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26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30. 00:28

사도행전 제26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아그립바2세는 갈릴리 북방에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로마황제 네로에 의하여 두가지 특권을 얻고 있었다. 그것이 첫째, 예루살렘성전의 보물을 관장하고 둘째,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 아나니아 대신에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는 헤롯대왕의 증손자이며 누이 베니게와 함께 지냈다. 그는 주후 100년에 죽었으며 베니게는 로마황제 티투스와 동거했으나 원로원에서 이의를 제기함에 따라 헤어지게 된다. 사도행전 제26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2세에게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왕은 그의 무죄를 총독 베스도에게 거듭 확인하여 주었다)

 

 

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참조 25:13. 이 젊은 왕은 바울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아그립바는 쇠퇴한 유대 왕조 마카베오 가문과 헤롯 가문의 마지막 자손으로,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공언했으나 실제로는 로마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치세는 한 왕조와 한 시대의 종언(終焉)을 고했다. 애초부터 헤롯 왕조는 로마의 꼭두각시였으며 그다지 찬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아그립바 앞에는 이제 나이가 들었으나 신념이 강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확신에 찬 바울이 서 있다. 아그립바는 냉소적이었고 진정한 가치에 무관심했다. 반면에 바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얻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다.

손을 들어. 이 무의식적인 몸짓을 언급한 것은 누가가 목격자였음을 시사한다(참조 21:40).

변명하되. 참조 25:8 주석. 아그립바 앞에서 변명하는 바울은 명목상 유대인이지만 아직 그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이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전에 벨릭스나 베스도 앞에서 심문받을 때보다도 훨씬 거리낌없이 자세히 말했음이 분명하다.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다행히.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s). “행복한”, “운이 좋은”, “복된”(참조 마 5:3 주석). 바울은 체포된 이후 소환되어 앞에 서게 되었던 어떤 사람보다 아그립바를 대할 때 더욱 편안했다. 아그립바는 고소자나 피고인 양측의 정서를 이교도의 행정관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바울은 아그립바를 통하여 베스도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를 바랐다. 비록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으나 바울의 생각은 주로 앞에 모인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있었다. 그를 묶고 있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보다 그들의 개종, 즉 그들이 죄의 결박에서 풀려나는 것이 바울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바울은 아주 진지하게 “다행히 여기옵나이다”라는 말로 진술을 시작했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특히. 유명하고 박식한 다른 유대인들(참조 25:26)보다 아그립바가 더 전문가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아그립바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바울의 만족감(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풍속과 및 문제. 참조 6:14; 21:21.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처음부터. 바울은 청년 때에 예루살렘에 왔다. 그는 다소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부터 유대 생활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인격 형성기를 보냈으며, 그때부터 그를 안 사람은 누구나, 그들과 함께했던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이 구절은, 바울이 다소에 있을 때에도 이 이교 도시에서 독립적인 거류지를 형성한 그의 동족과 주로 교제했음을 나타낸다(참조 9:11 주석).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과 편견에 철저히 젖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충성은, 청년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생활한 상태. 바울의 행동 양식, 삶의 원칙, 삶의 철학.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많은 유대 지도자가 바울을 알고 있었으며 주로 산헤드린 회원으로 인정받은 청년으로(8:1, 3; 사도행적, 102), 그리고 미움받는 나사렛 분파에 대한 열렬한 박해자로서 얻은 명성을 통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지도자들의 신임으로 인해 다메섹으로 가는 특별한 사명이 그에게 위임되었다(9:1, 2).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일찍부터. 즉 “처음부터.” 복음에 대한 그의 지식에 관하여 누가가 유사하게 사용한 표현이다( 1:3).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으로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바울에게 유리하도록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가장 엄한.  3:4~6과 비교하라.

