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21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26. 17:13
 
사도행전 21장 주석(요약자; 에덴지기)
 

 
 
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저희를 작별하고. 헬라어 본문에 사용된 동사는 힘겹게 작별함을 시사하는데,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서 떼어 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로. 분명히 유리한 바람과 조수로 인하여.
고스. 헬라 에게 해의 관문, 소아시아 해안의 작은 섬이다. 고대에 이 섬에는 의료학교와 함께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다. 이곳은 술과 비단 생산, 직물로 유명했다.
이튿날. 누가는 확실히 항해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에 관련된 날짜들을 기록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참조 20:6, 7, 15).
로도. 소아시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 유명한 섬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유명해졌다. 고대에는 이 도시를 아스테리아(Asteria, “별들의 지역”이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로도(또는 로도스 또는 로데스)라는 이름은 이 섬에 자라고 있던 많은 장미 때문에 붙여졌다. 조선(造船)에 유용한 이 섬의 목재는 주민들이 강력한 해군을 창설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해운 교통의 요로이자 상업적,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에는 큰 태양신전이 있었으며, 주조화폐에는 태양신 아폴로의 두상이 새겨져 있었다. 높이가 30미터 이상인 태양신 헬리오스의 거대한 청동상은 로도의 거상(巨像)으로 알려졌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렸다. BC 280년경 카레스(Chares)가 건축한 이 거상은 BC 224년경 지진으로 무너졌으며, 거의 900년 동안이나 넘어진 채로 방치되었다. AD 7세기에 사라센 정복자들에 의하여 한 유대인에게 팔렸는데, 이 청동을 조각 내어 운반하는 데 낙타 900마리 이상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바다라. “그리고 무라”가 추가되는 독법을 지지하는 몇몇 본문상의 증거(참조 20)가 있는데, 로마로 가는 바울의 항해(27:5)에서 환승(換乘)하는 과정에 의한 것 같다. 속주 루기야의 바다라 해안에 위치한 도시였으며 아폴로 신 숭배로 유명했다. 크산토스(Xanthus) 강 어귀에 있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 바다라의 외항이었다. 여기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연안 연락선에서 베니게로 향하는 장거리 배로 옮겨 탔다.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베니게. 팔레스타인 북쪽의 해안 지역, 예수께서 봉사할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베니게(Phoenicia)의 주요 도시는 두로와 시돈이었다.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구브로. 참조 13:4~6 주석.
수리아. 팔레스타인 북쪽, 유브라데 강 서쪽에 위치한 고대 지역. 누가는 베니게의 두로를 넓은 의미의 수리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두로. 베니게의 매우 오래된 항구로, 바다라에서 항해로 약 닷새가 걸린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 견고한 요새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9)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연관되어 유명했다(왕상 7:13~45; 대하 2:11~16). 이 도시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위되었었고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되었다.
짐을 풀려.  “짐을 내리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자들을 찾아. 우연히 거기 있었던 제자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두로인 그리스도인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곳에 교회가 수 년간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참조 11:19; 15:3), 이것이 두로에 있는 교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이레.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갈망했지만(20:16),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두로 교회의 간청에 의해 거기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성령의 감동으로. 결코 인간의 “영”을 뜻할 수 없으며, 사도행전에 현저히 나타나는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한다(참조 2:2~4; 5:3; 8:39; 10:44, 45; 13:2; 15:28; 16:6, 7).
들어가지 말라. 이 표현은 분명히,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던 것처럼(16:6, 7)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여행을 성령께서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직접 금지한 것을 바울이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히려 조금 나중에 가이사랴에서 아가보에 의해 더욱 명백하게 주어진 것처럼, 예고로 이해해야 한다(21:10, 11).
하더라. 즉 “계속해서 말하다.” 이런 예언적 경고들은 분명히 성령의 은사를 가진 자들에 의해 안식일에 또는 두로 교회의 다른 모임에서 주어졌을 것이다(참조 갈 6:1).
