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27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비록 바울이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지만 마침내 오랫동안 품어왔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 참조 롬 1:15; 15:22~24)는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바울과…맡기니. 가이사랴에 머무는 동안 바울을 맡았던 군병들은 로마로 가는 항해를 담당한 한 군관에게 그를 맡겼다. 다른. 헬라어 헤테로이(heteroi). 바울과는 성격이 다소 다른 일단의 죄수들을 의미한다. 대. 헬라어 스페이라(speira). “보병대.” 이와 같은 로마 원군 보병대는 아마도 1,000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참조 21:31; 23:10 주석). 이 아구사도 “대(隊)”의 정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아구사도라는 이름의 보병대가 1세기에 수리아에 주둔했다는 명각의 증거가 있으며,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보병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부장. 100명을 지휘하는 로마의 장교(참조 10:1 주석). 율리오(Julius). 로마식 이름이다.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가려 하는. 백부장은 길목에 있는 여러 항구에 들러 로마로 가는 배를 찾고자 했다. 아드라뭇데노. 소아시아의 무시아 북서 해안에 있는 항구로, 드로아 동쪽 80킬로미터 되는 곳에 위치하였다. 이 항구는 꽤 중요한 상업적 중심지였으며, 오늘날에는 에드레미트(Edremit)라 불린다. 이 항구는 이 배의 모항(母港)이었으며 항해의 목적지였다. 올라. 헬라어 에피바이노(epibaino-). “태우다”, “승선하다”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 아리스다고. 바울의 여행 동료. 그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고(19:29), 후에 마게도냐와 헬라에서도 함께 있었다(20:4). 로마에서의 첫 투옥 때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골 4:10; 몬 24절). 함께하니라. 이 말은, 아리스다고와 기자인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였음을 암시한다. 로마의 법은 로마 시민이 죄수로 여행할 때에 노예 한 명과 개인 의사 한 명을 동반하도록 했다. 아마도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종으로, 누가는 그의 의사로 동행했던 것 같다.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시돈. 베니게 해안에 있는 유명한 항구로 두로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참조 12:20 주석). 친절히. 헬라어 필란쓰로포스(philanthro-- po-s). “인간적으로”, “친절하게.” 하여. 헬라어 크라오마이(chraomai). “사용하다”, “취급하다”, “대우하다”(참조 7:19). 바울은 그와 가까이 접촉한 모든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주었다.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떠나가다. 출항하다(참조 눅 5:4).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구브로 섬과 대륙 사이에서 육지 쪽으로, 곧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날씨가 좋았다면 틀림없이 구브로 남쪽으로 항해했을 것이다(참조 21:1~3 주석).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길리기아…바다를. 즉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에서] 떨어진 바다” 무라. 해안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미로스 강변에 세워진 성이다. 오늘날 터키인들은 이곳을 뎀브레(Dembre)라고 부른다. 이 항구는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로 가는 배들의 일반적인 기항지는 아니었다. 한 고대의 명각은 무라를 곡물을 저장하는 장소로 언급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들이 이곳에 곡물을 풀도록 항로가 정해졌을 것이다(38절). 애굽은 로마제국의 곡창지대였다.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알렉산드리아 배. 무라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직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더디 가. 강한 역풍 때문이었을 것이다. 간신히. 헬라어 몰리스(molis). “어렵게”(참조 8절). 니도.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 모퉁이에 위치한 항구로, 당시 번창했다.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적어도 마카베오 시대부터 이곳에는 유대인 거류지가 있었다(마카베오1서 15:15~24). 바람 때문에 배는 해안 근처로 밀렸다. 에게 해로 나오자 강풍을 받아 배는 그레데를 향해 나갔다. 허락지. 즉 “우리를 용납하지.” 이 계절에는 바람이 보통 북서쪽에서 불어왔으며 계절풍(지중해 동부에서 해마다 여름철이면 약 40일 동안 부는 건조한 북서풍-역자 주)으로 알려졌다(참조 14절). 살모네. 그레데 동단에 위치한 갑(岬)으로, 배가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데로 곶[串]일 것이다.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거슬리는 바람을 피하여, 바람이 불어 가는 쪽 곧 그레데 해안 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파도가 비교적 거세지 않았을 것이다.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간신히. 어렵게 항해하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7절). 미항. 이 항구 도시는 어느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여전히 동일한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그레데의 남쪽 해안, 즉 섬의 남쪽 해안의 주요한 갑인 마탈라 곶의 동쪽 약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리메네스 칼리(Limenes Kali)로 알려져 있다. 라새아. 이 도시의 옛터가 미항의 동쪽 수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여러 날이 걸려. 순풍을 기다리며 어떻게 할지 의논하느라고 걸린 시간이다. 금식하는 절기. 유대 성력으로 일곱 번째 달인 티쉬리월(참조 Josephus Antiquities iii. 10. 3 [240]) 열 번째 날에 지킨 대속죄일이다. 때는 10월 하순경이었으며 심한 폭풍이 예상되었다.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내가 보니. 헬라어 쎄오레오(theo-reo-). “식별하다”(참조 요 4:19).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통찰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로서 자신의 관찰과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일이 후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27:44). 타격과 많은 손해. 즉 “손상과 많은 손실.” 이렇게 기탄없이 충고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배를 맡고 있는 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지중해와 에게 해를 여행하였다. 이 특정한 항해가 있기 몇 해 전에 그는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5)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의 여행과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파선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이 장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선장. 헬라어 퀴베르네테스(kuberne-te-s). “키잡이”, “선장” 즉 항해의 책임을 맡은 자이다. 백부장은 당연히 이곳저곳을 순회하는 유대인 랍비보다 전문 항해인의 판단을 더 선호했다. 선주. 로마로 보내는 애굽산 밀(38절)인 화물도 그의 소유일 것이다. 이 주요 산물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사이의 수익이 높은 활발한 무역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참조 5절 주석). 믿더라. 문자적으로 “설득되었더라.”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백부장은 바울보다는 선장과 선주를 더 신뢰하였다. 로마제국 수비대 장교로서 백부장은 선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불편하므로. 즉 “적합하지 않은”, “맞지 않는.” 