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7강(눅24: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8. 02:50

누가복음 강해 227(24: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1()

 

안식일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간 여자들이 천사로부터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다(24:1-7).

 

기독교는 마디로 부활의 종교입니다. 물론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성육신입니다(1:35). 그리고 복음의 구체적인 실천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생애이며 특히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 마디로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16:24, 22:28, 3:13-15). 하지만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공생애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결과는 하나님의 놀라운 상급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도님들이 예수님처럼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 영생의 부활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27:50-56, 22:29-30, 고전15:20-24).

그와 같은 마치 환상과 같은 이야기가 이제부터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절망 가운데 빠져서 슬픔에 젖어 있던 바로 시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눈물과 절망을 영원히 치유해줄 있는 부활의 새날을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65:17-19, 21:1-8).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계명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안식 첫날 새벽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24:1-3);

(1)   안식일 계명이란 보통 명령이 아닙니다(24:1a).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확실하게 지키도록 되어 있는 강제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전적인 교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사람들에게 7 가운데 6일을 일하게 되면 반드시 하루는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깊은 교제를 하자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과 육을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에 영과 육이 강퍅해지고 피로에 지쳐서 많이 상하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치유해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를 해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고 말씀의 능력으로 영과 육을 치유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벌고 세상적으로 교제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치료실에 입원하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부활과 영생은 건너가 버리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 가운데 영적으로 치유를 받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복음의 전파와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식의 시간을 할애하지 아니하게 되면 자꾸만 자신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것이 심각한 부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디로, 영적인 타락은 그렇게 하여 발생하고 있습니다.

(2)   안식일이 끝나자 마자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친지인 여인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24:1b).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한번 살피고 자신들의 손으로 향품처리를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1)      사실 안식일 전날 오후3시부터 해가 질때까지 예수님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갈릴리에서 친지 여인들이 참여를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자리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산헤드린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식을 집전했습니다(23:50-56, 19:38-42).

2)      요셉은 정식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하여 사전에 로마총독의 허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자신이 준비한 33kg이나 되는 몰약과 침향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정성스럽게 향품처리를 했습니다. 다음에 세마포 붕대로 시신을 감아서 요셉이 마련해둔 바위굴 묘실에 안장을 했습니다.

3)      모든 과정을 멀찍이 서서 지켜본 여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 살로메와 막달라 마리아 등이 들어 있습니다(15:40).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16:1-8).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한번 안고서 실컷 울어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조카 그리고 스승을 그냥 떠나 보낼 수가 도저히 없습니다. 그리고 몸에 마지막으로 향유를 뿌리고 향품을 발라주고 싶습니다.

(3)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바위굴 무덤 앞을 문처럼 가로막고 있던 돌이 굴러서 옮겨져 있기 때문입니다(24:2). 그렇다면 누군가 여러 사람이 무거운 돌을 옆으로 옮겨 놓고서 속에 침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들어갔다고 하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시신을 훼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여인이 허겁지겁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당장 시신을 올려놓은 바위 침상부터 살핍니다. 역시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가 않습니다(24:3). 예수님 반대자들이 시신을 가지고 가서 없애 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인들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둘째로,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24:4-5);

(1)   땅에서 완전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절망에 빠져 있는 여인에게 찬란한 옷을 입고 사람으로 현신한 천사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아가서 시신조차 잃어버려서 완전한 절망에 빠져 있는 여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갑자기 사람의 모습으로 천사가 현신하여 자신들의 곁에 서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여인은 깜짝 놀라고 동시에 두려워서 떨게 됩니다(24:4). 찬란한 옷을 보니 하나님의 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으니 이제는 자신들의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장 자리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습니다(24:5a). 순간 귀로 천사들의 말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24:5b). 묘한 음성이며 기묘한 일입니다. 천사가 말을 하고 있는데 동시에 하나의 메시지로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3)   천사가 전해주고 있는 소망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다가 땅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는 반드시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주신다고 하는 창조주의 메시지가(52:13-15, 53:10-12, 22:28-30) 천사들의 입을 통하여 여인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있는 유일한 이유는 실제로 의로운 생명을 살리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예수님께 부활의 역사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24:36-49).  예수님과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의 역사가 없다면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그것은 공허한 메시지에 불과할 것입니다(고전15:12-19).

셋째로,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고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24:6-7);

(1)   부활과 영생의 메시지가 공허한 것이 아니고 헛된 메시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수가 있을까요? 방법을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알기 쉽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3 부활에 대한 예언을 잊지 말고 다시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이 실제로 성취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24:6-7 의역).

(2)   조금 단계적으로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도저히 사람의 경험과 이성으로써는 믿을 수가 없는 부활과 영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2)      둘째,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이미 아들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완전히 계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3)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태초의 세상창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새로운 창조의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예루살렘을 하나님나라의 수도로 땅에 임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 창조의 방향성을 알게 됩니다(65:17-19, 21:1-5).

4)      넷째, 부활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있는 자는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는 제자들에 한정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21:27). 사실에 대하여 의사 누가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자들인즉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나라에 있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부활이 없으면 성도들은 미래가 없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있는 예수님을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는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셨다고 하면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가 되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하고 있는 그때에 안식일이 지나자 다음날 새벽에 곧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무덤 속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는 죽음의 절망을 이기게 하는 부활과 영생의 소식으로부터 다시 시작이 되고 있는 놀라운 신앙을 말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미래는 관뚜껑을 닫은 후에 다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부활을 믿고 있는 성도의 대속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고귀한 것이며 충분히 영생의 부활의 몸을 선물할 있는 값진 것입니다. 그러한 평가와 상급이 있기에 성도들은 오늘날에도 역동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부활신앙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몸과 영생을 허락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알게 사도 바울은 남은 평생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도 예수님께서 얻으신 부활의 몸을 얻어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3:10-14). 그래서 복음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자신이 알게 놀라운 부활의 신앙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부디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서 그러한 부활과 영생을 얻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감으로써 동일한 하나님의 상급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고전11:1 의역).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부활과 영생을 바라보면서 한평생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길로 끝까지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실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