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사도행전 제18장 주석(요약자;에덴지기)

손진길 2024. 5. 24. 08:51

사도행전 제18장 주석(요약자;에덴지기)

 

사도행전 18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바울이…떠나.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바울”을 생략하고 “그가 떠났다”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고린도. 아덴에서 남서쪽으로 약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이쓰무스(Isthmus)를 따라 갔거나 아니면 바다를 통해 피래우스(Piraeus)에서 겐그레아까지 여행했을 것이다. 고린도는 이쓰무스에 접해 있었고, 양쪽 해안에 항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동쪽 겐그레아에 있었고 또 하나는 북쪽 레캐움(Lechaeum)에 있었다. 이곳은 헬라 초기 시대부터 상업적인 요지였다. 상업은 사치와 부도덕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서 바울은 그의 활동을 시작했는데, 아덴에서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다.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굴라 (Aquila). “독수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이름이며, 헬라어로는 아퀼라스(Akulas)이다. 이 이름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는 옹켈로스(Onkelos), 전승에 의하면 한 유대 타르굼의 저자이다(참조 제10, 38, 39).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에 살면서 동물에서 유래한 이름을 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본도에서 난. 문자적으로 “혈통적으로 본도 사람.” 소아시아 지역은 흩어진 유대 족속들로  가득했는데 이러한 점은 사도행전 전반을 통해 알 수 있다(참조 행 2:9, 10 주석; 벧전 1:1). 본도 출신의 몇 유대인은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있었다( 2:9). 본도는 당시부터 약 1세기 전에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왕이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어 로마 통치 하에 들어갔다.

글라우디오가…명하여.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일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유대인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사주를 받아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글라우디오]가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Lives of the Caesars v. 25. 4; Loeb ed., Suetonius, vol. 2, 53). 당시 상당히 큰 유대인 거류지가 로마 도성 안의 야니쿨룸(Janiculum) 언덕 기슭에 있었다(참조 542쪽 지도). 그들은 로마 상류계급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자신들의 회당과 기도 장소(참조 16:13 주석)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렐리기오 리치타(religio licita, 법적으로 인정된 종교)로 관대히 다루어졌고, 압비아 가도(Appian Way)를 따라 놓여 있는 그들 소유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은 갑작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수에토니우스는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명령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사람에 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헬라어 “i()와 “e()의 발음은 거의 구별되지 않았고, 테르툴리아누스(Apology iii. 5), 헬라어 이름 크리스토스(Christos)가 종종 “좋은”, “유용한” 또는 “친절한”을 의미하는 크레스토스(Chre-stos)와 같게 발음되었다고 말한다. 글라우디오의 포고령에 대한 가능한 설명은 오순절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왔고, 비시디아 안디옥(13:50), 루스드라(14:19), 데살로니가(17:5~8) 그리고 베뢰아(17:13)에서와 같은 소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메시야라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자나 거절한 자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언어와 명칭(18:15)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갈리오와 같은 로마 행정관들은 쉽게 그리스도를 여러 당파 중 하나의 지도자로 생각했을 것이고, 지상의 왕권을 주장한 자로 추측했을 것이다(17:7의 데살로니가에서처럼). 이 설명은 소동, 명칭의 혼란 그리고 추방령이 왜 일어났는지 밝혀 줄 것이다(참조 제10, 80, 81).
아굴라와 그의 부인은 추방될 때까지 로마에 있었으며, 로마에 있는 다수의 유대인 또는 그들의 후손이 자유민(참조 6:9 주석)이었던 점으로 보아, 아굴라나 그의 부모도 그 계층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로 돌아간 것으로 언급되었는데( 16:3), 그랬다면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던 이후에 돌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거기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 함께 있었고(고전 16:19), 그들이 살던 집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장소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낼 때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었다면 그들도 그 도시에 있었다(딤후 4:19). 그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로마에서 누가 새로운 신앙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다음 자료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1) 팔레스타인에서 복음이 괄목할 만큼 성공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는데 로마의 유대인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확실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오순절 이후 25년이 지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오순절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2:10)이 있었다. (3) 스데반과 변론했던 헬라파 유대인 중에는 로마의 자유인들이 있었으며 스데반 자신이 그 계층에 속했을 수도 있다(참조 6:5, 9 주석). (4) 바울이 문안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16:7). 따라서 전승이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이들 가운데서 로마 교회 설립자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이 바울에게 영향을 미친 스데반에 의해 구축된 위대한 원칙들과 같은 것임을 가리킨다. 이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어떻게 그토록 쉽게 고린도에서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줄 것이다. 바울이 롬 16:3~15에서 이름을 열거한 많은 사람이 글라우디오 당시 로마에서 추방당했고, 후에 되돌아갔다.