그 항구가 겨울 동안 배를 보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거나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기에 너무 작았을 것이다. 떠나. 헬라어 아나고(anago-). 여기서는 “출항하다”라는 의미이다. 뵈닉스. 일반적으로, 그레데 남쪽 해안에 있으며 연중무휴로 개항하는 최상의 항구 뤼트로(Lutro)로 생각된다. 이 항구는 헬라의 지리학자 스트라본(Geography x. 4. 3)에 의해 언급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외국으로 가는 배의 중개상이 바다에서 보호해 준 것에 대한 감사제로 세라피스와 유피테르에게 바친 서판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문자적으로 “남서와 북서를 내려다보는.” 뤼트로 항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배를 탄 사람이 항구로 들어갈 때에는 서쪽을 보게 되어 있다. 뤼트로 항구를 형성하는 갑(岬)의 다른 쪽은 덜 안전한 피네카(Phineka) 항구인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남풍. 선장이 북풍(7, 8절)을 피하려고 지금까지 그레데 남쪽으로 항로를 잡았던 것으로 보아, 남풍이 순하게 분 것은 기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득의한 줄. 오랫동안 기후가 바뀌기를 기다렸음을 보여 준다. 닻을 감아. 즉 “닻을 올려.” 가까이 하고. 헬라어 앗손(asson). “더 가까이.” 오래 전에는 어떤 장소의 이름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더 가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지명은 확인된 바가 없다. 서쪽으로 약 6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뵈닉스에 도달하기까지 해안으로부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선장의 목적이었다. 행선하더니. 문자적으로 “항해를 하고 있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유라굴로. 헬라어 유로클뤼돈(eurokludo-n). “동풍”과 “[큰] 파도” 즉 “거센 물”을 의미하는 두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유로클뤼돈은 큰 파도를 일으키는 동풍을 지칭한다. 그러나 유라퀼론(eurakulo-n)이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제시할 수도 있다. 앞부분이 헬라어이고 뒷부분이 라틴어인 이 혼성어는 동북동풍을 가리킨다. 광(풍). 헬라어 튀포니코스(tupho-nikos). 자연의 폭풍우의 힘, 특히 맹렬한 바람의 화신인 튀폰(Typhon)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바람의 빠른 변화는 이것이 거센 폭풍우였음을 나타낸다. 대작하니. 문자적으로 “그것으로부터 파도가 치다.” 이것은 산이 많은 그레데 섬에서부터“파도가 치다”라는 의미이다. 갑자기 부드러운 남풍이 강한 북풍으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배는 남쪽 가우다라는 섬(16절)쪽으로 떠밀려갔다.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배가 밀려. 마탈라 곶의 동쪽 연안에 가까이 붙어 항해할 때는 배가 변화무쌍한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뵈닉스로 가는 길에 트인 만(灣)을 가로지르기 시작하자 맹렬한 북동풍이 강력한 위세로 배를 남서쪽 가우다 방향으로 몰아갔다. 바람을 맞추어. 바람을 마주 대할 수 없음을 말한다. 가는 대로 두고. 문자적으로 “우리는 [바람에] 항복하여 밀려갔다.” 배를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서쪽으로 바람에 밀려가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가우다. 이 섬의 오늘날 명칭은 곳조(Gozzo) 또는 가우도(Gaudo)이다. 프톨레마이오스(Geography iii. 15. 8)는 이 섬을 클라우도스(Claudos)라고 불렀다. 이 아주 작은 섬은 마탈라 곶[串] 남서쪽 72.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마탈라 곶 부근에서 북동풍이 배를 급습하였다. 아래로 지나. 즉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항해하여(참조 4절 주석). 간신히 거루를 잡아. 이 옛스러운 관용구는 “우리가 간신히 [구조용] 보트(혹은 작은 배)를 제어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다. 이 작은 비상용 보트는 대개 밧줄로 매어 둔다.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순식간에 보트에 물이 차고 다루기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선원들은 보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배 위로 끌어올리려 하였다. 17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줄. 바람이나 파도의 힘에 의해 배가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체 전체를 두른 강한 밧줄을 말한다. 목조선을 줄로 두르는 이 방법은 오늘날 프래핑(frapping)으로 알려져 있다. 배는 계속 항해하기 어려웠으며 심하게 물이 새어 들어왔기 때문에 판자를 댄 이음새가 갈라져 크게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배가 바다에 침몰할 위험에 직면했다. 투키디데스(History i. 29. 3)와 호라티우스(Odes i. 14)를 비교해 보라. 스르디스. 헬라어 쉬르티스(surtis). (「제임스왕역」에는 “유사”[流砂] 의미하는 “quicksands”로 되어 있음-역자 주) 아프리카 대륙 북부 해안으로 만입(灣入)되어 있는 큰 만(灣)의 동쪽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는 같은 만의 서쪽 부분인 소(小) 스르디스와 구별하기 위해 대(大) 스르디스로 불린다. 대 스르디스와 소 스르디스 모두 수심이 얕으며 모래톱 즉 유사를 숨기고 있는데, 항해가 시작된 이래 셀 수 없는 배의 묘지가 되었다. 바울의 배는 바람에 의해서 대 스르디스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루칸(The Civil War ix. 303~310)과 밀턴(Paradise Lost ii. 939)을 참조하라. 걸릴까. 헬라어 엑핍토(ekpipto-). 여기서는 “[해안에] 좌초되다” 또는 “[위로] 떠밀리다”라는 의미이다. 연장. 헬라어 스큐오스(skeuos). “장비”, “기구”, “도구.” 여기서는 “선구”(船具)를 의미한다. 선원들은 사용하지 않는 모든 선구, 특히 무거운 주범(主帆)과 장비를 끌어 내렸다. 배를 통제할 만큼의 돛과 기구만 남겨두어, 매우 위협적인 모래톱이 있는 스르디스를 피할 수 있도록 했음이 분명하다. 배가 바람을 타고 가우다 섬 쪽으로 비교적 잔잔한 항해를 하는 동안 여러 조치(16, 17절)를 마무리지었다. 항해의 이 부분에 대한 묘사를 보려면 제27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내리고. 헬라어 칼라오(chalao-). “풀다”, “내려가게 하다”, “내리다.” 그냥. 거루를 배에 올리고 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 중요하지 않은 장비를 다 버린 상태를 말한다. 쫓겨가더니. 하루나 이틀이면 북동풍은 배를 서남서쪽 스르디스로 몰아갈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선원들은 폭풍이 부는 악천후에 앞서 배에 장비를 갖추었으며 뱃머리를 바람받이로 돌려서 배를 세우고 우현으로 바람을 받으며 범주(帆走)했다. 그렇게 하면 배의 이물이 거의 북쪽을 향하고 북동풍은 배의 우현을 치게 되어, 배는 주로 옆으로 밀려 서북서쪽을 향해 가게 된다. 가우다에서 멜리데까지는 약 760킬로미터이다.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심히 애쓰다가. 폭풍은 점점 거세졌다. 이튿날. 폭풍우 이틀째이다. 배는 이제 일시적인 피난처였던 가우다 섬을 지났다.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그들은 뱃짐인 밀(38절)을 바다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체에 줄을 둘렀는데도(참조 17절 주석) 배에 물이 많이 새어 들고 있었다.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기구. 참조 17절. 배에서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장비, 특히 갑판 위에 있던 것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저희 손으로. 문자적으로 “자신의 손들” 곧 선원들의 손으로. 장비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바람에 휩쓸려 간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바다에 버린 것이다.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날 동안. 사건의 추이가 분명해지기까지 거의 두 주가 지났다(27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폭풍이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방향을 정하고 위치를 알기 위해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찰하는 일에 의존하였다. 