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제임스왕역」에는 “accomplished thoses days[저 여러 날을 만료한 후]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4절의 “이레”를 말한다. 「제임스왕역」의 여기서 “만료한”으로 번역되고 딤후 3:17에서는 “furnished(설비된, 「개역한글판」에는 “온전케 된”으로, 「개정표준역」에는 “equipped[준비를 갖춘]으로 되어 있음)로 번역된 이 헬라어 동사의 일차적인 의미는 “항해 준비 곧 배의 장비를 갖추다”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두로에서 항해 준비를 위해 배가 이레 동안 머물렀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여기서처럼 시간을 표현할 때는 “마친 후” 또는 “지난 후”가 더 좋은 번역일 것이다.
떠나갈새. 문자적으로 “떠나서 우리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저희가…전송하거늘. 부인들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두로의 모든 교회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마을에서 나와 해안까지 전송했다(참조 15:3; 20:38).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참조 20:36 주석.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서로 작별한 후. 문자적으로 “우리들끼리 인사하고.” 즉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집으로. 헬라어 에이스 타 이디아(eis ta idia). “자신의 [것으로]” 즉 그들 자신의 집으로(참조 요 1:11 주석).
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수로. 헬라어 플로오스(ploos). “항해.” 여기서는 두로에서 시작한 항해 혹은 마게도냐에서 시작한 전() 항해를 말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는 돌레마이에서 예루살렘까지 남은 여행을 육로로 마친 것 같다.
돌레마이. 헬라와 로마 통치자들이 고대에 악고( 1:31)로 알려진 이 도시에 붙인 이름이다. 그 후 십자군에 의해 성() 쟝 다크르(St. Jean dAcre) 혹은 간단히 아크르(Acre)라고 명명되었다. 구약 시대에 이곳은 중요한 성읍이었으나,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를 건축함으로 이를 능가하게 되었다.
형제들. 돌레마이에도 교회가 있었다. 이 도시가 해안 도시들과 연결된 큰 도로에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죽음에 따른 박해 동안 흩어진 초기 신자들이 이 도시를 방문하고 회심자들을 얻었다(참조 11:19).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가이사랴에. 참조 10:1 주석. 여행은 육로로 이어진 것으로(참조 7절 주석) 추측된다. 당시에 돌레마이와 가이사랴 사이에는 훌륭한 도로가 있었다. 바울이 육로 여행을 선호한 것에 관해서는 20:13을 참조하라.
일곱 집사 중 하나. 6장에서 임명된 일곱 집사는 여전히 독특한 무리로 보인다. 누가가 조직적인 의미에서 말했든지 기념적인 의미에서 말했든지 간에, 교회가 그때 이후 집사제도를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전도자 빌립. 빌립은 원래 “공궤를 일삼는” 자들 즉 집사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집사들의 목록에서 스데반 다음에 나온다(6:5). 빌립에게 이 공궤하는 일은 점차 사라지고 “전도자”의 일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다(참조 8:5~13, 26~40). 이 명칭은 직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성령으로부터 이러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결과로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해야 한다(참조 행 13:1 주석; 4:11). 이 은사에 대한 중요성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딤후 4:5)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불일 듯 하게 하”(딤후 1:6)라고 권고한 데 나타난다.
