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30강(눅24:18-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20. 00:32

누가복음 강해 230(24: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4()

 

이스라엘을 속량(贖良, 종살이를 하고 있는 자를 구원하여 양민으로 만들어 주는 ) 메시아로 굳게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므로 이제는 희망이 사라져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글로바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24:18-21)

 

본문에는 다윗의 혈통인 글로바 부자의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24:18-21). 이유는 사라진 선민들의 제국을 예수님께서 다시 건설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는데 꿈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좌절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다윗 대왕에 의하여 건설이 있는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그들 다윗가문과 유대인들의 오랜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 발걸음이 슬프고도 무거운 것입니다(24:17).

이제는 언제 다시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를 되살리고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할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살아 생전에는 기회가 찾아오지 아니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지난 3 동안 예루살렘 가까운 엠마오에 살고 있는 글로바가 장남 시므온과 함께 조카인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열심히 도운 까닭은 예수님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내며 죽은 자까지 되살려내는 기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수만명에게 기도로써 하늘의 양식을 내려준 능력자입니다. 따라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갈릴리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6:15). 그러한 백성들의 움직임을 다윗의 혈통인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들과 아리마대와 같은 유대인 마을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그들의 인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일반선지자가 아니라 선민을 위하여 다시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할 있는 메시아입니다. 특히 붕괴된 다윗의 왕가를 다시 세우고 유다 지파는 물론 외세의 지배로부터 전체 이스라엘을 속량해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다윗가문의 사람들과 유대인 마을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전 1,051년경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이 됨으로써 이스라엘 12지파가 하나로 뭉쳐 이스라엘 왕국으로 출발을 합니다(삼상11:14-15). 그렇지만 주전 1,011년경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나자(삼상31:3-6) 많은 땅을 블레셋에게 빼앗겨버리고(삼상31:7) 이스라엘 왕국은 두개로 쪼개어지고 맙니다. 이유는 유다 지파가 자파출신인 다윗장군을 맞이하여 헤브론에서 왕으로 삼고 독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삼하2:3-4). 기타 11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군사령관인 넬의 아들 아브넬과 뜻을 같이하여 왕자 이스보셋을 옹립하여 요단 동편 마하나임에서 사울 왕가의 이스라엘 왕국을 유지한 것입니다(삼하8-11).

(2)   그러나 아브넬이 죽고 이스보셋 왕이 실정을 하자 7 만에 기타 11지파가 나라를 다윗 왕에게 바치고 맙니다(삼하5:1-5). 통일을 이루고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은 그때부터 블레셋을 치고 잃어버린 북쪽의 땅을 수복하고자 정복전쟁에 나섭니다(삼하5:17-25). 먼저 여부스 족속의 시온산성을 점령하여 다윗성으로 삼고 수도를 그곳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됩니다(삼하5:6, 9-10).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윗은 적들과 싸워 연전연승을 하여 마침내 옛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넓은 (15:18-21)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점령하고 수많은 족속을 복속하게 됩니다(삼하8:1-14).

(3)   그와 같이 다윗대왕이 많은 정복전쟁으로 세운 이스라엘 제국이 그의 아들 솔로몬 대왕 때까지 유지가 되다가 뒤를 이은 르호보암 2 주전 930년경에 그만 남북으로 쪼개어지고 맙니다. 솔로몬의 부역공사에 엄청나게 시달린 이스라엘 10지파가 가혹한 정책을 르호보암 왕이 전혀 시정하지 아니하자 그만 여로보암을 세겜에서 왕으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왕상12:16-20).

(4)   그러나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성전으로 찾아가는 관례를 시정하기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북쪽의 단과 남쪽의 벧엘에 두고서 여호와로 알고서 섬기라고 강요합니다(왕상12:25-33).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이 대거 탈북을 하게 되고 북조 이스라엘은 우상문화가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잇사갈 출신의 장군 오므리가 왕이 되자 사마리아로 천도를 하는데 그의 아들인 아합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처가의 바알 신을 도입하여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을 더욱 부채질하고 맙니다(왕상16:22-33). 그것이 사마리아인들의 타락입니다.

(5)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17:5-6). 그리고 앗수르의 식민정책과 혼혈정책에 의하여 이스라엘 10지파가 사라지게 됩니다(왕하17:22-24). 더구나 이방인들의 수호신과 우상문화의 대대적인 도입으로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여호와신앙이 크게 타락하고 맙니다(왕하17:25-34). 결과 유다 왕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아니하게 됩니다(4:1-6, 4:9).

(6)   홀로 남은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마저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25:1-7). 그후 주변의 패권국들이 바뀜에 따라 계속적으로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사이 주전 140년경부터 80 동안 레위 지파가 세운 하스모니안 왕조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다스린 적이 있지만 다윗왕조가 재건이 사례는 없습니다.

(7)   그러므로 다윗의 가문과 유대인 마을의 사람들은 애타게 옛날 다윗대왕과 같은 메시아를 부디 자신들에게 보내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오랜 세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 대왕의 직계인 목수 요셉과 예루살렘 가까이 살고 있는 그의 동생 엠마오의 글로바가 그러합니다(24:13-21). 그리고 엠마오에서 비교적 가까운 아리마대에 살고 있는 공회원 요셉의 꿈도 그러한 것입니다(23:51).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람 글로바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24:18);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사람 글로바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24:18a); 예루살렘에서 25 정도 서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시골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는 2제자입니다(24:13). 가운데 연장자가 글로바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2사람을 대표하여 답변하고 있습니다(24:18a).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아니하시고 2사람의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24:17).

