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22강(눅23:26-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16. 15:44

누가복음 강해 222(23:26-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16()

 

예수님의 십자가 운반을 도와준 구레네 사람 시몬과 자신의 지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대하여(23:26-31)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로마총독인 빌라도의 최종결정과 사법처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유대교지도자들과 그들이 동원한 유대교인들)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바라바) 놓아주고 예수는 (로마병정들에게) 넘겨주어 (유대인)들의 뜻대로 (십자가처형을) 하게 하니라”(23:23-25);

의미는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공정한 재판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교인들을 많이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있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논리와 힘에 밀려서 그만 그들의 요구대로 정치적인 판결을 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이 어떠한 논리와 힘으로 로마총독을 밀어 부치고 있기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협력을 수밖에 없게 것일까요?

(1)   첫째, 논리에 대해서는 훗날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그의 복음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이르되,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12). 로마에 대하여 역심을 품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무죄로 풀어주게 되면 빌라도 역시 같은 편이며 로마황제에 대하여 역심을 품고 있는 자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2)   둘째,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보다 힘이 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힘으로 밀어 부칠 수가 있는 이유는 수적인 우세라기 보다는 그들이 빌라도의 실책이라는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빌라도의 실책이란 로마에 대한 반란죄로 이미 구속이 되어 있는 바라바와 유대교지도자들이 혐의를 주장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 가운데 이번 유월절을 기념하여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느냐고 유대인들에게 잘못 질문한 것입니다.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바가 있는 바라바와 같은 중요한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은 로마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쉽게 허용할 수가 없는 제국의 중대 사안입니다. 그런데 변방의 일개 총독에 불과한 빌라도가 그러한 직권남용의 발언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엄청난 실책입니다.

2)      그때부터 빌라도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약점을 잡히게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비밀협상을 통하여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이 빌라도의 실언(失言, 말의 실수) 대하여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불공정하게 재판한 결과에 대하여 모두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전혀 잡음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유대인들의 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27:24-25).

결과 예수님께서는 그날 아침에 로마병정들에게 넘겨지게 됩니다(23:25). 그리고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령부(‘브라이도리온’, praetorium,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령부인데 이때는 가이사랴에서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와서 잠시 사령부에서 머물면서 집무를 보고 있기에 관정이라고도 불리고 있음, 15:16-20)에서 로마의 병사들로부터 온갖 희롱을 당하시게 됩니다(15:16-20). 다음에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고 1.5km 떨어져 있는 골고다 언덕까지 이동을 하시게 됩니다(23:26).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것입니다(15:25).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까지 가시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수록이 되고 있습니다(23:26-31). 그들이 바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나중에 밝혀지고 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며 또한 예수님을 위하여 애통해하고 있는 여자들과 여러 백성들입니다(15:21-22, 23:26-27). 그러면 자세한 내용은 본문의 구절을 검토하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로마병정)들이 예수를 (골고다로) 끌고 때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15:21)시몬이라는 구레네(리비아)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23:26);

(1)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다고 언도를 하고 그의 군사들에게 십자가처형을 하도록 넘기고 있습니다(23:25a). 그것으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23:25b). 그런데 의사 누가는 로마병정들이 예수님을 끌고서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사령부 브라이도리온’(praetorium) 들어가서 그곳에서 행한 채찍질과(27:26) 희롱과 모욕 등에(27:27-31) 대해서는 기록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적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안으로 들어가서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입히고 가시관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15:16-20). 아무래도 로마의 고위직 각하에게 예루살렘의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고 있는 의사 누가인지라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생략을 것으로 보입니다(1:3-4).

(2)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부와 사령부가 있는 해안도시 가이사랴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23:33). 가이사랴는 배를 타고서 로마로 왕래하기에 편리한 곳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수도는 어디까지나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로마의 군대를 일부 주둔시키고 곳에도 사령부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국내외에서 많이 모여들고 있는 명절이 되면 빌라도는 가이사랴의 로마병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성전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령부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사령부의 한쪽에 로마총독의 임시관저와 집무실이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유월절이 되면 헤롯 왕가의 분봉 왕들도 유대교인들이므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됩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헤롯의 궁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심문한 것으로 보입니다(23:7-12).

