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3강(눅23:32-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6. 15:46

누가복음 강해 223(23:32-3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17()

 

행악자와 함께 자신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로마병정들을 위하여 사함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과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는 병정들에 대하여(23:32-38);

 

십자가처형은 본래 해양국가인 페니키아에서 발명이 사형제도입니다. 페니키아의 중심도시는 두로와 시돈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게 가나안 족속 가운데 일부가 지중해 연안을 타고서 북쪽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시돈입니다(10:15, 왕상16:31). 그곳 지중해연안에서 어업을 영위하였으나 풍랑과 태풍 때문에 어로작업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어업수입만 가지고서는 돈을 만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왕 지중해에서 부족의 앞날을 개척할 같으면 해상무역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가장 견고한 해상무역의 기지를 건설하고자 후보지를 선정합니다.

결과 선택이 장소가 두로입니다(삼하5:11, 왕상9:11). 두로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섬입니다. 그곳은 마치 철옹성과 같습니다.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접안시설을 갖춥니다. 그리고 지중해무역에 나선 결과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은 대성공을 합니다. 그들은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무역할 상품을 개발하고 재배합니다. 대표적인 식민지가 스페인의 다시스와 튀니지의 카르타고입니다.

페니키아의 상인들과 선주들은 두로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역선을 운영하는 책임자들은 시돈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힘만으로는 수많은 무역선을 지중해 전체에 띄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 식민지에서 선원을 모집하여 무역선에 태우게 됩니다. 그에 따라 끔찍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선상반란(船上反亂, 배위에서 발생하는 반란사건)입니다. 어떻게 하면 선상반란의 꿈을 애초에 잠재울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목적으로 발명이 것이 높은 돛대에 선상반란의 주모자들을 못을 박아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보통 일주일 정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마름과 시장기에 시달리다가 천천히 피를 흘리면서 마침내 미이라처럼 되어 죽고 맙니다. 그것이 가장 처참한 죽음을 의미하고 있는 십자가처형의 시작입니다.

페니키아가 망하고 나자 지중해무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서 카르타고와 로마가 전쟁을 벌입니다. 결과 로마가 승전을 하고 지중해무역을 석권합니다. 로마 역시 옛날 페니키아가 봉착한 선상반란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처형의 방법을 도입합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의 시민에 대해서는 처참한 형벌을 면제합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제한적으로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와 주인을 살해한 노예들에 대해서만 십자가처형에 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처형이 유대 땅에 파견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하여 참으로 오래간만에 다시 선을 보이게 됩니다. 장소는 해골이라는 지명이 말하듯이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즐비한 골고다언덕입니다(23:33). 그리고 처형을 당하는 자는 3사람입니다(23:32-33). 사람은 나사렛 예수이고 좌우의 사람은 그날 아침에 특사로 풀려난 바라바의 동료로 보입니다. 그들은 역시 바라바처럼 로마의 세력을 유대 땅에서 몰아내고자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체포가 죄인들인 것입니다(23:19). 그렇지만 반란의 과정에서 살인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행악자’(行惡者, 악을 행한 사람) 불리고 있습니다(23:32).

행악자는 그날 예수님에게서 이상한 행동을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1)   첫째, 자신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수들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있는 로마의 병정들을 위해서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23:34). 그들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의미를 모른 바보처럼 희희락락(嬉嬉樂樂, 즐겁게 웃고 떠드는 )하고 있으니 부디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간구입니다.

(2)   둘째, 죽은 자까지 살려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3:35-37).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남을 구할 있는 그리스도라는 말일까요?

(3)   셋째,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있는 예수가 로마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23:3).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이라고 패가 붙어 있습니다(23:38). 그것은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병정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한가지 의문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승리의 왕이 아니라면 예수는 과연 어떠한 왕일까요?”.

이제부터 점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또다른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 19:17)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27:38, 15:27, 19:18) 하나는 우편,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3:32-33);

(1)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군대의 사령부인 브라이도리온’(15:16)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1.5km 거리라고 합니다. 길을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서 걸어간 자는 사람입니다. 의사 누가의 기록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 19:17)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23:32-33a).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지 예수님의 경우만을 적고 있습니다(27:32-33, 15:21-22, 19:17). 그리고 막상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에 예수님의 좌우편에 사람의 행악자가 함께 처형이 되고 있다고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로마인들의 사령부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힘들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실 때에 사람의 행악자도 함께 그들의 십자가를 지고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23:32).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실 때에 죄인인 우리들도 함께 길을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시각은 그가 주치의(主治醫)로서 함께 따라다니던 이방인 사도인 바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없도다”(8:16-18).

(3)   예루살렘 도성의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골고다 언덕은 일명 해골 골짜기의 위에 있는 언덕이라는 곳입니다(23:33a). 그곳 골짜기에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부자들이 사둔 바위굴들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부자들의 묘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53:9, 23:52-53). 따라서 부자들은 죽어서도 언덕에 있는 바위굴속에 안장이 되고 가난한 자들은 골짜기 공동묘지에 그냥 안장이 되고 만다고 하겠습니다.

(4)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명의 행악자가 동시에 못이 박히고 있다는 것입니다(27:38, 15:27, 23:33b, 19:18);

1)      어째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의 죄인은 오른쪽에, 한사람의 죄인은 왼쪽에서 처형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죄인을 한꺼번에 예수님의 오른쪽에 두거나 아니면 모두 왼쪽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씩 갈라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서 처형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대목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5장의 다음 기록을 함께 묵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 “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25:41).

