서 아그립바 Ⅱ세와 함께 지냈다. 나중에는 티투스 황제의 정부가 되었으나, 원로원에서 그녀와 결별하기를 강요했을 때 티투스는 몹시 슬퍼했다(Suetonius Titus vii. 2; Tacitus History ii. 81; Josephus Anti- quities xx. 7. 3).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환영을 목적으로 새 총독을 방문한 아그립바 Ⅱ세의 첫 번째 예방(禮訪)이었다. 물론 아그립바 Ⅱ세는 로마의 분봉왕이었다.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여러 날. 체류 기간이 연장되므로 기회가 생겨 바울은 아그립바와 버니게 앞에 소환되었다. 베스도는 상호 관심사인 항목으로 언급하기보다는 대화 도중에 자연스럽게 바울의 사건을 언급했다.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대제사장. 참조 2절 주석.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참조 1~3절 주석.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기회. 헬라어 토포스(topos). 문자적으로 “장소”이며 “기회”를 의미한다(참조 롬 15:23). 베스도는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내어 주는 것. 헬라어 카리조마이(charizo- mai, 참조 11절 주석). 로마의 관리는 단지 호의의 차원에서 고소당한 사람이 징벌받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리스도에게 바로 그런 식으로 행하였다. 베스도에 대한 기록은 빌라도보다는 더 명예롭다.
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여기 오매. 참조 6, 7절 주석.
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자기들의. “그 자신의”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바울을 언급한다.
종교(「제임스왕역」에는 “superstition[미신]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헬라어 데이시다이모니아(deisidaimonia). “신들에 대한 경외”, “종교” 그리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나 간혹 “미신”을 뜻한다. 베스도는 명목상이나마 유대인인 아그립바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하지 않는 한 좀처럼 유대교를 “미신”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 벨릭스나 베스도와 면담 중에 예수를 직접 언급한 첫 번째 기록으로, 그의 이름이 좀 더 빨리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경험은 바울이 말한 부활에 대한 대단히 성공적인 예증이었으며, 그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24:25)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베스도는 구주에 대한 바울의 증언을 반영하고 있다.
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내가…의심이 있어서. 베스도는 자신이 유대인의 믿음과 관습에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유대교의 본부인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사건에 대한 사실(참조 9절 주석)을 확인하는 것이 아마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거절했다(참조 10절 주석). 바울이 로마로 간다면 베스도가 그의 사건 보고서를 보내야 했으며, 견문이 넓은 유대인인 아그립바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아내는 일에 총독을 거들 수 있었다. 또한 아그립바에게 한 이 요청은 앞으로 아그립바와의 관계에서 베스도에게 유용한 아첨이 함축된 것이었다.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황제. 헬라어 세바스토스(Sebastos). “존경할 만한”, “숭상할 만한”, “공경할 만한”이라는 의미이며 라틴어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장엄한”, “위엄 있는”, “명예에 합당한”)에 해당하는 단어이다(「제임스왕역」에서도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함-역자 주). 참조 제9, 48 이는 BC 27년부터 AD 14년까지 통치한 캐사르 아우구스투스(가이사 아구스도)가 아니라 황제로서의 가이사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로마인들은 통치자를 황제라 부르지 않고 아우구스투스라 불렀다.
판결. 헬라어 디아그노시스(diagno-sis). 문자적으로 “완전히 알기.” 철저한 조사를 나타낸다.
지켜 주기를. 헬라어 테레오(te-reo-, 참조 24:23).
가이사. 당시 황제 네로(AD 54~68).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나도…듣고자 하노라. 아그립바는 분명 바울에 대하여 듣고 바울과 그의 가르침에 호기심이 있었다. 아그립바의 종조부 헤롯 안디바가 예수를 보고 싶어했던 것과 비교하라( 23:8).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크게 위의를 베풀고. 아마도 베스도에게 감명을 주고 바울을 위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때는 바울이 왕족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증거할 첫 번째 기회였다(참조 9:15).
천부장. 참조 22:24 주석. 바울을 체포했던 루시아가 이 부류였다. 베스도는 이 특별한 청문을 위하여 주둔군의 고급 지휘관들을 집합시켰는데, 아그립바에게 경의를 표하여 이 행사에 외적 색채와 중요성을 부여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높은 사람. 가이사랴에서 유명한 사람들.