브리스길라(Priscilla). 이 이름은 다른 곳에 브리스가(Prisca)라는 축소형으로 나타난다(딤후 4:19; 참조 고전 16:19; 최상의 본문으로 입증된 롬 16:3 헬라어 본문). 브리스가라는 이름은 로마 초기 시대부터 국가에 집정관과 치안관을 오랫동안 배출한 프리스키(Prisci)()의 겐스(gens) 곧 후손들과 연관성이 있음을 반영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결혼은 로마 상류 계층 여성들 사이에서 교육받은 유대인들이 끼친 영향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만약 브리스길라가 상류 출신 로마인이었다면, 그녀의 이름을 맨 앞에 둔( 18:18; 16:3; 딤후 4:19)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참조 행 18:26)은 그녀가 교양 있는 여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두 사람이 바울에 의해 회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으나, 몇 가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1) 어떤 일이라도 빠뜨리지 않았을 누가가 그들이 루디아처럼(16:14) 바울에게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2)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도 주저하지 않고 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18:3)은 그들 편에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암시한다.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앞의 “글라우디오가 명하여”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반대는 복음을 잠잠케 못함( 8:4; 1:7, 8)―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사방으로 다니면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교사로, 병고치는 자로, 봉사하면서 그리스도의 일을 증거하였다. 예루살렘과 로마와 다른 곳에서 행한 그들의 증거는 적극적이었고, 힘이 있었다. 진리를 거절한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는 힘있는 감화력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큰 반대를 불러 일으켰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지 20년 후에는 로마에 열렬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이 교회는 강하고 열심이 있었으며 주님이 그 교회를 위하여 일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투기와 분노는 한이 없었고 믿지 않는 주민들을 계속 선동하였다. 그들은 불평거리를 만들어 이르기를,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무질서하고 공익에 유해한 존재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분쟁을 촉발케 할만한 것을 선동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추방된 사람들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있었는데, 그들은 고린도에 가서 천막 제조 공장을 세웠다(리뷰 1900. 3. 6).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함께 거하여. 탈무드(Sukkah 51b; Soncino ed., 245)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각 동업자들이 회당예배에 함께 앉았다. 외지인이 들어오면 회당에서 쉽게 동료 기술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거처를 함께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고린도에서도 행해졌다면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숙소와 직업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장막을 만드는 것. 장막을 만드는 일은 바울이 고향 다소에서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일이었다. 다소는 당시와 그 후에도 범포(帆布)와 장막 제작에 다량 요구되는 염소 털 직물로 유명했고, 로마인에게는 킬리키움(cilicium)이라는 로마 속주의 이름을 통해 알려졌다. 아굴라의 출생지인 로마의 속주인 본도 역시 같은 제품으로 유명했는데, 이 제품의 재료는 타우루스(Taurus) 산지의 비탈과 주위 방목지에서 길러진 염소들에 의해 공급되었다. 부유했음직한 바울의 배경과 그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암시는 그가 일을 배워야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 “아들에게 직업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그가 도둑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랍비의 격언은 히브리 가정에서 거의 보편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예로, 저명한 힐렐도 목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처럼 고린도에서도 생계를 위하여 일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이익을 위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비난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고전 9:15~19; 고후 11:7~13; 살전 2:9). 그는 고린도에서 임금을 위해 일하는 기술자 또는 유대인의 일터에서 일꾼으로 시작했고, 아직 일개 유대인 이상의 존재로는 고린도 도시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사도들은 작업의 방법을 가르쳤음(고후 10:1,7, 8; 20:17-35 주해 참조)―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그는 아굴라로 부터 일을 같이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함께 권고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영혼들에 대한 사심없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고, 그의 동역자들에게도 손으로 일하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한 것은 위급한 때에 자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섬기는 형제들 중 몇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면 우리들은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마땅히 끼쳐야 할 영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0장에는 바울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과 그의 행동 양식을 옹호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한 영예를 주셨다. 그에게 그분의 신임장을 주셨고, 막중한 책임을 부여하셨다. 사도는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비천하고)”―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낮추어 숙련공으로서 손으로 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한”다고 하였다(고후 10:7, 8 인용)(리뷰 1900. 3. 6).
바울은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며 살았음( 20:33, 34; 살전 2:9; 살후 3:8)―바울은 그들과 함께 머물렀다. 따뜻한 그 지방에서 많이 사용하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그는 청년 때에 배웠기 때문에 자기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이 직업에 종사하였다.
바울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고, 그의 재주와 웅변으로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가 살던 지역의 사람들이 뽑아준 산헤드린 의원이었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랍비였다. 그러나 그의 교육은 그가 쓸모있는 어떤 직종의 견습공의 과정을 마칠 때 까지는 완성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는 자주 그의 손으로 그의 쓸 것을 벌었다고 하였다. 어떤 낯선 도시에 가 있을때 그는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하여 그의 재원이 다 고갈되었을 때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그의 직업을 의지하였다(바울의 생애 99,100).
바울은 비록 몸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일에 종사하면서 낮에 노동하였고 밤시간의 대부분도 일을 하였으며, 자기 자신과 동행인들의 쓸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주 밤을 새워 일하는 때도 있었다(청년 지도자 1902. 2. 27).
숙련공―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장막 만드는 직업을 배웠다. 장막을 만드는 데에도 고등 부문과 하등 부문이 있었다. 바울은 그중에 고등 부문의 것을 익혔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서는 보통 부문의 일도 하였다. 장막 만드는 직업은 다른 직업만큼 자금 회전이 그렇게 빠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때로는 가장 엄격한 절제에 의해서만 그의 생계를 꾸려 갈 수가 있었다(리뷰 1900. 3. 6).
교육자―바울은 교육자이었다. 그는 그의 음성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지성적으로 일하면서 그의 손으로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최고의 인간 교사로 인정받으시는 분에게서 교육을 받은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였다. 바울이 잽싸고 능숙한 솜씨로 일을 하면서 그의 동료 일꾼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막 건립에 관하여 모세에게 주신 세부 사항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 일에 들이는 솜씨와 지혜와 재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쓰시려고 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최고의 영예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리뷰 1900. 3. 6).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안식일마다. 바울은 적어도 1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다(참조 11).

강론하고. 바울은 항상 유대인에게 먼저 갔다(참조 13:5, 14 주석).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후에 에베소에서처럼(19:8, 9) 도시에 머무는 동안 내내 회당에서 강론하도록 허락받지 못하였다(참조 18:7).