전도자로서 빌립의 활동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했던(8:40) 가이사랴 지경을 넘어갔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 후에 따른 박해 동안 외국으로 흩어진 사람들과 함께 팔레스타인과 베니게의 해안을 오르내리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11:19). 아마도 이 일로 빌립과 누가가 처음으로 만났을 것이고 또한 빌립과 바울이 처음으로 만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유하니라. 빌립의 거주지는 분명히 가이사랴였다. 초기교회 역사가인 누가는 빌립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교회의 상태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딸 넷. 이 여인들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참조 행 13:1 주석; 고전 14:1, 3, 4; 2:20; 4:11). “예언하다”라는 동사는 “미리 말하다”(참조 창 20:7; 11:9 주석), 즉 하나님을 위해 미리 말한다는 의미이다. 선지자는 사건들을 미리 말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가장 사모할 만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여인들에 관한 예가 다수 제시되어 있다(고전 14:1).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선지자였고( 15:20), 드보라도 선지자였는데, 이 여인의 영감에 의한 도움으로 바락은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했다( 4:4). 이사야의 부인도 선지자였고( 8:3), 유다 왕 요시야의 개혁 때 제사장 힐기야(왕하 22:14; 대하 34:22)를 도운 훌다도 선지자였다. 선지자 안나는 아기 주님께 경배했다( 2:36~38). 거짓 여 선지자들도 언급된다( 6:14; 2:20). 요엘은 마지막 때 “여종”에게 예언의 은사를 부어 주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2:28, 29).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여러 날. “더 많은 날.” 즉 처음 계획한 것보다 오래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보. 의심할 여지없이 흉년을 예언했던 아가보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참조 11:28). 흔치 않은 이름과 특별한 은사가 함께 언급된 점으로 보아 이들이 각각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유대. 가이사랴를 포함한 로마 도() 유대가 아니라, 제한 의미에서 이전의 유대 지역을 말한다.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 아마포, 모직, 가죽으로 만든 띠로, 동방의 겉옷의 느슨한 부분들을 단단히 잡아매 허리에 묶는 것인데 특히 일을 하거나 걸어갈 때 그렇게 한다. 이것은 돈, 서판(書板), 철필 등을 휴대할 수 있을 정도의 주머니 만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잡아매고. 예언을 제시하기 위한 극적인 방법 중 하나로, 하나님의 지시 아래 이사야( 20), 예레미야(remiah/13/1e; 18:1~10; 19:1~3; 27:2, 3; 28), 에스겔( 4:1~13; 5:1~4) 등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성령. 사도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가운데 성령의 직접적, 인격적, 극적 임재를 의식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실제였던 것처럼 성령의 임재도 그들에게 실제였다. 16:7; 2:2~4; 5:3; 13:2과 비교하라.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것은 이루어졌다. 참조 33; 24.
이방인. 아가보의 예언이 이루어져 바울이 로마인들의 손에 넘어갈 당시 로마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팔레스타인의 군권과 민권을 다 쥐고 있었다. 바울은 경고에 위축되지 않았고 위험에 단념하지도 않았다.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사람들. 누가와 가아사랴 교회를 포함하여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예언을 들었는데, 이는 안식일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예언되었던 것 같다.
권하니. 즉 “계속해서 간청하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어찌하여. 여기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슬픔으로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기보다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야 할 그의 사명에 대한 결심을 약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름을 위하여. 참조 빌 3:7, 8. 사도들과 그들의 동료들은 이름을 활용했다. 참조 3:16 주석; 4:12; 5:41.
죽을 것도. 진실한 순교자 정신을 나타낸다.
각오하였노라. 헬라어 본문에서 대명사 “나”가 강조되어 있다. 이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고통의 대가를 지불할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가리킨다(참조 행 20:24; 예수의 태도 [ 9:51]).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교회는 어떠한 호소도 소용없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뜻은, 무서운 위험이 있는데도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의 결심 안에서 분명해졌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외부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면의 평화를 가져온다. 22:42과 비교하라.
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행장을 준비하여“채비를 하여”, “짐을 챙겨.
올라갈새. 즉 “올라가기 시작했다” 또는 “올라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을 계속했다는 뜻이다.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나손을 데리고 가니. 오히려 “[우리를] 나손에게로 데리고 가다”라는 의미이다. 알려진 것이 전혀 없는 이 초기(“오래된”이라기보다는) 제자 나손은 구브로를 떠나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의 집을 마련했다. 이 이름은 헬라인 중에 흔했으며 그는 초기의 헬라파 회심자였을 것이다.
