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소요. 헬라어 쏘뤼보스(thorubos). “소란”, “소동.” 같은 단어가 예수의 고난(마 26:5; 27:24; 막 14:2), 야이로의 딸을 일으킴(막 5:38)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당한 공격(행 21:34; 24:18)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제자들을 불러. 바울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하여 교인들의 모임을 요청했다.
작별하고. 헬라어 단어는 “고별하고”, “작별 인사를 하고”(참조 21:6)를 의미한다. 분명히 바울은 교회가 다시 한 번 잠잠해지는 것을 볼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 그는 에베소에서 약 3년을 보냈다(AD 54~57년경).
마게도냐로. 사도행전의 이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서들에서 얻는 정보로 보충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서들과 차이가 있다. 마게도냐로 여행하는 동안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다(참조 고후 2:12, 13; 7:5; 9:2).
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그 지경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은 그 자신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빌립보에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울은 틀림없이 마게도냐를 가로질러 로마가 닦아 놓은 도로를 따라 서쪽의 아드리아 해안으로 갔고, 일루리곤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참조 롬 15:19).
헬라. 헬라어 헬라스(Hellas), 그리스. 누가는 남쪽 지역인 아가야와 같은 뜻으로 헬라스를 사용한다. 바울은 여행을 계속하여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에 당도했고, 그곳에는 교회 안에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많은 일이 있었다. 거기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그가 보낸 두 편지서를 받았다. 에베소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분당의 정신을 꾸짖었다. 또한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의 무질서를 꾸짖었으며, 근친상간에 반대하는 그의 견해를 제시했다. 바울이 직면한 목회적 과업들은 설령 고린도에서만 모든 시간을 보냈다 해도 이 지역에 머무는 3개월 동안 휴식을 거의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고린도에 거하는 동안, 바울은 아마도 많은 친구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글라우디오의 칙령은 철회되었거나 더 이상 강제성을 갖지 않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서 로마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참조 행 18:18, 19; 롬 16:3).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분을 쌓았던 다른 사람들도(참조 롬 16장) 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로마로 가려는 그의 열망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롬 1:10, 11). 바울은 그리스에서의 사업을 이루었다. 그는 자신을 서쪽으로 끌어당기는 인간적 매력 이상의 것을 느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잠시만 머무를 목적으로 속히 예루살렘에 가서, 이방에 있는 교회들이 준 선물들을 넘겨 준 후 즉시 로마와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계획했다(롬 15:24~28).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사실상 그가 어떻게 다른 경로로 여행했는지를 보여 준다.
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석 달을 있다가. 또는 “그가 석 달을 보낸 후에.” 헬라어 구문상, 이 구절은 뒤따라 오는 부분과 연결된다.
배 타고 수리아로. 즉 “수리아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다.” 바울은 아마도 그의 여행경로를 잡고 승선까지 했던 것 같으나 배가 떠나기 전 경고를 받았다.
유대인들이…공모하므로. 즉 “그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만든 책략.” 유대인들은 바울이 고린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동안 그를 공격하는 데 갈리오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제는 비밀리에 그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분명히 그를 죽이려는 의도였다. 바울은 그 음모에 대하여 들었을 때 계획을 바꿔 동료들과 함께 마게도냐로 떠났으며, 그 공모자들을 좌절시켰다.
마게도냐로 다녀.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는 분명히 그가 수리아로 가는 뱃길에서 실행될 것이었기에, 북쪽으로 가려는 그의 신속한 계획 변화는 새로운 상황에 따르는 새로운 음모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아시아까지. 이 표현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인용할 수 있다.
함께 가는 자는. 디모데와 아마도 소바더(소시바더의 다른 이름이라 추정됨)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롬 16:21). 대표단의 규모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계획된 많은 금액을 바울이 가지고 가고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이 돈을 기부한 지역들의 많은 증인을 데려감으로써 비방자들이 그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행할 수 있는 어떠한 의심도 피할 수 있었다(고후 8:19~21). 그러므로 대표자들은 유력한 교회들에서 택해졌고, 그들은 바울의 처신에 나무랄 데가 없음을 증언할 수 있었다. 누가를 포함하여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8명이었다(참조 5절 주석).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를 기다리더라. 이 성경절에서 갑자기 1인칭 복수로 바뀐 것은, 자신의 이름을 결코 언급한 적이 없는 누가가 바울의 동료 명단에 그 자신이 포함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대표자로, 또는 바울의 친구이자 의사로서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다림은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했고, 그는 그곳에서 “무교절 후에”(6절) 출발했다. 앞서간 제자들은 드로아 교회에게 바울이 오는 것을 알렸을 것이고 그의 도착에 맞춰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모두 모였을 것이다.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무교절. 바울은 유대인의 절기 때문에 빌립보에 의도적으로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유월절 기간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23:6)인 바울이 큰 종교적 감동으로 계속 충만해 있었을 것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 기간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참조 고전 5:7, 8).
닷새 만에 드로아에.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향하는 서북향의 항해는(참조 16:11, 12 주석) 사흘 길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동남쪽을 향해 항해하는 이 배는,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형성된 남서해류와 봄에 에게 해(Archipelago)에서 일어나는 북동풍을 만나야 했다. 바울이 유럽으로 건너가도록 하는 마게도냐의 부르심에 대한 이상을 보았을 때, 그는 누가와 디모데와 함께 드로아에 있었다.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는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에서 그들의 일에 은혜를 베푸신 열매의 일부를 대표했다.