(3)   구레네 사람 시몬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애굽의 서쪽에 있는 리비아 출신이며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13:1)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을 뜻하고 있는 니그로’(negro)라고 하는 말이 헬라어 니게르에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리비아 구레네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경건한 유대교인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이 되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는 2 대도시가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도시에서 헬라의 철학과 히브리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향으로 리비아와 튀니지에서도 유대교를 믿는 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외국인 가운데 시몬의 집안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가 되십니다. 그리고 밤새 여러 차례 심문을 받게 됩니다.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 대제사장 가야바,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의 심문을 차례로 받은 후에 대공회에서 하나님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가 되십니다. 아침이 되자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끌고서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황제에게 반역하고자 유다의 백성들을 선동한 죄인이라고 고발합니다(23:1-2). 하나님 모독죄라고 하는 애초의 죄목을 변경하여 로마의 반역자로 거짓 고발함으로써 무조건 십자가에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총독 빌라도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 사이에 힘겨루기가 계속이 되다가 마침내 빌라도가 항복을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판결을 하고 맙니다(23:23-25). 결과 예수님께서는 아침식사도 못하신 계속 로마병정들에게 희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서 골고다 언덕까지 1.5km 이동하게 됩니다. 드디어 피곤과 허기를 이기지 못하시고 여러 차례 쓰러지고 맙니다.

(5)   로마병정들은 아무리 모질게 채찍질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일어나지 못하시는 것을 보자 별도의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것은 길가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건장한 체구의 흑인 시몬을 보고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23:26). 얄궂은 운명으로 시몬은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서 골고다로 향하게 됩니다;

1)      그때에는 일이 그저 우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날 골고다에서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 가운데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마디 말씀을 시몬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나사렛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로마병정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23:34). 둘째, 오른쪽에 못박히고 있는 죄인이 부탁을 하자 그를 위하여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43). 셋째, 노모 마리아의 노후를 형제가 아니라 제자 중의 하나인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19:25-27). 넷째, 이루었다고 선언하시고서 운명을 하시는 것입니다(19:30).

2)      장면들은 시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용서와 천국에의 소망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로마에 반역한 일개 유대인의 선지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죄인 예수가 남긴 교훈과 생애는 알면 알수록 신비합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신의 처자식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아예 초대교회에 출석하게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는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 그룹이 됩니다(13:1).

3)      훗날 지도자 그룹이 안디옥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있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를 하고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합니다(13:2-3). 또한 시몬의 아내와 그들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에서 참으로 칭찬을 받는 일꾼들이 됩니다. 그래서 시몬의 이름을 초대교회에서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입니다(15:21). 그리고 그의 아내인 루포의 어머니는 사도 바울에 의하여 나의 영적인 어머니라고 불리게 됩니다(16:13). 그녀는 멀리 로마에까지 가서 그곳의 초대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을 신앙으로 섬긴 여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7-28);

(1)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길을 따라오면서 애통해하고 있는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선 무리는 남자들이고(23:27a) 뒤에서 울면서 따라오고 있는 무리는 여인들입니다(23:27b). 의사 누가는 여인들에 앞서서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는 무리를 단지 백성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3:27a). 그것은 사도의 신분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그저 일반 유대인들과 함께 익명으로 남자 제자들이 멀찍이 따라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가족과 친지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의사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24:10)라고 후술(後述, 나중에 적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2)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에서 자신을 따라온 여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23:28b)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이 고개를 뒤로 돌려서 직접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므로 결코 잘못 것이 아닙니다(23:28a).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엉뚱하게 호칭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1)      이유는 여인들만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는 수도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하는 호칭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유다의 여인들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부르고 있는 시온의 딸들 동일한 의미입니다(3:16). 그리고 의미를 확대해보자면 그것은 선민 유대인 모두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장부와 같은 굳건한 하나님신앙을 지니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비유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비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8c)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으로 너희들이 당할 일이 나는 걱정이라고 하시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되면 유대인들에게는 어떠한 미래가 찾아오게 되게 되는 것일까요? “너희 세대와 자녀들 세대 나누어서 가지를 손꼽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당장 38 후에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그만 디두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정예병들에 의하여 처참하게 진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 11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참살이 되고 모두들 가나안에서 이방 땅으로 쫓겨나게 되고 맙니다. 둘째, 그후 유대인들은 자손대대로 1,900 가까운 세월을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헤매게 됩니다. 그들의 고토인 팔레스틴 지역에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게 되는 때가 주후 1948 5월입니다.

