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8강(눅24:8-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8. 17:03

누가복음 강해 228(24:8-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2()

 

예수님 부활에 대한 몇가지 기록의 차이와 평소 예언하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24:8-12);

 

갈릴리에서 여인들이 안식 첫날 새벽에 예수님이 안장되어 있는 바위굴 묘실을 찾아간 결과(24:1) 가지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됩니다(24:2-7); 첫째, 바위굴을 막아 두었던 돌이 옆으로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24:2). 둘째,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24:3). 셋째, 무덤 속에서 현신한 천사를 발견했으며(24:4) 다음과 같은 천사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고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24:5-7).

여기서 첫째와 둘째의 사실들은 일종의 정황증거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 이상의 장정이 힘을 쓰면 바위굴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길 수가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없는 이유가 마태복음 28장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바위 굴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27:62-66) 가운데 사람이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와 전전임 대제사장 안나스를 찾아가서 사실을 알려주자 사람은 산헤드린 대공회의 사두개인 대표자들인 장로들과 상의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소문을 내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돈을 받고서 그렇게 소문을 내었기에 오늘날까지 유대인사회에서는 그와 같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28:11-15).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한다면 당시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27:62-66). 특히 돌을 옆으로 옮기는 경우 소리가 크게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을 경비하고 있던 군인들은 그러한 소리를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예수의 시신이 없어지는 것도 경비병들이 당시에는 전혀 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하나의 반증이 됩니다; “ 돌이 옮겨진 것은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이 작용한 것이기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그렇게 옆으로 이동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도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에 의한 것으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시신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부활의 몸을 입고서 무덤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몸이 당시에는 완전한 영적인 몸이 아니기 때문에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출입할 있도록 바위굴을 막고 있는 돌문을 옆으로 옮겨준 것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덤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아직 만지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20:11, 14, 16-17).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사실을 알려주게 됩니다(20: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입으신 부활의 몸이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이 되자 부활한 육체가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몸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데 닫힌 문을 열지않고 그대로 투과하여 방안으로 들어서신 것입니다(20:19). 그것은 부활의 몸이 이제는 영적인 몸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완전한 영생의 몸으로 변화가 됩니다.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40일후 베다니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그대로 승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24:50-53).  

이제는 가지 사실을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는 것입니다(24:1, 10,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모친 마리아, 16:1-2,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와 살로메, 28: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20:1, 막달라 마리아). 둘째,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을 방문한 사도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다릅니다(24:12, 베드로, 16:11, 사도들이 믿지 않음, 28:10, 기록이 없음, 20:2-8, 사도 베드로와 요한). 셋째, 천사의 현신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4:6-8).

만약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과 말을 듣고 무덤을 방문한 사도들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구전이 되고 있는 증거들이 서로 다르기에 달리 기록들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물론 저자 자신의 체험도 들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이성은 오히려 전해져 오고 있는 이야기를 각각 나름대로 정직하게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으며 역설적으로 부활의 신빙성을 더욱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을 먼저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단지 40 동안 500 정도의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시고 제자훈련을 시키신 베다니에서 승천하시고 말기 때문입니다(24:50-53, 1: 3-11, 고전15:4-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훗날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하면 믿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비결에 대하여 천사들이 예수님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4:5-8).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기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생전에 예언하신 말씀들은 모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가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직접 육신의 눈으로 보고 믿는 것보다는 영적인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부활한)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9).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 “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영적으로)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모든 것을 11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24:8-10);

(1)   의사 누가는 막달라가 예수님의 무덤 바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16:9, 20:11, 14-18) 적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믿고서 그대로 11사도 다른 에게 알렸다고만 적고 있습니다(24:9). 이유는 가지로 보입니다;

1)      첫째,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의사 누가는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하지 아니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복음신앙이란 마디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 주님으로 모시고서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신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부 계시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믿고서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따라가는 자가 참된 제자이며 성도라고 하겠습니다.

3)      참고로, 여기서 다른 ’(24:9)에는 다른 여자들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24:10). 그리고 11사도’(24:9)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가룟 유다가 길로 이미 가버렸기 때문입니다(27:3-5).