헬라인. 헬라어 헬레나이(Helle-nai).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전문 용어의 의미로 유대인 개종자가 아니라 다른 경우에서처럼(참조 11:20 주석) 이교도를 가리킬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면(참조 10:2 주석) 바울이 이들 중 일부를 회당에서 만났을 것이고 대부분은 분명히 사업상 또는 다른 이유로 만났을 것이다.

권면하니라. 즉 “설득시키려 노력하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실라와 디모데가…내려오매. 마게도냐로부터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왔을 때.” 살전 3:2을 통해, 아덴에서 바울에게 온 것으로 보이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더 자세한 소식을 알기 위해 그리로 곧바로 되돌려 보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살전 3:6). 이때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고후 11:9)이 바울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표시로 선물을 가지고 온 때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제임스왕역」에는 “pressed in the spirit[심령의 강권을 받아]).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그가 말씀[또는 “기별”]에 붙잡혀[또는 “강권을 받아”]”라는 독법을 증거한다. 「개정표준역」에는 조금 약한 어조로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데 사로잡혀”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말해야 할 충동을 느꼈다(참조 시 39:3). 실라와 디모데의 도착과 설교하고자 하는 바울의 충동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는 선물들 때문에 바울이 한동안 말씀을 전하는 데 전념하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의 생업을 게으르게 했다는 암시는 없으며 고전 9장도 이런 생각과 배치된다. 그는 이미 말씀을 전할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고, 따라서 실라와 디모데에게 들은 고무적인 소식으로 그 충동이 강화되었을 뿐이다.예수는 그리스도라…증거하니. 예수가 유대인들이 알아야 했던 고난당하는 메시야 곧 구주이자 진리 자체임을 강조한다.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저희가 대적하여. 여기 사용된 동사는 군대가 전투대형을 갖추고 선 것처럼, 강하게 대적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바울에 대한 반대는 매우 조직적이고 단호했다.

훼방하거늘. 헬라어 블라스페메오(blasphe-meo-). [어떤 사람에 대하여] 악평하다”, “비방하다”, “모독하다.” 이 단어는 “우매한”이라는 의미의 블락스(blax)와 “말하다”라는 의미의 페메(phe-me)로 이뤄져 있다. 확실히 부당한 비방은 “어리석은 말”이며 모독은 그보다 더 나쁘다. 이 경우에 유대인의 모독에는 틀림없이 바울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악한 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최고의 모독이었다. 벧후 2:2에 사용된 블라스페메오와 비교해 보라.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행동에 대한 언급이 행 19:9에 기록되어 있다.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이러한 소동은 로마에서 분명히 이미 발생한 일(참조 18:2 주석)과 다른 여러 장소에서 발생한 일들(참조 13, 14장등)의 재연이었다. 신성모독의 메아리가 “예수는 저주받을 자라!”는 표현에서 드러난다(고전 12:3, 「개정표준역」).

옷을 떨어. 이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느 5:13; 10:14; 13:51 주석을 참조하라.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한 행동으로서 다른 어떤 행동보다도 사도의 분노를 잘 나타냈다. 이것은 바울의 마지막 호소 수단이었다. 이성과 양심에 대한 그의 호소는 다만 잔인한 폭력으로 보답되었다.

. 그는 비유적인 언어를 써서 “피”라는 단어를 “파멸”의 의미로 사용한다(참조 수 2:19). 여기에 표현된 사상과 형태는 본질적으로 히브리식이다(참조 마 27:25 주석). 자신의 책임을 파수꾼으로 정의한 에스겔의 표현과 비교하라( 3:18, 19).

이방인에게로. 참조 13:46 주석.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돌아서겠다는 말은 분명 제한적이고 지역적 적용에 불과했다. 사도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일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린도에서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참조 9:15; 19:8).

공경하는. 헬라어 세보마이(sebomai). “공경하다”, “예배하다.” 여기 사용된 단어의 형태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13:43)과 “경건한 헬라인들”(17:4; 참조 10:2 주석)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의 집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였으며 이방인이 유대인의 집에 가는 것보다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유스도. 로마인의 별칭이었다(참조 1:23 주석). 디도 유스도라는 이름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그를 바울이 그레데에 남겨 놓은 갈 2:3의 디도와 같은 사람이라고 유추할 이유는 없다. 로마인에게 디도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레데에 보내진 디도는 고후 7:14; 8:16, 23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기 언급된 유스도는 디도처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회당에 참석하였다(참조 아래 “공경하는”에 관한 주석).

사람의 집. 바울은 가르침과 예배를 위하여 이 집을 사용하였다. 그는 여전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거했을 것이다.

옆이라. 또는 “붙어 있었다”, “옆집이었다”(「개정표준역」).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회당에서 반대를 당한 후, 분명히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꾼 유대인들이 찾아오기 쉽게 하기 위하여 가까운 곳에 집회 장소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집회 장소를 택한 것이 또 한 번 쓰라림을 맛보게 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특별히 추종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한 회당장까지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러하였다(8).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회당장 그리스보. 고전 1:14은 그리스보가 바울이 침례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보가 회심 전에 유대인 가운데 차지했던 지도적인 위치와 그의 모든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인 일은 그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주목받게 했다.