이레. 바울과 누가는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아마도 그들은 에게 해를 건너 5일간의 항해 끝에 안식일이 지난 후 상륙한 것 같다. 그들이 드로아에서 보낸 7일, 즉 완전한 일주일은 안식일로 끝났다. 다음 날, 즉 그 주의 첫째 날에 바울은 걸어서 앗소에 가려고 계획했고(13절), 나머지 동료들은 배를 타고 앗소로 향했다. 안식일이 끝나는 시점과 이른 아침 출발 사이, 선교사들은 드로아에 있는 교회에서 꽤 오랫동안 중대한 모임을 가지면서 그 주 첫째 날의 어두운 부분, 즉 토요일 밤을 보냈다.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 후 첫날.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표현이 마 28:1의 것과 동일하다(참조 마 28:1 주석). 이것이 최소한 일반적으로 일요일을 의미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임이 일요일 저녁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 전날 저녁에 있었는지에 대해 주석가들은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 모임이 일요일 저녁에 있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방인이었을 누가가 자정에 하루가 시작하는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로마식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저녁의 모임은 일요일 저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또한 이 절에서 “안식 후 첫날”과 “이튿날”을 언급하며 보여 주는 시간적 순서는, 바로 주일의 둘째 날에 바울이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제안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모임은 분명히 일요일 저녁에 있었을 것이다. 요한 역시 일요일 저녁을 “안식 후 첫날”(요 20:19)로 언급한 적이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유대식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이날은 이미 그 주일의 둘째 날이 된다. 누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코트(Ellicott), 코니비어(Conybeare), 하우슨(Howson) 그리고 A. T. 로버트슨(A. T. Robertson)을 포함한 다른 주석가들은 이 모임이 일요일 전날 저녁에 있었다고 이해했다. 유대식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하루가 일몰에서 시작하므로 안식 후 첫날의 어두운 시간은 일요일 전날 저녁, 즉 오늘날의 토요일 저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계산법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수 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누가가 이방인이든 아니든 그의 이야기에서 이 방법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따라서 드로아에서의 바울의 모임은 토요일 저녁 일몰 후에 시작되었고, 그 밤 내내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이튿날, 일요일에 그는 걸어서 앗소로 갔을 것이다.
어떤 저자들은 이 표현을 가지고 초기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준수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누가가 유대식 시간 계산법을 썼느냐 혹은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썼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모임이 “안식 후 첫날”에 있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유대인의 계산법을 사용했다면 일요일이 되기 전날 저녁은 첫째 날로 간주되었을 것이며, 그가 만약 로마식 시간을 사용했다 해도 일요일 저녁은 여전히 첫째 날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준수했느냐는 문제에서, 중요한 요소는 이 첫째 날 모임이 정규적인 그리스도인 모임인가 아니면 단순히 바울의 방문으로 인하여 첫째 날에 이러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고려해 볼 때, 이날이 주중 첫째 날이기에 바울이 특별히 이 모임을 열었다는 견해를 지지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는 드로아에서 7일을 거했으며 거기서 이미 한 번 이상 성도들을 만났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제 그는 떠날 입장이었고, 그 전에 고별 모임을 갖고 성찬식을 거행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이 일이 주중 첫날에 있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명확한 일요일 준수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이 여행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연대기적 전체 기록들과 조화를 잘 이룬다(참조 20:3, 6, 7, 15, 16; 21:1, 4, 5, 7, 8, 10, 15). 그러므로 이 절을 이해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모임이 일요일이어서가 아니라 바울이 “떠나고자 하여”(20:7)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며, 누가는 유두고 사건 때문에 이 이야기를 포함시켰고, 이날이 “안식 후 첫날”이었다는 기록은 단순히 여행에 대한 바울의 연대기적 기록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절을 초기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준수에 대한 증거라 평가하는 것에 대해 저명한 교회사학자 아우구스투스 네안더(Augustus Neand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성경절이 일요일 준수에 대하여 전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그 작은 교회가 형제애를 나누는 고별식사로 모였을 것이며, 그 경우 일요일을 특별히 기념할 일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차제에 사도가 마지막 기별을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The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tr. Henry John Rose, vol. 1, 337).
강론할새. 헬라어 디알레고마이(dialegomai). “서로 이야기하다”, “의논하다.” 여기와 9절을 제외하고 전 신약에서 이 동사는 “논쟁하다”, “논하다” 그리고 한번은 “말하다”로 번역되었다. 분명히 이 모임은 설교가 있는 정규 교회 예배가 아니고,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대화하고 의논하기 위한 그리고 교훈을 주기 위한 비정규 모임이었다.
밤중까지. 그들은 야간 고별예배로 모였다. 그러나 교제의 기쁨과 바야흐로 사도가 그들을 떠난다는 사실이, 통상적인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강론을 계속하게 했다. 형제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이 떠나기 전 그들에게 베푸는 비공식 영적 잔치를 전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윗다락. 다락은 고대 동방에서 주로 사교적 혹은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목격자로서 분명하고 상세하게 기록한다.
등불을 많이. “등” 즉 기름으로 채워진 “남포등”(참조 마 25:1, 3 주석)은 분명히 두 가지 이유로 여기 언급되는데 (1) 열기와 연기로 밀폐된 방에서 그로 인한 유두고의 졸음을 설명하기 위해, (2) 그리스도인들의 저녁 모임에서 음란한 방종을 자행(恣行)했다는 비난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Tertullian Apology 8).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등불이 설교자 가까이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유두고. “행운”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벨릭스(Felix), 펠리치아(Felicia), 펠리치스무스(Fellicissmus), 브드나도(Fortunatus), 파우스투스(Faustus), 펠리치타스(Felicitas), 순두게(Syntyche) 등 유사한 뜻을 가진 이름들처럼 명각에 자주 나타나는데 특별히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 가운데서는 보편적이었다.
청년. 헬라어 네아니아스(neanias). 엄격히 말하면 24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자. 그러나 아마 여기서는 좀 더 융통성 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참조 12절 주석).