(2)   의사 누가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3여인의 이름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24:10)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슷하게 3여인의 이름을 적고 있는 마가복음의 기록과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가서”(16:1). 여기서 야고보의 어머니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어머니인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6:3)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 마가는 살로메를 적고 있는데 비해서 의사 누가는 요안나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1)      살로메는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며 세베대의 아내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모로 추정이 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적고 있습니다. 둘째, 의사 누가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8:3)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도 마태가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27:56)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입니다. 그는 헬라어를 모르는 사도 베드로를 도와서 베드로가 구술하는 복음적인 내용을 헬라어로 적어서 베드로전후서를 작성해줍니다(벧전5:13). 그리고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대기를 배우고 그것을 복음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베드로와 친한 집안(5:10) 갈릴리의 유지인 세베대와 그의 아내 살로메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살로메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6:1).

3)      요안나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입니다(8:3). 그런데 요안나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오고 있으며 재물로 예수님 일행을 돕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부장사회인 유대에서 남편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갈릴리의 분봉 헤롯 안디바의 신하인 구사가 사실은 아내 요안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재정적으로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사는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죽을 병이 걸리자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있는 자로서 헤롯의 신하입니다(4:46-47).

4)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즉시 병이 낫게 것을 확인하고서 그때부터 집안이 그리스도를 믿게 것입니다(4:53). 그러므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 구사와 아내인 요안나는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크게 돕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유다의 정치적인 정세에 밝은 의사 누가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갈릴리의 분봉 헤롯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재무대신이 은밀하게 아내 요안나를 통하여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도운 이야기를 본문에서와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8:3, 24:10).

둘째로,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24:11-12);

(1)   의사 누가는11명의 사도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그리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전해주고 있는 천사들의 메시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믿지 아니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 세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의사 누가의 기록으로 본다면, 아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천사의 메시지만을 듣고서(24:4-8) 여인들이 11사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24:9). 둘째, 고대 가부장사회에서는 여인들의 증거력이 남자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진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셋째, 선지자가 스스로 부활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11사도들의 믿음은 아래와 같은 세가지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마디로 그것은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다시 40일간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되살려야만 합니다(1:3-9). 육체적인 부활보다 중요한 것은 죽어버린 믿음을 영적으로 되살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첫째,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서는 아무 것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은 믿음의 범주에 속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경험적인 것이 아니므로 제외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디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2)      기본적으로,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지의 대상이며 아는 것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물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아니한 그것, 예를 들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인간의 검증의 차원을 뛰어넘고 있는 영적인 것과 신적인 그것이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무덤속에서 부활시켰다고 하는 그와 같은 신위적인 창조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1장조차 믿지 아니하고 있는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3)      둘째,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언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가운데 세차례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3일의 부활에 대하여 예언을 해준바가 있습니다(8:31, 9:31, 10:33-34). 그런데 예언의 말씀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4)      셋째,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되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3차례나 보여준 바가 있는데 그것을 모조리 기억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장례행렬에서 되살린 (7:11-17), 병으로 죽어 버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 (8:41-56), 무덤속에 들어간 4일이나 되는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려낸 (11:38-44) 등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3)   11사도들이 전부 무덤에서 다녀온 3여인이 전해주고 있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허탄한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고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24:5-7);

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이 평생에 현신한 천사를 눈으로 보고 또한 말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천사가 자신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말하면 말을 곧이 대로 참이라고 알아 듣겠습니까? 그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한 )입니다.

2)      그런데 가운데 사람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베드로는 한가지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3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였다가 그날 밤에 안나스의 저택의 뜰에서 코를 다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22:34, 60-62, 14:30-31, 72).

3)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 자신의 미래지사는 물론 예수님 자신의 미래의 일까지 전부 예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 9:20)라고 입술로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4)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의지하여 쉽게 허탄한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일어나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24:12a). 베드로가 것은 빈무덤에 세마포 붕대만이 풀어진 놓여 있는 것입니다(24:12b).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베드로의 소원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육신은 하나의 감옥과 같습니다. 육체가 사람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지만 동시에 영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흙덩어리입니다(2:7).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있는 영혼이 육신적인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흙덩어리의 본능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의 육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영적인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1-24).

그런데 사도 바울은 때문에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기적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7:25a).

그것은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이상 제한하지 아니하고 영생의 구원을 얻을 있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예수님께서 입게 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얻고 영생구원을 누리기를 얼마나 소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3:10-11). 그래서 푯대를 향하여 이방인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3:12).

그렇지만 역시 문제는 아직도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남은 성도의 삶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지적과 같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14:38)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고맙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방을 말씀해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의사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속사람으로 자리를 잡고 계시기에 남은 인생을 예수님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은혜를 많은 사람들이 누릴 있도록 지상명령을 힘차게 수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