신문소. 헬라어 아크로아테리온(akroate--rion). “청중을 위한 방.” 특별한 방청객을 위하여 구별된, 공공의 성격을 다소간 띤 큰 방이었을 것이다.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유대의 모든 무리.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회원들로 대표되는 민족으로서 유대 백성을 가리킨다.
크게 외치되. 바울을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청원은 소란스럽고 격렬했다(참조 22:22, 23).
여기서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새 총독에게 바울을 죽이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일에 가담한 가이사랴의 반 바울파 당을 분명히 선동하였다. 바울을 죽이라고 새 총독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바울을 반대하는 당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가이사랴에서 분기시켰다.
내게 청원하였으나. 즉 “내게 소송하다”, “내게 청원하다”, “내게 중재하다”(참조 롬 8:27, 34; 11:2; 7:25).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죽일 죄를. 참조 11절 주석. 로마인은 유대인의 종교를 위반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받기를 청원하였고,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준비해야 하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황제. 참조 21절 주석.
가이사 앞에서 바울이 호소함―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교만, 형식주의, 이기심 그리고 유대인의 마음 가운데 그처럼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와 같은 압박의 정신이 있다. 장차 그리스도의 대표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취급한 것과 동일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저희가 곧 당면해야 할 큰 위기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은 동일한 마음의 곤란, 동일한 잔인한 결정, 동일한 완고한 증오를 겪게 될 것이다.
그 사악한 날에 양심의 명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용기와 확고부동함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지식이 필요될 것이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당할 것이며 그들의 최선의 노력은 오해를 받고 그들의 이름은 흉악한 것처럼 내던짐을 받을 것이다. 사단은 그의 모든 기만의 능력을 가지고 마음에 영향을 주고 이해력을 흐리게 하며 악을 선처럼, 선을 악처럼 나타나게 하고자 일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이 더욱 굳고 순결하며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이 확고하면 할수록 사단은 더욱 맹렬하게 그들을 대적하여 의롭다 공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성도들에게 한번만 주신 신앙을 굳게 붙잡는데는, 가장 확고한 신뢰심과 가장 영웅적인 목적이 요구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임박한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갈망하신다. 준비하였거나 아니하였거나 그들은 모두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갈망하신다. 준비하였거나 아니하였거나 그들은 모두 위기를 당하여야 하며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하게 한 자들만이 그 시험과 시련의 때에 굳게 설 것이다. 양심의 문제를 강제하기 위하여 세상 통치자들이 종교계의 목사들과 연합할 때에 누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흑암이 가장 깊을 때에 경건한 품성의 빛은 가장 밝게 빛날 것이다. 모든 다른 기대가 무너질 때에 누가 여호와를 영원히 의지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원수들이 사면에 있어 주의 종들을 해하고자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피곤한 땅의 큰 반석의 그늘이 되실 것이다(행적 431-432).

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황제. 헬라어 호 퀴리오스(ho kurios). “그[혹은 ‘나의’] 주”이며 여기서는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 이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붙여지듯이, 황제들에게 쓰일 때는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후계자 디베료도 그랬던 것처럼 아구스도는 누구든지 그 자신을 “주”라 부르는 것을 금하였으나(Suetonius Augustus iii. 53. 1; Tiberius xxvii), 겸손하지 않은 후계자들은 친구들이나 아첨꾼들로부터 이 칭호를 들었다. 칼리굴라는 자신에게 퀴리오스에 해당하는, 라틴어 도미누스(dominus)라는 칭호를 붙였으며, 도미티아누스는 도미누스 데우스(dominus deus), “주 신(主神)”이라는 칭호를 택하였다. ()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후원자인 트라야누스 황제를 자주 도미누스라 불렀다.
확실한 사실을…없으므로. 베스도는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유대인의 종교 문제에 연관된 고소에서 바울에 관한 자세한 정보에 입각한 기소장을 제출하는 방법을 몰라 당황했다.
아뢸. 베스도는 황제에게 상세한 기소장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당신 앞에. 베스도는 이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는 일에 아그립바의 특별한 도움을 기대했다. 아그립바는 또한 그의 충고가 중하게 받아들여질 때 만족할 것이었다.
27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무리한. 로마의 사법 제도는 재판관들이 자주 돈에 좌우되기는 했으나 원칙은 공정했다. 베스도는 어느 정도 성실한 사람이었다(참조 1절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