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31강(눅24:22-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20. 00:33

누가복음 강해 231(24:22-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5(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고 있는 글로바에 대한 예수님의 꾸중에 대하여(24:22-26);

 

글로바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최근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도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으로 보이는 정황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길손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째서 글로바는 초면인 길손에게 그러한 확실하지 아니한 이야기까지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을 해볼 문제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유추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   첫째, 사람들은 발걸음을 같이하면서 길을 오래 같이 걷게 되면 모두가 동료이자 친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길을 함께 걸으면서 나누는 이야기가 숨김이 없고 진솔한 법입니다. 동행자는 그러한 심중의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쉽게 친해집니다. 지금 글로바가 그러한 입장입니다.

(2)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마음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토로해 놓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치유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침 글로바는 예루살렘에서 참으로 소중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나사렛 예수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컸던 글로바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거침없이 선보이고 있는 예수님이야 말로 외세의 지배를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선민의 나라를 재건해줄 있는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허무하게도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것입니다.

(3)   셋째, 오늘 아침에 발생한 사건의 결말이 글로바는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같이 찾아갔던 여인들의 증언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바위가 옮겨져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현신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예언 그대로 부활하셨으니 사실을 믿고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전해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베드로가 먼저 현장확인을 다녀왔습니다. 여인들의 말과 같습니다. 뒤를 이어 다른 사도가 무덤을 찾아가서 동일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보입니다(24:24).

(4)   넷째, 그렇다면 다음의 일은 어떻게 것일까요? 엠마오 고향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글로바는 그것이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초면의 길동무에게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글로바가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심한 꾸중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 하시고”(24:25-26).

이상의 내용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디로, 그날 새벽에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전해준 메시지와 동일한 것입니다(24:6-8).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선지자들의 예언과 같이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53:7-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길은 정복전쟁에서 연승을 하여 선민의 제국을 만든 다윗대왕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2)   둘째,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있다고 하면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전에 수차례 사도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지난 금요일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3일이 되는 오늘 새벽에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3)   셋째, 그러한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글로바와 같은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까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질책이 글로바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24:22-23);

(1)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 여자들에게서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24:22). 그들의 증언은 증거력이 약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24:23); 첫째, 정황증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것이 아니고 다만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가 옮겨져 있는 것과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는 것을 것입니다(24:2-3). 둘째, 천사들이 현신하여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24:4-8). 천사들의 메시지는 생전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24:23).

(2)   자신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똑똑하게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곧이 대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악한 영들도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거짓 메시지를 전해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고후11:14). 더구나 남자들이 아니고 여인들이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고대의 가부장사회에서는 증거력이 약합니다. 따라서 별도로 남자들이 가서 확인을 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와 함께한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24:24);

(1)   사람의 증언으로 중죄를 확정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따라서 율법에서도 사람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이나 사람의 증언으로 중죄에 대한 확정판결을 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7:6). 여기서 말하고 있는 증인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람 이상의 남자 사도나 제자가 현장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야만 합니다(24:24a).

(2)   두어 사람의 남자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확인한 사실은 여인들의 전언과 같다는 것입니다(24:24b). 여전히 굴입구를 막고 있던 바위가 옆으로 옮겨져 있고 무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누가 훔쳐간 것일까요? 아니면 부활하신 것일까요? 두어 사람 가운데 사람인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시신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 붕대가 풀린 침상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24:12).

(3)   만약 누군가 침입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한다면 구태여 세마포 붕대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부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사도에 대해서는 4복음서를 참조하면 사도 요한입니다(20:2-10). 그렇지만 사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24:24c).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요? 이제는 사도가 여러 사도와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들을 찾아오실 때를 기도하면서 기다려 보아야만 합니다(24:33).

셋째로,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 하시고”(24:25-26);

(1)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관한 관념이 아주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글로바에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정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는 유월절 어린양과 같습니다. 스스로 대속의 제물이 됨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속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출애굽기의 모세나 사무엘 역사서의 다윗대왕과 같습니다. 선민들을 종으로 삼고 괴롭히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을 징벌하고 선민들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자입니다.

(2)   사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벌써 700년전에 기록이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53:10). 이사야의 예언이 사실이라고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36).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는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십니다. 그것은 이방인을 무찌르고 정복전쟁에 성공하여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다윗대왕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를 반드시 기억하라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아니하신 글로바에게 주지시키고 계십니다;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24:25-26).

그러므로 대속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서 선민과 성도의 영광만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회와 선민국가의 영광만을 드높이고자 하며 이방인들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하는 본문입니다. 아무쪼록 성탄절에 예수님처럼 대속의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의 영광을 얻으시는 성도님들의 귀한 삶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