창. 대부분의 고대 가옥에서 창문은 벽에 난 유일한 열린 공간이었다. 아마도 망가지기 쉬운 격자문이 아니었다면 여기 나타난 대로 사고를 예방할 만한 창살이나 골조도 없었던 것 같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문자적으로 “졸음에 정복당하다.” 분명히 기름 등불의 열기와 연기로 인해 공기가 탁해졌으며 그 젊은이는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삼 층 누. 헬라어 트리스테고스(tristegos). “3층 지붕.” 오늘날로 말하면 “4층”에 해당할 것이다.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만약 열린 창에 격자문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사람으로 가득 찬 방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활짝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땅으로 떨어졌는데, 안뜰에 떨어진 것 같다. 유두고의 회복을 기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죽음이 “혼절한 듯한 상태”로 이해되지 않기 위해서인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의사인 누가의 표현과 12절(“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은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떨어져서 생명이 끊어졌으며 사도의 기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내려가서. 동방의 가옥은 흔히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해 출입했다. 바울의 행동은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의 행동을 상기시킨다. 분명히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떠들지 말라. 문자적으로 “소동을 멈추라”, “걱정을 멈추라.”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올라가. 사도의 침착성과 말은 분명 혼돈 중에 있는 회중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바울은 위층 누로 되돌아갔고 모임은 계속되었다.
떡을 떼어 먹고. “그들은 만찬을 들었다”(사도행적, 391). 참조 행 2:42 주석; 마 26:26~30; 행 2:46; 고전 11:23~30. 이 성찬식은 계획된 행사였지만, 밤중까지 계속된 강론은 아마도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 같다(참조 7절 주석).
날이 새기까지. 그 위도에서 유월절 직후 일출은 아침 5시와 6시 사이였다.
이야기하고. 헬라어 표현상 일상 대화와 구별되는 친밀한 대화를 의미한다.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살아난. 9절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가 실제적인 죽음을 가리키지 않았다면 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의사 누가는 죽은 사람의 생명의 회복에 대한 기적을 이야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이. 헬라어 파이스(pais). 일반적으로 “아이”를 의미하지만 젊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실상, 나이와 상관없이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여기서 “아이”는 젊은이 또는 그보다 약간 나이 든 사람을 의미했을 것이다(참조 9절 주석).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강조를 위해 부정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크게 위로를 얻었더라.”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우리는 앞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의 동료들은(참조 4절) 바울이 드로아에서 도보로 출발하기 전에, 먼저 배로 여행을 시작했다. 이 동료들이 그 저녁 모임에 참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기가…가고자 하여. 즉 자신이 지망하여. 23:24을 제외하고는 바울이 도보나 항해 외에 다른 방법으로 여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바울은 56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는데, 분명히 드로아 시에서 앗소까지 이어진 포장된 로마 가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미둘레네에 가서. 한때 카스트로(Castro)라 불렸던 그 도시는, 당시 레스보스 섬의 수도로 천연적인 위치와 빼어난 건물들로 인해 아름다웠다. 레스보스 섬은 둘레가 약 270킬로미터로 에게 해에 속한 섬 중 가장 크며, 지중해에서는 일곱 번째로 크다.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기오 앞에. 또는 “맞은 편에.” 기오(Chios, Coos) 섬은 레스보스 섬과 사모 섬 사이에 위치해 있다. 미둘레네에서 기오 섬까지는 배로 하루가 걸렸다.
사모. 리디아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섬으로, 기오 섬에서 배로 하룻길이었다.
밀레도. 항구 도시, 초기에 이곳은 그레데에서 온 이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점차 활동적인 이주민의 중심지가 되면서 정치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에베소에서 약 52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바울의 동료들은 앗소를 떠난 지 3일 후 이곳에 도착했다.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즉 배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는 뜻이다.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간을 절약해야 하는 바울은, 에베소에 들림으로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오순절. 참조 2:1 주석. 바울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가기를 왜 그렇게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올라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운집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구제금을 나누어 주는 일에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또는 이전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 절기가 바울에게 특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유월절까지 여행을 마치지 못했으며(20:6), 그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절기 이전에 그곳에 도착하기를 원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사람을…보내. 바울은 그가 많은 고통을 당했고(참조 고전 15:32), 주님을 위하여 좋은 열매를 얻었던 에베소 교회에 아무 연락도 없이 그 지역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밀레도에서 교회의 문제들을 이야기하자고 요청했다.
장로들. 참조 28절; 11:30; 14:23 주석.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말하되. 여기에 바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가장 부드러운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전도설교라기보다는 권면으로, 청중에게 바울 자신의 생애의 희생과 정직을 상기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맡은 책임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경고는 엡 5, 6장, 특별히 6:10~18에서 반복되며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아시아. 참조 2:9 주석.
첫 날부터. 바울의 기록은 에베소 체류 전반에 걸쳐 일관성이 있다.
지금까지. 그가 거기서 일한 모든 시간 동안.
어떻게 행한 것을. 바울은 그의 영적, 사도적 권위의 증거와 하나님의 부르심과 임명에 대한 증명으로, 그들 가운데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들어 호소하고 있다.
너희도 아는 바니. 사실상, 개인적으로 익히 아니. 헬라어 본문에서는 “너희”를 강조하는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그들과 3년을 같이 지냈으며(31절) 에베소 교회의 다음 지도자에게 훈계한 대로(딤후 4:5) 자신의 사역에서 “충분한 증명”을 보였다. 바울과 함께한 그들의 경험에 대한 호소는, 그의 사역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던진 비방과 연관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모든 겸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힌(갈 6:14) 바울은 부르심과 직분에 대해 또는 그것으로 인한 어떤 자만심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육체를 신뢰할 만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빌 3:4~7). 또한 그의 사도로서 겪은 경험과 고통을 자랑할 만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후 11:18~30). 그의 겸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위대함에 의해 그의 작음과 연약함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속했다.
눈물. 예수처럼 바울도 울었다(고후 2:4; 참조 요 11:35). 그는 유대인 형제들이 나라를 상실한 일을 슬퍼했다(롬 9:1~5; 참조 눅 19:41, 42). 그는 그들이 진리의 길에 장애물을 놓는 것을 슬퍼했다. 그는 영혼들이 버려지는 것을 슬퍼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완고함을 슬퍼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 목자는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로 인하여 슬퍼하며, 진리에 대한 그들의 반대에 대해 거룩한 열정이 솟아날 것이다.
간계. 참조 9:24 주석.
