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9강(눅24:13-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8. 17:04

누가복음 강해 229(24:13-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사도들보다 먼저 엠마오로 가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시는가?(24:13-17)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저술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3일에 부활하신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추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후 28년경에 비하여 그가 자료를 조사하고 있는 시점은 3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그리 많지를 못하고 또한 만난 시점이 서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의사 누가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증언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기록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신 그때의 기록을 공신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24:36-49).

그렇지만 의사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에 나타나시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점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24:9-11, 33-36). 그들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이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금요일 오후 늦게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식을 지내고 골고다 언덕 근처에 있는 바위굴에 시신을 안장합니다(23:50-54). 장례식을 지켜본 예수님의 모친과 친지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등이 향유와 향품을 준비해 놓고서 다음날 토요일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23:55-56).  안식일이 지나고 새벽이 되자 그녀들은 부리나케 예수님의 바위굴 묘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24:1). 그런데 이상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바위굴을 막아 두었던 바위가 옆으로 치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습니다”(24:2-3). 누군가 침입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알고서 낙담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생전의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해보라고 말합니다(24:4-6). 죽은 3일에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차례나 예언하셨기에 그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24:6-8). 이야기를 그녀들이 11사도와 여러 여자 제자들에게 말해준 것입니다(24:9-10).

(2)   둘째, 11사도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믿지를 않습니다(24:11). 이유는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준 것에 불과하며 그녀들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확실하게 보지 아니하고서는 섣불리 예수님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책임 있는 11사도들의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시몬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그냥 허탄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목요일 유월절 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는 사건이 새벽닭이 울기 전에 3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을 그것을 무시했다가 베드로가 처참하게 낭패를 당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22:33-34, 60-62). 그래서 벌써 예수님께서 3번이나 자신의 무덤 부활을 예언하신 바가 있으시기에 그것을 믿고서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갑니다. 결과 빈무덤과 풀어 놓은 세마포 붕대만을 보게 됩니다(24:12a).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언 그대로 부활하신 사실을 천사가 전해준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서 예루살렘 마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24:12b). 이제는 그곳에서 나머지 사도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찾아 오시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24:33-36).

(3)   셋째, 그런데 마가와 의사 누가는 엠마오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담을 마치 삽화처럼 위의 첫째와 둘째 이야기 사이에 싣고 있습니다(16:12-13, 24:13-35). 내용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처음에는 알아 보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이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며 떼어서 자신들에게 주시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생전의 예수님이신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24:30-31). 영적인 눈이 떠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사라지셨기에 사람은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마가의 집에 모여 있는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24:33, 35). 집에서 사람은 시몬 베드로로부터 자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 모두를 찾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마가가 애정을 가지고 짧지만 자신의 복음서에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6:12-13). 그리고 의사 누가는 엠마오로 가던 2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분의 말씀 가운데 그리고 성찬식 도중에 영적인 눈이 떠져서 확실하게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이(24:30-32) 너무나 귀한 간증인지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4:13-35).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친절함은 바로 자신처럼 생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의 뜻을 깨달아 구원의 주님으로 믿고서 따르고 있는 훗날의 많은 성도들을 위한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날에 그들 둘이 예루살렘에서 25 되는 엠마오 하는 마을로 가면서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24:13-14);

(1)   의사 누가의 글은 질서가 정연합니다. 이유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주제에 맞는 글을 서로 연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성의 하나를 여기서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에 그들 둘이 예루살렘에서 25 되는”(24:13a). 조금 설명을 해봅니다;

1)      그날에 예루살렘 모처에 11사도와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입니다. 그날 새벽에 향유와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로부터 11사도와 제자들에게 급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24:9). 그녀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었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으며 무덤을 막은 바위도 옆으로 치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했지만 사도 베드로가 무덤에 가서 확인한 사실을 듣고서는 생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2)      베드로가 달려가서 것은 빈무덤에 세마포 붕대가 풀어져서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24:12). 베드로는 그것이 평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에 비추어보면 무덤속에서 부활하신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24:7-8). 그렇지만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확인을 수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계속 신세를 지면서 한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려보고자 결정하고 있습니다(24:33).

3)      가운데 두사람은 고향집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1km 25 남짓 떨어진 엠마오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남의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편하게 고향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서 한번 기다려 보기로 작정하고서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2)   엠마오 하는 마을로 가면서”(24:13b); 그렇다면 엠마오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음 몇가지 사실을 가지고 추론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의사 누가의 자료수집과 분석의 결과에 따르게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간 제자가 그들 사람입니다(24:15). 특히 사람 가운데 사람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바로 글로바입니다(24:18). 그런데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으며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19:25). 의미는 서열상 글로바의 아내가 예수님의 모친이나 이모 다음이지만 지인으로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막달라 마리아보다는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로바의 아내 역시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입니다.

2)      , 예수님의 친척이면서 엠마오에 살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12 때의 예수님의 행적을 참조하면 유추가 가능합니다.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고 갈릴리 나사렛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길을 나선 예수님의 부모님께서는 하룻길을 후에야 아들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2:41-43). 그래서 함께 걸어서 가까운 친척집까지 함께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2:44).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의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서북쪽으로 함께 친족들이 누구일까요? 엠마오나 유대인 마을 아리마대(23:51,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32km지점이며 라마 헬라어라고 알려지고 있음) 살고 있는 친족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목수 요셉과 같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3)      ,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의 뒤를 잇고 있는 3 총회장의 이름이 시므온인데(15:14) 그가 예수님의 사촌동생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엠마오로 가고 있던 자는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글로바는 시므온의 아버지이며 목수 요셉의 동생이고 예수님의 숙부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남자로서는 친척 가운데 가장 어른이시며 또한 자신의 제자로서 물심양면으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숙부님 글로바를 먼저 찾아보고서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을 공산이 큽니다.

