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28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30. 07:32
 
사도행전 제28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멜리데. 시칠리아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섬 몰타(Malta). 어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일뤼리아) 연안 근처의 아드리아 해()에 있는 멜레다(Meleda) 섬에 배가 난파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27:27의 아드리아에 대한 언급이 배가 지중해를 벗어나 오늘날 아드리아 해로 알려진 곳에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견지한다. 또한 그들은 당시 멜리데 사람들이 로마인도 헬라인도 아니고 토인(참조 28:2)이었으며, 오늘날에는 독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언급한다. 이 설명은 개연성이 매우 적으며 오늘날 어떤 유능한 학자들에게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추가로 27:27; 28:2을 참조하라.
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토인들. 헬라어 바르바로이(barbaroi). 헬라 사람과 로마 사람에게 소란스러운 수다(참조 롬 1:14 주석)처럼 들리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의성어이다. 멜리데 토인들은 베니게 사람들과 혈통적으로 연관되었을 것이고, 베니게 사람들과 접촉한 결과 베니게 방언을 썼으며 따라서 히브리인과도 관련이 있었다. 멜리데는 로마가 카르타고 사람들로부터 이 섬을 취한 2차 카르타고 전쟁(참조 Livy Annals xxi. 51) 이후 줄곧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특별한. 곧 “보통이 아닌” 친절. 19:11에서 같은 헬라어 표현이 “희한한”으로 번역되었음을 참조하라.
영접하더라. 계속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폭풍이 부는 아침에 드린 찬양 예배―인원 점검을 해 보았을 때 단 한 사람도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뱃사공들과 군인들과 손님들, 그리고 죄수들 모두 합해서 거의 삼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폭풍이 부는 11월의 어느 아침에 멜리데섬의 바닷가에 서 있었다. 거기에서 바울과 그의 형제들과 그들의 집회에 참석한 몇 사람이 큰 깊음의 위험을 다 지나도록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고 안전하게 상륙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바울의 생애 270).
3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바울이…거두어. 바울은 또다시 일행을 편안하게 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나무. 덤불이거나 아마도 떠밀려온 나무일 것이다.
뜨거움을 인하여…나와. 추위로 무감각해졌거나 이미 동면에 들어갔던 독사가 활동성을 되찾아 위험을 감지하고 나왔다.
독사. 멜리데 섬에는 독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이 바울 당시에 독사가 없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일례로, 근래에는 하와이에 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이 짐승. 문자적으로 “이 생물.
그 손에 달림. 뱀은 바울의 손을 물고는 거기 매달려 있었다.
공의. 헬라어 디케(dike-). “공의” 혹은 “징벌.” 멜리데 사람들에게, 바울은 뱀에게 치명적인 물림을 당하여 신들에게 처벌받은 죄인으로 보였다.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바울이…떨어버리매. 여기서 바울은 또 다른 위험 앞에서 조용하고 침착한 상태를 유지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가이사 앞에 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상함이 없더라. 그는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당하지 않았다. 참조 막 16:18; 10:19.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오래 기다려도. 섬 주민들은 독이 퍼진 살이 부풀어오르기를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이라. 참조 14:11 주석.
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제일 높은 사람. 헬라어 프로토스(pro--tos). “첫째.” 즉 수석 관원(primate)을 의미한다. 이 직함은 명각들을 통해 그 섬의 로마 관원을 지칭하는 말로 입증되었으나 직함 자체는 로마에 기원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보블리오(Publius). 순전히 로마식 이름이다.
우리를 영접하여. 아마도 이 추장은 계급을 감안하여 백부장을 영접하였는데 그와 함께 바울도 영접한 것으로 보인다.
사흘이나…유숙하게 하더니. 추장의 환대는 영구적인 채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질. 헬라어 뒤센테리아(dusenteria).
기도하고. 참조 약 5:14, 15 주석. 치유 은사(고전 12:9)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낫게 하매. 바울은 루스드라(14:8~10), 빌립보(16:18), 에베소(19:11, 12), 드로아(20:9, 10) 등에서와 동일한 성령의 능력을 여기서 나타냈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다른…사람들. 다른 섬 주민들.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후한 예. 보수가 아니라 선물로 제공한 것으로, 아마 돈, 음식, 옷 등 짐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의 필요에 적합했을 것이다.
떠날. 헬라어 아나고(anago-). 여기서는 “항해할”(참조 27:12)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배에 올리더라. [우리를 위해] 배에 싣다.” 이 관대함은 보블리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의 본을 따랐을 것이다.
11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석 달 후에. 폭풍 시기가 지나간 후, 항해를 재개해도 안전한 때였다.