믿어 침례를 받더라. 두 동사의 헬라어 형태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기간의 계속적인 과정을 암시한다. 회심자 중에는 가이오(고전 1:14)가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친절하기로 유명했고 바울의 두 번째 방문 때 바울을 대접했으며( 16:23) 다른 이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가야의 첫 열매”였던 스데바나의 식구들은 분명히 그곳의 최초 회심자(고전 16:15) 중에 속해 있었다. 바울이 직접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전 1:16). 다음 열거되는 사람들도 그때 혹은 직후에 회심한 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 16:17), 유명한 여성 회심자 글로에(고전 1:11),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 16:23),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인 에배네도( 16:5). 실라와 디모데가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이 회심자의 대부분에게 침례를 주었음이 분명하다(참조 고전 1:14~16).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주께서…말씀하시되. 또는 “그리고 주가 말씀했다.” 여기서 바울에게 다른 이상이 주어진다. 주의 말씀으로 판단해 볼 때 어떤 이유로 바울은 용기를 잃고 신변의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부름을 받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 기별을 받았다(16:9, 19). 그러나 여기서는 주가 친히 그의 종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상들은 그의 삶의 다양하고 큰 위기에 주어졌다. 그가 처음 예수를 본 것은 회심 때였다(9:4~6; 참조 사도행적, 115). 그는 후에 같은 목소리를 듣고, 같은 모습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상 중에 보았다(22:17~21). 이제 그는 다시 한 번 주를 보고 말씀을 들었다.

두려워하지 말며. 이 말은 이때 바울이 어떤 두려움과 낙담에 빠져 있었으며 주를 위하여 시도하던 일에 무거운 부담을 느꼈음을 의미한다. 회심자 대부분은 노예나 자유민 계층이었으며 바울과 유사한 문화 배경을 가진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은 그의 전도를 받아들이는 데 더뎌 보였다(참고 고전 1:26, 27). 분명히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미 욕설을 퍼붓는 유대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일은 쉽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주님은 인자하게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권고하였다.

잠잠하지 말고. 말씀에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약해진 순간 침묵 속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았으나, 전보다 더 줄기차게 복음을 전하라는 권고가 왔다. 어떤 것도 바울의 증언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엘리야가 이와 유사한 낙담의 위기를 겪었고(왕상 19:4~14), 예레미야도 두 번 이상 이런 일을 경험하였다( 1:6~8; 15:15~21).

말하라. 즉 “말을 계속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원문에서 “내”가 강조된다. 예수가 준 명령에 뒤이어 그 순간 바울의 필요에 부응하는 약속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그를 반대했으나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있었다. 교회 전체에게 주어졌던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28:20)는 약속은, 여기서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반복되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고통의 삶을 의미했지만 사람의 악한 계획이 제어되고 바울의 사역이 영구히 방해받지 않으리라는 보증이 함께 있었다.

해롭게 할. “너를 해할”, “학대할.”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공격에서 벗어날 것을 약속하지 않았다. 다만 적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바울에게 이 보증은 수 세기 전 엘리야가 경험하고 선포한 대로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음을(왕하 6:16) 의미했다.

백성이 많음이라. 엘리야가 약할 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겼도다”(왕상 19:18)라고 들려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고린도의 죄악들(고전 5:10, 11)에 깊이 얽혀 있는 사람 중에도 구원을 사모하고 회개의 초청을 기다리는 정직한 영혼들이 있었다. 이 초청은 반드시 바울과 동역자들이 해야 한다.
당시 고린도는 상업 활동의 요긴한 중심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교회는 좋은 평판을 갖는 것이 절대 필요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확장과 중요성은 바울이 후에 거기 있는 교회에 쓴 편지서들에서 볼 수 있다. 주는 이상을 통하여 바울의 설교가 큰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자비로운 확신을 주었다. 그는 위안을 갖고 일어섰고 어떤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일 년 육 개월. 고린도에서 보낸 시간은 바울에게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기회뿐 아니라 겐그레아 항구( 16:1)와 같은 이웃 지역에서 일할 기회도 제공하였다. 고린도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한 것 외에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그의 가장 초기 서신으로 알려진 두 서신을 보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야고보서가 먼저 기록되지 않았다면 신약 중 가장 오래된 문헌일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는 고린도후서의 인사말(고후 1:1)은 복음 전파가 명백하게 이 도시 지경을 넘어선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광범위한 결실을 이상 중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받아들였고, 이는 다가오는 다음 박해를 위해 그를 준비시켰다.

유하며. 헬라어 카씨조(kathizo-). “앉다”, “어떤 장소에 거하다.” 이 동사는 영구성과 계속성을 시사한다.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갈리오. 그의 완전한 이름은 원래 마르쿠스 안내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 부유한 로마인 루치우스 유니우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에게 입양되어 유니우스 안내우스 갈리오(Junius Annaeus Gallio)로 알려졌다. 그는 네로의 가정교사였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이다. 세네카는 총독인 그의 형제에게 “분노”(Anger)와 “복된 삶”(Blessed Life)이라는 두 논문을 헌정하였다. 갈리오는 AD 51년에서 53년 사이에 아가야 총독이었을 것이다. 그가 열병으로(Seneca Epistles civ. 1) 아가야에서 은퇴한 후에는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에는 네로의 호의를 얻었으나 마침내 이 폭군의 분노를 사, 한 전승에 의하면 그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는 그가 자살하기를 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다만, “그의 형제 세네카의 죽음으로 경악”하여 네로에게 자신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전한다(Annals xv. 73; Loeb ed., Tacitus, vol. 4, 333).

