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22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27. 06:03
 
사도행전 제22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부형들아. 정중한 인사말의 형태(참조 1:16; 7:2 주석)이다. 바울은 격한 군중을 달래고자 하였다.
변명. 헬라어 아폴로기아(apologia). 혐의에 대해 변명하는 발언이다.
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히브리 방언. 당시 유대인들의 통용어인 아람어를 말한다(참조 21:40 주석).
더욱 종용한지라. 바울은 손짓(21:40), 아람어 어투, 정중한 말씨로 격한 청중의 면밀한 주목을 끌었다. 인간들의 감정의 바다가 갑자기 잔잔하게 가라앉고 기대에 찬 고요가 그것을 대신했다.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 헬라어 본문에서 “나”는 강조형이다(참조 21:39 주석).
다소. 참조 6:9; 9:11; 21:39 주석.
자라. 유아기가 아니고 청년기를 말하는 것 같다. 비록 국외에서 출생했으나 바울은 유대교 거점의 보수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했다.
가말리엘. 참조 5:34 주석.
문하(「제임스왕역」에는 “at the feet[발치에서]로 되어 있음-역자 주). 바울 당시에는 선생과 학생 모두 앉아서 수업을 했는데 선생이 학생보다 높은 곳에 앉았다.
율법. 유대인의 신앙과 관습의 체계이다.
엄한. 헬라어 아크리베이아(akribeia). “정확”, “엄격”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군중에게 자신의 배경이 전적으로 유대적임을 확신시킨다. 그는 그들의 관점이 무엇인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참조 23:6; 24:14; 26:3~5 주석).
너희 모든 사람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공통적인 입장이 있음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성전을 성스럽게 그리고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그들의 소망을 칭찬한다.
열심하는. 참조 21:20 주석. 바울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율법”에 “열심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 도를. 참조 9:2 주석.
핍박하여. 참조 7:58; 8:1~4; 9:1, 2, 13, 14; 26:10 주석.
죽이기까지. 한때 바울은 그들이 지금 열심을 내는 것처럼 “열심하는” 자였다.
옥에 넘겼노니. 헬라어 본문에 “옥”이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은 사울의 핍박 활동이 여러 성에서 수행되었음을 시사한다(참조 26:11).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대제사장. 아나니아(23:2). 본 주석에서 채택한 바울의 생애 연대에 의하면, 바울이 개종하던 당시(AD 35)에는 가야바(참조 눅 3:2 주석)가 대제사장이었다. 아나니아는 가야바 이후 일곱 번째 대제사장이다.
모든 장로들. 헬라어 프레스뷔테리온(pres- buterion). “장로회.” 여기서는 산헤드린을 지칭하는 듯하다. 바울이 개종한 후 23년이 흘렀을 것이나 그 당시 생존해 있던 “장로들”중 몇몇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재가하는 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일 것이다(8:3; 9:1, 2).
형제들. 바울은 여기서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형제들”이라고 재치 있게 지칭한다(참조 22:1 주석; 18:15).
공문. 참조 9:2 주석; 고후 3:1~3.
가더니. 문자적으로는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이라는 의미이다(참조 9:3 주석).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다메섹. 바울은 종교적 열심으로 이방 땅까지 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그리스도교를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오정쯤. 하나님의 임재의 광채는 정오에 내리쬐는 수리아 지방의 눈부신 햇빛을 오히려 어둡게 했다(참조 26:13).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들으니 소리 있어. 참조 9:4~6 주석; 22:9.
핍박하느냐. 참조 9:4 주석. 사울의 개종과 관련된 여러 진술의 비교는 9:3 주석을 참조하라.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뉘시니이까. 참조 9:5 주석.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참조 9:7 주석.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내가…무엇을 하리이까. 참조 9:6 주석.
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참조 9:8 주석.
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가 유대 종교의 요구 사항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9:10에는 그가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거기서 그는 단지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로 불린다. 이곳에 묘사된 바울은 청중의 호의를 얻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참조 22:1~4 주석). 바울이 불경한 사람이었고 지금 혐의를 받고 있는 것처럼 불경한 행동을 한 죄가 있었다면, 경건한 유대인이 바울을 받아들였을 리 없다.
칭찬. 경건한 유대인인 아나니아의 성실성은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믿음에 충실한 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바울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경험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였다.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내게 와. 참조 9:11~17 주석.
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참조 7:32 주석. 스데반이나 아나니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스스로 형제들 중에 가장 독실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처럼 그들은 눈먼 동족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게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9:1~3; 10:1~3).
너를 택하여. 곧 “너를 지명하여”(참조 9:15 주석).
자기 뜻을 알게. 개종 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알며 그것을 양심적으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참조 23:1; 24:14).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참조 마 7:21~27; 7:17; 13:17 주석). 바울은 반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참조 고전 1:1; 고후 1:1; 1:1; 1:1).