. “이단” 혹은 “분파”를 의미한다(참조 5:17; 15:5; 24:14 주석). 여기서는 바리새인을 하나의 “분파”로 지칭한다. 참조 제10, 56, 57.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심문받는 것. 즉 “재판을 받는 것.” 유대교의 기본적인 원리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4, 5).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22)는 믿지 않았다.

우리 조상.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포함된다.

약속.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으로, 그것에 이스라엘에게 준 다른 모든 약속들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열두 지파가 항상 기다리던 것이었고, 바울은 이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의 부활이 메시야 약속에 함축되어 있는데(참조 사 53:10~12 주석), 이는 죽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장래에 대한 모든 소망에 근거를 제공하는 매우 중심적인 사실이었다(고전 15:12~23; 3:10, 11; 살전 4:13~18; 2:13).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의 사고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선지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계시된 대로 국가적 융성과 메시야의 강림을 통해 그들의 대적을 정복할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에 유대인들이 너무 집중한 나머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당하고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사실(참조 눅 4:19 주석)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 영광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았다(고전 15:51~54; 9:28).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이 약속. 아브라함에게 약속되고( 12:1~3)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반복된 축복을 말한다. 바울에게 예수는 이 축복의 체현(體現)이며 방편이고 실현이었다( 4:12, 13; 고전 1:30).

열두 지파. 열 지파는 사로잡힌 이주자들로 저들이 내쫓긴 나라들 가운데 흩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언약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이 지파들 중 남은 무리가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다(참조 왕상 19:18).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썼다. 여 선지자 안나는 아셀 지파에 속했다( 2:36). 회복 이후 여러 해 동안 추방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탈무드(Berakoth 20a, Soncino ed., 120)에는 랍비 요하난이 “요셉의 자손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밤낮으로. 이 표현은 헌신적인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실천하는 열성과 진지함을 잘 드러낸다.

간절히. 헬라어 엔 엑테네이아(en ekte- neia).

아그립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이 단어가 생략된 것을 지지한다.

내가…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메시야에 관한 소망의 두 가지 기본적인 면 때문에 고소당했다. (1) 예수가 메시야이다. (2) 메시야가 죽음에서 부활했다(참조 6절 주석).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바울이 유대교가 중심을 두는 바로 그 소망 때문에 동족에 의해 고소되었다. 엄격한 자들 중에 가장 엄격한 자인 그가 배교자로 낙인찍혔으며 가장 열렬한 애국자가 매국노라 선언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에 의해서.” 사실상 그들은 이방인들 앞에서 고소자의 역할을 하는 대신 그의 입장을 옹호했어야 했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당신들은. 복수형 대명사로 모든 청중을 포함한다.

못 믿을 것. 바리새인이며 그리스도인인 바울에게 전체적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과 특별히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근본(참조 고전 15:12~22)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 신앙의 모든 근본(24:15)이 와해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의미를 잃게 된다(참조 마 22:32; 고전 15:14, 17, 19 주석).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이름.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참조 2:38 주석)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그는 진실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의 체현이었다(참조 요 1:14 주석).

대적하여. 한때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23:1) 그리스도교와 투쟁했으나 그 양심은 여러 해 동안 접한 유대교의 환경과 가르침으로 무감각해진 양심이었다.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행하여. 초기교회의 위대한 영웅이며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신약의 거의 3분의 1을 기록한 바울이 한때는 유대교의 창공에 빛나는 별이었으며 유대인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생소한 느낌이 든다(참조 7:58; 8:1; 9:1, 2; 22:4, 5). 그는 한때 높은 영예의 자리에 올랐으며(참조 사도행적, 102), 지금 그를 격렬하게 고소하는 바로 그들이나 계승자들에게서 중요한 임무를 위임받았었다(9:1, 2). 박해자로서의 그의 사업은 분노가 폭발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민족과 교회에 봉사하려는 대망을 품은 헌신적인 한 사람의 계획된 운동이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 아주 무자비했다. 더욱이 이 활동은, 한때 그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증오심을 갖게 된 그의 원수들이 지금은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는(25:1~3)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죽일 때.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만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바울 때문에 죽은 다른 이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모든 회당에서. 초기교회의 신자들은 회당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않고 회당과 성전에서 계속하여 유대 형제들과 함께 예배드렸다(2:46). 징벌하는 곳으로서의 회당에 대하여는 마 10:17; 23:34; 13:9; 12:11을 참조하라. AD 205년경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대인 회당을 박해의 원천이라 불렀다(Scorpiace 10).