3)      그와 같은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복음서의 저자가 의사 누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의사 누가만이 행악자의 태도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가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3:39-43).

둘째로,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로마병정)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23:34);

(1)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종교재판을 하여 예수님을 하나님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사형의 집행에 관한 권한이 없습니다(18:31). 따라서 그들은 로마총독인 빌라도를 찾아가서 나사렛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란의 음모죄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과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처형이 결정이 되고 로마병정들이 사형을 집행하고 있습니다(23:32-33).

(2)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면서 자신을 못박고 있는 로마의 병정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십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들의 상관인 로마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어떠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자신들이 거짓고발을 했다는 죄를 알고 있습니다. 단지 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처형을 실시하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만 그들이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병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23:34a).

(3)   로마병정들이 죄인들의 옷을 벗겨서 그것을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옷감이 귀하기 때문에 속옷과 겉옷이 모두 비쌉니다. 그러므로 병사들이 죄인들의 옷을 벗기고 치부만을 겨우 가린 십자가에 매달고 있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유대 땅에서는 보통 속옷은 위아래로 여러 벌을 껴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옷는 두루마기 형태로 하나입니다. 따라서 병사들이 옷을 나눌 때에 속옷의 경우에는 필요한대로 하나씩 가지면 됩니다, 그러나 겉옷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비 뽑기를 하여 사람이 그것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23:34b). 당첨이 되는 병사는 행운입니다. 겉옷 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23:35);

(1)   유다의 백성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선지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주전 5세기말의 선지자 말라기를 끝으로 하여 유대 땅에 공식적으로 선지자가 활동한 것은 주후 28년경 세례 요한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몇달 후에 나사렛 예수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활동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다음해에 갈릴리의 분봉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감옥에서 참수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참형을 지켜본 백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400 이상이 지나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선지자의 처형의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묵묵하게 역사적인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23:35a).

(2)   일반백성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산헤드린 대공회의 관리들이 예수님의 처형장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지의 사실 때문에 예수님이 못마땅합니다; 첫째, 나사렛 예수는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로 손색이 없을 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민들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외세를 쫓아내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메시아의 사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둘째, 이방인을 용서하고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고 나사렛 예수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선민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전해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주장에 유대교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지 아니할 것입니다(1:1-3).

(3)   그렇게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미운 털이 잔뜩 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대공회의 관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결코 호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원하여 스스로 십자가에서 한번 벗어나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십자가를 박차고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라고 믿어 주겠다는 희롱입니다(23:35b). 그들의 말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26:53). 하지만 일을 절제하고 있습니다. 까닭은 대속의 십자가를 단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스스로 져야만 장차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26:54).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를 박차고자 하는 유혹을 끝까지 물리치고 계시는 예수님의 인내와 믿음을 여기서 생생하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군인들 희롱하면서 나아와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이라 패가 있더라”(23:36-38);

(1)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고통의 모습을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로마의 병사들입니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어떻게 보면 지겹고 심심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죄인을 희롱하고 놀리는 재미라도 있어야만 무료한 하루의 일과를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산헤드린 대공회의 관리들이 예수님을 놀리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남만 구원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한번 구원을 해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23:35 의역). 재미가 있는 놀림감입니다. 그래서 로마병정들이 금방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23:37).

(2)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죄수가 몹시 고통스러워하면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포도주를 해면에 찍어서 입에 묻혀주게 됩니다(23:36, 19:29). 그것은 가지의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갈증을 일시 해소해줍니다. 둘째, 진통제의 역할을 합니다;

1)       뜨거운 태양 아래 건조한 일기 가운데 골고다 언덕에서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손과 발에 박힌 대못 때문에 피와 물이 빠져나가면서 갈증이 극도에 달하게 됩니다.

2)      그리고 십자가에 박혀 있는 몸이 자체 체중 때문에 늘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가슴이 횡경막을 눌려서 숨을 쉬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말을 수가 없게 되고 숨이 가빠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을 일부 경감시키기 위하여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3)      그것이 원시적이지만 여기서는 포도주입니다. 그것을 해면에 묻혀서 조금 죄수의 입술에 적셔주면서 로마의 병정들이 얼마나 놀려먹고 있는지 모릅니다(23:36-37). 참으로 사람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있는 만행입니다.

(3)   로마총독인 빌라도는 자신의 재판이 옳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못박혀 있는 십자가에 머리 위에 하나의 패를 만들어서 매달라고 로마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유대인의 이라고 패입니다(23:38). 의미는 두가지입니다;

1)      첫째, 다윗의 후계자로서 나사렛 예수는 외세를 쫓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마황제에 대하여 그렇게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유대인의 예수이므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다는 로마총독의 명분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이 패를 제거하거나 자구수정을 하자고 제의하지만 빌라도가 응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19:21-22).

2)      둘째, 진실한 유대인의 왕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깊은 의미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산제물로 희생하시고 나면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와 사망의 세상권세가 깨어지고 모든 세상의 권세는 그리스도에게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한 의미를 사도 마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8:18-19).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님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세상임금이 쫓겨나고 하나님나라가 건설되어 나갑니다(12:31-32). 그러므로 세상임금이 쫓겨난 자리에 예수님께서 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사람의 죄인이 함께 못이 박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한사람은 조롱합니다. 구주로 인정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무리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자각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병정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시면서도 무지한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안에서 영원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왕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나라에 입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선택할 있는 구원의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놓는 고난을 몸소 견디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받는 것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세상사람들의 조롱과 희롱을 감수하면서 대속의 삶을 살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있도록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