27절을 볼 때 항해사들은 배의 운항 위치를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길을 잃은 것이다.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선원의 형편을 말한 것이지만 헬라어 본문에 명백히 나타난 것처럼 대개의 선객들도 그랬을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배를 운항하는 어려움과 흥분으로 인해 규칙적인 식사 준비나 식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뱃멀미를 했을 것이다. 바울이…서서. 미항에 있을 때 바울의 충고가 거절된 이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선장과 선원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 말을 듣고. “내가 이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바울의 말은 비난이나 불쾌한 잔소리가 아니라 항해사들을 설득하여 그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그의 충고(10절)를 따랐다면, 지난 며칠간의 위험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바울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것이었다. 이 타격과 손상을. 그들은 뱃짐과 삭구(18, 19절)를 잃었으며 지금은 배와 목숨까지(20절) 잃어버릴 형편에 이르렀다.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안심하라. 또는 “용기를 내라”, “마음을 다잡아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바울이 한 용기의 말과 “여망이 다”(20절) 없어질 것이라고 한 그들의 말을 대조해 보라. 요 16:33; 행 23:11과 비교해 보라. 바울의 태도와 어조는 용기를 주는 그의 훈계와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불안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너희 중 생명에는. 얼마 전에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생명이 희생되리라고 예상했으나(10절), 하나님은 어떤 생명도 희생되지 않을 것임을 계시하였다. 배뿐이리라. 오직 배만 손상된다는 의미이다.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나의 속한 바. 종교는 개인적인 일 곧 개인적인 헌신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드리는 개인적인 경배와 봉사이다. 바울은 거의 파선 지경에 처한 배에 함께 타고 있는, 두려워 떠는 이방인들에게 공감을 주는 증언을 한다. 바울은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을 위해 이제 곧 개입하려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상호 협력하는 봉사를 통하여 그분은 바울에게 속하고 바울은 그분께 속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봉사의 멍에를 멨으며, 자신과 함께 멍에를 멘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눠왔다(참조 마 11:28~30; 롬 1:9; 딤후 1:3, 12). 사자. 문자적으로 “한 천사.”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천사의 개입에 대해서는 행 5:19; 8:26; 12:7; 히 1:13, 14을 참조하라. 내 곁에 서서. 바울은 천사가 예루살렘의 감방으로 그를 방문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때 천사는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23:11).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두려워 말라. 하늘의 방문자들이 얼마나 자주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왔는가(참조 눅 1:13, 30; 2:10; 계 1:17).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 약속(23:11)이 처음 주어진 이후 사도를 지탱해 온 그 약속을 새로이 한 것으로, 바울은 시련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마침내 로마에 도착할 것이었다. 네게 주셨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위기의 때에 바울은 자주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이제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이 사람이 보통 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과 그의 그리스도인 동료들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 참조 창 18:23~32; 마 5:13)임이 입증되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하나님을 믿노라. 상황이 위험해지고 희망이 없어질수록 바울의 믿음은 강해졌다. 배의 견고성이나 선장과 선원의 기술에 대한 신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참조 20절).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한 섬. 멜리데(28:1) 섬. 오늘날의 몰타 섬. 27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열나흘째 되는 날 밤. 폭풍우 극(劇)의 대단원의 막은 2주 후에 내렸다(참조 18, 19, 33절). 그동안 그들은 바다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속수무책으로 떠다녔다. 그 거리는 대략 760킬로미터이며 하루에 약 58킬로미터를 표류한 셈이다. 아드리아. 아드리아 해(海).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아드리아 해로 알려진 곳의 남쪽에 위치한 지중해의 일부이다(참조 Strabo Geography ii. 5. 20; Josephus Life 3 [15]). 사공들이…짐작하고. 멜리데 섬(28:1)의 북동 해안, ‘성 바울 만(灣)’의 동쪽 끝에 위치한 쿠라 곶[串]의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물보라 소리를 감지한 것 같다.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재어보니. 문자적으로 “[납]을 끌어올리다.” 그들은 밧줄에 매단 납처럼 무게가 나가는 것을 이용하여 수심을 쟀다. 고대에는 이 방법이 밤중이나 안개가 심할 때 배가 해안의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를 정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십 길(「제임스왕역」에는 “twenty fathoms”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헬라인이 사용하던 한 “길”(fathom)은 양팔을 벌리고 손가락을 쭉 편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길이로, 약 1.8미터에 해당하는 영어의 “fathom”과 거의 같다(참조 제10권, 54, 55). 그러므로 쿠라 곶[串]에서 400미터 떨어진 바다(참조 27절 주석)의 깊이는 약 37미터이다(본 장의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조금 가다가. 문자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열다섯 길. 즉 27미터 정도이다. 잠깐 동안에 짧은 거리를 갔는데 이렇게 깊이가 빨리 줄어든 것은 배가 해안에 신속하게 접근하였음을 나타낸다.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암초. 문자적으로 “울퉁불퉁한 곳들”(참조 27절 주석). 닻 넷을 주고. 깜깜한 밤이라 배를 해안 어디에 대야 가장 좋을지 결정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배의 이물을 해안 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고물에서 닻을 던져 내렸다. 고대하더니. 문자적으로 “기도하더니”(참조 욘 1:4, 5).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도망하고자 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사공들은 배와 선객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임을 입증한다. 체하고. 헬라어 프로파시스(prophasis). “구실”, “모양.”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이…이르되. 바울은 바다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참조 10절 주석)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불필요하며 따라서 사공들이 배를 포기하려는 의도 외에 다른 의도가 없음을 간파하였다. 이 사람들이…있지 아니하면. 오직 사공들에게만 배를 해안에 대어 선객들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거루. 이것은 두 주일 전에 가우다 섬 근처에서 갑판에 끌어 올렸던 작은 배이다. 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이 새어 가매. 사공들이 육지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감지한 때(27~29절)로부터 날이 샐 때까지 약 여섯 시간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음식. 