강제로. 문자적으로 “계속 강제하다” 또는 “강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모독하는 말.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을 포기하는 말(참조 레 24:11~16). 플리니우스(AD 108년경)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포기하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을 보았다(Letters x. 96).

격분하여. 문자적으로 “성난” 또는 “노하여 펄펄 뛰는.” 바울은 종교적인 광신자였는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성령의 호소를 묵살하려는 시도로 그렇게 했던 것 같다(참조 딤전 1:13).

외국 성. 외국의 성들로 팔레스타인 변경 너머에 있는 성들.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그 일로. 문자적으로는 “그 일을 [추구]하는 중에.” 즉 “그 용무로.

권세. 바울은 이단에 대한 산헤드린의 이동 감독관이었다. 그는 유대교의 총체적인 심문자였다.

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정오나 되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고 바울이 점점 밝아 오는 태양 아래서 여러 시간을 여행한 점으로 보아, 눈을 멀게 한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다. 가장 밝은 태양 빛이 비치는 시간에 그 태양 빛보다도 더 밝은 초자연적인 빛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13~18절에서만 9:1~22에서 언급되지 않은 바울의 개종에 관한 진술의 요점들을 지적한다.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소리를 들으니. 모두 소리를 들었으나 오직 바울만 그 말을 이해했다(참조 행 9:4, 5 주석; 10:7; 12:28, 29).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그 당시에 농부들 사이에서 특히 유대인들 사이에서까지 사용되던 잘 알려진 헬라 속담일 것이다. 이 비유는 동방의 농부가 소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기 위하여 쇠막대를 사용하는 관습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광경이 실제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가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주님이 박해자에게 주는 기별의 적절한 예증으로 그것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예수가 당시의 속담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눅 4:23 주석을 참조하라). “뒷발질하기”로 번역된 동사의 형태는 “계속하여 뒷발질하기”라는 의미로 이해되며 “가시채”(켄트라[kentra])로 번역된 단어는 “막대기들”(고전 15:55에서 단수형으로 사용되었고 “쏘는 것”으로 번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하늘의 기별은 바울의 양심이 성령의 호소를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참조 8:1). 바울의 선생(22:3)인 가말리엘의 정신은 바울이 나타내는 것보다 더 아량 있었다. 이 교육적 배경과 개종 전에 바울에게 이미 그리스도인 친척이 있었다는 사실( 16:7)은 분명 그가 당한 영적 위기의 요인이었다.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나는…예수라. 헬라어 에고 에이미 이에수스(ego- eimi Ie-sous). 참조 9:5 주석.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네가 나를 본 일. 바울은 실제로 주님을 보았다( 22:17, 18; 고전 9:1; 15:8). 바울이 사도직을 주장하는 것은 이 직접적인 사명 부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진정 부활했음을 알았다(참조 갈 1:15~18; 딤전 2:7). 참 증인은 자신이 증언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내가…나타날 일. 그리스도는 바울을 지도하고 간섭하기 위하여 반복하여 나타났다(참조 행 18:9, 10; 22:17~21; 23:11; 고전 11:23; 고후 12:1~5). 바울은 부활한 주님을 목격하였으며 부활의 진리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알았다.

너로 사환…을 삼으려 함이니. 참조 9:10, 15 주석. 하나님은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가르친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내가…보내어. 대명사 “내가”는 강조형이다. 다른 이가 아닌 예수가 친히 바울에게 사도직을 부여한다.