총독(deputy). 정확히 말해 “지방 총독”(proconsul, 참조 13:7 주석). 여기서 다시 누가는 직함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정확성을 보여 준다. 디베료 치하에서, 속주 마게도냐의 남쪽에 있는 그리스 지역을 포함하는 아가야는 제국 속주였으며, 따라서 제국 총독(procurator)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AD 44년에 다시 한 번 글라우디오에 의해서 원로원 속주가 되었고 더 이상 군부 통제를 직접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Tacitus Annals i. 76; Suetonius Lives of the Caesars v. 25. 3). 그러므로 바울이 방문했을 때 이곳은 지방 총독(proconsul)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유대인이…일어나. 「제임스왕역」이 번역된 이래로 여기 사용된 “insurrection(소요)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통치자들에게 대항하는 백성의 봉기를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일어난 것은 반란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일제히 출두함으로써 사도를 도시에서 추방하려고 기도(企圖)했음이 분명하다.

재판 자리. 로마의 총독들은 아고라(agora) 혹은 포룸(forum) 곧 시장에서 정해진 날(참조 19:38 주석)에 법정을 여는 것이 통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든지 불만을 토로하여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기회를 틈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리오에게는 그들이 어떤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동족 중 한 사람을 고소하는 유대인 무리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얼마 전에 로마에서 왔다면 “크레스투스”(참조 18:2 주석)로 인해 생긴 문제를 들었을 것이고 이것을 같은 문제에 대한 다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이 사람. 헬라어 후토스(houtos). “이것” 또는 “이 사람”으로, 그들이 갈리오의 마음에 전달하기 원했던 경멸을 잘 표현한 지시대명사이다.

율법. 총독에게 고소할 때 유대인들이 생각한 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고 로마법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의 의중에는 정책상 유대인이 로마에서 쫓겨났지만 유대교는 여전히 로마 정부에 의해서 관용되고 인정된 종교 곧 렐리지오 리치타(religio licita)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소는 유대인 종교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인정받지 않은 새로운 종교를 전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참조 17:7 주석).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입을 열고자. 공식적인 담화를 도입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어법( 5:2; 13:35; 10:34). 바울은 공식적으로 변호하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갈리오가…이르되. 갈리오가 아가야에 거하는 동안 새로운 그리스도교 운동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유대인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는 바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요 정치가의 한 사람의 견해로 볼 때 이것은 그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로마가 인정한 종교와 인정하지 않은 종교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비행이나 사악한 행위.” 총독이 관여해야 할 두 가지는 (1) 악행(참조 24:20) 곧 불법적인 행위, (2) 윤리적 잘못을 수반하는 비양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한 문제들을 조정할 때 그는 로마법과 형평을 집행하는 자로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여기 사용된 두 표현은 절도나 폭행 같은 공개적인 비행을 가리키며, 두 번째 표현은 주로 사기성이 농후한 교활함이 특징을 이루는 소행들을 지칭한다.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 “내가 너희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전문 용어로서, 고소를 처리한다는 의미가 있다. 갈리오는 그의 말을 통해 로마 사람들이 관대한 유대인보다도 자신들을 더 우월하게 여긴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송사가 정당했다면 그러한 관용의 혜택을 누렸을 것이고, 그는 그의 직임과 로마법에 관계된 다른 문제들을 조사했을 것이다.

가하거니와. 즉 “이성에 따라서”,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문제. 정확히 말해 “문제들.

언어와 명칭. 또는 “말과 명칭.” 틀림없이 유대인들은 기회만 주어졌다면 바울의 가르침에 관련된 많은 것들을 계속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관련된 문제는 로마인에게 오로지 신학적 정의의 문제였지 로마법에 관계된 문제는 아니었다. 만약 갈리오가 로마에서(참조 2절 주석) “크레스투스”라는 이름을 들었다면 그는 훨씬 쉽게 황제의 명령을 따랐을 것이고 되도록 속히 유대인 논쟁자들을 제거했을 것이다(참조 23:29).

너희 법. 문자적으로 “너희에게 맞는 법.” 갈리오는 강조하여 말함으로써 그들이 법에 호소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넌지시 말했다. 그들의 경우는 로마법보다는 유대법에 관련 있었고, 따라서 그는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헬라어 단어 “재판장”과 대명사 “나”가 강조되어 있다. 갈리오는 이 사건이 로마법과 관련이 없었으므로 재판을 거부하였다.

16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저희를…쫓아내니. 분명히 시장 곧 재판 자리에 릭토르(lictor, 집정관을 따라다니며 죄인을 잡던 관리-역자 주)와 다른 관리들과 함께 앉아 있던 갈리오는 “언어와 명칭”에 관한 문제를 일으키는 논쟁자들을 거기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는 고린도의 번잡한 상업 생활에서 재판권을 행사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회당장. 참조 8. 소스데네는 그리스보의 회심(8) 후에 회당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독 앞에서 즉시 바울을 고소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열의를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는 대변자로서 둘러싼 군중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고 그들 중 다수는 헬라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갈리오의 경멸하는 어감을 알아챘고, 또한 스스로 터득한 교훈에 따라 그의 반대 결정을 따랐는데, 이 결정은 매우 서투른 결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패소한 후에 그들의 새 지도자에게 등을 돌렸을 수도 있다. 틀림없이 이방인 중에 바울을 동정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중은 소스데네를 특별히 지목하여 끌어냈다.

소스데네. 널리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바울의 경우와 같이 박해하는 지도자가 후에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이 사람을 고전 1:1의 소스데네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잡아. 참조 16:19; 17:19. 같은 동사가 21:30에서 예루살렘 폭도들의 과격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바로 후에(33) 바울을 구출해 내는 천부장의 행동에 대해서도 쓰인다.