시험. 헬라어 페이라스모이(peirasmoi). “시험하는 것들”, “시험들.” 벧전 4:12과 비교하라. 행 19장은 원수들의 반대에서 발생한 역경들이 진술되어 있다.섬긴 것. 헬라어 둘류오(douleuo-). “[노예로서] 섬기다.” 바울은 종종 이 단어와 명사 둘로스(doulos), “종”, “노예”를 그리스도와 관련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는데,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과 의지가 주님께 완전히 속해 있음을 나타낸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그의 주인에게 속했다. 자신의 이익이나 세상의 어떠한 관심도 그가 섬기는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었다.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익한 것. 문자적으로, “함께 오는 것들” 또는 “가치 있는 것들.” 바울과 같이 복음 사역자는 영적으로 영양이 있다면 양떼의 입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것이다.
각 집에서나. 좀 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복음 사역 방법.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사역이 공중 전도를 대신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동반되는 필수적인 것이었다(교회증언, VI, 321,; 사도행적, 250, 296,).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집방문에 대해서는 각 시대의 대쟁투, 612을 참조하라.
꺼림. 헬라어 휘포스텔로(hupostello-). “아래에 두다” 그러므로 “숨기다”, “억압하다.” 이 단어는 일찍이 돛을 감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노력하고 활동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한 가르치고 권고하기를 꺼리지 않았고 진리를 감추지 않았다(참조 27절).
전하여. 헬라어 아낭겔로(anaggello-). “알리다”, “선포하다.” 보통 복음을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데 사용된다.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유대인과 헬라인들. 바울은 항상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 형제들에게 먼저 접근했다(참조 행 13:5, 14; 14:1; 17:1, 2; 18:4; 19:8; 롬 1:16; 2:9, 10; 3:1, 2).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인데 그 이유는 (1) 죄는 먼저 하나님께 범한 것이고 (2) 사람이 용서의 정신을 보인다 해도 죄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는 근거하에 죄의 담당자인 예수 그리스도(고후 5:21; 벧전 2:24)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 이 명사가 파생된 동사의 정의에 대해서는 마 3:2 주석을 참조하라)
믿음.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벧전 1:8)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참조 롬 4:3 주석). 참으로 “믿음으로 좇아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 5:1, 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증거한 것이라. 즉 가르치고 권고하고 더 나은 삶에 도전함으로써 증거한다는 뜻이다. 같은 단어가 딤전 5:21; 딤후 2:14에서 “명하다” 그리고 “명하라”라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강하게 촉구하거나 엄숙히 간청한다는 의미이다.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심령에 매임을 받아. 여기서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환경의 영향으로 압박을 받았거나, 다시 말해 자기의 의지에 이끌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에 매임을 받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23절에 비추어 어떤 이들은 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데, 23절 “성령(Holy Ghost)”에 사용한 “거룩한(Holy)”에 해당하는 단어가 이 절에는 없는 것이 대조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23절의 “성령”(거룩한 영)이라는 단어가 이 절의 “심령”(spirit)과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로 기울어진다. 성령이, 바울이 취하고자 하는 행동을 막는 16:6, 7 주석을 참조하라. 여기의 동사(여기에서처럼 위치로 인해 강조되는)는 일반적으로 줄이나 족쇄로 억제받는 경우에 사용되거나(마 13:30; 21:2), 상징적으로 강한 의무의 압력(롬 7:2) 또는 강한 명령이나 충동(참조 몬 13절의 명사)에 사용된다. 바울은 의무에 대하여 강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계기가 더해졌을 때 “매임”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의무는 행해져야 했으며 결과는 하나님께 있었다.
무슨 일을 만날는지.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에 그를 기다리는 위험이 있음을 알았다(행 20:23; 참조 롬 15:30, 31). 그를 위협하는 위험의 성격이나 심각성이나 결과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길은 하나님께 맡겨져 있었으며 어떤 위험이 있든지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는 곳으로 갈 것이었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내게 증거하여. 이것이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것인지(참조 16:6, 7 주석) 혹은 21:4, 11에서처럼 선지자의 예언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마음에 계속해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에 의한 것인지 언급이 없다.
결박과 환난. 바울은 재난이 그에게 닥쳐올 것에 대한 강한 확신은 있었으나 세부적인 것은 알지 못했다.
나를 기다린다. 또는 나를 위해 남아 있다.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달려갈 길. 헬라어 드로모스(dromos). “경주”, “경주로”, “인생살이” 또는 “임기”, “경력.” 자기 앞에 펼쳐진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바울은 스스로를 산 제사(롬 12:1)로 드리고 있었다. 고별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그러한 길을 마쳤음을(딤후 4:7) 주장했다. 그렇게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그들 앞에 당한 “경주를 인내[참음]로써 경주”하라고(히 12:1) 권고했다. 바울은 그렇게 삶을 경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인한 소홀함이나 실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생애를 깨끗한 양심으로 마치기를 원했다.
예수께. 바울 자신이 복음사역에 대한 소명의 실체를 강하게 인식한 것은 그의 독특한 회심의 결과였는데, 그때 그리스도가 친히 그에게 사명을 위탁했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가 해야 할 일이 전달되었다(9:15~17; 22:14, 15; 26:16~18). 다른 사람들은 그의 소명을 의심했지만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고후 3:1~6; 갈 1:10~24).
사명.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봉사.”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deaconate”(집사)가 파생되었다. 여기서는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봉사를 의미한다. 충성스런 봉사가 바울의 주된 원칙이었고 그는 그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동일한 헌신을 권고했다(딤후 4:5).
복음. 참조 막 1:1 주석. 복음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그런 증거는 오직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죄인임을 아는 자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자들에 의하여 입증될 수 있다.
증거하는 일. 즉 “철저하게 입증하는 것.”
나의 생명을…여기지.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생명을 전혀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즉 바울은 자신에게 속한 문제들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참조 빌 3:7, 8). 이는 주께서 성육신으로 자신을 낮추었을 때의 태도였다(빌 2:7, 8).