의인. 여기서는 예수를 지칭한다(참조 행 3:14; 7:52; 요일 2:1). 열두 사도는 주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매일 그와 교제했다(요일 1:1, 3). 이제 사도직에 특별한 부름을 받은 바울도 주를 뵙는 특권을 받았다(참조 행 22:17~21; 고전 15:3~9; 고후 12:1~5).
음성. 다메섹 근처에서 본 계시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에 주로부터 받은 특별한 지시(고후 12:1~5; 1:11, 12)를 언급할 수도 있다.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그를 위하여…증인이 되리라. 열두 사도처럼 바울도 주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뜻(14)을 알았다. 또한 그들처럼 바울도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참조 1:8). 바울의 자격과 권위는 그들의 것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었다(고전 15:10; 고후 11:5; 2:8, 11).
모든 사람 앞에서. 아직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사명(참조 21)을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보고 들은 것. 증언의 힘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다(참조 요일 1:1~3; 벧후 1:16~18). 바울은 살아 있는 구주를 만났으며, 열두 사도가 구주에게 받았던 것처럼 깊고 명료하며 조직적인 진리의 지식을 직접 받았다.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왜 주저하느뇨. 증거는 충분했다.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왜 지체하는가?(참조 8:36).
주의 이름.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그의 이름”이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불러.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한 봉사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침례를 받고. 참조 마 3:6; 2:38; 9:18; 6:1~6 주석; 8:36.
너의 죄를 씻으라. 침례는 하나님이 지정한 예식이다(참조 마 3:15; 16:15, 16; 3:3, 5; 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자체만으로는 죄를 “씻는” 데 무력하다. 침례는 그 외적 행동에 믿음, 회개 그리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일이 따라야만 효력이 있다(참조 마 28:19; 2:38; 3:19; 8:36, 37). 죄의 제거를 가능케 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고후 5:20, 21; 벧전 2:24; 3:21; 요일 1:7, 9).
바울은 확연한 회심의 때를 결코 잊지 않음( 26:9-16)―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박해하던 박해자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돌아선 그의 회심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회심이 이후의 생활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가? 그가 한때 조롱하고 멸시하던 분 곁에서 일을 할 때 그것은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는가? 그의 봉사의 초기에 갖게 된 확신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개인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지혜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있고 항구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가 늘 임재해 계시다는 느낌을 배양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도로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충실한 군병으로서 명령을 받기 위하여 그의 대장을 늘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장애물들이 아무리 많이 산적해 있어도 이로 인해서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이는 그가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원고 114, 1897).
사도 바울이 각곳에서 사람들에게 그가 회개한 것같이 회개하라고 호소할 때 자신의 회개에 하늘 천사들이 행한 봉사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원고 29, 1900).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루살렘으로. 이것은 9:26의 방문이다(참조 9:26 주석).
성전에서. 아마도 아침 기도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에(참조 눅 1:9; 3:1 주석).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바울을 영화롭게 하셨던 바로 그곳에서 바울이 신성 모독죄로 고소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기로 결정하기 전에 그 사실들을 조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비몽사몽. 이 계시를 통해 주어진 기별을 18~21절에 기술하고 있다. 이 일은 9:26~30에 기록된 예루살렘 방문 시에 일어났다.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속히. 9:29, 30에는 제자들이 바울을 보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29)은 그들에게 바울이 지체 없이 그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개인적인 안전을 개의치 않는 바울의 성격(참조 행 19:30; 20:22~24; 고후 4:7~9; 11:24~27)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적 부담(참조 롬 9:1~3; 10:1)으로 바울은 그 도시에 남아 있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사도행적, 130). 복음의 전달자가 위협적인 상황을 개의치 않아야 할 때도 있으나, 어떤 도시에서 핍박을 당할 경우 다른 도시로 도망해야 할 때도 있다(참조 마 10:23 주석). 외견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곤란을 겪을 경우에는 의무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바울의 형편이 이러한 경우였으며 형제들의 충고와 더불어 하나님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바울은 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았으며( 22:21; 2:7~9), 하나님의 목적은 그가 이방으로 떠남으로써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바울은 그곳에 15일간 머물렀다( 1:18). 18:17~25; 11:16; 15:2; 2:2을 비교하여 이와 흡사한, 형제들의 충고에 덧붙여진 하나님의 지시를 살펴보라. 참조 13:2~4; 15:28.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주 믿는 사람들을. 참조 15:21 주석.
가두고…때리고. 아마도 바울이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사의 시제로 보아 이 행동이 일정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핍박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제 바울의 목적은 그의 피에 굶주린 이 성난 폭도들 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그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함으로써 공통적인 입장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때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좀 더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말을 기꺼이 들을 것이었다.