셋째로,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23:29-30);

(1)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자녀들의 세대와 현재의 세대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 어느 정도일지 알기 쉽게 비유적으로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먼저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말세의 삶이 얼마나 살기가 힘드는지 사람들이 자녀들을 생산하기를 싫어할 정도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23:29);

1)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든 세상입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인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풍요한 물질문명 가운데 굶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유례가 없이 심각합니다. 신분의 상승이나 성공의 신화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2)      극소수의 재벌과 권력자들의 횡포가 어느 때보다도 심합니다. 민족과 나라를 초월하여 새로운 계급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많이 가진 자들과 전문적인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95% 백성들은 고달픈 현실 가운데 꿈과 소망을 잃어버리고서 당장의 삶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3)      결과 자녀를 생산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지키지 못하고 영원히 가진 자의 종으로 살아갈 바에는 자신의 대에서 절손(絶孫, 자손을 남기지 아니하고 대를 끊어 버림)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2)   그처럼 비극적인 세상에서 살게 되면 가지 소원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이 모두 뒤집혀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빨리 열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천지개벽의 사상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버리게 되는 그러한 종말을 기대하면서 세상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23:30).

넷째로,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3:31);

(1)   여기서 푸른 나무 싱싱한 자녀들의 세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른 나무 예수님을 처형하고 있는 세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 자녀들이 미래에 맞이할 세상도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이상 자녀생산을 하지 아니하고 그저 자신들의 고생을 끝으로 하여 세상을 모두가 하직하려고 합니다(23:29).

(2)   당장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앞날도 크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만민구원, 영생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것을 이단으로 몰아서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인들이 처단을 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는 마치 말라버린 나무 같은 신앙입니다.  따라서 40년이 지나가기 전에 유대인의 3분의 1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가나안 땅을 떠나 살길을 찾아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유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3:31)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선진국의 백성들이 절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먼저 유럽의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서구의 공동체에 동구권이 들어오게 되자 서구의 선진국들이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됩니다. 결과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어쩔 없이 역사적으로 유럽의 대륙은 하나의 공동운명이라는 전통 때문에 부담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럽대륙과는 달리 유럽의 섬국가로 살아온 영국은 부담을 이상 분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1970년에 사정사정하여 유럽 공동체에 참여한 영국이 47 만에 그만 스스로 국민투표를 시행하여 공동체를 탈퇴하고 맙니다.

다음에는 국제질서를 이끌고 있는 미국이 2차세계대전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세계의 패권을 내어놓고 옛날의 고립주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미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이 세계의 경찰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하는 자각 때문입니다. 산업공동화, 부동산 폭락, 엄청난 실업, 사라지는 복지, 불법체류자 산적한 국내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세계질서의 유지에 매달리고 있는 현재의 미국의 정책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정책노선을 완전히 바꾸고자 하는 미국민들의 염원이 금번 대통령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작금의 상황도 그와 비슷합니다. 국민들은 미국과 비슷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데 제도권은 전혀 개선의 노력이 없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선택은 마지막으로 기존 정치권의 문제해결의 노력을 지켜보고서 만약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고 하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자 것입니다. 참으로 위태위태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것들이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이 먼저 자신들의 십자가를 이제는 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 보아야만 합니다. 나아가서 새로운 세상에서 한민족들이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백성으로 계속 쓰임을 받을 있도록 기도를 해야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

 

(그림은 옛날 예루살렘과 십자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