유하려 함이라. 이 절은 가이사랴 성도 중 몇 사람이, 바울이 만나본 적이 없는 초기의 제자이며 바울과 동료에게 집을 제공할 그들의 친구 나손을 소개하기 위하여 바울과 그의 동료들과 예루살렘까지( 102킬로미터) 동행했음을 암시한다. 이 예루살렘 방문이 바울에게 처음이 아니었고, 바울이 그곳에 있는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유할 곳을 위해 낯선 자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외관상의 모순은 지리적 요인들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비춰 보면 이해가 되고 해결될 수 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102킬로미터의 거리는 하루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로 이틀이나 사흘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접대 관습에 비춰보면, 가이사랴 신자들은 바울 및 그의 일행과 예루살렘까지 동행할 필요는 없었고, 단지 집주인인 그들의 친구를 바울에게 소개해 주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중 한 마을에 사는 그들의 친구 나손의 집까지 하룻길을 그와 동행했고, 거기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하룻밤을 유했다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한 제안된 해결책은 다른 본문상의 독법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가서 유하다” 대신에 “이 사람들이 우리가 묵어야 할 어떤 사람에게 우리를 데리고 갔는데, 우리는 어떤 마을로 들어가 초기 제자인 구브로 사람 마손이라는 사람에게로 갔다”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를 제시할 수도 있다. 17절은 여행이 진행되었고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바울을 영접했음을 가리키는 이 독법을 따르는 것이 논리에 맞다.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바울이 이전 방문 때 만났던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그를 즐겁게 영접했다.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야고보…장로들도 다. 가능하면 빨리 바울은 지도자로 보이는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 사람들은 선출된 “지방” 교회 장로들이라기보다는 거기 거하고 있는 사도들(참조 14:2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장로들 모두가 특별히 언급된 15:2, 4, 6을 참조하라. 분명히 “주의 형제”인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었다(참조 행 12:17 주석; 15:13; 1:19).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낱낱이 고하니. 문자적으로 “하나씩 말하기를 계속했다.” 행 15:3; 15:30과 비교하라. 바울의 보고는 장로들에게 18:22의 예루살렘 방문 이래 그가 경험한 일들을 알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서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온 구제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영광을 돌리고. 즉 바울이 끝마쳤을 때 감사의 일반적인 표현으로 “그들이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바울에 대한 찬양은 분명히 언급되지 않았다.
유대인 중에…수만 명이 있으니. 유대인 중에서 이루어진 복음 전파의 놀랄 만한 진전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 어림 숫자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 회심자들 이상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처럼 수많은 유대인이 오순절을 위하여 거기에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무리”에 관해서는 6:1, 7; 9:31; 11:21, 24; 14:1; 17:4을 참조하라.
율법에 열심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이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유대교 의식들에서(참조 15:19~21 주석) 자유롭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최소한 구약의 의식들을 실천하고 있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바리새인들의 많은 전통적 요구사항들도 따르고 있었다. 후자에 관해서는 제10 56~58, 61, 62을 참조하라. 바울은 자신이 그의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즉 바리새인으로서 살았다고 묘사한다(26:5). 이 계층에서 대부분의 초기 회심자들이 나왔으나 그들은 바울과 달리 여전히 율법주의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네가…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문자적으로 “네가 모세로부터 떠나게 하는 배도를 가르치고 있다.” 이는 바울에 대해 회자되고 있던 비난이었으며, 자신들의 종교에 열성적인 유대인에게 이보다 심각한 고소는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종교적 감정뿐만 아니라 애국심, 분파심, 역사적 전통, 사회적 관계 그리고 공적인 법에 근거하여 분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수많은 유대인(참조 20)이 만유를 회복할 메시야로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 의식과 요구사항을 더욱더 고수하고 바울을 민족과 종교를 모두 배반한 자로 철저하게 두려워하여 거부했음이 분명하다.
할례를 하지 말고. 앞의 일반화를 가리키는 특정한 비난이다. 이 비난에 따르면 바울은 전통이 아니라 율법 자체에 깊이 새겨져 있는 유대인의 언약의 상징을 위반하고 있었다.