너를 구원하여. 이 일과 다른 경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전 진술(9:22)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이 바울을 위험에서 구해내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위험의 순간에 그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말한다.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참조 눅 4:18 주석. 그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리라는 약속이다. 바울은 마귀가 사람들의 영적 눈을 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1:20~32; 고후 4:4). 예수가 그에게 말하던 바로 그때도 바울은 육체적 눈멂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눈이 열려야 할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겠는가!

어두움에서 빛으로. 참조 요 1:4~9 주석.

사탄의 권세. 사탄은 모든 사람을 죄로 이끌었다. 실로 그는 죄의 창시자이다. 그리스도의 뛰어난 능력만이 사람을 그의 마수에서 놓이게 할 수 있다.

돌아가게 하고. 또는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눈이 열리자 그들은 그들이 여행하고 있는 길 끝에 있는 확실한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돌이켜야 했다.

죄사함.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복음을 통해 그들은 죄의 면제 즉 죄를 떨쳐버리는 좋은 소식( 1:7~9; 벧전 2:24)을 접하게 되었다.

믿어 거룩케 된. 바울은 성도들이 통과해야 할 품성 변화의 과정인 성화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성화는 칭의를 통해 죄책으로부터 즉시 자유로워지는 것( 4:8) 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음과 생애를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바치는 일을 더한다. 그것은 “필생의 사업이다”(참조 사도행적, 560 ~562; 5:48 주석).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했던 것처럼 바울은 지속적인 헌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면서 나아가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참조 빌 3:12~14; 8:1~4 주석).

기업. 일시적인 세상의 헛됨, 사악함 가운데서 늙어 가는 대신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벧전 1:4)을 전하고자 하였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보이신 것. 참조 9:3~7 주석.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사울은 문자 그대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으며 어떤 면에서 육적으로 그분을 알았던 자들보다 더욱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바울에게 이 계시는 살아 있는 실재로 남았다. 바울은 그가 의뢰한 자를 알았다(딤후 1:12).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하”(참조 14절 주석)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허락한 계시에 응하여 완전히 굴복하였다. 그의 헌신은 완전하여 일단 의무의 길이 명백해지자 그 이후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주님이 원하는 바를 알고자 하였으며 안 후에는 그것을 행하였다(참조 16:6~12). 그의 평생을 통해 유일한 질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22:10)였다. 그는 여전히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다(고후 5:14).

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다메섹에…있는 사람과. 바울은 개종할 때 있었던 곳, 교회에 심각한 상해를 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즉시 일하기 시작하였다(참조 9:19~22 주석).

예루살렘에. 바울은 약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18). 거기서 목숨을 걸고 매우 담대하게 증거하였으므로 유대인들,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참조 6:1; 14:1 주석)은 격노하였다(9:29).

유대 온 땅. 유대 모든 지역. 예루살렘으로 향한 몇 번의 여행 중 한 번 혹은 그 이상 유대 지역에서 전도했을 것이나(참조 행 11:29, 30; 12:25; 15:3, 4; 18:22; 21:8~15; 1:22), 바울이 유대 전도를 언제 수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방인. 바울의 이방인 선교는 약 9년 혹은 10년 후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되었다(11:25, 26; 13:1~4).

회개하고.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 [사람의] 마음을 바꾸다”(참조 마 3:2; 3:19~21 주석).

일을 행하라. 참조 마 3:8 주석. 바울은 여기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의해 성취되는 삶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행함”을 주장한다. 어떤 행위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의는 생애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 상응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행위를 자동적으로 행하게 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21, 22, 27; 2:5~8)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바울보다 더 강조한 전도자는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값없는 선물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여기서와 같이 그에 따르는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참조 롬 8:1~4). 믿음의 사람은 율법을 세우는데( 3:31), 이는 그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2:10)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의가 존재할 때 그 의는 선한 행위로 입증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참조 약 2:14~24).