헬라어 트로페(trophe-). 모든 종류의 “음식”(참조 마 3:4 주석). 배를 포기할 경우 필시 모든 사람들은 고생하고 위험에 노출될 것이므로 영양 섭취는 필수였다. 기다리며. 문자적으로 “체류하며”, 즉 “기다리며.” 주린 지가. 규칙적인 식사를 가리키는 것 같다. 배 위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었으며 음식도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멀미를 했다. 열나흘. 참조 27절 주석.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음식. 참조 33절 주석. 구원. 헬라어 소테리아(so-te-ria). “구원.” 여기서는 신체적인 관점에서의 구원을 뜻한다(참조 31절).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이런 비유적 표현은 성경에서 완전한 구원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인다(참조 눅 21:18; 삼상 14:45; 삼하 14:11; 왕상 1:52).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축사하고. 바울은 음식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료 선객들에게 그의 훈계와 일치하는 모범을 보였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안심하고. 바울의 희망찬 모습, 믿음, 용기는 사람들에게 곧 전염되었다. 해안에 있는 암초의 위험을 인식했지만 모두가 용기를 냈다. 받아먹으니. 참조 33절 주석.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배. 배는 상당히 컸을 것이다. 바울 당시에 60미터가 넘는 배들이 지중해를 항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배는 1,200톤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이 장의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고물에 닻이 네 개 있었다는 사실(29절)과 이물에도 여러 닻이 있었다는 사실은 배가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시점에서 배에 탄 사람의 수가 처음으로 진술된 것을 보아 배를 버릴 것을 예상하고 인원 점검을 한 것으로 보인다.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밀을 바다에 버려. 이 배는 분명히 밀을 싣고 로마로 가는 애굽의 배였다. 이달리야, 특히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애굽에서 선적한 밀에 의존하고 있었다(Juvenal Satires v. 118, 119; 참조 5절 주석).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짐의 대부분 또는 모두를 바다에 던졌을 것이다(18절). 삭구(索具)는 이미 최소한으로 줄였으며(참조 17절 주석), 갑판과 선측 후반부에 있는 것들도 모두 버렸다(19절). 이제는 남아 있는 짐들과 음식까지 버렸다.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그들은 해안에 닿은 후에야 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28:1). 멜리데는 물론 잘 알려져 있었으나 배가 닿은 곳인 ‘성 바울 만(灣)’은 보통 기항하는 항구에서 멀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항만. 헬라어 콜포스(kolpos). “만”(灣), “내포”(內浦). 문자적으로는 “가슴.” 영어의 “gulf”(만)는 콜포스(kolpos)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거쳐 파생되었다. 그들이 매우 염려한 바위투성이의 해안에 틈이 있었으며, 비교적 안전하게 배를 댈 가망이 있었다. 들여다 댈 수 있는가. 배를 밀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의논한 후. 문자적으로 “목적하다”, “계획하다.”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킷줄. 키를 물에서 끌어 올려 배 양측면에 고정시켰던 줄을 말한다. 당시의 배에는 흔히 양쪽에 하나씩 두 개의 키가 있었다. 배를 조종하여 뭍에 대기 위해 키를 다시 물에 내렸다. 돛. 헬라어 아르테몬(artemo-n). “앞 돛.” 주범(主帆)은 고패와 함께 내버린 것으로 보인다(참조 17, 19절 주석).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 키를 작동시켰는데도 소용돌이가 배를 휘돌게 했던 것 같다. 고물은…깨어져 가니. 즉 “고물은 깨지기 시작하니.” 배의 이물이 고정된 상태에서 격렬한 소용돌이는 점점 고물을 깨뜨렸다. 큰 물결에.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이 구절이 생략된 것을 지지한다.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죽이는 것이 좋다. 참조 12:19; 16:27 주석.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구원하려 하여. 문자적으로 “구원하기를 원하여.” 백부장은 바울과 그의 일행을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였다. 또한 그는 배에 탔던 모든 자들의 생명이 바울 덕택에 보존되었음을 깨달았다(참조 9, 10, 21~26, 31, 34~36절).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 배가 해안 가까운 곳에 좌초한 것이 틀림없다. 사용할 수 있는 널빤지는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고,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먼저 물가로 헤엄쳐 가게 했다.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에 의지하여. 문자적으로 “남은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은 어떤 것[부분] 위에.” 생존자들이 물살 때문에 부서지거나 손으로 뜯어낸 배 조각을 잡고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구원을 얻으니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약속한 대로 그리고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대로(24절) 모두 안전하게 탈출하였다. FN4 FTB 제27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27장의 폭풍과 파선 기사의 갖가지 세부 사항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1) 몇몇 항해 전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며, (2)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가 항해에 대한 개인적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약에 사용된 헬라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이 진술의 배경이 되는 지중해 지역 항해에 대한 개인적 경험도 겸비하고 있다면, 이런 지식을 모두 갖추지 못한 사람보다는 분명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1918~1919년 지중해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한, 캐나다 온태리오 주 틸슨버그에 있는 애번데일 장로교회 목사인 에드윈 스미쓰 중위이다. 스미쓰 중위는 1919년 8월호 설교 평론(Homiletic Review, Vol. LXXVIII, No. 2, 101~110)에, 지중해에서 복무한 해군 장교로서의 경험과 관찰에 비추어 27장의 파선 내용을 설명하였다. “성 바울의 마지막 항해와 파선”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는 스미쓰 중위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이 파선한 지점으로 알려진 ‘성 바울 만(灣)’에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멜리데(몰타)섬의 발렛타 항에서 승선 복무하고 있을 당시에 기록한 것이다. 그 기사의 전체 내용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 주석에 일부를 싣는다. 인용된 사실들과 그것들에 기초한 결론은 성경의 내용을 확증해 주며, 누가가 견문이 넓고 정확하며 믿을 만한 역사가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스미쓰 중위는 고대의 배, 항해, 선박 조종술, 바다, 항구, 그 지역에 인접한 육지 그리고 파선과 관련이 있는 바울과 누가에 대한 지식을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기사를 시작한다. 이어서 “항해”에 대한 고대인들의 일반 지식을 진술한다. 