각 회당. 이단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고소를 듣고 처벌한 장소인 회당에 대해서는 마 10:17; 23:34; 13:9; 12:11을 참조하라. AD 225년경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시대에도 유대인 회당이 아직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의 원천”이라고 기록했다(Scorpiace x).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증인. 헬라어 마르튀스(martus). 신약 시대에 마르튀스라는 단어에는,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현재의 영어 “martyr”에 첨가된 순교자라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버릴 때 마지막 증언을 하도록 요청받는 일이 많아지자 그러한 증인들이 특히 순교자(martyr)로 알려지게 되었다.
저희. 헬라어 본문은 강조형으로 쓰였으며 “바로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전에 그를 죽이기로 꾀했던 바로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대한 바울의 열심을 잘 알았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내가…보내리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이 선언의 성취가 아니었다.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이 선언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성취가 아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지 아직도 약 구년이 지나야 할 것이었다.
이방인. 바울은 주로 비유대인들을 위해 일했다(참조 9:15 주석).
22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이 말하는 것까지. 즉 “이 진술까지.” 몹시 호기심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침묵했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구원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격노했다(참조 눅 4:25~29; 7:51~54). 그래서 정식 재판조차 없이 즉시 바울의 죽음을 요구했다. 그들의 좁은 소견에는 바울은 명백히 유대교로부터 배도한 자였다.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옷을 벗어 던지고. 헐렁하게 걸치는 겉옷(헬라어 히마티온[himation], 참조 마 5:40 주석; 10, 52)을 벗어 던지는 행동은 대단한 흥분을 반영했다. 폭도들은 막 행동에 옮기려고 하였다. 왕하 9:13과 비교하라.
티끌을…날리니. 강한 혐오나 거부의 몸짓.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천부장. 헬라어 킬리아르코스(chili- archos). 1,000명을 통솔하는 지휘관”(참조 요 18:12 주석). 분명 아람어를 모르는  이 장교 글라우디오 루시아( 23:26)는 필시 바울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가 틀림없이 뭔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결론내렸을 것이다.
영문. 즉 성전 지역의 북쪽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 또는 망대(참조 제9, 526; 21:31 주석).
떠드나. 즉 “소리치다”(참조 12:22).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이다.
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헬라어는, 그를 가죽줄로 묶어 앞으로 뻗게 하여 채찍질하기에 좋은 자세로 만들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백부장. 헬라어 헤카톤타르코스(hekaton- tarchos, 참조 행 10:1 주석; 7:2). 이것은 병사 100명을 책임진 장교이며 채찍질을 집행하는 임무가 있었다.
로마 사람 된 자. 만약 바울이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면, 그가 자신을 로마 사람이라 주장한 것은 중대한 범죄였을 것이다. 그 백부장은 말썽을 일으킨 유대인 그 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로마 시민권은 대단히 높이 평가되었는데(참조 28; 9, 46, 47), 그 소지자들에게는 많은 특권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경우에 로마 시민권은 바울에게 보호 장치가 되었다(참조 16:37~39 주석).
 수 있느냐. 로마법은 로마 사람을 채찍질하는 것을 금했다(Livy Roman History x. 9. 4, 5).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 헬라어로 언급된 그 장교의 질문에서 강조점은 “네가”에 있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 아람어로 연설하여 유대인 폭도들을 격분의 정점에 막 이르게 한 사람이 로마 시민이라니 라는 생각에 그 장교는 놀랐음이 명백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시민권(「제임스왕역」에는 “freedom[자유]이라 되어 있음-역자 주). 헬라어 폴리테이아(politeia). 여기에서는 “시민의 권리나 특권”의 의미로 사용됨. 3:20과 비교하라.「제임스왕역」에서 “freedom(자유)이라는 단어는 어떤 도시가 귀빈이나 영웅에게 부여하는 특권인 자유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나면서부터로라.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태어났다,” 즉 로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29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신문. 바울이 받을 뻔했던 고문을 부드럽게 표현한 말이다.
두려워하니라. “천부장”의 두려움은 그가 바울을 결박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울은 자주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28:20; 1:7, 13, 14, 17; 4:18; 10, 13), 로마 시민들도 결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튿날까지도 결박되어 있었다(22:30). 이때 천부장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 가죽끈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30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알고자 하여. 즉 “알기를 희망하여.” 로마 장교인 주의 깊은 그 천부장은 문제의 뿌리에 접근하여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바울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열망하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 결박을.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이 말이 생략되었음을 입증한다.
온 공회. 즉 산헤드린. 루시아는 그것이 유대 종교에 관한 문제임을 알았다. 산헤드린이 모였던 회의실에 대해서는 마 27:2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즉 안토니아 요새의 망대로부터(참조 24; 21:34 주석). 로마 호위병이 동행하여 바울의 개인적인 안전을 보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