규모를 지키지 말라. 6:14 주석과 비교하라. 여기서 바울이 율법에서 파생된 세부사항들과 거기에 불가피하게 들어와 첨가된 전통적인 실천사항들을 공격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항들은 수많은 사람이 열렬하게 믿는 엄숙한 책무였다. 편견에서 나온 폭력 때문에 반박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유대인 자신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적용하고 종교에 대한 개인의 행실에 관련지어 보면 이러한 의무들은 쉽사리 반박할 수 있었다(22:3; 23:1, 6; 24:11~16; 25:10, 11; 26:4~7, 22). 유대인들의 의식적 요구사항을 옹호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예루살렘 총회(15)의 입장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식이든 양심의 요구에 따라 그것을 계속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 회심자들은 그 요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천국을 향해 가는 데에 율법적인 행위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2:24~29; 4:1~11; 5:1~6; 2:16~22).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법을 개인적으로 적용하여(고전 9:19~23) 특별히 유대인 중에서는 유대인처럼 살았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교회에서 그 의식적인 실천들을 계속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는데, 그들이 믿음의 복음에 비추어 의식의 수행이 무의미함을 깨달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 14:1~10; 고전 7:17~24). 바울은 스스로 나실인의 서원을 했다(18:18). 그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다(16:3).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녀들이 할례를 받지 않게 하라”고 가르쳤다고 비난할 근거가 없다. 그 비난은 그의 적들이 꾸며낸 것이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결국 유대인들로 하여금 의식의 실천사항을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으로 보고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도의 가르침의 근본이었다. 우리 주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소유하라고 가르쳤으며( 5:20) 그들 자신을 위한 종교적인 외식을 정죄했다( 6:1~7). 그리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주장했다( 4:23). 바울은 사람들에 의해 개발되고 강요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2:20~22)는 식의 종교, 곧 실제로는 도덕적 및 영적 중요성도 없고(참조 롬 14:1~10; 4:9~11; 9:9, 10)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그 의미가 종결된 규칙들( 2:8~17)을 믿는 종교를 부정했다.
희생제도와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제정되었다. 희생제도들은 그것이 가리킨 분이 인류의 죄짐을 진 자로서 돌아가실 때 의미가 없어졌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성소와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서의 제사장들도 동일하게 그 의미를 상실했다( 9:24~27; 27:51; 8:13; 9:11~15). 할례는 한 나라, 즉 한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 관계의 외적 표징이었다( 4:11). 할례 의식이 개인적으로 적용되었다 해도, 유아 상태에서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예배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민족적이나 국가적 문제가 아니고( 3:28, 29; 3:11),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적 문제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3:22~24; 3:26, 27; 2:8) 할례 의식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믿음의 길 곧 구원의 새 언약이 도래함으로( 31:31~34; 고후 3:6~9; 8:6~13) 옛 언약의 표인 할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믿음으로 “힘써 여호와를 알”( 6:3)고자 하는 유대인은 영적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할례를 반드시 중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르친 대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비추어 보면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전 7:19; 참조 롬 3:31; 8:4; 요일 2:3).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할례(그 의식 자체를 위한 준수)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5:6; 6:12~17).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신( 2:11~17)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이다( 3:16, 27~29; 2:9~14). 모든 사람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2:4~10; 참조 롬 3:26~30)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믿음과 영적 통찰력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왜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믿음의 사람이 된 내가 자녀에게 할례를 주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다만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 형제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대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고 실천했다. 그러므로 유대화주의자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들은 거짓이었지만, 모든 유대 의식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들었도다. “가르침받았다”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을 반대한 유대화주의자들은 “율법에 열심”(20)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관해 과장되고 파괴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 의식들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서로를 판단하지 말라고 바울이 그렇게 열렬하게 훈계( 14:1~10; 2:16)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자신이 열성적인 율법주의적 비평가들에게 심하게 고통을 당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긴 하지만 이런 재판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믿음 없이 신앙 행위를 하는 것은 죄이다( 14:23).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저희가. (「제임스왕역」에는 “무리가 필연 함께 와야”라는 구절이 들어 있음-역자 주). “무리가 필연 함께 와야”라는 독법을 생략하는 것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를 제시할 수 있다. 이 구절이 없다면, 문맥상 어떤 모임이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
들으리니. 바울의 도착 소식은 반드시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많은 유대인 신자 가운데 퍼진 소문에 의해 전해질 것이었다(참조 20).
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대로 하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는 충고가 최선이라고 믿었다. 바울을 문제에 연루시킬 의도는 없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비난받아야 했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보인 편견을 없애고자 했다(사도행적, 403).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한 것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가 그에 대한 반대를 없애고자 노력해야 했다.