그 다음에는 누가가 묘사한 갖가지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선장과 선원이 취한 조치들은 바로 “오늘날 유사한 상황에 처할 경우 최신 선박 조종술에 따라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들과 거의 문자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콤모두스 황제(AD 177~192년 재위), 당시의 헬라 저술가 루키아누스(Lucian)가 알렉산드리아 곡물 운반선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언급한 후, 스미쓰 대위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인들의 배나 성 바울 당시와 가까운 시대의 배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폼페이이 갈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얻은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왜냐하면 폼페이이의 대리석과 프레스코 벽화는 귀중한 세부사항을 제공하며 성 바울의 항해 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그의 파선 후 20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대리석과 벽화들을 보존해 준 재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나는 기독교 첫 세기의 상선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고대 선박들 중 하나를 재현하는 일에 힘쓸 것이다. “이러한 선박들은 이물과 고물이 아주 똑같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외형, 특히 물에 잠기는 부분은 50년 전의 범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배 윗면의 현호(측면에서 본 갑판의 기울기-역자 주)는, 가운데 부분은 거의 일직선이나 양쪽은 매우 가파르게 곡선을 이루며 이물과 고물의 끝 기둥은 상당히 높고, 그 끝에는 일반적으로 뒤로 젖혀진 물새의 머리와 같은 장식물이 있다. 루키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묘사하면서 배의 뒷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고 그 꼭대기에는 금으로 된 체니스쿠[거위의 머리 모양을 한 돌출물]가 있으며 뱃머리도 그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폼페이이의 내볼리아 튀케(Naevolia Tyche)의 무덤에 있는 배를 그린 프레스코 벽화를 보면 배의 구조가 이와 유사하며 높은 뱃머리 끝에 미네르바(지혜와 무용[武勇]의 여신-역자 주)의 머리 형상을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현장(舷墻, 파도가 넘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뱃전에 설치한 방벽-역자 주)은 개방된 난간이었으며 선실과 요리실이 상갑판의 양쪽 끝에 있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그림 중 하나에 그려진 테세우스의 배 안에는 굵은 밧줄이 감겨 있는 캡스턴(닻 또는 무거운 짐을 감아 올리는 장치-역자 주)이 보이며, 비르질리우스 판(3 vols., Rome, 1765)에 나오는 울뤼세스(Ulysses)의 배(고대의 대리석 조각에서 취해 낸 것으로 알려짐)에서 닻감개(windlass)에 감겨 있는 밧줄을 볼 수 있다. “이 고대의 배와 현대의 모든 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타 장치에 있을 것이다. 고대의 배는 현대의 배처럼 뱃머리 기둥에 달린 하나의 방향타로 조종된 것이 아니라 뱃머리 양쪽에 하나씩 달린 두 개의 큰 노(파달리아[padalia])로 조종했다. 그래서 누가는 이를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들은 양쪽에 하나씩 난 뱃머리 구멍을 통해 작동되었는데 뱃머리 구멍은 고물에 닻을 줄 때도 사용되었다. 13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현대의 방향타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고대의 배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크기이다. 성 바울 당시에 밀을 싣고 애굽과 이달리야를 왕복한 많은 배들은 1,000톤 이상의 짐을 실었을 것이다. 이익이 남으려면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배는 단거리 항해를 할 때에만 이득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여러 진술이 이를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추론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이때 누가와 바울이 타고 여행했던 그 배에 밀과 함께 276명이 탔었다는 사실의 진술이다. 선원이 26명이라면 선객의 수는 250명이다. 수주일 동안 짐과 선원 외에 이렇게 많은 선객이 한꺼번에 항해하려면 보통 어선보다 훨씬 커야 한다. 요세푸스가 이달리야로 여행하다가 파선한 배에는 오늘날 5,000 내지 6,000톤급이나 되는 대서양 횡단 정기선의 승객 수에 해당하는 600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들의 크기에 대해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설명은, 역풍으로 아덴까지 밀려간 알렉산드리아 밀 운송선 이시스(Isis)호를 건조(建造)한 목수(나우페고스[naupe-gos])가 제공한 것이다. 제공된 자료에 의하면, 건조될 때 생기는 최대한의 오차를 감안한다 해도 이 배는 적재량 1,100톤 내지 1,200톤의 배였을 것이다. 한 저술가는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1,300톤 이상까지 계산한 경우도 있다. “이런 고대의 배들에서 쓰는 삭구(索具)는 매우 간단했다. 일반적으로, 배의 길이만큼이나 긴 활대가 달려 있고, 활대 위에 높이 감아 올린 네모난 큰 돛을 펴놓는 한 개의 주범(主帆)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 큰 곡물 운반선에는 중간 돛이 달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뱃머리 부근에 좀 더 작은 또 다른 돛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르테몬(artemo-n)이라고 불리는 네모진 작은 돛을 달았다. 또한 이들 배에는 갖가지 상황에 따라 배를 용이하게 조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침로(針路) 바꾸기” 혹은 “바람을 등지고 항해하기” 등의 조작을 위해 삼각 돛을 달았다. 삼각 돛은 또한 심한 폭풍이 쳐 큰 돛을 거두어야 할 때 사용되었다. “성 바울이 타고 여행했던 배가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배의 구조와 삭구를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주석자들이 27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다루면서 적절하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누가나 바울 혹은 두 사람 모두 바다에 관해 사전 경험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이름이 붙여진 복음서의 저자이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배 조종과 배에 관한 지식에 통달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는 행 27, 28장 외에 어떤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누가가 해변에서 아무리 많이 배를 관찰하고 배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도 성 바울과 본인이 겪었던 파선 이야기를 진술하는 데 충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지식과 통찰력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선원으로 항해하며 다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상 동일한 증거에 비춰 볼 때 선원으로는 아니지만 아무튼 항해를 했으며 최소한 두세 번 이상 짧은 항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바울에 대해서도 나의 견해는 그가 상당히 많은 항해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독자들이 곧 알게 되는 바와 같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누가처럼 침묵하지 않는다. … “고후 11:25에 보면 ‘세 번 파선하는데’라고 기록되어 있다. 항해할 때마다 파선당하는 것은 아니므로, 세 번의 파선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가 바다에서 오랜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도 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배가 그레데 남쪽 해안의 미항에 도착하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배가 마지막 항해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항구에서부터이며, 이제 그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성 누가는 배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실제 선원이라면 이 부분을 결코 생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전개하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배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길고 지루한 항해 끝에 그들이 상당 기간을 바람에 묶여 미항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계절상 겨울이 가까워오고 밤에는 캄캄하고 흐렸으므로 나침반 없이 멧시나 해협까지 960킬로미터의 거리를 항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장은 항해를 계속하기를 단념하고 그레데 섬에서 월동하기로 결정했다. 