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6강(눅23:50-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8. 02:49

누가복음 강해 226(23:50-5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0()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다(23:50-56).

 

그리스도로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장례식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700 전에 다음과 같은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의로운 종인 메시아)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9). 예언이 본문에서 있듯이 고귀한 산헤드린 대공회원이며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하여 골고다언덕에서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23:50-56).

정말 있을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대공회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물어 종교적으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를 했습니다(22:66-71, 14:64). 그런데 구성원이 되고 있는 사람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로마총독인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23:52). 그리고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진작에 마련해둔 자신의 값비싼 묘실, 골고다언덕 아래 해골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의 반대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부자들의 바위굴 무덤에 정성스럽게 예수님을 장사지낸 것입니다(23:53).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첫째로,공회회원으로 하고 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 기다리는 자라”(23:50-51);

(1)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밤중에 은밀하게 체포를 당하시면서 그때부터 어두움의 권세가 지배하는 시간이 시작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22:53). 어두움의 권세는 다음과 같이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복음서에서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유대교의 권력을 막후에서 장악하고 있는 안나스가 발벗고 나서서 그의 하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체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22:52, 18:12-13).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 체포과정의 불법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2)      둘째, 로마총독의 사전허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나스가 예루살렘을 지키는 로마의 천부장과 수하의 군대를 매수하여 함부로 예수님의 체포에 동원하고 있습니다(18:3, 12).

3)      셋째,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성전이나 회당에서 정정당당하게 체포를 하지 아니하고 한밤중에 은밀하게 내부고발자 가룟 유다를 앞세워서 체포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22:47-48, 52-53, 18:20-24).

4)      넷째, 전전직(前前職) 대제사장에 불과한 안나스가 예수님을 체포하여 자신의 저택으로 끌고가서 종을 시켜 구타를 하면서 불법적인 심문을 자행합니다(18:19-24).

5)      다섯째, 대제사장 가야바는 비상대공회를 소집하여 기습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를 결정하고 맙니다(14:61-65,22:66-71).

6)      여섯째, 안나스와 가야바가 주동이 되어 예수님을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자고 나사렛 예수가 유다의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기에 붙잡아 왔으니 로마의 반역자인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해달라는 것입니다(23:1-2).

7)      일곱째,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을 이미 정보조직을 통하여 알고 있는 로마총독이 이에 불응하자 전현직 대제사장들은 그를 정치적으로 압박하여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게 합니다(23:4-5, 13-25, 19:12).

8)      여덟째, 로마병정들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골고다언덕으로 끌고가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데 성공을 하게 되자 이제 어두움의 세력은 예수님의 숨통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끊어버리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모습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이 계속이 것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23:44).

9)      아홉째, 오후 3시에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로마병정들이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이 모두 쏟아지게 함으로써 완벽하게 확인사살을 하게 됩니다(19:30-34).

(2)   이상은 어두움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상속자 메시아를 처치함으로써 세상을 어떻게 자신들이 영원히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유대교지도자들에게 경고하신 포도원농부의 비유’(21:33-46) 비추어 보게 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인 어두움의 영들이 깜빡하고 있는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을 땅에서 처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희생한 종에게 상급과 부활의 영광을 베푸시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11:6);

(3)   일찍이 모세의 증언에서 있듯이,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를 인간들에게 가지고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30:19-20). 그리고 예수님의 증언 그대로,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과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임하게 됩니다(11:25-26). 이에 따라 이제부터는 어두움의 세력을 뚫고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4)   전령으로서 여기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사람의 산헤드린 대공회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이 주장(主將)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요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공회회원으로 하고 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 기다리는 자라”(23:50-51);

1)      여기서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Jeshep, a counseller, and he was a good man, and a just, KJV)”(23:50)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러한 정의롭고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상대적인 선함과 의로움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을 만났을 때에 절대적인 선함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벌써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18:18-19).

2)      육신을 입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속성인 절대적인 선함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을 온전하게 희생하는 경지의 선을 지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18:18).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동료인 니고데모와 더불어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그저 은밀하게 예수님을 옹호하는 편에 서있습니다;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 자라)”(23:51a).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살리고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대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발언을 것이 아닙니다.

3)      그리고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도 의로운 존재라고 한다면 영어단어가 just 아니고 righteous입니다(23:50).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여호와의 종이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영화와 지위를 먼저 내려놓아야만 합니다(16:24).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좋게 말하면 숨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기다리는 자라”(23:50-51)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하던 자가 이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벌써 그들을 통하여 시작이 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둘째로,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무덤에 넣어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23:52-54);

(1)   산헤드린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먼저 예루살렘의 로마군 주둔사령부인 브라이도리온’(15:16) 내에 있는 임시 총독관저의 집무실로 찾아가서 빌라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요청을 합니다; “예수의 시체를 (자신에게) 주십시오. 동료들과 함께 예수님을 당일 장례를 치르고자 합니다”(23:52 의역).