네 사람. 이 네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이었고, 이는 유대인의 의식이 여전히 유대인 회심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예증했다. 이 유대인 형제 네 명은 이미 그들의 서원을 이루어 가는 중이었으나 다른 사람은 특별히 이미 서원을 실행하는 과정에 있는 자들의 비용을 감당하는 조건으로 그 환경에 들어오도록 허락되었다.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바울이 이 권고를 이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결례를 행할 필요가 있음을 묵인하는 표가 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유대인들의 용납을 얻어내는 데 도움보다는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이는 나실인의 금기를 시작하고 그 기간의 끝에 머리를 깎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참조 18:18 주석).
비용을 내어. 바울은 서원을 행하고 있던 사람들의 비용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곧 레위인 이발사에게 지불할 의식상 머리를 깎는 데 드는 비용과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 일년 된 숫양, 일년 된 암양, 숫양, 무교병 한 광주리, 소제물, 전제물 등 제사에 드는 비용을 말한다( 6:9~21).
머리를 깎게 하라. 서원의 결과로 머리가 깎이고 제물이 드려질 때 머리카락은 화목제물인 숫양 밑에서 불로 사루어졌다.
모든 사람이…알 것이라. 바울이 서원 의식에 참여한다면 그가 모세를 “배반”(참조 21절 주석)한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모든 비난이 “헛된 것”임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게 될 것이었다.
율법을 지켜. “율법”, 즉 토라는 유대인의 생각과 생애와 종교의 중심이었다. 토라, 즉 가르침은 모세의 글들에서 주어진 모든 교훈을 포함했다. 바울은 율법을 어긴 것으로 비난받았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생각하기에 바울이 유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그 율법에 신실함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방인에게는. 바울에게 결례를 행하도록 제안하는 장로들의 대변인인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총회 의장을 맡고 있었다(15:13). 그는 바울에게 이방인의 자유에 더 이상 문제가 없다는 것과 그들이 유대인의 의식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켰다. 그런 다음 그는 바울에게 자유케 하는 결의안을 상기시켰다(참조 20절 주석).
목매어 죽인 것. 이 구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를 제시할 수도 있다.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유대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고전 9:19~23). 그러나 그는 사실 여기서 모순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열심인”(21:20)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참여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적, 405, 406,과 비교하라.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즉 서원이 끝났을 때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제사장들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이 기간을 마치기까지 네 사람에게 7일이 더 요구되었다(27). 요세푸스에 따르면(War ii. 15. 1 [313]) 서원하는 기간은 총 30일이었는데 이제 그들에게 오직 7일이 남아 있었다.
바울의 충고자들에게도 잘못이 있었음( 2:11, 12)―이 양보는 바울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않았고, 확고하고 성실한 그의 품성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를 권고하는 사람들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이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 하에 기록하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 있지 않을 때는 잘못을 범하였다. 바울이 베드로가 이중적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를 면전에서 책망한 적이 있는 것이 기억날 것이다(바울의 생애 214).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 에베소와 그 주위에서 전파된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들을 격동시켰다(참조 19:22, 23).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 중 얼마가 성전에서 바울을 알아보고, 그를 반대하기 위해 사람들을 충동했다. 7일 중 마지막 날을 조용히 기다리는 가운데 결례의 과정 중에 있다는 표징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바울을 붙들었다(24:18).
모든 무리.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20)이 아니라 오순절이 다가오면서 성전 구내를 채우고 있던 무리이다.
충동하여. 즉 “충동하기 시작하다.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외치되. 마치 바울이 어떤 심각한 범죄나 소요케 한 죄를 저지른 것처럼 외쳤다.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스데반에게(6:13, 14) 그리고 분명히 이전의 많은 경우에 바울에게 퍼부어졌던 것과 동일한 비난이다(참조 13:45; 14:2; 17:5, 6; 18:6, 12~15; 19:9). 한때 스데반을 고소하고 그의 죽음에 동의한(26:10; 사도행적, 98, 102, 102, 116) 사울이, 이제는 바울이 되어 유사한 고소를 당해 유사한 죽음의 위협 앞에 두려움 없이 서 있다.
헬라인을 데리고. 바울은 이방인의 바깥뜰과 유대인에게만 허용된 구역을 분리하는 “중간에 막힌 담”( 2:14) 안으로, 즉 거룩한 경내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온 것으로 간주되었다(Joshephus Antiquities xv. 11. 5). 그 분리의 벽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된 명각에는 유대인이 아닌 자는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었다(참조 제10, 75, 76).