때리되. 또는 “그를 때리기 시작하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갈리오의 선언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세인의 무관심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가 전적으로 종교에 무관심했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는 그의 합당한 사법권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판결은 그리스도교 전파에 도움이 되는 전례를 남겼을 것이다. 로마인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참조 14) 알려면 제10, 66~69을 참조하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러 날 유하다가. 바울은 1 6개월 동안(11) 비교적 조용히 생활하면서 일했다. 그는 이 기간 후나 아니면 후반부에 갈리오 앞에 끌려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 후에 다시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수리아로. 여행 동기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후에도 그런 것처럼(참조 20:3, 4 주석) 그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참조 롬 15:25, 26; 2:10)을 위해 거둔 선물을 몸소 전달하고자 했다. 바울이 다른 여러 지역에서보다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설교가 잘 받아들여졌는데도 에베소에 머물기를 거절한 점으로 보아, 예루살렘에 돌아가기로 결심하자 되도록 빨리 거기에 이르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2) 그가 근자에 한 서약 때문에 성전을 방문해야 했다. (3)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상당히 먼 지역인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한 사역의 결과를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참조 15: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참조 2절 주석.

서원. 개인적인 서원으로, 6:1~21에 묘사된 한시적인 나실인 서원의 수정된 형태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실인의 서원은 세상과 일상적인 삶에서 구별될 것을 요구했다(“나실인”이라는 단어는 “구별된” 또는 “성별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서원 기간에 나실인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으며, 머리나 수염도 깎을 수 없었다. 서원 기간을 마칠 때는 성전에서 머리를 깎고 희생제물 밑에 있는 제단 불로 태워야 했다. 21:24에 언급된 나실인들은 서원을 마친 후에 머리를 잘랐다. 예루살렘에서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 자른 머리털을 성전에 가져와 남은 머리카락을 자를 때 바치도록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울이 수리아로 가는 항해에 오르기 전 겐그레아에서 행한 일이다. 고전 11:14에 비춰볼 때, 바울은 남자들의 긴 머리를 남성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실인의 서원을 하면 반드시 머리를 길러야 한다. 따라서 그는 서원을 따랐으나 수정된 형태를 따랐고, 서원 기간이 겐그레아에 도착하기 전에 끝나지 않았다면 여행 전에 머리를 자른 것은 그의 용모와 당시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원을 하게 한 주된 요인은 종종 두려움이 뒤따르는 위험에서 구원받은 데 대한 깊은 감사였다. 두려움, 약속 그리고 구원은 고린도에서 있었던 바울의 사역 기록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 계획에 헌신하려는 서원은 자연스런 결과로 뒤따를 것이었다. 바울은 경건한 감정의 표현들을 경멸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의 다른 몇몇 관행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그것들을 율법적인 행위로 여기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여러 모양이 된”다(고전 9:22)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게 동정심(20)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나실인 서원은, 바울 자신도 율법을 멸시하지 않고 다른 유대인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도록(참조 행 21:21~24 주석) 가르치고 있음을 증거할 것이었다.

겐그레아. 사론(Saronic) ()에 위치한, 고린도 동편의 항구. 16:1은 그곳에 조직된 교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뵈뵈와 그녀의 그리스도인다운 봉사( 16:2)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 것은 그가 이 교회와 밀접히 접촉해왔음을 가리킨다. 아마도 바울이 이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에베소에 와서. (「제임스왕역」에는 “그가 에베소에 와서”라고 되어 있고, 「개역한글판」에는 주어 없이 단순히 “에베소에 와서”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본문상의 증거(참조 20)는 “그들이 에베소에 와서”라는 독법을 지지한다. “왔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해양 용어로 “상륙하다”를 의미한다. 에베소는 유명한 도시로 헬라의 이오니아 지역의 수도였으며 후에는 로마 속주 아시아의 수도였다. 그곳은 사도 요한의 후기 활동 무대가 되었다. 이 도시는 큰 강 헤르무스(Hermus)와 매안드로스(Maeander) 사이에 위치한 카위스트로스(Cayster) 하구에 있는, 바다에서 멀지 않은 구릉지대에 위치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부해안에 위치한 초기 헬라인의 정착지였으나 BC 6세기에 리디아 왕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은 아데미(로마의 다이아나; 참조 19:24 주석)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아데미 신전은 세계 각처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수 세기 동안 동서양은 에베소에서 긴밀히 접촉했으며 그곳에서 헬라의 종교는 좀 더 동양적인 특성을 갖게 되고 주술, 신비, 마술과 결부되었다. 에베소는 바울 당시 로마의 속주 아시아에서 단연 가장 활기차고 인기 있는 도시였다. 그곳에는 적어도 회당 하나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유대인이 있었다.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에베소에 얼마간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다양한 이동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회당에 들어가서. 바울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비록 그들에게서 끊임없이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는 결코 동족을 포기하지 않았고, 여기서도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그에게 좀 더 머물러 있기를 간청(20)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그의 설교가 그렇게 적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에베소 사람들의 국제적인 특성이 바울에게 다른 태도를 나타내도록 했을 것이다.

변론하니. 헬라어 디알레고마이(dialegomai, 참조 20:7 주석).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청하되. 그들의 청함은, 향후 좋은 열매를 기대해도 좋을 징후였다. 바울이 전하는 진리에 베뢰아 사람들보다 더 수용적인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을 젖으로 먹일 어린아이들(고전 3:2)로 생각했으나, 그들이 복음에 대한 비밀의 지식( 3:4)을 공유할 수 있었기에 후에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20:27)고 선포할 수 있었다.