1)      로마총독인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정치적인 공세 때문에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처형을 선고하였지만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23:23-25). 그런데 뜻밖에도 역시 산헤드린 대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찾아와서 일찍 나사렛 예수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니 일을 조기에 마무리할 있게 되어서 좋습니다. 따라서 기꺼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해주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문제는 대제사장을 위시한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의 태도입니다. 나중에 동료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로마총독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리마대 요셉에게 불이익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를 돕고 있는 공회원 니고데모에게도 동일한 불이익이 있게 것입니다(19:39-40).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3)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불이익을 이제는 기꺼이 감수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숨어서 예수님을 도왔지만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뒷받침하고자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의 사건을 통해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민과 이방인들 모두를 살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나라에 자랑스럽게 들어갈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천국복음사상과 대속의 십자가 희생의 길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대인과 해외의 모든 유대인 교포들 그리고 만민을 한꺼번에 모두 살릴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참고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 소장파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은 다른 공회원들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소위 힐렐학파라고 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인식과 주의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인들이 꿈꾸고 있는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정치적인 메시아가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해준다고 하는 사상과 교리로써는 세상을 구원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동안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선민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구태의연한 방법으로써는 선민의 해방과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입니다.

2)      대신에 한가지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선민구원사상을 개혁하여 만민구원사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선포하고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개방노선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의 노선이 묘하게도 예수님의 천국복음사상과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동안 산헤드린 대공회 내의 바리새인들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도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의 문제를 두고서 의견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해외에 있는 유대교인들이 이제는 헬라의 세계와 로마의 세계에서도 히브리사상을 연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이방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시대의 정신에 발맞추어 유대교를 개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교포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주창하는 소위 힐렐학파 생겨나고 있습니다.

(3)   힐렐학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상에 상당히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장파들의 목소리를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대표하고 있는 공회원들이 사실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라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유대교는 아무리 개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위일체인 여호와 하나님 사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10:30’ 절에서 이미 천명하신 바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산술적인 하나로만 수가 없는 신비를 지니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관에서 비롯되고 있는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4:6, 고후13:13) 전혀 다른 종교인 것입니다.

2)      둘째, 유대교는 안식일과 성전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과 그날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 성도의 속사람 속에 성전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14:16-20, 고전6:19-20).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뿌리가 같지만 믿는 바는 엄청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4)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무덤에 넣어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23:53-54); 다음과 같이 세부문으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1)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23:53a); 세마포는 아마의 열매의 껍질에서 얻는 가느다란 실로 옷감입니다. 그러므로 대마의 안쪽 껍질에서 뽑은 실로 만든 삼베보다는 비싼 제품입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서는 귀족들이 주로 입었으며 시신을 감싸는 붕대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고 있다는 것은 돈을 들여서 장례를 정성스럽게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23:53a, 19:40). 참고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역시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리트라 33kg이나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향품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19:39-40). 극진한 장례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2)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무덤에 넣어두니”(23:53b); 부자의 무덤이라는 의미입니다.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굴이 비싼 묘실입니다. 공동묘지는 골고다 골짜기에 있지만 부자들의 묘실은 다릅니다. 골짜기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그곳 비탈에 바위굴들을 만들어 비싸게 팔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그것을 미리 사두었다가 나중에 자신의 묘실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회원이며 부자인 아리마대가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미리 사둔 묘실을 아낌없이 예수님의 안장지로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700 전에 기록이 예수님의 묘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성취시키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호와의 의로운 종의 무덤은 범죄자들의 묘가 있는 그곳 가까이 부자의 묘실에 자리를 잡게 것이다”(53:9 의역).

3)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23:54); 주후 32 4 15 금요일 오후 3시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23:44-46). 시신을 끄집어내리고 운명하셨음을 로마병정이 확인합니다(19:33). 그리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완전하게 확인사살까지 하고서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인계합니다(19:34, 23:52-53). 그때부터 니고데모가 향품처리를 하고 요셉이 세마포로 감습니다(23:53a, 19:40). 다음에 시신을 운구하여 비탈에 있는 바위굴 무덤에 안치를 합니다(23:53b, 19:41-42). 그렇게 장례를 치르고 나니 해가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목에 대하여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23:54).

셋째로,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여자들 뒤를 따라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23:55-56);

(1)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여자들은 아주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입니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비롯하여 이모와 숙모 등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19:25).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재정적으로 도운 부자인 여인들도 들어 있습니다(8:2-3). 따라서 그들은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정성스럽게 예수님을 장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23:49, 53). 그리고 시신을 운구하여 비탈진 바위굴에 안장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23:55). 예수님의 무덤이 어디인가를 기억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다음날은 토요일 안식일이므로 일체 골고다언덕에 접근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에는 성전과 회당출입만이 허용이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모여서 안식일 다음날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시신을 다시 향유로 깨끗하게 닦아주고 향품을 발라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미리 향유와 향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23:56);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시고 나자 땅에서는 가지의 현상이 발생을 합니다; 사도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첫째, 성소의 휘장이 갈라집니다(27:51a, 23:45). 둘째, 지진이 발생합니다(27:51b). 셋째,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부활을 합니다(27:52-53).

세가지의 의미가 당장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첫째, 그들은 이상 유대교의 교리와 율법에 갇히어 있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유대교의 교권을 행사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공회 다수파의 눈치도 이상 보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듯이 그렇게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뜻을 구하고자 합니다.

(2)   둘째, 장차 경천동지할 새로운 역사가 유대교내에서 발생할 것이라는 예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선두에 사람의 공회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앞장을 서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선민구원만을 교리화하고 있는 유대교를 보전하고자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민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시대가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24:1-12, 44-53, 1:8). 부활의 불길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이미 옮겨져서 불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선택이 틀렸으며 예수님의 주의주장이 옳았다고 대속의 죽음의 현장에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그동안 소극적으로 하나님나라만을 소망하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아니하던 이기적인 신앙의 구태를 벗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살아가고자 담대하게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의 지배가 끝나고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전령으로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먼저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진리로 역사하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서 새로운 소망의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결단과 소망이 성도님들에게 풍성하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