조금도 귀한 것으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24절 마지막 부분에 대한 다음의 독법을 지지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가치 있게 생각하거나 나에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귀한 것. 내 자신의 소망에 가치 있는 것. 어떤 개인적인 선택이나 소망도 바울을 꾸준한 사역의 특권에서 떼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종이었다(롬 1:1). 어떤 것도 그가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혹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주의 정신이었고 초기 그리스도인의 정신이었다.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하나님[의]. 이 단어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제시할 수도 있다.
나라. 참조 행 1:6; 마 4:17 주석. 바울이 소망의 중심으로 삼았고, 로마 황제들의 절대 권력 앞에서 개인적인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포한 왕국이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여기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여지없이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과 밀레도와 에베소의 교회들이 그를 다시 보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위험들을(행 20:22, 23; 롬 15:30, 31)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으며, 로마와 스페인을 방문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행 19:21; 롬 15:23~28)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1차와 2차 로마 투옥 사이(빌 1:25~27; 몬 22절)에 밀레도와 에베소는 아니더라도 마게도냐와 아시아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때 이것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즉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여 엄숙히 선포하노니.
모든 사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전도했다. 그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무도 그가 태만했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여기 복음 사역자에 대한 감동적이며 도전적인 모본이 나타나 있다.
피. 분명히 겔 33:6에 나오는 파수꾼의 책임에 대해 인용한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의 의무를 다했다. 그의 생각은 명백하게 그가 고린도에서 유대인 회당을 떠날 때 말했던 것(참조 18:6)의 반복이다. 그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들의 피, 즉 그들이 구원의 복음 기별을 거절할 경우 그 결과로, 사망이 그들 위에 임할 것이다(행 18:6; 참조 마 27:25).
내가 깨끗하니. 헬라어 카싸로스(katharos). “깨끗한.” 바울은 여기서 최종적인 그리스도인 품성(참조 빌 3:12~14)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그의 의무를 실행하는 데 깨끗함을 주장한다.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꺼리지 않고. 참조 20절 주석. 인기 없는 진리로 인해 빚어지는 두려움이나 인기에 대한 쓸모없는 갈망이 바울의 봉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진리를 부끄러워하거나 위장하는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뜻. 즉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바울은 이 계획을 스데반의 설교(참조 7:54~58)를 통해 최초로 듣고 그리스도에게 친히 들은 것 같다(행 9:4~6; 갈 1:15~20). 그는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망하신 목적, 그의 부활과 승천, 대제사장으로서의 하늘 성소 사업 그리고 중보 사업의 마지막에 그의 백성들을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리라는 약속의 목적을 제시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명확히 제시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양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고전 12:12~27; 엡 4:12), 하나님의 성전이요(고전 3:16, 17), 주의 신부다(엡 5:23~32). 하지만 더 친숙하게는 하나님의 양떼이다(요 10:11~16; 참조 벧전 5:4; 히 13:20). 그러므로 그들은 쫓겨나지 않고(요 10:26~30) 인도를 받아야 하며, 착취되지 않고 공급받아야 한다(시 23; 요 10:7~14; 벧전 5:2).
파스토르(pastor, 목사)는 “내가 먹이다”라는 동사 파스코(pasco-)에서 온 라틴어 단어이다. 성경에 아주 선명하게 제시된, 호소하는 듯한 선한 목자는 복음 사역자의 모본이다. “온”은 모든 양떼와 각 양을 의미하는데,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약 2:1~9).
삼가라. 바울의 떠나감과 그가 그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의 관점에서 볼 때, 장로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의 깊게 자신들과(참조 30절) 양떼를 살펴보아야 했다. 개인적인 행위, 교리의 일관성과 견고성을 지키는 일, 심지어 외부에서 오는 위험들(참조 고후 11:23~28)에서 묘한 유혹과 위험이 종교 지도자들을 에워쌌다. 이러한 일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증가할 것이다.
성령. 신성의 셋째 위격(位格)이다. 에베소 장로들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보는 앞에서(참조 14:23 주석) 위임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이 선출 또는 임명받는 과정과 성령 충만한 이들(참조 6:3)을 통해 성령에 의하여 선택된 자들로 간주했다. 여기서 다시 사도 시대에 하나님의 영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역사했다는 확실한 믿음이 드러난다(참조 2:2~4; 4:31; 5:3, 4; 6:3, 5; 8:39; 10:45; 13:2; 15:28; 16:6, 7).
감독자. 헬라어 에피스코포이(episkopoi). 문자적으로 “돌보는 자들”이지만 “감독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절과 비교해 보면 바울 당시 “장로들”(프레스뷔테로이[presbuteroi])과 “감독자들”(에피스코포이)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참조 행 11:30 주석; 행 1:20; 딛 1:5~7). 장로로 알려진 이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감독자” 역할을 했다.
하나님…교회.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하나님의 교회”, “주의 교회”, “하나님과 주의 교회”라는 독법으로 엇갈리게 나타나는데, 후자는 전자의 두 독법이 결합된 특징을 나타낸다. 바울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언급한다(롬 9:5; 딛 2:13; 참조 골 1:15~20; 2:9; 빌 2:5~11). 이 본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 번역의 문제들(Problems in Bible Translation), 205~208을 참조하라.
자기 피로. 헬라어 원문이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아들의] 피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번역은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독법에 적합한 반면, 다른 번역은 신성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거나(다른 참고 문헌들이 명확히 하는 개념) “주의 교회”라는 독법에 적합하다. “피는 생명”이다(신 12:23). 피가 흘려지면 생명은 끊어진다. 희생동물의 피가 땅에 흘려지고 죽는 것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갈바리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버지와의 분리로(마 27:46; 요 19:34, 35) 그의 심장이 터져 물과 함께 피가 나올 때 “구원하는 피”(고전 1:17, 18), 피로 사신 일(행 20:28) 그리고 깨끗하게 하는 피(요일 1:7)로 일컬어진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능케 한 속죄제물로서 죽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특별한 헌신과 관심으로 목사들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사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구성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자신의 피로 샀다(벧전 1:18, 19). 죄를 알지도 못한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었다(고후 5: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 하늘에 앉히셨다(엡 2:1~6).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20; 7:23; 참조 벧후 2:1).