바울은 이 결정에 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얼마 후 선장이 뵈닉스가 배에 더 안전하며 과동하기에 더 나은 항구라고 말하면서 해안을 따라 뵈닉스까지 약 61킬로미터 내지 64킬로미터를 올라가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을 때, 바울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기를 강력히 권하였다. 그는 그런 움직임에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때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고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날씨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선장이 제안한 이동은 분명히 모든 선원들에게 좀 더 나은 안전과 위안을 약속하는 이동이었으므로 성 바울이 충분한 이유 없이는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가 제시되지 않았다. 이것은 성 누가의 기사의 특징이며 그가 실제로 선원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부차적인 증거이다. 진짜 선원이라면 그 이유를 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점 때문에 자칫 장황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선원은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 이유가 다음과 같다고 본다. 배는 날씨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안전하지 않았으며,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 계절에 배를 타고 폭풍에 휘말리는 모험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바울은 이미 이 배에 몇 주간 승선해 있었으며 그들은 그레데까지 항해해 내려오는 동안 바람이 부는 대로 밀리는 힘겨운 고생을 겪었다. 그 몇 주 동안 바울은 관찰과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배가 꽤 많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돌풍이 강하게 몰아칠 때 배가 뒤틀리면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것을 인지했다.… 당시 바울의 주장은 간단했다. ‘비록 뵈닉스(현대의 루트로)가 미항보다 과동하기에 더 나은 항구라고 생각하지만, 연중 이 시기에 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것은 그 이득에 비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계절에 순한 남풍은 반갑지 않은데, 이는 그 바람이 보통 동북동쪽으로 되돌아서 돌풍을 일으키며 메사라 만(灣)을 건널 때 우리에게 덮친다면 모두를 육지에서 멀리 날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결국 바다로 나갔고, 그때 성 바울이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항구를 떠난 후 마탈라 곶을 지나기까지 그들의 항로는 육지에서 가까웠다. 미항의 정박지로부터 마탈라 곶까지의 거리는 약 5킬로미터 내지 6.4킬로미터 정도이다. 항로는 서북서쪽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남풍은 순풍이었고 갑판보의 고물쪽으로 두 눈금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몇 시간 후에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은 아주 높아진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갑자기 날씨가 변하였다.… “배는 바람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고 떠밀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태풍성 강풍을 만났다. 그 강풍으로 인해 그들은 항로를 벗어나 그레데에서 서남서쪽으로 약 37킬로미터 떨어진 가우다 섬쪽으로 내몰렸다. 그러므로 강풍이 배에 몰아쳤을 때 배가 어디쯤에 있었는지를 안다면, 거기서 그들을 몰아간 바람의 방향을 상당한 근사치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강풍이 배를 엄습한 것은 배가 미항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았을(우 폴뤼[ou polu]때’였다. 문법학자들은 우 폴뤼라는 말은 비교하는 용어로서 절반 이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배는 마탈라 곶과 바다의 서북서쪽 약 27킬로미터 지점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돌풍에 견딜 수 있도록 배를 정비하는 일이다. 크고 네모진 돛을 돛대 꼭대기로 감아올리고 폭풍용 돛을 달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즉시 배를 밧줄로 단단히 둘러매야 한다. 벌써 배를 둘러 감아야 하다니! 아아! 성 바울이 가장 염려하던 일이 확실해졌다. 불과 세 시간 정도 폭풍에 밀려왔으나 배는 약해졌고 심하게 뒤틀리는 현상을 보였다. 배를 강화시키는 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런 폭풍이 배의 선체를 크게 뒤틀리게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플리니우스는 그것을 ‘원재(圓材)뿐만 아니라 선체 자체도 파괴하는, 선원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라고 일컬었다. 내항력(耐航力)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배를 타고 겨울에 바다로 나가기를 바울이 주저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성 누가는 그들이 40킬로미터 정도밖에 가지 못했을 때 배를 둘러 감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배가 뒤틀리고 심하게 샌다는 것을 확실하게 가리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선체를 강화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경우는 예외 없이 배가 약하고 낡았거나 배에 손상이 오래 남아 있는 경우이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인식하지 못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누가와 바울이 타고 항해했던 배가 당면한 실제적인 위험은 배의 누수 상태로 인해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게 될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만일 하나님의 섭리로 육지를 발견하여 해안에 배를 대어, 그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면 배는 바다에 침몰했을 것이요 배에 있던 모두는 사망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스르디스쪽으로 떠밀려 갈까 두려워하여 ‘그들이 기어를 낮추었다’라고 되어 있다(참조 「개정역」, 17절). 다음과 같은 「제임스왕역」의 번역보다 더 잘못된 번역을 상상하는 어려울 것이다. ‘유사(流砂)에 빠질까 두려워서 돛을 내리고 그냥 떠내려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실로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위험을 두려워하면서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스스로 버리는 것과 같다. 돛대나 돛을 철거함으로써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돛을 내리고 빈 돛대로 항해하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떠밀려 간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배가 바람에 밀려 가우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배는 바로 그들이 피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고 누가가 말한 그 스르디스쪽으로 바로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제임스왕역」에 누가가 ‘유사에 빠질까 두려워서 돛을 내리고 그냥 떠내려갔다’고 말한 것을 주목하라.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하루 정도 지나 스르디스에 걸렸을 것이며 이 이야기는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르디스는 그들의 위치에서 직선으로 서남서쪽 약 320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유사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돛을 내리고 강풍에 그대로 밀려가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을 채택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라 할지라도 여기서 펼치고 있는 나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배와 똑같은 상황에 빠진 배일 경우 선장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오직 두 가지가 있다고 알고 있다. 