선전하므로. 문자적으로 “선언하였다” 또는 “공고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전도자 곧 그분의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자였다.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나를 잡아. 참조 21:27~31 주석.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하나님의 도우심. 참조 21:31, 32; 23:11, 12, 30 주석. 인간의 눈에는 바울을 구조한 자들이 루시아와 그의 군병들로 보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이 그 도움을 베풀었음을 알았다(참조 23:11).

증거하는 것. 참조 9:15; 26:1 주석.

선지자들과 모세. 구약(참조 눅 24:44 주석)을 가리킨다. 바울은 반복하여 성경에 대한 그의 신뢰와 충성을 확언한다(참조 24:14 주석). 예수 안에서 성취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은 구약 전반에 산재해 있다.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그리스도. 문자적으로 “그 그리스도”(참조 마 1:1 주석).

고난을 받으실 것.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바로 유대인들과 바울 사이의 논쟁점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위한 여지는 없으므로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참조 6절 주석). 여기서 바울의 진술은 엠마오로 가던 예수의 진술과 거의 동일하다(참조 눅 24:25~27 주석).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항상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고전 1:23). 참조 13:27~37 주석.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는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1:18)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라고 최초로 선포한 자였다( 5:21~29; 11:23~26).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일어난 자는 아니다. 그 점에서는 모세가 먼저이다( 9:28~30; 9). 그리스도는 탁월함에서 그리고 생명의 창조자로서( 1:15, 16; 3:4) “먼저”이다. 죽음을 정복한 후( 2:24; 1:18) 예수는 그와 그의 능력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보증하였다. 그의 부활은 의인들이 모두 겪게 될 부활에 대한 보증이었다(고전 15:12~22).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딤후 1:10) 자는 그이다.

이스라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2:32)이라고 불렀다.

이방인들. 이들은 하늘이 바울을 선택하여 진리의 빛을 선포하도록 한 대상들이다(참조 9:15 주석).

빛을 선전하시리라. 또는 “빛을 선포하다.” 구주에 대한 인간의 필요만큼이나 오래된 복음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빛 가운데서 새로운 능력으로 선포된다. 참조 요 1:4~9 주석.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베스도가…가로되. 그는 들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거나 귀담아 들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큰 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세상에 맞추어진 귀에는 “미련한 것”으로 들린다(고전 1:23).

미쳤도다. 베스도는 고결한 주제에 대한 바울의 강박 관념이 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고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다. 아그립바의 경우 하고자 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로마인인 베스도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각하. 흔히 사용되는 경의의 호칭으로, 베스도의 고위 관직에 적합하다(참조 눅 1:3; 23:26; 24:3 주석).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진술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할 것을 호소한다.

담대히 말하노니. 이 장에 기록된 바울의 개종에 대한 내용은 9장과 22장의 동일한 내용의 설명보다 더욱 자세하다. 바울은 담대히 말했는데 이는 아그립바 왕이 박식한 청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것이 팔레스타인에서 갖는 마지막 발언 기회일 수도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에 하나라도. 예수의 생애와 봉사, 죽음과 부활, 오순절의 경험, 베드로와 요한 및 다른 사도들이 행한 이적들, 바울의 놀라운 개종, 복음의 전파에 뒤따른 주목할 만한 결과들이다.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를 “좇는도다”( 12:19)라고 불평했으며,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치안관들에게 사도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17:6)다고 말했다. 복음 선포에 따르는 논쟁은 물론 복음에 대한 관심과 흥분은 바울이 말해온 바를 확증해 준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믿으시나이까. 아마도 그는 유대인으로서 선지자를 믿었을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예언하였다. 참조 22절 주석.