치게. 헬라어 포이마이노(poimaino-). “양떼를 돌보다”, “목자가 되다.” 양떼를 돌보고 좋은 목초지로 데려가는 것은 목자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목초지에서 그의 양떼를 먹여야 한다. 이는 베드로가 그의 주님께 세 번씩이나 권고받은 일이었고(요 21:15~17), 베드로가 후에 자기로 인해 회심한 자들에게 넘겨준 사명이었다(벧전 5:2). 다섯 가지 목회 의무가 제시되는데 (1)양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끌고(고전 2:4~7; 엡 3:8~11) 복음의 능력을 경험케 하고(요 3:11; 고후 4:13)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제시하므로(딤후 2:15) 그들의 영적 상태를 신중하게 향상시킨다. (2)양떼를 위해 기도한다(요 17:9~17; 롬 1:9; 엡 1:16; 살전 1:2; 딤후 1:3). (3)깊은 영적 의미 가운데 교회의 의식들, 즉 침례예식(롬 6:3~6), 세족예식(요 13:3~17), 성만찬예식(마 26:26~30; 고전 11:23~30) 등을 집례한다. (4)교회 내에서 복음의 진리를 고수한다(유 3절; 딤전 1:3, 4; 4:6, 7, 16; 딤후 1:14; 2:25; 3:14~17). (5)회심자를 찾아 양 무리에 더한다(행 2:47; 11:24; 참조 눅 14:23).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떠난 후에. 바울은 그가 함께 세운 교회들의 후견인으로 일해 왔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후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신실했으나(삿 2:7) 후에는 배교했다. 바울이 떠남으로 그들에게 위험이 많아질 것이다.
흉악한 이리. 여기서 바울은 선한 목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유를 예시한다. 삯꾼은 늑대와 맞서지 않는다(요 10:12). 그러나 양떼의 신실한 목자는 연약한 양을 보호하기 위해 확고히 선다. 그런 공격들의 날카로운 위험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그 일에 대하여 경고했다(마 7:15).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이 교회라는 양 우리 밖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예견한 늑대로부터 양떼를 보호해야 한다. 바울이 이 장로들에게 한 경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큰 배교가 있을(살후 2:1~12) 것이라는 편지를 썼으며, 후에는 디모데에게 같은 종류의 위험이 올 것에 대해 경계하라는 편지를 썼다(딤전 4:1~3; 딤후 3:1~15). 1세기 사도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사도 요한은 당시 널리 퍼진 위험으로서 배교를 목격했고(요일 4:1),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놀랄 만한 타락과 이교화에 대해 그가 받은 이상들을 언급한다(계 2:12~24; 6:3~11; 17; 18).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너희 중에서도. 교회 외부로부터 양떼를 공격할 앞 절에 나타난 “이리”는, AD 400년경 일반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를 급진적으로 변질시킨 유대화주의자들과 이교의 영향력을 대표한다. 이제 바울은 데마(딤후 4:10), 후메내오, 빌레도(딤후 2:17)와 같은 내부에서 오는 배교의 영향력에 대해 경고하는데, 그들의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 같으며”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끌어. 헬라어 아포스파오(apospao-). “빼내다”, “억지로 떼어 놓다.” 스스로 떨어져 나간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끌어 내어 그들의 배교에 참예케 하고자 할 것이다.
내가 아노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의해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빛을 통하여 안다는 뜻이다.
불안정한 이론들을 제지하라(딤후 4:3, 4; 벧후 2:1)―사람들이 일어나 어그러진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벌써 활동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해 주신 일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거룩한 진리를 보통 사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쟁점이 되는 문제들은 진리가 아니라 자만심이 강한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해 낸 것들을 표준이라고 내세우지만 그것들은 전연 표준이 될 수 없는 조작품들이다. 그래서 그것은 참된 표준이 나타나게 될 때 아무 가치가 없는 인조 표준으로 치부될 것이다. 온갖 것들이 건전한 교리에 도입되고 섞일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명민한 영적 식별력과 하늘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물과 속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속된 것들이 도입된 것은 믿음과 건전한 판단력에 혼동을 주고 크고 웅장하며 이 시대를 위한 시금석이 되는 진리를 흠잡기 위함이다.…
사람들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이 마지막 시대보다 진리가 더욱 왜소해지고, 더 많은 흠을 잡힌 때는 일찌기 한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질적인 이단들을 대량 가지고 들어 와서는 그것들을 백성들을 위한 성경 말씀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새롭고 이상한 것들에 끌리고, 경험이 미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조작해 놓은 생각들의 성질을 잘 식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큰 결과를 가져올 어떤 것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다 묶어 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낮은 경건의 표준을 얼마나 꾸짖고 있는가! 독창적인 어떤 것을 내어 놓고자 하는 사람들은 새롭고 이상한 것들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없이 이 불안정한 이론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생명과 사망이 좌우되는 문제로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 곧 견고한 진리의 말씀을 갖고 있다. 이 모든 억측과 공론들은 그것이 자라나고 두드러지게 드러났을 때보다는 그 초기에 보다 더 쉽게 억제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분의 계시된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곧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를 과시하고 무엇인가 놀라운 일을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다 더 쉽게 건전한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다(편지 136a, 1898).