하나는 배가 있는 곳에 닻을 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풍에 대비하여 삭구를 갖추고 뱃머리를 바람받이로 돌려서 배를 세워, 배의 표류 방향을 위험지대를 향하여 곧바로 나가게 하는 대신 그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바꾸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첫 번째 방법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배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누가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방법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한다. 뱃머리를 바람받이로 돌려서 배를 세우면 배는 배 앞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는데, 선원들은 이것을 ‘헤드리칭’(headreaching, 바람 부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 나아가기)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는 주로 표류하며 비록 현측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그 거리는 비교적 길지 않다. 위험에 접근하여 뱃머리를 바람받이로 돌려서 배를 세울 때 취해야 할 적절한 조치는 맞바람을 받아 지그재그로 항해하는 것으로써, 배가 앞으로 나간다는 점을 고려하여 언제나 배를 위험한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흘러가도록 한다. 이 경우에 그들은 배의 우현에 바람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의 우측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말이다. 그랬을 경우 배의 앞머리는 북쪽, 즉 아프리카 해안과 스르디스에서 멀어지는 방향을 가리켰을 것이며 현측은 일반적으로 서쪽을 향하되 맞바람 운행을 하는 동안 배는 가고자 하는 방향인 이달리야 방향을 향해 전진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주석자들이 「제임스왕역」에 있는 ‘연장을 내리고’라는 말이 이러한 경우에 돛을 조종한다는 것을 누가가 표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누가가 사용한 표현은, 뒤에 설명이 나오겠지만 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바람을 맞으면서 항해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누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만을 언급하는 평소 습관에 따라 그 모든 것을 생략했으며, 배를 적절한 상태에 놓이게 하여 배가 침몰하는 것을 막고 가능한 한 선체가 뒤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한 다음 단계로 곧바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제임스왕역」에서 말하는 ‘연장을 내리’는 것인데, 「개정역」에서는 ‘기어를 낮추었다’로 번역되었다. 얼마나 더 나은 번역인가! 맞바람을 안고 배를 진행시키는데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심히 애를 써야 했으며 닻을 감아 올린 큰 활대의 무게가 거기에 부착된 모든 밧줄, 도르래 등 부가적인 무게와 함께 선체를 크게 뒤틀리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즉시 이를 끌어내려 갑판 위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누가가 ‘그들이 이와 같이 옮겨지더니’(후토스 에페론토[houto-s epheronto])라고 기술할 때, 이는 선체를 둘러 감고 악천후 항해에 대비했을 뿐만 아니라 바람을 우현에 받으며 맞바람을 안고 지그재그로 적절하게 항해했다는 의미였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스르디스에 걸리지 않게 하는 유일한 조치였다. 사고 많은 첫 번째 날은 이 말로 끝을 맺는다. “다음날 강풍은 계속되었으며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배는 진행했다. 이때부터 취한 조치들은 숙련된 선박 조종술을 보여 주는데, 이는 선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추천하는 것이다. 갑판에 적재된 화물은 당장 배를 조종하는 데 필요 없는 다른 모든 도구와 함께 버려야 했다. 셋째 날, 그들은 ‘배의 기구를’ 내버렸는데(19절), ‘저희 손으로’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이 내려진 ‘연장’, 즉 돛과 도르래 등이 달린 커다란 아래 활대를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을 배 밖으로 버리는 데는 선객과 선원들의 연합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배는 마치 군함이 대포를 배 밖으로 내버릴 때와 같은 경감 효과, 즉 좀 더 가볍게 항해하며 침수를 방지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루한 11일간의 항해가 계속되었으나 강풍은 약화되지 않고 맹위를 떨쳤다. 해와 별을 볼 수 없었으며 마침내 ‘구원의 희망이 다 없어졌더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그런데 왜 희망이 다 없어졌는가? 고대의 배는 나침반이나 천체 관측기가 없는 경우 날짜를 계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배가 안전한 방향으로 표류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꼭 절망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정확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물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은 효과가 없었으며, 가라앉는 배를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해안에 배를 대기 위해 가장 가까운 육지를 발견하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육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침몰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폭풍의 맹위보다는 배의 상태였다.… “마침내 아드리아 바다 위를 표류한 지 14일째 되는 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에 선원들은 육지가 가까운 곳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는 그런 표지들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지만, 그들이 해안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바위투성이의 해안에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댈 경우 별빛이 없는 밤바다일지라도 상당히 먼 거리에서 파도를 볼 수가 있다. 멜리데 섬 즉 ‘성 바울 만(灣)’을 실제적으로 파선했던 현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표지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쿠라 곶 400미터 이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떤 배도 동쪽에서 이곳으로 들어 올 수 없다. 그 곶에 이르기까지는 동쪽에서부터 표류해 온 배의 항로에서 육지가 뒤쪽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캄캄한 밤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배가 이 거리 안에 들어오면 해안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반드시 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의해 바다는 ‘먼 하늘까지 솟구치는 흰 파도의 포말(泡沫)’이라는 캠벨의 시구가 연상될 정도로 격렬하게 해안에 부딪혀 부서지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근자에 그 장소를 방문했으며 밤새 그 곶[串]에 머물렀다. 유라굴로가 몰아치고 있었고 흰 물보라가 공중으로 12미터 내지 15미터로 솟구쳤으며 해안의 소음으로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캄캄한 밤에 선원들이 해안에서 부서지는 이 파도를 보지 않고는 ‘성 바울 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두 번째 방문 때 작가는 작은 배를 타고 만 안으로 들어가 바다쪽에서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하였으며, 수심을 측량한 결과 바로 쿠라 곶이 그 파란 많은 밤에 그들이 다가갈 수 있었던 육지라는 사실에 대해 그의 마음에서 이제는 의심이 사라졌다. “그러나 선원들이 과연 캄캄한 밤에 400미터 밖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까? 