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 드로비모는 바울과 함께 마게도냐에서부터 동행한 사람이었다(20:4). 고소한 유대인들 중 얼마는 드로비모를 고향에서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들은 이제 그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바울이 이 사람을 이방인에게 금지된 경내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 복음 안에 있는 바울의 자유가 결코 바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도덕 관념을 무시하게 하지 않았고( 14:3~10; 고전 9:19~23; 10:27~31) 그의 용기가 무모한 행동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고소는 거짓이었다.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온 성이 소동하여. 누가는 이것이 큰 규모의 소동이었고, 성전 모독 소식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가자 유대인들은 무엇이 그들을 진정으로 분노하게 하는지에 대해 행동으로 보여 줄 준비를 갖추었음을 알려 준다. 이때는 AD 58년경이었다. 8년 후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도성은 이미 반항적인 곳이 되어 있었다.
바울을 잡아. 또는 “바울을 붙들어.
끌고. 바울을 붙잡은 사람들은 즉시 바울이 더럽혔다고 생각한 거룩한 구역에서 그를 끌어냈다.
문들이 곧 닫히더라. 레위인 문지기들이 문을 즉시 닫은 것은, 더 큰 모독을 막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성전이 소동의 장소가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죽이려. 바울을 붙잡은 사람들은 스데반의 생명을 빼앗았던 것처럼(7:54~60)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를 쳤다(21:32).
요란. 아직 폭동은 아니지만 이 소동은 전 도성을 휩쓸어 자칫하면 통제가 불가능할 수 있었다.
소문. 헬라어 파시스(phasis). [비밀스런 범죄]가 드러남”, “소문에 의한 정보.
군대. 헬라어 스페이라(speira). “보병대”(참조 10:1 주석). 군사력과 엄한 규율을 갖추고, 소동을 일으키는 유대인을 제어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로마 수비대가 성전 지역 북서쪽의 바위 위에 지어진 탑에 주둔해 있었다. 이 탑은 헤롯 대왕이 건축했는데, 클레오파트라와의 열애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것으로 이름난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hony)를 기념하여 안토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토니아 망대는 각 모퉁이에 작은 탑이 있었고 성전의 북쪽과 서쪽의 유개 가로(有蓋街路)로 연결되는 계단 두 개가 있었다. 이 수비대는 특히 수많은 사람이 도성에 와 있는 오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참조 지도 제9, 526.
천부장. 헬라어 킬리아르코스(chiliarchos). “천 명의 지도자.” 로마 보병대 사령관을 지칭하는 용어.
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군사들과 백부장들. 천부장 즉 보병대 사령관은 백 명의 부하를 이끄는 백부장과 함께 군인 수백 명을 혼란 중에 있는 무리들에게 내려보냈다.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참조 31절 주석. 로마 군인들이 당도하자 바울을 붙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겁을 먹었다. 흥분한 유대인들조차도 이 사건을 폭동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잡아. 즉 “그를 붙잡다”, “그를 구금하다.” 이렇게 한 것은 바울을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 내고 이 사건이 명확하게 조사되기 전에 사건의 주범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일은 고린도에서처럼 구출이었다(18:14~17).
결박하라. 로마의 소송 절차대로 분명히 수갑이 바울의 양쪽 팔에 각각 채워졌고 그를 지키는 군인들이 수갑의 양끝을 붙잡고 있었다(참조 12:4, 6). 이렇게 묶인 채, 바울은 예비재판을 받기 위하여 총독 루시아 앞에 끌려갔다(참조 23:26; 24:7, 22).
물으니. “법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다.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어떤 이는…부르짖거늘. 그런 소문과 고소의 혼란은 전에 에베소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흥분한 군중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었다(19:32).
영문. 헬라어 파렘볼레(parembole-). “쌓아올린 것.” 즉 진영( 13:11, 13; 20:9) 또는 군대의 “진”( 11:34). 야전 군사 개념인 이런 의미에서 여기의 “영문”이라는 의미로 바뀐 것은 라틴어 카스트라(castra, “야영지”)에서 카스텔룸(castellum, “성채”, “성”)으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바울은 죄인이었지만 최소한 탑의 은신처에서는 안전했다. 구출은 적시에 이루어졌다.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층대에. 군인들은 가능한 멀리, 성전에서 안토니오 망대로 연결되는 계단으로 바울을 데리고 갔다(참조 31절 주석).