진리의 반역자들이 가장 악질적인 박해자들이 됨(시 119:126, 127; 딤전 4:1)―소위 말하는 기독교가 대부분 그 순수성과 진실성을 잃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기독교도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인내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효화 되고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시험하게 될 불같은 시련으로 교회가 체질을 당하는 날이 올 때 순수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미혹케 하는 영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진리를 대적하는 반역자들이 될 것이요, 거룩한 신탁을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핍박하는 가장 악질적인 박해자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미혹케 하는 귀신의 영들을 좇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와 살―그의 성령의 말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겨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점점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윗의 말과 같이 그들도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만물의 찌끼같이 여길 때 그들은 일어나 그 말씀을 옹호할 것이다. 편의와 쾌락과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시련의 날에 서지 못할 것이다(리뷰 1897. 6. 8).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일깨어. 바울이 틀림없이 인식하고 있었을 주의 권고(마 24:42; 25:13)를 의미심장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이 방금 “감독자”(참조 20:28 주석)라고 부른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설교하는 일은 매우 적절했다. 바울은 교회를 지도하고 목양하는 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경계를 강조한다.
삼 년. 바울은 삼 년 동안 에베소 교회 앞에 경계의 모본을 보여 주었다. 사도행전의 역사에는 회당에서 설교한 3개월(19:8), 두란노 서원에서의 2년(10절), 데메드리오의 폭동 바로 전후의 분명치 않은 기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과 잘 알려진 유대인의 포함식 계산법(참조 제2권, 83, 84)은 “삼 년”이라는 바울의 일반적인 언급에 충분한 설명이 된다. 참조 61쪽.
눈물로. “감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뜻 그대로 바울의 깊은 동정심은 그의 기록 많은 부분에서 밝혀진다(참조 행 20:19; 고후 11:29). 바울은 목회적 능률과 열심에 대해 강도 높게 말하고 있으나 장로들 중 누구도 그의 언급을 논박하지 않는다.
훈계하던. 헬라어 누쎄테오(noutheteo-). “생각하게 하다”, “권하다”, “권고하다.” 바울은 그들 앞에 명백하게 그들의 의무와 위험을 제시했다.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은혜의 말씀.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의미하는 형용사구로 볼 수도 있다. 유사한 표현은 “그의 능력의 말씀”(히 1:3) 또는 우주를 지탱하는 힘이 있는 “그의 능력 있는 말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은혜의 말씀”은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유 24절). “은혜”(카리스[charis])라는 단어는 고후 12:9에서와 같이 종종 “능력”(뒤나미스[dunamis])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말씀”(로고스[logos])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격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가 말할 때 그의 말씀에는 은혜뿐만 아니라 능력이 충만하다(참조 약 1:21; 히 4:12; 렘 23:29). 카리스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롬 3:24 주석을 참조하라.
부탁하노니. 헬라어 파라티쎄미(paratithe-mi). “곁에 두다”, “위임하다.” 여기서는 “위탁하다”(벧전 4:19)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믿음의 “의탁” 또는 “맡겨 놓은 것”(파라쎄케[parathe-ke-])이 된, 그들이 받은 진리(딤후 1:14)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교사들(딤후 1:14)이 있었다.
너희를…세우사. 하나님은 위대한 건축가이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고전 3:11). 영적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은사들이 이 “세우”는 일과 짓는 일(엡 2:20; 4:11~13)을 위해 주어진다. 그 결과 교회 즉 성도들의 모임이 세워지고(벧전 2:5, 9, 10; 히 12:22~24; 엡 5:27), 그를 믿는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에 참예하게 된다(빌 3:8~14; 엡 3:14~21; 벧후 1:3~8).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함은 최후의 기업을 얻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도, 즉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롬 1:7; 고전 1:2; 고후 1:1). 이 표현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 “성화는 평생의 일이다”(실물교훈, 65). 그러나 수명이 언제 끝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화는 성도들의 경험 가운데 시급하고 방해받지 않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 성화는 친히 하나님에 의해(출 31:13; 겔 37:28; 살전 5:23; 유 1절), 그분의 뜻대로(히 10:10),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2; 6:11; 엡 5:26; 히 13:12), 성령에 의해(고전 6:11; 롬 15:1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요 17:17) 이루어진다.
기업.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 분배를 가리킨다(수 14~19장).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부족으로 그들의 땅을 성공적으로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삿 1장; 2장; 히 3장; 4장). 하나님의 자녀의 기업은 분명히 히브리인에게 할당된 소유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히 주장되어야 한다. 에베소인의 기업에 대한 바울의 사상 전개를 비교하라.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받은 구원의 서약이 되는 “우리 기업에 보증”(엡 1:14)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의 영적 소유로서의 “성도 안에서 그 기업”(엡 1:18)과 그리스도의 재림시 들어갈(마 25:34; 눅 12:32),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기업”(엡 5:5)이다. 재림시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늘에 들어가서 1,000년 동안 통치할 것이고(살전 4:16, 17; 계 20:4), 그 후 새로 창조된 땅에서 살 것이다(계 21:1~4).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내가…탐하지. 사무엘이 그의 백성들에게 한 호소와 비교하라(삼상 12:3~5). 바울과 사무엘 둘 다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변명을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직함을 잃고 타락했다(삼상 8:3). 바울은 “탐심의 탈”(살전 2:5; 참조 고후 7:2; 12:17, 18)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바울은 그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으나(고전 9:13, 14) 탐욕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고전 9:12, 15)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의 두드러진 영향력으로(참조 갈 4:13~15) 바울은 자신의 부를 위하여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빌 4:12).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빌 4:11) 배웠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서 어떤 “이”(利)도 취하지 않았다(고후 12:17). 그는 빌립보인들에게서 어떤 “선물”도 바라지 않았다(빌 4:17). 바울은 지원을 바라기보다 그의 손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 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노력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부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는 비난에 대한 변호로 이 사실을 말한다.
은이나 금이나 의복. 동방에서는 흔히 이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유하다고 간주했다. 나아만(왕하 5:5)과 다른 이들(창 24:53; 45:22; 왕하 7:8; 참조 마 6:19; 약 5:2, 3)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너희 아는 바에. 에베소 교인과 바울의 교제가 그처럼 친밀하고 지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이 손으로…당하여. 자급하는 바울의 습관을 가리키며, 탐욕의 비난에 대한 부분적인 변호로 소개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18:1~3). 그는 이전에 에베소에서 친히 손으로 일했고(고전 4:12) 데살로니가에서도 일했다(살전 2:9; 살후 3:8). 이 절은 그가 에베소에서도 이와 같이 일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사람들과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일했다. “자주 나는 병”이 있었던 디모데(딤전 5:23)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아직 목사들을 부양하는 방법을 세우지 못한 때에 복음을 전하는 동안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을 조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쓰는 것. 헬라어 크레이아이(chreiai). “필요한 것들”, “필수품.”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부족한 필요가 채워졌을 때 만족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사치스러운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범사. 에베소 신자들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교리뿐만 아니라 자아 신뢰,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인의 자선 등과 같은 실제적 경건 문제를 다루었다.