내 두 눈으로 바로 그 장소를 관찰한 후에, 나는 그들이 파도를 볼 수 있었을 것이며 폭풍이 잠깐씩 잔잔할 때에는 파도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해군 기록에 나의 의견을 확증해 주는 증거가 있다. 1810년 8월 10일 캄캄한 밤에 프리깃(frigate)함 라이블리(Lively)호가 바로 이 쿠라 곶에서 난파하였다. 이 군함의 망대에서 바람이 불어 가는 쪽에 바위가 있다고 경고했던 조타수는 전함 장교들을 위한 군 법정에서 자신이 육지를 보지는 못했으나 40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바위에 부딪치는 ‘바다의 소용돌이’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당시에는 평상시처럼 미풍이 불고 있었으며 누가와 바울이 이곳을 지날 때 불고 있었던 강풍은 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누가는 그들이 몰타(멜리데)에 난파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필자는 배가 그 방향으로 표류해 갈 것임을 지적했다. “다음 문제는 흥미롭다. 14일째 되는 날 자정이 되기까지 배는 가우다에서 얼마나 멀리 표류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표류한 속도와 흘러간 시간에 달려 있다. 멜리데에 온 이후 나는 바울이 탔던 배라고 상상되는 크기의 배가 시간당 얼마나 멀리 표류하는지, 수 년간 지중해를 항해하고 전시에 멜리데와 그레데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했던 상당수의 선장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 대부분의 전반적인 의견은 시간당 약 1.6킬로미터에서 3킬로미터를 항해한다고 말한 점에 비추어 시간당 약 2.4킬로미터, 즉 24시간당 약 57.6킬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시간의 경과를 다룰 차례다. 누가는 배가 미항을 떠난 날부터 시간을 계산하였다. 19절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그 전날은 ‘이튿날’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항해를 시작하면서 폭풍이 불기 시작한 ‘첫째’ 날을 알 수 있다. 첫째 날에 일어났다고 묘사된 사건들이 그날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우다 섬을 떠난 때부터 14일째 되는 날 자정 육지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아드리아 바다를 통과해서 표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만 13일이 넘는다. 하루에 약 57.6킬로미터로 계산된 표류 속도와 이미 말한 대로 13일과 1/4일이라는 경과 시간을 알게 되었으므로, 57.6에 13과 1/4을 곱하면 763.2킬로미터라는 표류 거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항로는 북 82 서(N 82 W)이다. “오늘날의 항해자가 추정할 때 이 결과가 실제의 항로 및 가우다 섬과 멜리데의 ‘성 바울 만’ 입구 사이의 거리와 어떻게 비교될까? 근래 만들어진 해군의 지중해 해도에서도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에서 ‘성 바울 만’ 곧 멜리데까지의 항로가 북 82, 서 17(N 82, 17 W)이며, 그 거리가 762.56킬로미터임을 알 수 있다. 이 계산에 따르면 가우다 섬에서 저녁 늦게 출발한 배는 14일째 되는 날 자정쯤 멜리데의 ‘성 바울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400미터에 내지는 1.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물론 이처럼 근접한 일치가 어느 정도 우연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계산의 근거가 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기록한 저자가 부정확했거나 배가 멜리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파선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진술에 기초한 계산상 그 범위 내에서는 이름이나 묘사에 이보다 더 맞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배는 이제 그 비참한 항해의 끝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육지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주의 깊은 ‘선원’들이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모양을 보고 육지가 가까움을 알았다. 혹은 누가가 표현한 항해 용어로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징후는 흔히 파멸의 전조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현대인들이 능가할 수 없는 침착성, 기민성, 선원 정신을 나타냈으며,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배 위에 있는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라졌던 희망이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이제 침몰하는 배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이용해 배를 해안에 댈 수 있다. 그러나 날이 밝기 전에 그렇게 하다가는 분명 파멸로 돌진하게 될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까지 가능한 멈춰 있어야 한다. 날이 새면 배가 들어갈 만한 항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샜을 때 그 땅이 어느 땅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항만을 보고 가능하면 그곳으로 배를 대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닻줄을 끊어 닻을 바다에 버리고 킷줄을 늦추면서 아르테몬(artemo-n, 앞 돛)을 올려 배를 해안에 댈 준비를 했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이물이 부딪혀 배가 좌초되었는데, 이는 ‘고물로 닻 넷을 주고’라는 말을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배가 뭍에 닿을 수 있도록 적절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상륙했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그 장소가 과연 누가가 묘사한 것과 일치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상황은 한밤중에 선원들이 분명히 육지를 보지 않고도 육지가 가깝다고 짐작한 것이다. ‘성 바울 만’으로 들어가는 항로에 있는 배는, 돌출하여 동쪽 입구를 형성하는 낮은 바위로 된 곶에서 400미터 이내의 지점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정도의 거리에서는 곶 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거리에서 라이블리 호의 조타수(操舵手)는 육지를 보지 못했으나 부서지는 파도는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가면 매우 가까워진 암초에 걸릴까 하여 배의 뒷머리쪽으로 닻을 주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분별력 있는 선견지명과 훌륭한 선박 조종술이 발휘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 앞돛을 올리고 닻줄을 끊기만 하면 상당히 수월하게 배를 조종하여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물이 만나는 곳은 살모네 섬과 본토 사이의 만(灣)이 틀림없으며 두 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만난다. “누가가 언급한 두 번째 상황은 어떤 육지에 가까워진다고 짐작했을 때 잰 물의 깊이였다. 그들은 수심이 20길인 것을 알았고 조금 더 가다가 다시 쟀을 때 15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는 쿠라 곶에서 좀 떨어진, 배가 머물렀던 장소의 깊이가 20길임을 발견했고 배가 움직였다고 생각되는 항로를 따라 해안에서 400미터 이내, 곧 그들이 고물에 닻을 주었던 곳이 15길이 되는 지점임을 알았다.… “누가가 진술한 내용, 즉 미항을 떠나 멜리데 섬의 뭍에 오르기까지 이 배의 이동에 대한 모든 기록이 가장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외적 및 내적 증거에 의해 입증되었음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가 설명한 대로 배가 바다에 머물렀던 시간도 표류 거리에 부합하였다. 끝으로, 도착한 장소에 대한 그의 묘사는 실제 장소와 일치하였으며 이 모든 사실은 누가가 실제 자신이 묘사한 대로 항해했음을 입증하며, 그의 관찰력과 진술이 상당히 확실하고 믿을 만함을 보여 주었다. 27장은 사실에 대한 꾸밈없는 기록이다. 나는 브레스(Bres)의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도덕적인 확신이 없지 않다면, 사도 바울이 멜리데에서 파선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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