허락지 아니하고. 문자적으로 “머리를 끄덕이지 아니하고.” 즉 용납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바울과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믿는 점에서 일치하며, 거의 동일한 표현(참조 약 4:15)을 사용한다. 그들에게 이 표현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던 공식 문구 데오 볼렌테(deo volente) 곧 “하나님이 원하시면“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바울이 하려고 마음먹은 것을 성령이 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는 16:6, 7을 참조하라.

돌아오리라. 바울은 기회를 얻자마자 약속을 이행하였다(19:1).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가이사랴에서. 상당히 많은 활동이 이 성경절 안에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가이사랴에서 그는 틀림없이 전도자 빌립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을 것이다. 그 후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렀다(21:8).

올라가. 즉 해안의 성읍에서 예루살렘 도성으로.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즉 “교회에 인사한 후에.” 그가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활동의 중심지를 방문했다는 간략한 기록이다. 이는 바울의 회심 후 네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다(참조 9:26; 11:30; 15:4; 21:17). 14:27에서와 같이 교회가 모였다거나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성취한 것을 보고했다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도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고 바울이 서원을 마쳤다는 말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냉대받았고, 이방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율법에 대한 입장 때문에 율법에 본래 열심이었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나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바울은 마음이 맞는 안디옥에 있는 교인들에게로 서둘러 갔다.

안디옥으로. AD 52년경,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오고 2차 선교여행이 끝난다(참조 102).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얼마 있다가. 이 방문은 여러 달 걸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갈 2:11~14에서 언급한 다툼이 이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오랫동안 안디옥을 떠나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유대화주의자들이 이방인의 자유에 대해 공격했다는 것이 이들의 추론이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압력을 가했고, 확고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그들에게 굴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이 사건이 예루살렘 총회(참조 15:39, 40 주석) 후에 바울과 실라가 안디옥을 떠나기 전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떠나. 안디옥은 앞선 두 번의 여행(13:1~3; 15:36~40)과 마찬가지로 3차 선교여행의 출발지이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바울은 소아시아의 북쪽 지방(참조 16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에 이르기 전에 루스드라와 더베를 방문하고, 전과 동일한 방향으로 갔다.

굳게 하니라. 바울은 새 교회들을 세운 복음 전도자일 뿐 아니라 그 교회들의 지속적인 안녕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목양자였다. 1차 선교여행 중에 세운 교회들 중 몇 교회를 이번에 방문한 것은 네 번째다(참조 13:51; 14:6, 21; 16:1, 6).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문자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태생.” 구약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이 번역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의 가장 큰 도서관들 중 하나가 있던 학문의 중심지였다. 철학자 필론은 그곳의 유대인들 사이에 뛰어난 지적 지도자였다. 그가 AD 50년경까지 살았으므로 아볼로는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볼로(Apollos).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나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의 단축형일 것이다. 이어지는 성경절들은 막간에 삽입된 것으로, 그 후에 일어난 일의 배경을 이룬다. 신약이 제공하는 아볼로에 관한 사실들을 통해 그가 초기교회에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그의 영향력은 고린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를 따르던 자들의 무리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고전 1:12; 3:5; 4:6).

학문이 많고. (「제임스왕역」에는 “eloquent[구변에 능한]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헬라어 로기오스(logios). “학식 있는”, “구변에 능한.” 한 가지 의미만으로는 온전한 뜻을 전달할 수 없다. 그는 학식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학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능한. 헬라어 뒤나토스(dunatos). “능한”, “힘있는.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 요한의 “도”()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주의 “도”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이 단어는 전문적인 용어로 볼 수 있으며, “그 도()를 좇는 사람”(참조 9:2 주석)이라는 구절에도 나타난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인 종교(Christian religion)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배워. 헬라어 카테케오(kate-cheo-). “소리내어 읽어주다.” 확대하면 “구두(口頭)로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catechize(문답식으로 가르치다)라는 영어가 파생된 이 단어는, 아볼로가 스스로 구약을 공부한 것 외에 누군가에게서 배웠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요세푸스(Antiquities xviii. 5. 2)를 통해 요한의 가르침과 침례가 유대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에 관한 침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에베소에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가르침은 간결했을 것이다. 그들은 요한이 다가오는 왕국을 위해 준비시키려고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가리킨 것과 예수가 침례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목베임당했고, 예수는 갈바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기별과 관련하여 후에 일어난 일들 즉 교회의 설립, 그리스도교 침례와 주의 만찬 예식, 성령의 부어주심, 회개에 뒤따르는 회심에 관한 가르침,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 등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침례자 요한 자신도 어느 날 사람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11:3)라고 주에게 물은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이러한 일들과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던 것을 단지 어렴풋하게 이해했을 뿐이다

열심으로. 참조 롬 12:11 주석.

예수에 관한 것. (「제임스왕역」에는 “things of the Lord[주에 관한 것]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위에 언급된 “주의 도”라는 표현은 구약 용어( 40:3)의 번역으로, 요한의 설교와 관련하여 복음서 기자들이 인용했다( 3:3; 1:3; 3:4; 1:23).
아볼로는 스스로 구약을 연구하여 알게 된 것 곧 천국의 도래에 관하여 요한이 설교했던 내용을 매우 정확하게 선포했을 것이다. 그는 요한이 어떻게 예수를 가리켰는지 나타내 보였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업과 말씀의 많은 부분을, 유대인에게 오랫동안 있었던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보내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구속이 가깝다는 증언이라는 증거로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볼로의 스승이 누구였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침례자 요한의 기별 이상으로 제자들을 끌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볼로에게 침례자 요한은 분명 옛 종교의 독특한 특성들을 유지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유대교 지도자였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아직 “할례받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고전 7:19)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제사 제도가 “없어져 가는 것”( 8:13)임을 깨닫지 못했다.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치고 있었으나[또는 시작했으나].