보였노니. 헬라어 휘포데이크뉘미(hupodeiknumi). “[모본으로] 보여 주다.”
약한 사람들. “아픈 자들”, “고통받는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롬 14:1)에게 적용될 수도 있지만, 바울이 방금 여기서 육체노동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행 20:34, 35) 여기서는 “약한” 사람이 문자적으로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 절의 뒷 부분도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사도 교회 신자들은 그 후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 이러한 책임에 잘 준비되어 있었다(참조 6:1, 2 주석).
돕고. 헬라어 안틸람바노(antilambano-). “받는 것의 반대”라는 뜻으로 “도와주다”라는 개념의 생생한 표현. 이 권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육체적 노동에서 기인한다.
친히 말씀하신바. 헬라어 본문에서 강조하는 표현이다.
복이 있다. 축복에는 “주고받는” 양면이 있다. 필요가 영적인 것이든 육신적인 것이든 복을 받은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주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다. 나눔에는 기쁨이 있다. 주는 자는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본성의 좋은 부분을 활용하게 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마 25:34~40). 하나님은 무한한 공급자라는 점에서(창 22:8~13; 시 23장; , 34), 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위이다.
기억하여야. 바울은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남아 있지 않았을 주의 말씀을 인용하여 장로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권고를 보강한다. 이 인용은 영감받은 사도적 권위를 부여받은 바울의 입술에서 나왔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리는 전승에 나타난 다양한 진술은 사도적 권위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예수로부터 들은 이 말을 바울이 전해들은 것인지, 예수가 바울에게 직접 나타났을 때 친히 들은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그 말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가 말하고 행한 “많은 것들”(요 21:25) 중 하나이다.
만능 목사(행 18:1-3; 살전 2:9; 살후 3:8)―바울이 그 사람들 앞에 그의 손을 펴 보였을 때 그의 거치른 손이 증언하는 바는 그가 어떤 사람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생활하였다는 것이었다. 거치른 그의 손이 목회에 종사한 바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분별있고, 지적이고, 웅변적인 그의 감동적인 호소력을 감소시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사도행전 20장 17-35절에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그리스도인 목회자들의 인격을 개괄해 놓았다. 그는 만능 목사였다. 모든 목사들이 모든 점에서 바울이 행한 것같이 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모든 목사들에게 말하는 것은, 바울은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인 신자였다는 점이다. 그의 모본이 보여주는 바는 기계적인 노동이 반드시 사람의 감화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명예로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거칠게 하거나 조잡하게 만들거나 무례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청년 지도자 1901. 1. 31).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들으시는 거룩한 왕 앞에서 취하는 겸손의 표로 적합한, 특별히 엄숙한 순간에 취하는(대하 6:13; 왕상 8:54; 눅 22:41) 기도의 전형적인 자세를 말한다(시 95:6; 단 6:10). 바울이 두로의 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도 무릎을 꿇은 것으로 묘사된다(행 21:5; 참조 엡 3:14).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누가는 바울의 모든 공중 연설과 심지어 대화까지도 요약했으나 에베소의 장로들과 한 기도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 주제는 엡 3:14~21에 시사된다. 동료들과 회심자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부담이 행 28:8; 롬 1:9, 10; 엡 1:16~19; 빌 1:4, 5; 살전 1:2; 딤후 1:3; 몬 4~6절에 나타난다.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 크게 울며.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이 크게 울었다.” 그들의 높은 존경심과 따뜻한 호의에 대해 이보다 더 감동적인 증거가 주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바울의 목을 안고. 동방에서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는 형태(참조 창 33:4; 45:14; 46:29; 눅 15:20). 바울의 친구들은 그를 사랑했다.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참조 25절 주석.
근심하고. 또는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그를 전송하니라. 문자적으로 “그를 보내었다.” 같은 헬라어 단어가 15:3과 21:5에서 “전송”이라고 번역되었다. 에베소 장로들은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와 머물러 있었고, 그가 타고 갈 배까지 함께 갔다. 참조 15:3 주석.
(참고자료; 사도 바울의 서방선교 요약)
오직 성령 안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 복음(1:8) | |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파(1:1-8:1a) | |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복음 전파(8:1b-12:25) | |
땅끝까지 전파된 복음(13:1-28:31) | |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13:1-15:35) |
바울의 복음 전파(1)/ 비시디아 안디옥(13장) |
바울의 복음 전파(2)/ 이고니온, 루스드라(14장) | |
예루살렘 공회(15:1-35)/AD 49 |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15:36-18:22) |
바울의 복음 전파(3)/ 빌립보(15:36-16:40) |
바울의 복음 전파(4)/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17장) | |
바울의 복음 전파(5)/ 고린도(18:1-22) | |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18:23-21:16) |
바울의 복음 전파(6)/ 에베소(18:23-19:41) |
바울의 복음 전파(7)/ 마게도냐, 밀레도(20:1-21:16)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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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증 (간증 포함) (21:17-26:32) |
유대인들 앞에서(21:17-22:29) |
제사장들과 공회 앞에서(22:30-23:35) | |
벨릭스 각하 앞에서(24장) | |
베스도 총독 앞에서(25:1-22) | |
아그랍바 왕 앞에서(25:23-26:32) | |
로마 압송과 투옥 (21:17-28:31) |
로마로 항해 중 파선과 구조(27:1-28:10) |
로마 도착과 감옥에서 복음 전파(28: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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