무리의 포행.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주모자들의 열망과 무리의 흥분은 그들이 잡으려는 자가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강화되었다.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호송병들은 실제로 그를 죽이려고 애쓰는 분노한 유대인의 손에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들고 가야 했다.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그를 없이 하자고. 바울에 관한 군중의 본래 의도와, 군인들이 그를 죽이기를 바라는 그들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한 세대 전에 이처럼 예수의 죽음을 요구했었다( 23:18; 19:15).
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내가…말할 수 있느뇨. 바울은 천부장이자 사령관 루시아에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기를 원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로마 시민임을 알리기 원했다(참조 39; 22:26).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천부장은 바울이 히브리어(아람어)만 할 줄 알거라 생각했으나 헬라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편 사람들도 그가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데 더욱 놀랐다(참조 22:2).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지중해 전 지역에서 사용하던 공용 헬라어인 코이네였다. 신약은 이 코이네로 기록되었다.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사천. 이 숫자는 요세푸스가 30,000이라고 한 것이거나, 도망했다가 다시 그들의 지도자와 합한 사람들의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객. 헬라어 시카리오이(sikarioi). 문자적으로 “칼을 품은 자들”, 즉 살인자, 암살자. 라틴어 시카리이(sicarii)와 비교하라. 이들은 유대인의 극렬 조직 셀롯당의 일원인 자객들이었고(참조 제10, 60, 61), 밤에 기습공격으로 소규모 로마 수비대의 십분의 일을 몰살시켰으며, 그들을 지원하지 않은 유대인을 살해했다(Joshephus War ii. 13. 3 [254~258]). 그들은 백주에 절기를 위해 모인 군중 가운데에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예루살렘 포위 후반부에 그들은 잔학하고 피비린내 나는 행위를 통해 그 끔찍한 시대의 엄청난 공포를 자아냈다.
애굽인이 아니냐. 헬라어 구문에서 이 질문은 “예”라는 대답을 기대한다. 로마 당국에 잘 알려진 여기 언급된 이 사람은 이집트계 유대인이었고, 자칭 선지자 행세를 했으며 벨릭스가 총독이 된 직후 30,000명의 남자들을(전승되는 숫자가 맞다면) 이끌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 감람산으로 갔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것이었다(Joshephus Antiquities xx. 8. 6; War ii. 13. 5 [261~263]). 벨릭스의 군사들은 상당한 손실을 보면서 이들을 참패시켰으나 주도자는 도망쳤다.
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소읍이 아닌. 즉 “미미하지 않은 도성”, “꽤 큰 도성.” 상업적인 관점뿐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 자부심이다. 메트로폴리스 아우토노모스(metropolis autonomos) 즉 “자치 도시”라고 새겨진 다소의 동전들이 발견되었다.
다소성의 시민. 참조 9:11 주석.
백성에게 말하기를.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자신보다는 교회와 복음을 위했던 그의 진실한 태도와 행동을 이해주기를 희망했다.
바울의 배경(22:3, 25-28)바울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길리기아 사람이었지만 로마의 시민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기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자유를 큰 돈을 들여서 얻었지만 바울은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바울은 랍비요, 정치가였다. 그는 산헤드린 의원이었다(원고 95, 1899).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허락하거늘. 헬라어 에피트레포(epitrepo). “인가하다”, “승인하다”, “허가하다.” 이 단어는 이런 의미로 파피루스 사본에 사용되었다.
층대 위. 군중의 거친 행동(22:22~25)이 다시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들보다 높고 안전한 위치.
손짓하여. 바울이 말하고자 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군중을 진정시키려는 몸짓.
히브리 방언으로. 즉 아람어로. 문자적으로 “방언.” 참조 제1, 30. 필사적은 아니라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그의 자유가 담겨 있는 간략한 변호를 할 것이다. 아래의 소란한 군중에 비하여 그는 얼마나 담담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