아나이다. 눈치 없이 아그립바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바울은 그의 대답을 기대한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진실임을 인식하였으나 지식과 확신이 그의 행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참조 마 7:21~27 주석).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적은 말로. 헬라어 엔 올리고(en oligo-). 문자적으로 “적은 것으로.” “적은 [시간] 안에”일 가능성이 있다. 이 구절의 원문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번역과 해석상의 시도가 있다. 주석자들은 일반적으로 아그립바가 26, 27절의 바울의 진지한 호소를 경시하는 양 빈정대면서 말한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다면 그가 빈정댄 것은 진정한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참조 사도행적, 438). 흔히 깊은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아그립바처럼 무관심한 척 말하며 행동하곤 하는데, 특히 믿지 않는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한다. 깊은 확신을 받았는데도 아그립바 왕은 총독의 재판정에 모인 자들에게, 일개 죄수가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한 설명으로 왕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사람으로 바울을 여긴다는 인상을 주기 원했던 것 같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바울은 분명하고 힘있게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아그립바 앞에서 그 개요를 설명하였다. 그는 예언의 메시야가 이미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그는 어떻게 구약 성경이 메시야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선언하였으며 어떻게 예수의 생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윤곽을 그린 모든 세목들이 성취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잃어버린 세계를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참으시고 치욕을 가볍게 여기셨으며 마침내 죽음과 무덤을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논증하였다. 한때 그에게도 그렇게 보였었으나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불신할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은 다메섹 성문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예루살렘 거리를 거니셨고 갈바리에서 돌아가시고 죽음의 속박을 깨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을 틀림없이 보았었다. 진실로 그는 게바, 야고보, 요한, 다른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과 담화하였었다. 그 음성이 부활하신 구세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그에게 명하셨으니 어찌 그가 불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와 유대 온 땅과 원방에서까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증거하였고 각 계급의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하였다(행적 436-437).

아그립바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이 말씀을 듣고 아그립바의 마음이 그의 가문의 과거 역사를 회상해 보았을까? 바울이 설교하고 다니는 그분을 대적하던 그 가문의 헛된 노력을 돌이켜 보았을까? 그의 증조부 헤롯 대왕이 베들레헴의 죄없는 아이들을 학살한 사건을 생각해 보았을까? 그의 큰 삼촌 헤롯 안티파스가 침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어떠했을까? 야고보를 죽인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Ⅰ세를 생각해 보았을까?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한 그들의 범죄의 결과로 이 왕가에 신속히 내리는 재앙들이 하나님의 진노임을 그는 알았을까? 그 날 그들이 입고 있던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의복이 아그립바로 하여금 그보다 더 강력한 군주였던 그의 친아버지가 백성들이 그를 신이라고 외쳐댈 때 눈부신 어의를 입고 바로 그 도시 한 복판에 서 있던 그 모습을 생각해 내었을까? 찬양의 소리가 드높은데 바로 그들 앞에서 그가 죽어 넘어짐으로써 헛된 영광을 탐하는 이 왕에게 두려운 심판이 얼마나 신속히 임했는가를 그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사건들 중 어떤 것이 아그립바의 기억 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앞에 있는 빛나는 장면으로 인하여 그의 허영심이 자극을 받아서 교만과 자만심이 보다 고상한 모든 생각들을 추방시켜 버렸다(바울의 생애 255,256).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적으나 많으나. 아그립바의 호통에 비추어보면 “적은”(28)을 가리킨다. 바울이 증거한 것이 적든 많든 왕처럼 식견이 넓은 유대인에게 호소하기에는 충분하다.

당신뿐 아니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바울은 계속 호소한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손짓하면서 바울은 그가 묶여 있는 쇠사슬을 상기한다.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왕과…일어나서. 회견은 바울의 뛰어나고 간결한 제시와 진지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과 없이 끝났다. 바울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서로 말하되. 바울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사형…할 만한 행사가 없다. 바울이 “미쳤”다는 말을 들었지만(24, 25),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바울이 진지하고 견문이 넓으며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놓을 수. 참조 25: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