그 섬에서 과동한. ‘성 바울 만()’에서 남동쪽으로 12.8킬로미터 떨어진 발레타 항구에서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배. 애굽의 또 다른 곡물 운송선일 것이다(참조 17:6, 38).
기호. 뱃머리에 있는 돛대모양의 이물 장식을 가리킬 것이다.
디오스구로(「제임스왕역」에는 “Castor and Pollux”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헬라어 디오스쿠로이(dioskouroi). 문자적으로는, 레다(Leda)가 유피테르에게 낳아준 전설상의 아들인 “쌍둥이.” 제미니(Gemini) 곧 쌍둥이로 불린 두 아들의 라틴 이름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이다.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수라구사. 섬의 남동쪽 연안에 있는 시칠리아의 수도로, 한때는 헬라의 영토였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에는 아테네 해군이 큰 재앙을 만났던 곳이었다. 순풍을 기다리느라 이곳에서 사흘을 보낸 듯하다.
대고. 배는 시칠리아를 향해 북쪽으로 항해했는데, 다음 항구는 헬라의 옛 도시인 수라구사였다.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둘러가서. 헬라어 페리에르코마이(perierchomai). 문자적으로 “둘러가다”, “원을 그리다.” 여기서는 아마도 역풍을 거슬러 전진하기 위해 맞바람을 안고 지그재그로 나가는 모양일 것이다.
레기온. 이달리야의 남단 메시나 해협에 있는 오늘날의 레기오이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한 때 이곳에 애굽 밀 운송선의 하역을 위한 항구 시설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남풍. 수라구사부터 레기온까지 지그재그로 항해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곧바로 북쪽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보디올. 이달리야 나폴리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폿주올리(Pozzuoli). 수도에서 남쪽으로 2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당시에 로마의 주요 항구였으며 특히 애굽에서 오는 밀 운송선을 위한 항구였다. 티베르 어귀에 위치한 오스티아가 후에 주요 항구가 되었다.
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형제를 만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3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멀고먼 로마의 주 항구 보디올에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무리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이곳에는 큰 유대인 거류지가 있었으며 적어도 이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 개종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정보가 부족하지만 이 교회가 로마 교회와 같이 AD 31년 오순절 때 이달리야에 거주했던 유대인 개종자들의 노력의 결과로 세워졌거나, 그 후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순례 여행의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청함을 받아. 간청 또는 강권을 받은 것을 말한다. 바울은 보디올에 있는 교인들과 1주일을 함께 머물렀으며 적어도 한 안식일을 거기서 보냈다.
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우리 소식을 듣고.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바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항구인 보디올과 로마 사이에는 항상 소식이 오갔다. 배의 도착과 함께 선객들의 명단과 뱃짐 목록이 즉시 알려졌을 것이다.
압비오 저자. 이 말에서 그 유명한 비아 압피아(Via Appia) 즉 로마에서 부룬디시움(Brundisium)에 이르는 압피아 가도(街道)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저자(시장)”에 해당하는 라틴어 포룸(forum)은 자치 성읍을 뜻하는 말로, 영어의 “borough(자치구)에 가깝다(「제임스왕역」에는 “Appii forum”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이 성읍과 간선도로 이름은 둘 다 로마의 유명한 감찰관 압피우스 클라디우스를 지칭할 것이다. “압비오 저자”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진 압피아 가도 상에 있었다. 호라티우스는 이곳을, 악명 높은 선술집이 많고 선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고 경멸했다(Satires i. 5. 3, 4). 로마에서 온 대표자들이 여기서 바울을 기다렸다.
삼관(three taverns). 라틴어 타베르나(taberna)에는 “술집”이나 “여관” 이상의 의미가 있다이 단어의 의미에는 모든 종류의 가게도 포함된다. 이 마을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로마에서 대략 48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바울을 만났는데, 이들은 첫 번째 무리보다 나중에 로마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키케로(Cicero)가 이 작은 마을을 언급한다(Letters to Atticus ii. 10).
맞으러 오니.  16:3~15에 의하면 로마의 신자들 중에 바울의 친척과 친구들이 있었다. 이름이 거기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분명 바울을 맞으러 거기에 나왔을 것이다.