(3)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24:14); 지난 아빕월 14 유월절 목요일부터 토요일 안식일 다음날인 17 아침까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면서 알게 일은 마디로, 숨막히는 일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지난 3 6개월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침내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이 나고 무덤속에서 평소의 예언과 같이 3일만에 부활하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까지를 망라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주후 28 4 14 목요일 밤에 체포가 되시고 금요일 새벽에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하나님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으로 정죄가 되십니다(14:53, 64). 시기는 유월절 무교절 기간이므로 지방에 있는 대공회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어 비상소집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교 실세 안나스가 금요일 아침에 자기파의 공회원들을 이끌고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거짓 고발하고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23:1-2). 호의적으로 응하지 아니하는 빌라도를 계속 로마의 반역자인 예수의 편을 들게 되면 역시 역심을 품은 신하라고 로마황제에게 진정하겠다고 정치적으로 협박하여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확정하게 됩니다(19:12-16).

3)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15:25, 33-37) 시신이 공회원이면서 예수님의 숨은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인도가 됩니다(23:52, 19:38-39). 그들 사람에 의하여 정성스럽게 장례가 치루어지고 부자의 무덤 바위굴에 안치가 되는데 그것을 사도 요한과 갈릴리에서 여자 제자들이 바라보게 됩니다(23:55).

4)      여인들은 향유와 향품을 준비하여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이 되자 무덤으로 찾아갑니다(24:1). 그곳에서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가 옮겨져 있고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24:2-3). 그리고 현신한 천사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생전의 예언 그대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고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주라고 합니다(24:6-7). 따라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는 11사도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24:9).

5)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서 제자는 엠마오에 있는 집으로 가고자 길을 나선 것입니다(24:13). 그들은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골고다 바위굴 무덤을 찾아가보지 아니하고 길을 나섰으므로 후일담(後日談, 뒷날의 이야기) 궁금합니다. 따라서 길을 가면서도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24:14).

둘째로,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알아보지 못하거늘”(24:15-16);

(1)   제자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십 길을 걸어서 가는 일이 보통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심심합니다. 따라서 지루함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동행이 필요합니다. 서로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거짓말처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은 시간이 걸린 것이지만 지루하지가 않으니 빨리 도착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떠날 때는 동행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세상에 제일 처량한 사람이 혼자서 동행이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제자가 원체 재미가 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곁에 누가 계속하여 따라와서 이제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중의 사람은 젊은이이고 한사람은 부친인지 나이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젊은이가 모르는 것을 자주 어른에게 여쭈어 보고 있습니다(24:15a). 그렇게 질문과 답변에 열중을 하느라고 이제는 옆에서 마치 일행인 것처럼 나란히 가고 있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24:15b).  

(3)   마침내 인기척을 느끼게 되자 나이가 드신 분이 옆을 힐끗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그러나 생소한 얼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조카인 나사렛 예수님과 비슷한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많으니 아마도 닮은 사람일 것이라고 글로바는 생각하고 있습니다(24:16b). 그것은 세상의 물질적이고도 육신적인 경험에 길들어진 사람의 눈이 그만 영적으로 어두워진 것을 말합니다(24:16a).

(4)   예수님께서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글로바 자신도 아들 시므온과 함께 멀리서 보았고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는 가까이에서 보고 확인을 바가 있습니다(19:25). 오늘 새벽에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예수님의 모친과 막달라 마리아 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 주었으나 그것은 헛것을 것이라고 11사도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24:11). 따라서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은 설마 예수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24:17);

(1)   모습을 보고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힙니다. 지난 3 6개월 동안 숙부와 사촌동생 시므온은 숙모이신 마리아와 함께 자신의 공생애를 따르고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예수님 자신이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는 숙부님 가족과 엠마오에서 만나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에도 숙부님 댁에서 묵어가고는 했습니다(2:43-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부는 조카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며 종제인 시므온은 종형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2)   그것은 마디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그대로 세상의 종말이 오면 모두가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수는 있지만 사람이 죽은 며칠 만에 부활하는 역사는 있을 수가 없다고 편리하게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11:24, 23:8).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엄청나게 제한하여 인간의 상식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앙입니다.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닮도록 인간까지 만드신 하나님께서(1:1-30, 2:7, 21-22) 다시 그와 같은 새로운 창조를 하실 있는 능력이(65:17-20, 21:1-8) 없겠습니까?

(3)   비근한 예로 지난 3 6개월 동안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보면(11:38-44) 예수님의 부활 정도는 얼마든지 믿을 있는 일입니다(11:25-26).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소하게 생각할까 싶어서 사전에 3차례나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3일만에 무덤속에서 부활하신다는 예언을 그들에게 해준 바가 있습니다(8:31, 9:31, 10:33-34). 그런데 숙부님과 종제의 태도를 보아하니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믿음을 되살릴 수가 있을까요?

(4)   방법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 본문에서와 같이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24:17a). 둘째, 말씀을 풀이해주시는 것입니다(24:32). 셋째, 함께 먹고 마시며 성찬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24:30).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번째의 방법을 사용해보고 있지만 사람의 제자는 슬픔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24:17b).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슬퍼서 다음 믿음의 길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자리에 멈추어 서있는 것입니다(24:17c).

결론적으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되살아나셨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창조주의 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무엇을 믿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복음사역을 하시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셨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때에 성도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얻으신 부활과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3:10-11, 고전15:20-24). 그만큼 중요한 믿음의 전환점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에게 자신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두번째와 세번째의 방법까지 사용하실 것입니다(24:25-32).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부활도 발견하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