요한의 침례. 침례는 종교적인 지식과 경험을 위한 입문이라는 개념이 “침례”에 포함되어야 한다. 요한의 침례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로우며, 그리스도의 전주자(前走者)로서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 복음서에서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멀리 미쳤음을 보여 준다. 알렉산드리아까지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이 “침례”의 한계에 대해서는 위의 “배워”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알 따름이라. 헬라어 에피스타마이(epistamai). “숙달되다”, “익숙해 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대히 말하기를.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별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대함이 필요했다. 전도자는 유대인들이 여러 번 기만자들에게 미혹당한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용기뿐 아니라 학식과 능변을 갖춰야 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는 분명히 아볼로를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그녀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영향력과 열성이 있는 여인이었음을 가리킨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회당 예배에 계속 참석했을 것이다. 아볼로가 그곳에서 랍비 자격으로 기별을 전했을 때(13:14, 15) 그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으며 호감을 가졌다.

데려다가. 요한의 기별을 충분히 받아들인 아볼로는 그 기별을 그 정도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유대인들보다 예수 편에 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더 쉽게 동조했을 것이다. 그는 메시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와 관련된 일들을 성취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도. 그들이 아볼로에게 “풀어 이른” 것은 로마에서 초기에 접촉한 그리스도교와 바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참조 2절 주석). 그것들에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회심과 침례 후의 성령의 은사, 주의 만찬의 의미와 필요성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9:1~7에 기술된 열두 사람의 경우와 같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아볼로는 분명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재침례를 받았을 것이다.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즉 “제시하더라”, “설명하더라.

학문이 많은 아볼로가 비천한 천막공에게 가르침을 받음―아볼로는 … 최고의 헬라 문화를 받았고 학자요, 웅변가이었다.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가르침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명과 부활, 승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고, 주께서 그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보내신 보혜사에 관한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볼로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그를 불러 왔다. 거기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이 웅변가는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크게 놀라고 감사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는 성경에 대한 보다 밝은 이해를 갖게 되었고,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유능한 변증가들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빈틈없는 학자요, 명민한 웅변가가 한낱 천막 직조공인 그리스도인 남녀의 가르침을 통하여 주의 길을 보다 완전하게 깨달았다(바울의 생애 119).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아가야.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로 갔을 것이다. 19:1과 아볼로를 언급한 고전 1:12은 이것이 확실함을 알려 준다. 훈련, 타고난 능력, 최근의 교육과 경험으로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이 아덴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볼로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고린도인 중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울과 동일하게(고전 1:12) 여겼다. 이런 일로 교회에는 강한 분파적 감정이 발생하였고, 바울은 그것을 책망했다(고전 3:3~17). 아볼로가 이런 일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가 심은 것(고전 3:6)에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볼로는 교회에 파당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고린도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전 16:12).

형제들이…편지하여. 천거서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위하여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보낸 “천거의 편지들”(참조 고후 3:1 주석; 16:1, 2; 4:10)로 알려진 것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것은 당시 “신임장”이었다. 에베소 교회에서 아볼로에게 기꺼이 그런 편지를 써주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장려하며. 즉 “용기를 북돋으며.

은혜로 말미암아…많은 유익을 주니. 이 구절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아볼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더 깊은 경험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지혜와 능변의 은사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였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 번역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것은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내가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고전 3:6, 10)라고 그의 사업과 아볼로의 관계를 언급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예수는 그리스도라. 참조 5절 주석; 17:3.

유력하게…이김일러라. 헬라어 디아카텔레코마이(diakatelechomai). “완전히 설복시키다”, “완전히 확신시키다.” 아볼로는 유대인들의 반대 이론을 성경으로 검증하여 그들을 설복시켰다. 아볼로는, 바울이 유대인들을 설득할 때 사용했던 그 결론으로 그들을 유도했다. 그의 방법은 바울의 방법과 달랐을 것인데, 차이는 성격에 있었다. 이 새로운 설교자는 그의 사역을 통해 자연스럽게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고, 바울이 노고로 얻은 것보다 수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볼로의 이름이 사도행전에 다시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의 후기 역사로 알려진 것을 여기서 다루어야겠다. 그의 이름이 고린도에서 한 분파의 슬로건으로 사용될 정도였지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사이의 교리적인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가까이 교제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불화가 없었던 것 같다. 고전 16:12에 비춰볼 때, 아볼로가 결국 고린도 교회의 천거서를 가지고(고후 3:1) 에베소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아볼로가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고전 16:12, 17)와 함께 다시 고린도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에 나타난 대로 그를 신임했다. 이후로 아볼로는 바울의 사역이 마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에베소와 고린도에서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사역을 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마쳐갈 때( AD 67) 아볼로를 언급한다( 3:13). 그는 교법사 세나와 함께 있었는데, 세나는 아볼로처럼 유대법이든 로마법이든 법에 조예가 깊어(참조 마 22:35 주석; 10, 62)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바울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아볼로에게 주라고 디도에게 요청한 점으로 보아,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분명히 사려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아볼로는 그레데에서 일해 왔고, 그의 주위에는 별도의 제자들의 무리가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울은 자신과 교제했던 자들과 그들을 구분한다( 3:13, 14).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