하나님께 사례하고. 시련의 경험을 통과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안전한 여행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여러 해 동안,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싶어했었다( 1:11~13). 그는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뚜렷하게 대조된, 도착한 후 실제 상황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충격적인 와중에도 담대한 마음을 지닐 이유와 최근 경험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보증을 찾아냈다. 바울은 가장 낙담스럽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참조 고후 4:7~10; 사도행적, 449). 그는 확고부동한 그리스도인 낙관주의자였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로마에 들어가니.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을 읽는 독자는 바울이 로마에서 겪은 일을 좀 더 완전하게 기술하였기를 간절히 바란다. 누가가 추가 사항을 덧붙여, 바울의 도착을 기점으로 또 다른 책을 기술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기를 지키는. 자기를 감시하는. 그 군인은 바울과 자신의 손목을 묶은 쇠사슬에 함께 매여 있었을 것이다(참조 20). 로마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기록한 편지서에서 바울은 이 쇠사슬을 자주 언급한다( 6:20; 1:7, 13, 14, 16; 4:3, 18; 참조 행 28:20). 사도 바울과 쇠사슬로 묶여 지내는 이방인 군인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을까? 우리 중 한 사람과 그렇게 쇠사슬로 묶여진 이방인이라면 어떤 영향을 받을까? 경비병이 자주 바뀌었을 것이므로 투옥돼 있는 이태 동안 바울의 생애가 경비병들의 전 군단에 널리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참조 빌 1:13 주석).
따로 있게. 투옥될 때 바울에게 베풀어진 배려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할 당시에도 계속 그를 지키고 있던 백부장 율리오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멜리데 섬에 성공적으로 비상 상륙을 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으며, 따라서 이는 다른 증거들과 더불어 지혜와 영적 능력이 두드러진 그의 고매한 인격에 백부장이 호감과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했다. 이것은 분명 베스도로부터 온 사건 진술서와 함께 바울에 대한 보고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사흘 후에. 바울은 우선 다른 곳에서 만나 이미 알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재회하고 로마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음이 분명하다. 그 후에 그는 비그리스도인인 로마의 유대인을 만나고자 했다.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 바울의 규칙은 언제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였다( 1:16; 2:9; 참조 행 13:5, 14, 46; 17:1, 2, 10; 18:4 ). 그는 그가 어떻게 로마로 오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유대인 장로들을 초청한다.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글라우디오의 칙령(18:2)이 해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 형제들아. 참조 1:16 주석.
백성…배척. 바울이 당면했던 어려움은 비시디아 안디옥(13:50), 루스드라(14:19), 데살로니가(17:5~8), 베뢰아(17:13, 14) 그리고 고린도(18:12~17)에서처럼 언제나 유대인들 때문에 생겼다.
조상의 규모. 바울은 그가 가르치는 바가 진정으로 유대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믿었다(참조 23:1, 6; 24:14~16; 26:5~7). 스데반에게 돌려진 비난과 비교하라(6:13, 14).
일이 없는데.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했던 무죄에 대한 해명을 반복한다.
죄수로 내어 준바. 바울은 예루살렘 폭동(21:27~36)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고, 굴욕적이고 낙담되는 결과만을 지적하였다. 지난 이태 이상 동안 그는 로마인의 죄수로 속박되어 있었다. 그는 유대인 때문에 구속되었으며, 그들의 지속적인 고소 때문에 죄수로 있었다.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나를…놓으려 하였으나. “나를 자유롭게 하다. 25:25; 26:32과 비교하라. 만약 벨릭스가 희망한 대로 뇌물을 주었다면, 그 부패한 총독은 틀림없이 바울을 석방했을 것이다(24:26). 바울 앞에 서 있던 모든 관리와 수비대 대장들은 그의 무죄를 확신했다.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송사하려는 것. 바울은 유대 민족을 사랑했으며(참조 롬 9:1~3; 10:1), 그들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감소하지 않았다. 그가 당한 부당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고소한 적도 없다. 그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이유는 로마나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에게 어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너희를…청하였노니. 바울은 회당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을 찾아갈 수 없었으나, 습관대로 우선 그들과 이해의 기초를 쌓고자 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오라고 초청한 것이다(참조 17절 주석).
이스라엘의 소망. 즉 메시야에 대한 기대. 바울은 예수가 이 기대의 완전한 성취라고 믿었다. 그의 믿음은 모든 유대인들도 가졌던 믿음이다. 그들의 그 믿음을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바울에게 유일한 관건이었다.
이 쇠사슬에 매인 바. 그가 구속된 것은 사실상 유대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포기하기보다 속박당하기를 선택했다.
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이후 가이사랴를 떠난 어떤 배도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에 로마에 도착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 대한 선입견에 물들지 않았다. 누가는 바울이 로마에서 보낸 이태(30) 동안 바울을 대적하는 편지가 예루살렘에서 왔다거나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를 대적하여 취했음직한 다른 조치(참조 사도행적, 453)가 있었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우리가…듣고자 하노니. 이 허심탄회한 고백은 매우 진지했던 것 같다.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의 기별을 조금밖에 듣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좀 더 듣기를 바랐다.
이 파. 참조 5:17; 24:5, 14 주석.