(2)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14:18b); 예루살렘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맞이하여 성전을 방문하고 있는 국내외 경건한 유대인의 수가 엄청 많습니다. 이제 일주일간의 무교절 기간 안식일을 지나고 처음으로 맞이하고 있는 일요일입니다. 아직 무교절 일주일이 끝나자면 3일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순례객들이 여전히 예루살렘에 체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3)   요즘 거기서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24:18c); 순례자들은 모두 요즈음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한가지 놀라운 사건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메시아로 불리고 있던 변방 나사렛 출신 선지자 예수님이 로마병정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글로바는 자신들이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옆에서 분명히 자세하게 들었을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무슨 이야기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고 퉁명스럽게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24:18bc).

둘째로,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이니 그는 하나님 모든 백성 에서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 관리들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박았느니라”(24:19-20); 사람은 정말 요즈음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글로바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24:19a). 글로바는 자신이 퉁명스럽게 답변한 것이 괜히 미안합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발생한 쇼킹한 사건에 관하여 사람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니 그는 하나님 모든 백성 에서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 관리들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박았느니라”(24:19b-20). 대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첫째, 글로바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4:19b);

1)      글로바는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보통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가르쳐주었으며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2)      그렇게 말할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오게 되면 천국복음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고 귀신까지 쫓아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폭넓게 행한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글로바는 예수님이 선지자의 경지를 진작에 넘어선 메시아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점을 은근히 사람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나사렛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박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24:20). 그것은 참으로 글로바를 실망시키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입니다;

1)      우리 대제사장들 관리들 사형판결에 넘겨주어”(24:20a); 만약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글로바의 생각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하였으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백성들을 외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데 사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과 유대교지도자들을 비판하는 행동을 용인하지 못하고 그만 그를 종교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처단하기 위하여 로마총독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2)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4:20b); 로마총독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모두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만 유대교의 자치권만 보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군정 하에서 사형의 집행권은 로마총독과 헤롯 왕가가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로마총독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예수님의 신병을 로마총독에게 넘겨주면서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라고 거짓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 어처구니가 없게도 예수님은 동족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로마병정들에 의하여 십자가처형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입니다.

3)      참고로, 글로바 역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의 개념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가 유대교를 이끌고 있지만 그의 장인이면서 전전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가 여전히 유대교 실세로서 가야바 못지 아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제도적으로는 주후 15 안나스가 대제사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주후 18 가야바가 단독으로 대제사장이 때까지 3년간 3사람의 복수 대제사장들이 유대교를 다스린 시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후 18 이후에는 가야바 혼자만이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교묘하게도 장인 안나스를 유대교의 비선실세로 삼고서 힘과 재물을 이기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가야바 이전의 시대처럼 복수의 대제사장이 다스리고 있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우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아니라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24:21);

(1)   예수님에 대한 글로바의 기대가 무엇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글로바를 비롯한 다윗의 자손들과 의식이 있는 부자 요셉과 같은 유대마을의 지도자들은 은근히 예수님이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쫓아내고 선민인 유대인과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를 패권국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줄 속량자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4:21a).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무하게도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시기심과 횡포로 말미암아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넘겨지고 곧장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24:20).

(2)   그런데 글로바의 진술은 하나의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일이 끝장나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그날 아침에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11사도 여러 제자들과 헤어져서 엠마오로 길을 나서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꿈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24:22-23). 그러므로 속량자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다시 전개가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꿈의 사건이 3일에 발생하고 있기에 글로바가 운자를 여기서 떼고 있습니다; “ 아니라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24:21b).

결론적으로, 의사 누가는 평범한 저술가가 아닙니다. 그는 선민 유대인들의 꿈과 현실을 정치정세로 정확하게 읽어내는 비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저술하고 있는 복음서는 골고다 언덕에 갑자기 나타나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정체에 대하여 성도들이 있도록 공회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23:50-51)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유대인의 마을 아리마대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 율법으로 재판을 하고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원입니다. 마침 유월절과 무교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대공회에 참석을 했다가 대제사장에 의하여 예수님이 정죄가 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14:63-64). 그리고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총독에게 끌고가서 십자가처형을 받아내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27:1-2, 19:12-16).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일체 그들 사두개인들의 횡포에 동조를 하지 않습니다(23:51, 19:38-42).

왜냐하면, 그들 유대인들의 마을에서는 나사렛 예수님을 보통 선지자가 아니라 선민들을 속량해줄 메시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르게 되어 있는 엠마오에는 다윗의 후손인 글로바와 그의 친족들이 살고 있습니다(2:43-45). 그런데 다윗의 가문과 유대 마을의 지도자들이 동의도 하지 않는데 로마와 협력하고 있는 레위인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앞장을 서서 예수님을 처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면 시신을 자신에게 인계해 달라고 사전에 요청을 합니다(23:52). 장례라도 섭섭하지 아니하게 지내어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선민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나라에서 의로운 여호와의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23:51).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의사 누가가 묘하게도 공회원 요셉의 정체를 상기와 같이 밝히고 있으며 또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다윗의 자손이며 예수님의 제자인 글로바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입니다(23:51, 24:13-35).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 선민만을 속량하는 선민의 나라가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여 영생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 힘차게 건설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의사 누가의 붓이 멈추지를 아니하고 기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복음이 끝나면 그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1:1-4, 1:1-5).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도 의사 누가와 같이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