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4강(눅23:39-4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7. 04:37

누가복음 강해 224(23:39-4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18(주일)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행악자의 미래는 어떠한가?(23:39-43)

 

   의사 누가는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그날 처형이 되고 있는 예수님과 행악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 사이의 대화 가운데서 성도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참조를 해야만 하는 깨달음과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을 한번 정리를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달린 행악자 한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비방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23:39b). 그리스도는 구원자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구원하고 다음에는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해야먄 된다고 하는 논리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의사 누가는 그것이 정당한 주장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기서 비방이라고 하는 용어를 먼저 사용하고 있습니다(23:39a). 흔히 하나님께 무엇인가 맡겨 놓은 것이 있는 것처럼 곧잘 비방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잘못된 자신의 인생과 그들 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모두 책임을 지고 고쳐 주어야만 한다는 논리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자를 모두 잘잘못을 따지지 아니하고 구원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것이 맞는 논리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논리를 가지고 한번 비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둘째, 그래서 다른 행악자가 동료의 주장이 억지이며 잘못된 비방이라는 사실을 자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요지는 다같이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행악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외세인 로마를 물리치고자 반란을 획책했다가 그만 실패를 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를 쓰다가 그만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세상적인 방법에 의하여 실패자에게 주어지는 십자가형이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러하지가 않다는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   셋째, 두번째의 행악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가 되고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대가 있기에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동료를 꾸짖는 한편, 자신의 소망을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23:42). 요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임을 예언하십니다(23:43). 예언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위에서 살펴본 내용과 질문을 중심으로 하여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달린 행악자 하나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23:39);

(1)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비방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비방 핵심은 그리스도가 구원자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와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어떠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옆에만 있으면 모두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하는 논리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3 6개월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었지만 예수님과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일까요? 무조건 자신은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자가 구원을 얻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있는 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회개하고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한번 살아보겠다고 결단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지신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사함의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단한 그대로 새로운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있도록 능력의 성령님께서 회개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고 내주 역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하나는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23:40-41);

(1)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행악자의 동료가 그자의 잘못에 대하여 꾸중을 하고 있습니다(23:40a). 요지는 자신들이 행한 일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는 확연하게 다르므로 점부터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23:41). 자신들은 외세인 로마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힘으로 반란을 도모하다가 그만 실패를 하여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세상에 전하시다가 그만 유대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모함을 받아서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다가 그것이 실패를 하게 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힘으로 로마의 지배를 뒤집어버리려고 하다가 역부족으로 실패를 했으면 로마에 의하여 반역자로 십자가처벌이 되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23:41a). 그것은 마디로 자업자득(自業自得, 자기가 벌인 일이므로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는 )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세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끝까지 수행하신 예수님이십니다(23:41b).

(3)   그런데 결과는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과의 정치적인 협상에 의하여 십자가처형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나중의 행악자의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23:41b). 여기서 자신들의 세상적인 방법이 틀렸으며 예수님이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옳다고 증거하고 있는 행악자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인과응보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23:40b).

(4)   예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였지만 행악자들과 동일한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더라도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잡으실까요? 이제 그자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미래의 보상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께 분명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동안 세상적인 목적과 방법으로 살아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한 구원이 이제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과연 가능할까요? 그것마저 이제는 예수님께 한번 의탁을 해보고 싶어하는 행악자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42-43);

(1)   행악자가 분명히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23:42a)입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임하게 되는 영생의 나라에 행악자는 자신도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를 기억하소서”(23:42b)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2)   이제는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실 차례입니다. 매우 긍정적인 대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43). 여기서 한가지 해석상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행악자가 장차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있도록 벌써 결정이 되었다는 통보입니다”. 의미를 하나씩 따져보고자 합니다;

1)      행악자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하지만 결정은 오늘 이미 자리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리적인 동행으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의 일일지라도 오늘 당장 영적으로는 행악자의 신앙고백과 의탁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결정이 되었다고 하는 통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행악자가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2)      낙원(樂園)이라고 하는 곳은 이상 슬픔이 없고 이제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 소위 파라다이스’(paradise)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행악자는 그러한 낙원을 세상에서 선민들을 위하여 한번 건설해보려고 외세인 로마의 세력을 무력으로 쫓아내어보겠다고 노력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패를 하고 이제는 십자가처형을 받고 있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세상적인 낙원을 이루고자 하는 꿈은 버려도 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만들고 있는 낙원은 마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여러 속국을 지배한 것처럼 선민들이 제국을 형성하게 되면 또한 이방인들을 그렇게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상적인 낙원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하겠다고 하는 욕심과 야망은 이제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4)      대신에 새로운 낙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다면 분명히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을 행악자가 십자가상에서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11:25-26). 따라서 자신이 세상적으로 꿈꾸고 있는 이상(理想) 세계”(ideal world) 접고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들어가고자 회개하고 결심하고 의탁하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얻을 있는 구원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비방이 아닌 정당한 그리스도 대한 이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세상적인 목적으로 원하고 있는 일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게 때에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일을 수행하는 자이지 결코 사람들이 욕심껏 원하고 있는 구원을 베풀어주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행악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한번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뒤엎어버리려고 노력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장에서는 그리스도에게 무조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종으로 생각하고 있는 횡포입니다.

생각해보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뜻과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과 욕심대로 움직이고 있는 불신앙을 회개하고 다시 신앙인의 자세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러한 회개가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사람을 위하여 베풀어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고 있는 자가 바로 두번째의 행악자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사실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의 행악자처럼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길로 들어서야만 것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깨달음과 회개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