반대를 받는 줄.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나돌고 있었다. 타키투스는 이 새로운 분파에 대해 가장 심하게 비난하는 기록을 남겼으며(Annals xv. 44), 수에토니우스(Nero xvi. 2)도 그와 동일하게 정죄하였다.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AD 165년 사망)는 유대인의 자료(Dialogue With Trypho 17)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비방에 대하여 말한다. 아마도 로마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연관된 여러 상황과 그들의 악한 성향에 대한 소문뿐만 아니라 놀라운 수적 증가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철저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므로 바울에게 좀 더 듣고 싶어했다.
우리가 앎. 로마에는 이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참조 15절 주석), 그들을 통하여 제한된 지식이 그곳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유대에서 돌아온 순례자들이 전한 소식 또는 적어도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을 것이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의 우거하는 집. 참조 16절 주석; 30.
많이. 문자적으로 “더 많이.” 처음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 다음 모임에 참석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대인들 중 어떤 이들은 완고하게 복음에 저항했고 어떤 이들은 진리의 말을 좀 더 갈망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들로 유대인들은 하루 종일 남아 있었다.
강론하여. 바울은 속박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유대인 청중들에게 전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데반이 제시한 것(7:2~53)과 비시디아 안디옥(13:14~41)에서 바울 자신이 한 설교(13:14~41)에 견줄 만한, 신중하게 연구한 신학적 발표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참조 마 3:2; 4:17; 5:2; 4:19; 8:12 주석.
증거하고. 그는 예수 안에서 체현된 메시야 소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증거하였다.
모세. 참조 눅 24:27, 44 주석.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믿는 사람도 있고. 바울의 전도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이다(참조 14:4; 17:4; 19:9).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전도자의 경험이다. 각자의 양심은 자유롭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사람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음을 인해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맞지 아니하여. 어떤 이들은 사두개인에게,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에게 더 호감을 가졌다(참조 23:6~10).
너희 조상들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조상들”을 따르기로 확정했다. 바울은 여기서 그 동일한 “조상들”이 그들이 지금 나타내고 있는 불신을 책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촉구한다(참조 눅 16:31; 8:39, 56 주석).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일렀으되.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을 꾸짖기 위해 직접 사용한( 13:14; 4:12; 8:10; 12:40) 6:9을 인용한다.
들어도. 구약의 이 성경절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사 6:9, 10; 7:21~27의 주석을 참조하라.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돌아와. 문자적으로 “다시 돈다”(참조 마 3:2; 2:38; 3:19, 20 주석).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이 구원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구원(참조 마 1:21 주석).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바울은 특별히 “듣기를” 거절한 유대인(참조 24~26절 주석)들에게 말한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거절하자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향했다.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온 이태. 누가가 이 두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거나 이 일에 성령의 지도가 없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 번째 책을 쓸 계획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두 해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일반적으로 이 기간에 로마에서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소위 네 권의 옥중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심리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투옥의 부담에 눌렸음을 안다( 3:1; 4:1; 1:16; 4:18; 1, 9, 10). 그는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염려했다( 2:23, 24). 에베소에 편지를 전달한 두기고( 6:21)와 빌립보( 1:1), 골로새( 1:1) 그리고 개종한 노예 주인 빌레몬( 1)에게 보내는 편지에 바울과 함께 그 이름이 나오는 디모데와 아울러 누가와 아리스다고( 27:2)도 그와 함께 있었다. 에바브로 디도는 빌립보에서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이 될 것들을 가져왔다( 4:18). 주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는 로마에 있는 동안 바울을 알게 되었다( 4:9; 10). 바나바의 친척 마가, 유스도라 불린 개심자 예수,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라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 4:10~12). 데마도 거기에 있었다( 4:14; 참조 딤후 4:10). 바울은 비록 죄수였으나 이 두 해 동안 복음에 대한 그의 증거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투옥의 끝이 가까워 올 즈음에 그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자기 셋집. 바울이 더 이상 개인적 비용을 손수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친구들이나 다른 곳, 특히 빌립보( 4:18)에서 재정적 도움이 왔을 것이다.
오는 사람을 다. 바울은 자유롭게 교제하였다.
담대. 문자적으로 “거리낌없음”, “두려움 없는 확신”, “용기 충천.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하나님 나라.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기별에는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 3:2; 1:14).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 이것이 바울의 모든 대화의 중심 영역이었다.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황제, 호민관, 경비병은 물론 유대인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전도자는 구금되어 있었으나 복음 기별은 그렇지 않았다.
이로써 초기교회의 성경 역사가 끝난다. 누가가 그 외에 더 기록했다고 해도 현존하지 않으며, 바울의 석방 이후와 두 번째 투옥과 죽음에 대해서는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승에서 약간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